2025.05.03 00:37

▲사진:서울 청계천(淸溪川)수로(水路)에 조성된 "책읽는 광장" / 소니a7M4 카메라-소니FE 55mm f1.8 ZA 단렌즈
갈리리
내가 아리마태 성주(城主)인 요셉 의원의 자택에 머문 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요셉 의원과 그의 가족들의 진심 어린 보살핌으로 여독(旅毒)에서 완전히 풀려난 나는 비로소 갈릴리로 떠 날 채비를 서둘렀다.
나의 분주한 움직임을 눈치 챈 의원의 딸 라헬이 처소(處所)로 다가왔다.
그녀는 나를 향해 미소를 띄우며 ‘도울 것이 있다면 말하라’고 운을 뗐다.
나는 마(麻)로 만든 가방에 물품들을 챙기며 대답 대신 손사래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녀는 선 자리에서 나를 향해 바짝 다가섰다.
그러고는 손에 쥔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아요.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나는 그녀의 느닷없는 행동에 놀라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한 표정으로 나의 손을 이끌고 무엇인가를 쥐어 주었다.
라헬이 말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주신 목걸이예요.”
나는 그제서야 손에 쥔 물건을 들여다 보았다.
순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어린아이 손바닥 크기만 한 금패(金牌)였는데, 앞면에는 히브리어로 시가(詩歌)가 음각(陰刻)돼 있었고 뒷면에는 라헬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새겨 있었다.
금패의 내용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라 그것을 되돌려 주며 말했다.
“라헬. 이 금패는 당신에게 매우 소중한 선물입니다. 헌데 이것을 저에게 주신 다니, 그럴 수 는 없습니다.”
순간, 그녀가 고혹 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받으세요. 제가 드리는 정표(情表)예요.”
“……?”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을 느꼈어요. 그리고 지금은 더욱 그렇고요.당신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에 오신 것도, 저의 집에 머무신 것도 모두 하늘의 뜻이랍니다.저의 느닷없는 말에 당황 하시겠죠.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저의 진실된 사랑을 받아 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말한 라헬도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녀의 고백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마음속으로 그녀를 흠모(欽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두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입술에 나의 사랑을 담았다.
나의 사랑을 확인한 그녀도 두 팔에 힘을 주며 한껏 포옹했다.
서로의 격한 심장박동을 느끼며 사랑을 확인한 우리는 기쁨에 찬 얼굴로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이 부실정도로 절색(絶色)인 그녀였지만 지금은 더욱 아름다웠다.
얼굴에 활짝 핀 웃음을 머금은 그녀가 말했다.
“갑재씨가 갈릴리에 가신 뒤 얼마 후에 저도 그곳에 가겠어요.”
나는 대답 대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방을 나간 직후 요셉 의원이 들어섰다.
그는 내가 채비를 서두르는 것을 지켜보며 두루마리 문서를 건넸다.
“예수님에게 드리는 추천서일세. 그분을 만나 뵙거든 나의 안부도 말씀드리시게.”
여기까지 말한 의원은 허리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내 내게 건넸다.
“여비일세.그리고 일부는 헌금하시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죽 주머니를 받았다.
묵직했다.
나는 의원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꺾어 예를 표했다.
그도 나를 따뜻하게 포옹하며 유대식 인사를 건넸다.
내가 보따리를 챙기는 동안 의원은 행로에 필요한 여러 정보를 귀띔해 주었다.
의원은 ‘특히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할 때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것’이란 주의도 당부했다.
요셉 의원이 등을 보이기 직전 의미심장한 웃음을 드러내며 말했다.
“라헬에게 들었네. 그 아이가 자네를 사랑한다고 하더군. 이는 예단(豫斷)처럼 들릴 수 있으나,이 것도 운명이라 생각이 드는구나.자네와 라헬은 하늘이 내린 천재(天才)이며 성인이니 실수가 없을 것이라 믿네.”
나는 출발에 앞서 두 마리의 말 가운데 혈기왕성한 말 잔등에 생활 필수품을 싣고 요셉 의원이 건네 준 추천서도 가방에 챙겨 두었다..
뿐만 아니라 내 생의 동반자가 되어 준 라헬의 금패 목걸이는 비단보자기에 정성스럽게 싸서 품속에 간직했다.
떠나기에 앞서 나는 요셉 의원과 라헬에게 다시한번 고마움을 표하고 만날 날을 기약한 뒤 대저택을 나섰다.
한편 중동지방 특유의 고온 다습한 날씨는 한 낮의 기온을 최대치로 끌어 올려 숨이 턱 끝까지 차 오를 지경이었다.
낮은 구릉 아래서 올려다 본 아리마태 성의 고즈넉한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인도에서부터 4100킬로미터를 함께 여정(旅程)해 온 두 마리의 말은 넉넉한 휴식 때문인지 등에 짐을 걸치고도 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종료나무 서식지와 흙먼지 투성이인 돌산을 지나 구불구불한 작은 계곡으로 들어서자 눈 앞에 예루살렘 성곽이 펼쳐졌다.
성(城)은, 모세가 애굽에서 유대인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 후 굴곡(屈曲)의 부침을 거듭한 역사의 상징이었다.
이후 이스라엘의 ‘지헤의 군주(君主)’인 솔로몬 대왕이 기원전 957년 경에 언약궤(言約櫃)을 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성전을 신축했다.
성과 성전은 채석장에서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완제품을 운반해 쌓아 올렸다.
나는 이번에도 배불뚝이 세리가 근무하는 성문(城門)입구로 말을 몰았다.
내가 통행 관문에 모습을 드러내자 동료 세리 곁에서 무료함을 달래며 연거푸 하품을 하고 있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는 채를 했다.
중동지방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손바닥을 비비며 큰소리로 말했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신라 머시기 하는 미남이시구만!”
자리를 밀치고 나 온 그가 덧붙였다.
“오늘도 말 두 필을 대동하셨는데, 어디로 가시는가?”
내가 말했다.
“갈릴리 가버나움까지 갑니다.”
가버나움 운운하자 그의 동공이 더욱 확대됐다.
“갈릴리라….거기에는 마술사와 고기 잡는 촌놈들만 득실거리는데, 하필 그곳에는 왜?”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예수….. 마술사 말인가?”
내가 정색한 투로 말했다.
“아직도 예수님을 마술사라고 생각하십니까?”
배불뚝이가 안면을 실룩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예루살렘 사람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그 친구는 마술사야. 그리고 사기꾼 비슷한 작자지.”
“왜 그렇죠? 예수님을 무조건 마술사로 단정하는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가 말했다.
“이유, 그런 건 나도 몰라.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떠들고 다니니까 그런 가 보다 하는 거지.헌데, 그 양반이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소문도 있기는 해. 마술을 써서 시몬(베드로)의 장모가 오랫동안 앓던 병을 낳게 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병을 고친다는…. .”
배불뚝이 세리는 ‘마술’이라는 단어를 마술처럼 놓지 않고 되풀이 했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딴청을 피웠다.
“세리 양반. 오늘도 통행세를 내야 합니까?”
그가 낄낄거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미남씨! 오늘은 그 냥 통과 시켜 드리겠네. 그리고 여행 조심하시게.특히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할 때는 바짝 긴장하시게.그곳에는 강도들이 많아.”
앞에서도 요셉 의원이 충고했듯 세리도 마찬가지로 ‘사마리아를 조심하라’고 피력했다. 돈주머니는 말 안장 깊숙한 곳에 숨겨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통행세를 내지 않고 무료로 세관문을 통과한 나는 이방인의 뜰 인근에 자리한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먹거리와 약초(藥草)그리고 말에게 줄 당근과 소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시장에서 장을 본 나는 본격적인 행로(行路)에 돌입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가버나움까지 거리는 대략 150킬로미터.
예수님께서도 이 거리를 여러차례 왕래하셨다.
요셉 의원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위치한 겟세마네 동산을 즐겨 찾으셨다.이곳에서 야훼와 소통하는 기도를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 바리새인 출신 부자 문둥이 시몬과 끔찍이 아끼시는 나사로와 그의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시기 위해 이들이 거주하는 베다니를 찾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마다 교통수단인 나귀마저 물리시고 걸어서 오셨다.
예수님의 걸음은 단순한 행보(行步)가 아니었다.
사역의 총본산지라 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의 최단 북쪽 갈릴리의 가버나움에서 제자들과 함께 출발해 게넷사렛을 거쳐 달마누나와 어촌인 벳세다(베드로와 야고보 안드레의 고향), 그리고 거라사를 거쳐 고향인 나사렛을 순회(巡廻)하셨다.
뿐만 아니었다,
예수님께선 갈릴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황무지 벽촌 데가볼리를 비롯한 베니게에서 “너희들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게 있다”고 말씀하셨다.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새로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지침(指針)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목에서 갈릴리 일대에 산재한 성읍(城邑)을 통과하시며 ‘하늘의 소리’와 ‘진리’를 사역(使役)하셨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선 헤롯 왕궁과 빌라도 총독관저가 자리한 가이사랴에서도 복음을 전하셨다.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항구 특성상 외국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고 외래문화가 잠식한 도시는 생동감으로 넘실댔다.
유대사회에 전염병처럼 스며든 헬레니즘과 그레코로만 사대(事大)만연은 유대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론 외래문명이 유대의 완고한 민족주의를 오염시키는 부작용으로 작동했다. .
헬레니즘과 그레코로만에 심취한 유대 젊은이들은 그들의 토속어인 아람어와 히브리어보다 헬라어와 라틴어로 대화하길 즐겼다.
뭔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헤롯 왕궁과 로마 총독관이 자리잡은 가이사랴(지명 자체가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뜻한다)는 여타 도시보다 화려했고 퇴폐적이며 자율이 넘쳐났다.
당초 헤롯 대왕이 이곳에 도시를 건설할 때 로마의 원형(原形)을 그대로 모방해 기초를 다지고 도로를 낸 뒤 로마식 건축물을 대거 조성했다. 항구의 분위기도 그랬다.
때문에 국제항(港)인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의 복고풍과는 상반된 이질적인 분위기를 드러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에서도 ‘새 포도주’를 갈망하는 수많은 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너의 이웃을 사랑하면 하늘의 계신 아버지께서도 크게 기뻐하신다.”고 사역 하셨다.
사역을 통해 어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로 듣기만 할 뿐 가슴속에 새기지 않는가 하면, 어떤 이는 복음에 감동돼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을 한 사례가 부지기로 넘쳐났다.
왕궁과 총독관이 있는 항구도시이자 행정도성(行政都城)이기도 한 가이사랴를 축복하신 예수님은 다음 행선지인 작은 어촌 성읍인 욥바에서 진리를 전파하시고 유대인들이 꺼리는 사마리아 지방으로 향하셨다.
험난하다고 알려진 사마리아로.
그곳을 지금 내가 지나가려 한다.
현재 내가 도착한 지역은 여리고 성읍이다.
이스라엘의 젖줄인 요단강과 인접한 이곳은 농축산업이 지역경제에 이바지 하고 있었다.
성읍 주민은 약 2만여명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곳은 애국심이 투철한 젤롯당, 다시 말해서 열심당원들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을 정도로 로마총독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여리고 역관(驛館)에서 잠시 멈춘 나는 말에게 물과 먹이를 준 뒤 올리브 열매와 계피 차를 구입한 뒤 다시 걸음을 뗐다.
동행한 말들과 한나절을 걸은 결과 사마리아의 중부 성읍인 수가를 거쳐 사마리아에 들어섰다.
사마리아
이곳은 예루살렘의 산만하고 무질서한 분위기와는 달리 사람들 저마다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 하나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이가 없었다.
마치 엄숙주의자의 근엄한 표정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예루살렘 성문에서 통행세를 뜯어내는 배불뚝이의 ‘사마리아에서는 강도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떠 올리며 허름한 시장통을 지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4명의 건장한 남성이 건들거리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람어였는데, 발음이 뭔가 어눌한 느낌이었다.
일행 중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치아가 고르지 않은 그가 침을 뱉은 뒤 말했다.
“이봐, 태어나서 처음보는 이상한 놈! 너 어디서 오는 길이냐?”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순간, 눈매가 흐리멍덩하고 삐쩍 마른 또 다른 사내가 시비를 걸었다.
그의 아람어도 이상하게 들렸다.
“임마, 지금 우리 형님이 묻고 계시자나!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들을 똑바로 바라만 보았다.
나의 이 같은 태도가 마땅치 않았는지 처음에 거들 먹 거린 사내가 느닷없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주먹을 가볍게 피한 뒤 말을 이끌며 앞으로 나갔다.
내가 움직이자 이들 4명도 동시에 움직이며 달려들었다.
이들의 거친 행동을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는 행인들의 수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나는 말을 옆으로 세우고 동시에 달려드는 사내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중국에서 수련한 18반 무예를 쓴 것이다.
이들에게는 1차 경고가 통하지 않을 것이기에 부득이 무예를 꺼내들 수 밖에 없었다.
장담하건 대, 18반 무예에 걸려들면 그것은 죽음과 직결될 수 있다.
내지르는 타격에 십중팔구는 반신불수가 되거나 심할 경우 목숨도 잃는다.
따라서 놈들은 오늘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우선 겁도 없이 내게 달려든 거들 먹을 향해 돌려차기로 관자놀이(귀와 눈사이에 태양혈이 있는 곳)를 타격하자 입에서 생선 부레가 터지는 소리를 내지르며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어서 달려드는 또 다른 놈을 향해서는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절권으로 목을 가격하자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썩은 고목이 나뒹굴 듯 뒤로 자빠졌다.
눈깜짝할 사이에 펼쳐진 광경이었다.
나의 현란한 무예를 지켜보고 있는 구경꾼들은 저마다 탄복하며 흥미를 유발했다.
나머지 남은 두 명은 동료들의 처참한 몰골에 기겁을 하고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다.
나는 처참한 몰골로 신음을 토하고 있는 두 사내에게 다가가 응축된 기혈을 풀어 고통을 완화 시켜주고. 유유히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현장을 벗어나자 어린 꼬마들이 신기한 것을 보기라도 한 듯 뒤를 따라 나섰다.
사마리아에서 있었던 소동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강도가 나타나지 않았고 시비를 거는 불량배도 더 이상 없었다.
한바탕 몸을 풀고(?)나자 어느새 해가 기울었다.
과연 사마리아에서 하루 밤 숙박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조금 전에 있었던 불쾌한 기억 때문이었다.
말도 피곤하겠지만 가이사랴 항구를 향해 좀 더 걷기로 했다.
그렇게 작정하고 앞으로 나갈 즈음이었다.
먼발치에서 중년의 사내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아람어를 할 줄 아느냐 하며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했다.
“이보시게 젊은이. 날도 저물었고 밤에는 엄청 춥네”라며 자기 집에 머물 것을 권했다.
나는 선뜻 내키질 않아 머뭇거렸다.
그럼에도 그는 겸손한 태도로 나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고 애를 썼다.그의 친절에는 사심(私心)이 없어 보였다.
나는 두어 번 정중하게 거절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아내까지 나와 ‘누추하지만 자고 가라’며 거들었다.
이들의 진심을 받아들인 나는 허리를 굽혀 예를 차린 뒤 두 말을 마구간에 두고 안내한 집안으로 들어섰다.
짚을 섞어 쌓아 올린 토담집 내부는 허름했으나 와 닿는 느낌은 푸근했다.
집 안에는 눈망울이 쨍쨍한 계집아이와 그보다 큰 사내아이가 나를 신기한 듯 열심히 살피는 중이었다.
때국물이 얼룩진 앞치마를 두른 부인이 토기 그릇에 물을 가득 담아 내왔다.
그러자 주인 남자가 나를 향해 어여 발을 내라며 재촉했다.
깜짝 놀란 내가 머뭇거리자 주인장은 나를 덥석 앉힌 뒤 두발을 잡아 내 물그릇에 담갔다.
그가 나의 발을 씻기며 말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발을 씻기셨소. 그분께서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며 그 대상은 한정되지 않고 누구라도 그리하라 하셨지요.내가 당신의 발을 씻기는 것도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오.”
나는 연거푸 놀라고 또 놀랐다.
이들 사마리안들은 오직 토라만을 정체성으로 여기는 독특한 유대인 뿌리였다.
그런데 이 집 주인장과 아내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룩히 여기고 신국시민(神國市民)으로 거듭나기를 원하고 있다하지 않는가!
(할렐루야! 주님은 나의 선한 목자이시니 나로 하여금 부족함이 없나이다.)
나는 뜻밖의 호의(好意)를 누리며 맛깔스러운 음식과 포근한 잠자리를 제공받고 깊은 잠 속에 빠졌다.
이날도 잠 속에 천사가 나타나 ‘나를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여라’는 계시(啓示)를 하고 사라졌다.
그렇다!
고향인 신라에서부터 중국과 인도를 거쳐 오는 동안 주님께서는 늘 나와 동행하셨다.
나는 그 느낌을 또렷하게 인지(認知)한다.
다음 날 아침.
두 부부가 정성껏 마련한 아침식사로 기력(氣力)을 보충한 나는 꼬마들을 위해 써달라고 유대 통용 화폐인 세켈과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을 건넸다.
나의 호의에 대해 손사래를 치며 펄쩍 뛰었던 부부는 끝내 나의 진정을 받아들이고 사례를 받아들였다.
내가 문을 나서기 직전 부부는 다시한번 ‘예수님은 메시아’가 틀림없다고 힘주어 말한 뒤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가이사랴
요셉과 니고데모 의원이 그려준 지도에 의존해 가이사랴로 향하는 길은 다소 험난 했다,
낮에는 후덥지근하고 따가운 햇살이, 밤에는 살을 파고드는 한냉 기(寒冷氣)가 엄습했으나 시리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친 행로에 비해서는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예수님도 나와 똑같이 변화무쌍한 기류를 받으며 이 길을 걸으셨을 것이다.
그렇게 사마리아에서 10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가이사랴 항구도시에 도착한 때는 여명(黎明)직후였다.
항만시설이 체계적으로 갖춰진 부둣가에는 엄청난 규모의 상선(商船)들이 횃불을 밝히고 선박에서 짐을 하역하고 있었다.
항구와 인접한 곳에 자리한 주막들은 일찌감치 좌판을 펼치고 음식장만을 서두르는 등 활기에 찬 모습이었다.
가이사랴는 로마제국 황제의 명칭(名稱)을 도시 이름에 인용한 유대의 계획 도시였다.
나는 이른 새벽부터 손님맞이에 분주한 주막집으로 들어섰다.
주막은 다목적 형태로 운용되는 규모가 큰 접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내가 입구에서 기웃거리자 어깨에 구정물이 낀 큰 수건을 걸친 사내가 눈알을 부지런히 굴리며 다가왔다.
내 곁으로 다가 온 사내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살피며 히죽히죽 웃기까지 했다.
그는 혼자 보는 것이 부족하다는 듯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던 또 다른 사내에게 고갯짓을 하며 휘파람으로 불렀다.
소리에 반응한 주방 사내가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왔고 그 역시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구정물이 잔뜩 낀 수건을 걸친 사내가 나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손짓발짓을 해 보였다.
“이봐, 당신 어디에서 왔어, 우리 말은 할 줄 알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아람어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와 헬라어 라틴어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유창한 아람어에 깜짝 놀란 두 사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곁눈질했다.
말이 통하자 어깨에 수건을 걸친 사내가 태도를 돌변하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 앉으쇼. 그리고 시장하면 먹고 싶은 음식을 시 켜요.”
나는 차라도 한잔 달라며 계피 차를 주문 한 뒤 말에게 먹일 사료와 당근도 함께 요구했다.
10여 분 뒤.
맛깔스러운 음식을 내 온 수건 사내가 식탁위에 음식을 내려 놓고는 덥석 앞자리에 앉았다.
나에 대한 궁금증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내는 나의 출신지와 이스라엘에 온 배경 그리고 갈릴리의 예수를 만나는 이유를 조곤조곤 물었다.
나는 사내의 관심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신라에서부터 여정을 남김없이 재생해 주었다.
나의 행로를 귀를 고추 세우고 귀담은 사내는 대단하다면서 세 번씩이나 엄지척을 들어 올렸다.
사내가 말했다.
“그런데 말요. 나도 예수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들어 본 기억이 있소. 그 라바이가 마술에 능통하다는 소문.”
내가 말했다.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은 마술이 아니라 오직 야훼께서 만이 하실 수 있는 초자연적 힘입니다.”
“초자연적….그게 뭐요?”
“야훼께서 6일 동안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은 믿으시죠?”
사내가 말했다.
“그야 말하면 잔소리지!”
내가 덧붙였다.
“야훼께서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신 것도 믿으십니까?”
“신라국에서 온 젊은이가 야훼의 행하심을 어찌 그리도 잘아오? 아무튼 노아의 홍수 심판도 잘 알지.”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든 사실도 알고 계시죠?”
내가 끈질기게 질문하자 수건 사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질문의 요지가 뭐요?”
내가 말했다.
“방금 야훼께서 하신 초자연적 힘에 대해서는 모두 인정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야훼와 삼위일체이신 예수님의 병 고치심과 기적행위도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수건 사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젊은이가 찾아간다는 예수가 우리 야훼와 같은 본성(本性)이란 거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훼와 같은 속성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를 빌려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언약(言約)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거참…알쏭달쏭한 말만 늘어 놓는구만! 아무튼 좋아요.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그 양반을 직접 보고 말을 나눠야 예수가 정말 야훼와 동일한 인물인지 구별할 수 있을거요.”
의혹의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 수건 사내는 내가 측은하다는 듯 더 이상 나와 말을 섞으면 자신도 이상해질 거라며 자리를 박차고 물러섰다.
그가 등을 보이며 말했다.
“이보쇼 젊은이. 당신이 예수를 만나거든 이곳에 꼭 오시라고 전하쇼. 아시겠소?”
내가 흔쾌히 답했다.
“물론입니다. 틀림없이 전해드리겠습니다.”
사내는 예수님에 대해 낯가림이 심했으나 마음의 바탕에는 선한 것이 내재돼 있었다.
나는 주막에서 포만감을 느낄 만큼 배를 채우고 가이사랴의 도심을 기웃거렸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에게 뜯어 낸 혈세(血稅)로 건설한 욕망의 단지였다.
엄청난 재원이 투자되었음을 드러낸 거대한 헤롯 왕궁과 로만형(型) 로마 총독관, 헬라의 원형극장과 같은 야외극장, 가이사랴 시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수로(水路)와 공중 목욕탕, 세금을 뜯어내기 위해 계획적으로 길을 낸 정방형(正方形)의 도로 등은 헤롯의 광포한 욕망의 표징(標徵)이었다.
나는 이곳 중앙지천(地川)에 위치한 공원에서 뜻밖에 인물과 마주쳤다.
다름아닌 바리새인들이었다.
나를 처음보는 원숭이 대하듯 응시(凝視)한 바리새인들은 처음에는 호의적이었으나 내가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밝히자 얼굴이 단번에 흙색으로 변했다.
바리새인 가운데 얼굴에 붉은 핏줄이 두드러진 늙은 사내가 파열음(破裂音)에 가까운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동방에서 당신이 무슨 이유로 그자(예수님)에게 가는가?”물었고 내가 “그 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하자 둘러싼 바리새인들이 발끈했다.
이들은 ‘예수는 메시아’라고 강조한 나의 말이 모욕적이라며 땅에 가래침을 내 뱉고 손바닥을 터는 시늉을 한 뒤 노려보며 사라졌다.
나는 투덜거리며 등을 보인 바리새인들의 격한 처신을 떠 올리며 예수님을 생각했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구나)
흐리멍덩한 태양이 점점 뜨거운 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더 더워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나는 마구간에서 여유롭게 휴식하고 있던 두 말을 이끌고 도심을 빠져 나와 가버나움으로 연결된 행로에 섰다.
두 마리의 말 얼굴을 번갈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요셉과 니고데모 의원의 말처럼 메시아인가,하나님의 본성인 삼위일체인가 아니면, 주막 집 수건 사내의 말처럼 사람들을 미혹(迷惑)케 하는 마술사인가 또는 환란 시기에 나타나는 이사야 같은 선지자인가.(계속)
이산해 / 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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