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8 09:31

▲사진: 예수님의 얼굴 (목판 유채) / 렘브란트 作(1648-1656) /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所藏)
예수님의 ‘하늘 헌장(憲章) 산상수훈(山上垂訓)’선포
예수님이 베다니의 부자집 청년 나사로를 살리신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향했다.
이틀 후 가버나움 항구에 도착한 제자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 이지역에 위치한 상점에 둘러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다.
확보한 물품은 히브리어로 하르타볼(높은 산)산 구릉지대(丘陵地帶)에서 펼쳐질 산상수훈 때 사용할 것들이었다.
필수품 구입에 사용된 자금은 예수님을 존경하며 따르는 베다니 출신 바리새인 문둥이 시몬과 아리마태 성주 요셉 그리고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타와 마리아, 올리브 기름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막달라 마리아의 아버지가 부담했다.
그런 가 하면, 산상수훈 헌금과 관련해 놀라는 사실이 있어 기록해 둔다.
다름아닌, 총독의 아내 클라우디아 프로쿨라가 남편 몰래 거액의 로마 은화(銀貨) 데나리우스를 살로매에게 건넨 것이다.
얼떨결에 은화를 받은 살로매는 놀란 나머지 이 같은 사실을 베드로에게 알렸고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보고했다.
(단언컨 데, 클라우디아 프로쿨라는 로마인 최초의 예수님의 제자이자 또 한 이방인으로선 처음으로 예수님을 삼위일체라고 고백한 인물이었다)
살로매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이고 세배대의 아내다.
믿음이 신실(信實)했던 살로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먼발치서 통곡하며 괴로워 했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와 함께 팔레스타인 전역을 도는 로방(路彷)전도에 나섰을 때 여신도들을 규합해 뒤에서 돕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예수님 곁에는 든든한 재정 지킴이들이 신국(神國)사역의 버팀목이 됐다.
산상수훈이 펼쳐질 하르타볼 산은 사방 어느 곳에서 보아도 산세(山勢)가 완만한데다,주변 경관(景觀)또한 아름다운 장소였다.
선지자 이사야와 함께 하나님이 사랑하신 예언자 에레미아는 하르타볼 산을 산중의 산으로 꼽기도 했다.
한편, 과월절(過越節)에 맞춰 하르타볼 산에서 산상수훈이 펼쳐질 것이라는 소문은 오래전부터 팔레스타인은 물론 유대 밖 이방인의 나라에까지 퍼져 나갔다.
그리고 때가 다가오자 세계 각지에서 행장(行裝)을 꾸려 갈릴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이들 이방인들은 각기 사회를 대변하는 학자 또는 덕망가(德望家)들이 주를 이뤘다.
이에 반해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떠나는 다수의 유대인은 기층민(基層民)과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들이었다.
이들은 유대 사회에서 제대로 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하류 계급이었다.
이 시대의 유대 사회는 절대 빈곤층이 다수였다.
이들은 하루 한끼도 간신히 때웠다.
대표적으로는 갈릴리의 빈촌(貧村)인 나사렛을 꼽았고 예수님이 일용직 근로자로 출퇴근 한 인근 도시 셋폴리스 역시 가난의 대표적 표상(表象)이었다.
예수님은 공생애(共生涯)이전에는 목수 일을 전업(專業)으로 하셨다.
창세(創世)때 에덴동산을 가꾸신 것에 비하면 매우 하잘것없는 일 이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으셨다.
일 푼 데나리온은 예수님의 대 가족이 라헴 빵으로 한끼를 겨우 먹을 수 있는 열악한 가치였다.
이 당시 요셉 의원이 부리는 남자 하인의 몸값은 6백 데니리온이었다.
그리고 포도나무 재배 기술자 또는 올리브 나무 재배 기술자들은 무려 2천 데나리온을 지불해야 데려올 수 있었다.
만약 당신이 목수를 필요로 한다면 예수님에게 일 푼 데나리온만 지불하면 가능했다.
아무튼 이들 하류계층의 직업은 양치기 또는 가죽을 무두질 하거나 신발(샌들)을 만드는 갖바치 또는 일용직 근로자와 어부 그리고 막노동꾼 이었다.
산상수훈 현장에는 상당수의 여성들이 몰려들었다.
유대의 여성들은 헬라 또는 로마제국의 여성들과 달리 사회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이러한 픙조(風潮)는 유대사회의 오랜 폐습(弊習)이었다.
유대 남성들은 여성을 헌 짐짝 대하듯 취급했다.
‘여자는 아담의 뼈를 통해 세상에 왔다’는 남성우월주의의 편견 때문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被造物)임에도 여성은 늘 하대(下待)의 대상이었다.
때문인가!
푸대접을 받는 여성들이 대거 하르타볼 산을 향해 몰려온 이유는 ‘예수님은 남녀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여성들은 ‘단비’같은 복음(福音)을 눈과 귀로 확인키 위해 용기를 내어 어려운 발걸음을 했다.
이스라엘은 남성이 중심이 되는 부계(父系)사회였다.
때문에 모든 권한은 남성 우월중심(優越重心)에서 비롯됐다.
여성은 미혼기에는 아버지의 소유물(從屬)이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남편의 소유물로 둔갑했다.
남편은 아내의 ‘비알’이라고 했다.
‘아내를 소유하는 주인’이란 뜻이다.
이 같은 분위기는 나의 조국인 신라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로 다른 세상에 살면서도 여성을 대하는 인식은 놀랍도록 비슷해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여자 라헬은 달랐다.
그녀는 타고난 천재로 다국어(多國語)를 유창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토라를 해석하고 심지어는 주석(註釋)까지 달 정도로 총명했다.
때문인가? 여성의 지위를 노골적으로 폄(貶)하는 바리새인들도 라헬을 대하는 시선만큼은 매우 관대했다.
물론 이 같은 경유는 매우 특별한 예다.
이렇듯 남성들로부터 노골적인 차별을 당하는 여성들이 남의 이목과 먼 길을 마다하고 대거 산상수훈 현장에 몰려온 이유를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주님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원동력이었다.
팔레스타인 지방 중간 지역에 터를 잡은 사마리아인들도 호기심을 부추기며 갈릴리로 향했다.
유대인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이들이 하르타볼 산상수훈에 관심을 드러낸 이유는 동족 가운데 불치병을 앓고 있거나 귀신이 들어 미친듯이 날뛰거나 환청에 시달리는 환자들 때문이었다
사마리아인 가운데 여럿 남편을 두었던 한 여인은 우연히 우물가에서 마주친 예수님의 놀라운 통찰력을 체감하고 ‘주님은 메시아’라고 고백한 바 있다. 이 여인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고 급기야는 수훈을 듣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라는 확신이 선 이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치유해 줄 것이라는 절대 믿음도 함께 지니고 떠났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런 가 하면,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추종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예수교인(敎人)이 된 중상류층 젊은 유대인들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하르타볼 산을 향해 나아갔다.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르치실 때 그곳에서 말씀을 엿들었던 의식화 된 부류들이었다.
당시 겟세마네에서 엿들었던 주님의 말씀은 생경(生硬)했으나 신선한 포도주처럼 부드러웠고 한편으론 단호했다.
주구장창 무미건조(無味乾燥)하게 읊조려 왔던 토라와는 전혀 다른 울림이었다.
이들은 과거에도 현재도 들어보지 못한 파격적인 말씀에 감동해 마음이 이끌렸다.
그리고 목마름의 해갈(解渴)을 위해 주위의 시선을 무릅쓰고 하르타볼 산으로 향한 것이다.
내일 펼쳐지는 산상수훈에는 이방인(외국인)들도 대거 참석하는 세계적인 행사가 됐다.
예수님의 명성은 비단 팔레스타인 뿐만 아니라 주변국가에까지 널리 퍼져 나간 상태였다.
팔레스타인을 오가는 무역상을 통해 ‘유대의 축제일인 과월절 직전에 하르타볼 산에서 산상수훈이 선포된다’는 소식을 접한 이방인들은 때에 맞춰 먹고 마실 것을 단단히 챙겨 길을 나섰다.
이들은 카스피안해(海)와 티그리스 강(江)지역과 유프라데스에서, 헬라와 로마, 심지어는 인더스 강과 황하강 지역에서 건너 온 지식인 무리였다.
좀 더 자세히 언급하면 문명국(文明國)인 헬라와 유대를 지배하는 로마,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원인 애굽과 고대 문명의 상징인 페르시아, 다신(多神)의 나라 인도, 그리고 철학과 인간중심 사상이 만개(滿開)한 중국과 감바로기아, 훗 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14처(處)를 오르시다 쓰러지셨을 때 대신 십자가를 진 시몬의 나라 구레네 출신 순례자들 이었다.
이 밖에도 예수님이 두려워 잠 못 이루는 갈릴리 분봉와 헤롯 안티파스와 가이사랴의 유대 총독청(廳), 산헤드린 소속 서기관과 바리새인, 사두개인, 젤롯 혁명당, 그리고 제사장 가야바가 밀파한 염탐꾼 등 다양한 부류들이 하르타볼 산에서 펼쳐지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산상수훈을 염탐하기 위해 속속 몰려 들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실 산상수훈의 근본은 ‘하나님의 나라’다.
오랜 세월에 걸쳐 타국가(에굽과 바빌론과 로마제국)에게 종속(從屬)돼 핍박을 받은 유대인들은 늘 하나님의 출현을 학수고대해 왔다.
그리고 한편으론 자신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선택한 민족(選民)이므로 하나님의 나 라는 오직 자신들의 전유물이라고 고집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가운데 유대인이라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에는 유대혈통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강변(强辯)했다.
여성을 물건취급 했던 이들은 오직 남존여비(男尊女卑)만 내세웠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遵守)해야 한다고 믿었다.
경건한 정신과 끊임없는 신앙생활을 병행(竝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도 들먹거렸다.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이 제대로 된 유대인만이 선택된다고 못박았다.
정신병자나 불구는 하나님이 내린 저주와 징계(懲戒)여서 절대 불가(不可)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한술 더 떠서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부류여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피력 했다.
가난한 자는 구제의 대상은 될 수 있으나 하나님 나라 잔치에는 초대받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부류와 그렇지 않은 대상을 멋대로 갈라치기 했다.
이들은 정신과 육체에 결함이 없고 재산이 풍족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해괴한 이유를 들이 댔다.
이 모든 내용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것들이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뒤 남녀노소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시고 어루만져 주셨다.
바리새인들이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 수 없다고 잘라 말한 문둥병자를 비롯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한 세리와 창녀를 보듬으시고 ‘더 이상 죄짓지 말라’고 타이르셨다.
그리고 이들을 용서하셨다.
예수님의 자혜로움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불평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세리와 창녀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산상수훈이 개최되기 전 날. 12제자를 비롯한 나 조갑재와 라헬,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매, 그리고 나사로의 오누이 마르다와 마리아 예수님의 여동생인 살로매 등은 외곽 제자 그룹인 70인들과 함께 막바지 현장 점검에 착수 했다.
나는 다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라헬과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헬라어와 라틴어 페르시아어 통역을 담당하는 동시에 의료까지 전담키로 했다.
제자 가운데 바돌로매(나다니엘)와 도마(유다:예수님의 동생)와 안드레와 빌립 그리고 야고보는 군중들이 앉은 구획(區劃)정리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재정(財政)을 책임진 가리욧 유다와 야고보의 아들 다대오 유다, 젤롯 당 열심당원인 시몬은 대거 몰려오는 군중들의 편의시설, 즉 화장실과 아픈 이들을 치료하는 응급실을 종료나무 숲 인근에 설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반석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세리 출신 마태는 예수님을 보좌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그 밖에 70인 제자들 가운데 50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군중에게 전달하는 변사(辯士) 임무를 맡았다.
목소리가 우렁차고 발음이 정확한 이들을 변사로 추려낸 뒤군중들 틈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해 예수님의 말씀을 되 받아 알리는 역할을 안겼다.
하르타볼 산 입구에 펼쳐진 구릉지대는 매우 광범위한 장소였다.
때문에 먼 뒷자리에 앉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경청(傾聽)할 수 없는 탓에 변사의 역할은 필수적이었다.
행사를 담당하는 형제 가운데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어머니는 연로(年老)한 탓에 가벼운 허드렛일을 도우셨다.
이렇게 밤늦게 까지 분주한 시간을 보낸 제자들은 각자 맡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예수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뒤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바위 뒤편 풀밭에 누워 잠을 청했다.
잠자리에서 올려다 본 밤 하늘이 오늘 따라 아름다웠다.
마치 청동 거울처럼 쨍하고 빛을 발하는 수천 개의 별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미하는 듯 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이 우주는 구릉지대에 누워 모든 이들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 보고 계신 저 분의 작품이다.
순간, 나는 또 다시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주님께선 하늘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
나는 박하사탕처럼 시원하게 뺨을 스치는 산들바람에 하나님의 오묘함(奧妙)을 느끼면서 신라국의 가족을 떠올렸다.
헌데, 내 마음을 훔쳤을까.
여자들끼리 누워 있는 곳에서 라헬이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녀도 내가 가족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하지만 이젠 가족들로 인해 가슴을 조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하셨으니까!
‘근심하지 말라.’
다음날 아침
하르타볼 산 입구 이스르엘 평야(平野)에는 이틀전부터 몰려든 어마어마한 군중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대충 어림잡아도 5천여 명을 웃돌았다.
이 같은 수치는 이스라엘 전체 인구수가 대략 5백만인 것을 감안할 때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유대인의 대축제일인 유월절에도 대 도심인 예루살렘에 5천 여명의 군중이 모인 기록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하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부터 약 9.6킬로미터에 위치한 하르타볼 산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이스르엘을 눈앞에 품고 있다.
산상수훈은 하르타볼 산 입구에 위치한 완만한 구릉지대(丘陵地帶)펼쳐졌다.
구릉지에는 솔로몬의 화려한 영화(榮華)보다 호기(豪氣)로움을 뽐내는 방초(芳草)와 관목(灌木)들이 흐드러지게 자생하고 있었다.
종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 선 나지막한 구릉(丘陵)에는 바위틈으로 맑은 물이 쉬지 않고 흘러 순례자들이 먹을 식수로 적합했다.
제자들은 군중들의 생리작용을 염두에 두고 두꺼운 마로 직조한 두꺼운 천을 땅에 박은 나무에 사방으로 둘러쳐 가림 막을 한 뒤 남녀를 구별해 뒷간으로 사용하도록 설치해 두었다.
산상수훈이 선포되는 이 날은 과월절(過越節)을 눈 앞에 둔 시기였다.
과월절은 유대인들이 모세의 지휘하에 에굽을 탈출하기 전날 밤 문설주에 양피를 발라 야훼의 파라오 응징(膺懲)때 무사했음을 기념하는 축제일을 뜻했다.
이날 청명한 하늘에는 솜처럼 부드러운 뭉개 구름이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차단하고 있었다.
어제의 하늘과는 판이한 양상을 드러냈다.
그런 가 하면, 갈릴리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실린 산들바람은 군중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됐다.
하늘에는 공중비행을 하는 갈매기들과 다양한 종류의 철새들이 군중의 머리 위를 이리저리 선회하며 경쾌한 날개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다윗의 시(詩)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 갖은 하늘과 지대(地帶)를 두루 살피며 지금 이 시각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 모든 현상들이 어쩌면 우주만물을 관장하시는 예수님의 조화(調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님께서는 돌무덤에서 썩기 일보직전인 나사로를 향해 ‘내가 왔으니 일어나라’하시며 죽은 시체를 일으켜 세우신 분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를 괴롭힌 귀신을 향해서는 ‘네가 무슨 권세로 그리하느냐’며 호통을 치셨다.
때문에, 지금 솥뚜껑 바위 뒤에서 기도 중이신 예수님은 능히 눈에 보이는 모든 조화로움을 창출(創出)해 내실 것이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순간 군중들도 저마다 가져온 돗자리를 깔고 앉아 옆사람과 사담(史談)을 즐기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이틀 전에 하르타볼 산에 도착해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한 뒤 오늘 이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유대 역사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산상수훈의 시간이 때를 기다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우람한 체격에 얼굴에 거친 수염이 뒤덮인 사내가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형상의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섰다.
부리부리한 눈을 좌우로 굴리고 있는 그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예수님의 첫번째 제자이며 반석(盤石)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베드로는 마(麻)로 직조한 지저분한 상의를 걸쳤고 허름한 바지춤은 검정색 가죽끈으로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피부가 거칠게 갈라진 흙투성이에 발에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그는 허리춤 부분이 찢어져 너덜너덜한 상의의 팔 한쪽을 꾸깃꾸깃 접어 걷어붙였는데 드러난 피부는 구리 빛이어서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시몬 베드로의 직업은 어부였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갈릴리 가버나움 항구 건너편에 위치한 작은 어촌마을 뱃세다에서 고기를 잡는 일을 업(業)으로 삼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반석(盤石)으로 불리며 좌장(座長)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를 따르되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말씀하시자 재산목록 1호인 고깃배를 바다 안으로 힘껏 밀쳐내고 예수님의 사도(使徒)가 된 것이다.
솥뚜껑 바위에 올라선 그는 광활한 구릉지에 운집한 군중들을 살폈다.
태어나서 처음보는 어마어마한 수였다.
간신히 걸어 다닐 수 있는 통로를 제외하고 빼곡히 들어 찬 군중들의 면면을 살피면 이랬다.
가진 자와 가난한 자, 많이 배운 자와 무식한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군림하는 자와 지배를 받는 자 남성들에게 노골적으로 차별 당하는 여성 무리들 등 각양각색의 인간군상이 어우러졌다.
솥뚜껑 바위 왼편으론 상당수의 이방인들이 지정된 위치에 앉아 있었다.
예수님과 베드로처럼 머리를 짧게 기른 헬라인과 로마인, 터번을 두른 페르시아인과 눈매가 날카로운 인도인, 얼굴색이 검은 에급인 등 앞서 언급한 외국에서 온 순례자들이었다.
이들은 바위에 버티고 선 골격이 우람하고 거친 모습의 사내에게 시선을 보내며 웅성거렸다. ‘설마 저 사내가 예수님….?’
이방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베드로가 입맛을 다셨다.
그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지 않자 바위 아래서 지켜보고 있던 예수님의 아우 도마(유다)가 ‘형님, 왜 우물쭈물하고 있소?”라는 핀잔에 그제서야 번쩍하고 정신을 되찾았다..
목젖이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침을 삼킨 베드로는 폐부 깊숙이 맑은 공기를 흡입한 뒤 말문을 텄다.
“사랑하는 형제들, 그리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오신 순례 객 형제들. 에덴동산처럼 아름다운 하르타볼 산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잠시 후면 여러분이 학수고대 하는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서실 거요. 그리고 복음을 전하실 겁니다.”
“그러면 그렇지 저리도 우락부락한 사내가 예수님일 수는 없지…”
이방인들의 속삭임이었다.
베드로의 쩌렁쩌렁한 알림이 끝나자 군중들이 술렁거렸다.
군중들이 웅성거린 이유는 라바이는 늘 기도를 한다는 것을 소문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드로가 바위에서 사라진 직후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라바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순간, 군중들의 시선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다.
소문을 통해 들었던 예수의 모습이 어수룩한 촌부(村夫)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앞서 예수님의 모습을 기술(記述)한 바 있다.
막달라 마리아를 치유하신 날 처음 목격한 생생한 장면 말이다.
그 모습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다시한번 재현해 보자.
예수님은 키가 크고 눈이 부실 정도로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또렷했다.
주님은 혈통(血統)으로는 전형적인 유대인이었다.
육신의 계보(系譜)는 다윗왕의 자손이다.
몸에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통 자루 옷을 걸치셨다.
먼지가 수북한 발에는 양 가죽으로 만든 샌들을 신으셨는데 신들매(끈)는 낡아서 헐거워진 상태였다.
머리를 어깨까지 내려오도록 길게 기르는 유대인의 습관과는 달리 모세와 다윗처럼 머리는 귀와 목이 드러나 있었다.
키도 큰 편에 속했다.
몸집은 말라보였으나 골격(骨格:뼈)은 단단했다.
혈색이 좋은 피부는 우유 빛 이었다.
칡 흑 같은 눈은 커다랗고 모든 것을 담을 듯이 깊고 단호해 보였다.
그런 가 하면, 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자애(自愛)와 연민(憐憫)이 가득했다.
코는 유대인 답지 않게 곡선이 날렵했다.
이를테면, 유대인 특유의 콧잔등이 불거진 매부리 코가 아니었다.
헬라인 또는 로마인처럼 매끈했다.
귀도 컸다.
귓밥이 윗입술 근처까지 내려와 어떤 말이라도 편견 없이 담아낼 형상이었다.
손가락은 마디 마디가 길었다.
손등은 투박했는데. 그 이유를 제자 바돌로매(나다니엘)는 이렇게 말했다.
“이보시게 갑재 형제. 자네는 타국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모를걸세. 원래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였지.거친 나무를 다루고 연장을 쓰다 보니 자연히 손이 거칠 수 밖에.”
하지만 손톱은 잘 정돈돼 있었으며 때가 끼었거나 영양실조로 부실하지는 않았다.
팔길이도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길었다.
선 자세에서 늘어트린 팔은 무릎에 닿을 정도였다.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다 품겠다는 자비(慈悲)의 모습이었다.
입을 다물고 계실 때의 표정은 무표정이었으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말로서는 형용할 수 없는 연민(憐憫)의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미소는 특히 입가장자리와 눈매에서 그랬다.
말씀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치아의 치열(齒列)은 가지런했고 틈새가 없는 옥수수를 연상케 했다.
목소리는 중저음(重低音)에 가까웠다.
무겁고 낮은 소리였지만 발음(發聲)은 명확했다.
목소리는 청음(淸音)이었다. 듣는 이들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내포돼 있었다.
걸음걸이도 일정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보폭(步幅)이었다. 30대 나이의 유대인 상당수가 허리가 굽거나 걸음걸이가 일정치 않았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샌들을 신으신 발의 크기는 다소 커 보였다.
발에는 뿌연 먼지가 뒤덮여 있었는데 이동하실 때 수송 수단인 나귀 또는 낙타를 타지 않으시고 먼 거리를 줄곳 걸으신 탓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두 마리의 말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 흔한 나귀조차 없으셨다.
허리도 꼿꼿했다.
등이 굽거나 휜 곳이 없었다.
이는 예수님의 건강이 매우 양호하다는 것을 반증(反證)했다.
지금까지 기술(記述)한 내용은 내가 막달라 성읍에서 처음 목격한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물론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 간택(簡擇)된 후 의사(醫師)된 입장에서 간접적으로 살펴 본 견해이기도 하다.
한가지 더 첨언할 것이 있다.
훗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겉모습을 보고 ‘나이가 50도 되지 않았는데’ 하며 비아냥거렸다.
예수님이 늙어 보인 이유는 쉴 틈이 없이 먼 거리를 유랑(流浪)하며 사역하신 탓 이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얼굴은 명경지수(明鏡止水)와도 같은 고요함으로 그득했다.
솥뚜껑 바위에 오르신 예수님은 사방에 흩어져 앉은 무리를 둘러보시고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동시에 섞어 말씀하셨다.
“상쾌한 아침.”
순간, 군중 속 곳곳에 버티고 선 변사들의 전달을 귀담은 이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할렐루야!”
구릉지대가 들썩일 만큼 웅장한 함성이었다.
예수님이 덧붙이셨다.
“사랑하는 너희들아 배는 채웠느냐?”
이 때 어떤 무리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다른 무리는 손사래를 치며 굶주렸음을 드러냈다.
이를 알아채신 예수님께서 팔을 뻗어 저으시며 말씀하셨다.
“아직도 굶주리는 너희가 있다니 이 무슨 일이냐 하나님은 하늘에 나는 새들에게도 세끼 먹을 양식을 주시는데 어찌 너희를 굶길까 보냐.”
군중들은 이 대목에서 다시한번 주변과 수군거리며 의구심을 드러냈다. 모인 군중이 한두명도 아니고 구릉지를 가득 메운 이가 수천 명인데,무엇으로 이들을 먹일 것이냐는 의문이었다.
특히 나와 라헬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통역으로 예수님의 일거 수 일 투족을 지켜보는 이방인들은 관심이 더욱 고취(鼓吹)돼 있는 터였다.
예수님은 잠시 말씀을 거두시고 바위 아래 서 있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물으셨다
“지금 너희가 지닌 양식이 얼마나 되느냐?”
느닷없는 질문에 두 제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예수님을 올려보며 말했다.
“주님. 저희가 가리옷 유다(제정 담당)와 함께 이틀간 가버나움 항구에 있는 상점을 다 뒤져 확보한 레헴(主食 빵)은 기껏해야 100여 명이 먹으면 족할 양입니다.”
베드로의 낭패(狼狽)한 모습을 바라보신 예수님이 말씀 하셨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내가 저들에게 먹일 양식을 만들 것이니 요한은 바위 앞에 앉은 사내 아이의 부모에게 먹을 것을 가졌는지 묻고 얻어오라.”는 지시를 했다.
영문을 몰라 해하는 요한이 눈 앞에 보이는 가족에게 다가가 혹시 가지고 있는 음식이 있느냐고 물었다.
요한의 정중한 물음에 사내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대략 대여섯살쯤 보였다.
요한이 자기 자식에게 음식이 있느냐고 묻자 곁에 앉은 젊은 부부가 마로 직조한 보자기에서 레헴(煎餠:밀가루를 둥글고 납작하게 만들어 화덕에 구운 빵) 다섯개와 갈릴리 바다에서 잡히는 어종(魚種)인 틸라피아(훗 날 베드로의 물고기로 불렸다)두 마리를 꺼내 보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잇몸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주님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드리겠소.”하며 보자기에 싼 음식을 디밀었다.
요한은 사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모를 향해 ‘샬롬(평안을 드린다)’하고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고는 보자기에 싼 오병이어(五餠二魚)를 예수님에게 건넸다.
지금 군중들과 바리새인 서기관들 그리고 이방인들은 숨을 죽인 채 예수님의 움직임을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 보고 있었다.
황갈색 보자기에서 오병이어를 꺼낸 예수님은 빵과 생선을 양손에 움켜 쥐시고 하늘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축사를 하셨다.
“아버지. 오늘 이자리에 모인 자매형제들이 기쁨의 찬양을 드리 오니 받아 주옵소서. 또 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리신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이 음식을 받치나이다. 모든 영광이 오로지 아버지에게 있사옵니다.”
예수님의 축사가 드넓은 평야지대에 울려 퍼지자 공중에 나는 새와 지대에 흐드러지게 핀 방초들과 빼곡히 모인 군중들도 숙연한 분위기로 아멘을 외쳤다.
통역으로 전해 듣는 이방인들도 숙연한 표정들이었다.
오병이어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축사를 하신 예수님이 바위에 음식을 내려 놓는 순간이었다.
모든 군중들 가운데 음식을 넉넉하게 꾸려온 이들이 저마다 빵과 물고기를 꺼내 돗자리 한 켠에 꺼내 놓는 것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광경이었다.
결코 누가 시키거나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저마다 선뜻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음식을 내놓은 것이다.
이 같은 진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베드로가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싱글벙글 하며 예수님의 눈치를 살폈다.
나 역시 그랬다.
흥분한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께서 또 다시 기적을 행하셨군요!”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눈치가 빠른 베드로는 즉시 70인 제자들에게 두 팔 신호를 보내 군중들이 꺼내 놓은 빵과 물고기를 바구니에 담게 했다.
5천 여명의 군중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내놓은 빵과 물고기를 고기잡이할 때 쓰이는 커다란 통바구니로 거둔 결과 열두바구니 하고도 차고 넘쳤다.
이것 만으로도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가난한 이들을 고루 먹일 수 있는 충분한 양(兩)이었다.
기적을 목격하고 있는 군중들은 저마다 감격에 겨워 할렐루야를 복창하며 예수님을 향해서는 ‘주님은 진정한 성령’이라며 한 목소리를 냈다.
이방인들도 방금 기적과도 같은 현상에 대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의 나라에서는 단 한번도 목격하지 못한 이례적인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것은 비단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보좌하는 제자들과 측근들도 감격에 겨워 서로 부둥켜 안고 기쁨을 배가(倍加)했다.
막달라 마리아와 마르다 그의 동생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매 곁에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딸 살로매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특히 어머니 마리아의 미소는 더욱 의미심장했는데,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행위를 어린시절부터 지켜 본 이유일 것이다.
제자들 역시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주님은 단지 축사 한마디로 군중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셨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축사가 끝나자 군중들은 돗자리에 차린 음식을 맛있게 식음하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그렇게 훈훈한 식사시간이 주어진 뒤 저마다 부산한 뒷정리를 하고 곧 전개될 산상수훈을 고대했다.
한편 가르침에 앞서 예수님도 바위 뒤에 앉으셔서 어머니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성령이신 예수님의 식사는 우리와 전혀 다름이 없다.
풀밭에서 제자들과 함께 동그마니 앉아 바닥에 놓인 레헴 빵과 불에 그을린 생선, 그리고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로 식사를 하셨다.
그게 전부였다.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삼시 세끼 챙겨먹는 기름진 고기와 향신로(香辛料)를 듬뿍 첨가한 산해진미(山海珍味)같은 왕의 음식이 아니었다.
제자들과 똑같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음식을 드신 것이다.
언젠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먹기를 탐하는 자’라며 비아냥을 한 때가 있었다.
예수님이 세리(稅吏)였던 마태의 집에서 그가 제공한 발효된 포도주와 육식을 맛깔스럽게 드시는 모습을 곁눈질 하며 뱉은 말이었다.
그렇다!
예수님께선 어느 누구의 음식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베다니의 바리새인 출신 부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도 식탁에 올려진 음식을 맛있게 드셨고 째지게 가난한 촌부가 건 넨 딱딱한 레헴도 ‘잘 구운 빵’이라고 칭찬하시며 드셨다.
여타 동년배(同年輩)유대인과는 달리 예수님이 건강한 이유는 문둥이의 음식이건 가난한자의 음식이건 또는 요셉 의원 같은 부자 집 음식이건 가리지 않고 드신 결과였다.
나는 예수님의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며 하늘나라에선 어떤 종류의 음식을 드셨는지 입이 근질거렸으나 차마 여쭤볼 수는 없었다.
내가 예수쟁이라는 사실을 알아 챈 어느 젊은 바리새인 서기관이 불쑥 이렇게 질문했다.
“신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나사렛 예수도 뒷간에서 볼일을 보는가?”
우문(愚問)이었다.
인자(人者)이신 예수님이 뒷간을 가는 것이 무엇이 궁금한가?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만드신 여호와 야훼께서 먹고 배설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그는 간과(看過)했다.
따라서 성령(聖靈)이시며 인자이신 예수님이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이 시비거리가 될 수 없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은 청명한 공기를 마시며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말씀하시고 빵과 포도주와 생선으로 생명을 유지시키신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은 ‘에덴의 회복’을 위해서 였다.
바리새인과 유대 기득권층이 두려워 하는 구습(舊習)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하도록 하기 위함 이었다.
제자들과 짧은 시간에 맞춰 식사를 하신 예수님은 잔반(殘飯)을 물리신 후 다시한번 축사를 하셨다.
예수님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일상이었다.
그리고 축사를 마치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의 안내를 받으며 솥뚜껑 바위에 오르셨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위에 선 예수님의 모습이 느닷없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얼굴에는 눈이 부실정도로 찬란한 광채(光彩)가 드리워졌고 입고 계신 지저분한 튜닉 통 자루 옷도 백옥(白玉)처럼 하얗게 변해갔다.
뿐만 아니었다.
머리 위에는 구름이 둥글게 걷히고 그 속에 한줄기의 빛이 내려와 후광(後光)처럼 전신을 비추었다.
예수님의 좌우에는 모세와 선지자 엘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5천여 명의 군중들은 경이로움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말(言)로서는 형용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군중들은 저마다 예수님을 향해 손을 내뻗고 ‘나의 영광스런 주님’을 외쳤다.
솥뚜껑 바위 인근에 자리한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급작스런 변화에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드러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방인 틈 속에 몸을 숨긴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총독청에서 파견한 로마군 출신 첩보원들 그리고 헤롯 안티파스의 염탐꾼들 역시 사색(死色)이 된 창백한 얼굴로 전전긍긍 하는 눈치였다.
변신한 예수님의 모습은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유대의 조상 모세가 시나위 산에서 야훼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하산했을 때 그의 아내 십보라와 첫째 아들 게르솜 둘째 아들 엘리에셀이 크게 놀라며 당혹스러워 했다.
모세의 모습이 완전히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지적이고 근엄하며 당당한 얼굴은 마치 해탈(解脫)한 사람처럼 위엄이 서려 있었다.
대추처럼 붉게 변한 얼굴은 시나위 산으로 가기 직전의 모습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런데 지금 솥뚜껑 바위에 선 예수님의 얼굴 역시 모세처럼 그렇게 변해 있었다.
원래의 모습은 지적인 아름다움과 자애(慈愛)와 자비(慈悲)가 그득한 이목구비였다.
그런데 이것에 더해 진중함과 근엄함이 더욱 배가(倍加)되었 다.
하늘의 소리를 연결하는 전승자(傳承者)이사야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품이 없는 외모(外貌)로 묘사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묘사와는 달리 나사렛 예수님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절세(絶世)미남으로 알려진 다윗 대왕 만큼이나 수려(秀麗)한데다 이에 더해 위엄(威嚴)마저 서려 있었다.
신성(神性)이신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각 육신(肉身)속에 인성(人性)으로 계신 것이다.
예수님이 삼위일체라는 사실은 공생애(共生涯)첫 행보(行步)에서 밝혀졌다.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宣布)했다.
당초 요단강에 오신 예수님이 성령이란 사실을 몰랐던 세례 요한은 천상의 음성을 듣고 비로소 주님을 가리켜 ‘세상의 모든 죄를 홀로 짊어질 어린 양’이라고 고백했다.
훗날 십자가에 자신을 기꺼이 달리시며 세상의 모든 죄를 못 박으신 그분이 지금 눈이 부시도록 변신한 모습으로 두 팔을 뻗어 군중들에게 향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들으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순간, 이방인들 속에 몸을 감춘 바리새인들이 저마다 침을 뱉으며 길길이 날뛰었다.
“저 자가 신성을 모독한다’는 거였다.
과거 모세와 엘리야는 시나위 산에서 하나님을 영접하는 순간 불꽃이 이는 떨기나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나를 볼 수 없나니 나를 보는 순간 너는 죽을 것이되 너는 얼굴을 가려야 하느니라”
그러나 이 날 모세와 엘리야는 하나님의 현신(現身)인 예수님을 곁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
이 순간을 지켜보는 제자들도 모세와 엘리야의 환생(幻生)을 보고 비로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확고히 받아들였다.
모세는 율법으로 대변되는 선지자요, 엘리야는 특별히 부름 받은 예언의 사람이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이들 중심의 신적 계시자인 것을 드러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우유부단(優柔不斷)한 반석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세와 엘리야의 동급으로 착각해 초막 세 개를 짓겠다는 경솔한 발언을 내뱉았다.
이를 곁에서 엿들은 요한이 그의 무지함을 지적하며 예수님과 두 사람의 관계설정을 알아듣도록 설명해 주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초막 발언이 적절치 않았음을 자백하고 예수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솔직함도 보였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모세와 엘리야 이사야 에레미야 등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거룩함과 영광된 시간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변신에 놀란 군중들이 오랫동안 술렁이며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자 예수님이 무리를 향해 타이르듯 말씀 하셨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
이 말씀이 있자 군중들의 소요가 순식간에 가라 앉았다.
그러고는 침묵이 깔린 틈을 비집고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주님! 제가 어쩌다 운이 좋아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에서 눈독을 들이고 돈을 탐하는 자들이 있는데 어찌하면 좋을지요?”
질문의 목소리는 군중들이 모인 정 중앙 위치에서 들려왔다.
물론 그 질문은 변사의 중계에 실렸다.
예상치 않은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이 오른 팔을 앞으로 향하시며 말씀하셨다.
“너희 자신을 위하여 땅에다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녹이 해치며, 또 거기는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도둑질 하느니라. 그리함으로 오히려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하늘에다 보물을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녹이 해치지도 않으며, 또 거기는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예수님께서 모두가 알아듣게 말씀하시자 이번에는 여자들이 운집한 곳에서 비교적 젊은 여자가 보자기로 눈만 내민 채 말했다.
“주님.저는 때때로 상대를 볼 때마다 질투와 시기를 느낍니다. 그러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 하지만 저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니 어찌해야 하는지요?”
예수님이 목소리에 시선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여자야.몸의 빛은 눈이라. 그러므로 네 눈이 순진하면, 네 온몸이 빛으로 가득 찰 것이요, 만일 네 눈이 악하면 네 온몸도 어두움으로 가득 찰 것이라,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움이 되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에 5천 여 군중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빠져들었다.
막달라 마리아와 라헬의 통역을 귀담은 이방인들 역시 예수님의 심오한 말씀에 넋이 나간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방인 가운데 머리를 짧게 자르고 튜닉 복장을 한 헬라인 남자가 헬라어에 유창한 라헬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인간에게 있어서 율법과 계율도 중요합니다만, 그 못지 않게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衣食住)도 중요하지 않나요?”
사내의 질문을 귀담은 예수님이 라헬의 통역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말씀하셨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지 아니하냐? 공중에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앗을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 않으며,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먹이시나니,너희들이 새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또 어찌하여 너희는 의복에 대해서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라.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며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든 영광을 누릴 때의 솔로몬이 차려 입은 것도 이 들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리라.”
헬라인이 덧붙였다.
“선생님 그렇다면 제가 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두 팔을 활짝 펴고 허공을 향해 말씀하셨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이는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요,찾는 자는 찾을 것이요,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명한 사람과 같다 하리라.”
예수님이 여기까지 말씀하셨을 때였다.
이방인 틈에 섞여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할말을 잃고 부지런히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틈만 나면 시비거리에 혈안이 된 이들도 평생 처음 들어보는 말씀에 마냥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통역을 통해 말씀을 듣고 있는 이방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눈치였다.
물론 나머지 수천의 무리들 역시 말씀에 공감하며 큰 소리로아멘과 할렐루야를 연호(連呼)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지나치게 흥분하자 다시 두 팔을 허공에 내밀어 진정 시키셨다.
그러고는 역사적이요 기념비 적인 ‘하나님의 대헌장(大憲章)’인 첫번째 수훈(垂訓)을 선포하셨다.
신빈(神貧): “들으라.너희에게 이르노니 심령(心靈)이 가난하여 내게 이르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다.”
군중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선언이었다.
심령이 가난하면 자격이 주어져 신국민(神國民)될 수 있다니 무슨 뜻인가?
비록 지금까지는 죄인이었으나 산상수훈에 참여한 이 순간부터 나의 유죄(有罪)를 걷어내고 진리에 합당한 길을 택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정신적으로 늘 고통속에 놓여 있거나 또는 병들고 귀신들리고 기득권층으로부터 무시당해 삶의 가치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그리하여 무력감에 빠져 스스로를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기며 자포자기한, 더 이상 낮아질 레야 낮아질 수 없는 상처받은 영혼들, 그러므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픈 심정으로 영적 갈망을 소원(所願)하는 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와 율법학자와 기득권층은 ‘하나님 백성’으로 부적격인가?
아니다.
비록 때는 늦었으나 지금부터 라도 진실로 회개하고 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주어 진다.
예컨데, 아리마태 성주요, 산헤드린 공회 의원인 요셉과 같은 이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이들이다.
예수님의 첫번째 헌장이 선포되자 구릉지에 군중들 저마다 후끈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며 들뜨기 시작했다.
특히 한끼 먹을 양식도 없이 산상수훈에 참여한 기층민(基層民)과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들은 더욱 흥분했다.
이 순간부터 예수님에게 나의 죄를 낱낱이 자복(自服)하고 회개(悔改)하며 진실로 거듭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분명한 말씀 때문이었다.
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수군거렸다.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아온 이들에게 ‘말씀이 복음이 되어’ 자신들을 위로하자 난생 처음으로 삶의 희망을 본 것이다.
감격한 이들은 바위에 선 예수님을 향해 주님과 할렐루야를 복창했다.
이들 4천 여명의 무리들이 감격스런 감정을 통제 못하자 바위 아래 선 베드로가 이들을 향해 그만 진정하라고 소리쳤다.
무리들은 그제서야 격정적인 감정을 추스르고 예수님에게 시선을 주었다.
군중들이 진정하자 예수님의 헌장 선포가 이어졌다.
통곡(痛哭): “들으라. 애통(哀痛)해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 받을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저지른 수많은 죄로 괴로워하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그나마 양심이 살아있는 이는 덕망가(德望家)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위로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도 위로는 받을지 언정 죄사함이 될 수는 없었다.
진정으로 애통해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무릎을 끓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애통은,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죄로 괴로워 하며 끝내는 하나님께 자복과 용서를 구한 다윗왕의 고백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그는 갑자기 자신 존재의 우월감에 도취돼 살인과 음란(淫亂), 쾌락을 일삼았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疏遠)해 졌고 끝내는 깊은 슬픔과 고독속에서 방황했다.
하지만 다윗왕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범죄를 낱낱이 실토하며 용서를 구했고 끝내는 애통해 하는 그를 위로하시고 거두셨다.
환골탈태(換骨奪胎)한 그는 인류사의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하나님에게 바치는 헌사(獻詞)시(詩)’를 지어 애통함을 강조했다.
다윗왕의 애통함 처럼 우리도 우리가 지은 죄를 숨김없이 자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 끝내는 용서를 받고 위로를 받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에는 전재가 따른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 는.
양선(良善): “들으라. 온유(溫柔)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온유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성격이 착하고 부드러운 이를 뜻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다르다.
자신의 고정관념과 자아(自我)를 서슴없이 걷어내고 모든 역량(力量)을 하나님에게 집중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사역(使役)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이 땅에 전개될 완전한 나라의 주인이 돼 무한한 삶을 누린다.
결론적으로 온유는, 자신의 것을 모두 비우고 사무사(思無邪)한 상태로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정신이다.
의갈(義渴): “의(義)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는다.”
의는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하늘의 법’이다.
그 법(의)은, 모세가 시나위 산에서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이며 예수님이 가르치는 모든 말씀이다.
또 한 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피조물이었다.
그렇기에 의에 목말라 하며 그것을 갈망하고 추구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진실로 자신(의)을 회복하려는 이에게 성령 같은 상을 내리시고 엄청난 힘을 부여(附與)하신다.
애긍(哀矜): “긍휼(矜恤)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
긍휼은 히브리어(語)로 ‘헤세드’다.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사랑을 뜻한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 이다.
자신의 사람인 우리를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대하신 예수님은 때로는 제자들과 때로는 피부가 썩는 이와 때로는 귀신들린 이와 때로는 가엾은 과부와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하셨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부모와 형제와 이웃을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긍휼이 여길 때 하늘에서도 우리를 긍휼이 여기신다.
청심(淸心): “마음이 청결(淸心)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초대받은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될 기회가 주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우리를 향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말한다. 너희가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 나라에 들 수 없다. 너희는 토라를 읽거나 회당(會黨)에서 저잣거리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찾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지금부터 회개하고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 때 이방인들 틈에 섞여 있던 바리새인과 대제사장 보좌관이 입을 한데 모아 예수님에게 소리쳤다. ”라바이(선생님)! 마음을 다하고 청결케 하면 야훼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어떤 식으로 청결해야 하는거요?” 그들 곁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변사가 큰 소리로 전하자 예수님이 군중에게 시선을 주며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말한다. 진실로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며, 가난한 이웃과 동물과 자연을 내 몸같이 사랑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크게 기뻐하신다.”)
화목(和睦): “화평(和平)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일찍이 욥(의로운 사람의 대명사)은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平安)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권유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한 첫번째 화평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길, “너희들은 절대 분쟁(紛爭)하지 말라. 시비(是非)하지도 말고 송사(訟事)를 구하지도 말라”고 말씀 하셨다.
송사하는 자는 횟칠(회당)한 곳에 넘쳐나니 정죄 당하지 않으려면 절대로 남을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다.
“분쟁과 시비로 말미암아 네가 죄인이 될 것이요 낙인 찍힐 것.” 이라고 경고하셨다.
횟칠한 자들은 화평하는 이들을 시기하고 질투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들을 자녀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이들마다 하늘에서 큰 상이 주어질 것.” 이라는 기대를 안겨 주셨다.
모세의 하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반목(反目)하고 분쟁(紛爭)을 일삼자 다양한 벌(罰)로 다스리셨다.
그럼에도 우리는 화목(和睦)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성령께서는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우리의 무지(無知)함을 대속(代贖)케 하시고 화평을 주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불화하는 이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화평하라.”고 말씀하셨다.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도 화평하는 것이요, 심지어는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도 화평의 근간이었다.
유대인들의 인사인 ‘샬롬’은 화평의 친화력을 그대로 드러낸다.
예수님은 “화평하는 이는 그 누구라도 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고 강조 하셨다.
의해(義害): “나의 이름(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예수님의 반석(盤石)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제자였다.
주검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두려워 한 것은 비단 반석 뿐만이 아니었다.
대다수가 불안에 떨며 몸을 숨기고 멀리 달아났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復活)’을 목격하고 체감(體感)한 제자들은 놀랍도록 돌변했다.
진리(眞理)의 실존(實存)이 예수님인 것을 뒤늦게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움은 커녕 바리새인과 대제사장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라고 거리낌 없이 증빙(證憑)했다.
이들이 하루 아침에 환골탈태(換骨奪胎)한 것은 자신들을 가르친 주님의 말씀이 사실로 밝혀져서 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예루살렘의 모진 핍박과 고문(돌팔매)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성령이신 예수님’을 알리는 사역에 매진했다.
제자들은 훗날 사지(四肢)가 찟기는 참혹한 주검을 맞이했으나 오히려 ‘정신적 부활’을 기뻐하며 고통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아무리 곱씹어도 놀라운 변화였다.
어리석고 무식하고 단순하고 우유부단했던 이들이 예수님을 닮아간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예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나 조갑재 역시 고향인 신라국으로 돌아온 뒤 가족과 동료 친우들을 상대로 예수님을 포교(布敎)했다.
고향 사람은 물론 가족들도 이름도 생경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뿐만 아니라 ‘미친 놈’ 취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전도했으며 나의 말을 수긍(首肯)한 이웃과 그들의 이웃이 하나님을 받아들였다.
물론 신라인들이 기적처럼 하나님을 섬기게 된 배경에는 예수님께서 나를 도와 ‘일을 하셨기 때문’ 이라고 믿는다.
아무튼 내가 서양의 신(神)을 전도한다는 소문은 끝내 궁궐까지 닿았고 왕명으로 호출돼 어전(御殿)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왕에게 차분한 어조로 예수님의 실상과 그분의 가르침을 조리(條理)있게 설파(說破)했다.
귀신(鬼神)과 미신(迷信)을 숭앙(崇仰)하는 왕에게 ‘이 세상에 왕은 오직 단 한 분. 하나님’ 이라고 직언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노(大怒)하며 나를 어전(御殿)에서 내쫓고 가택구금을 명했다.
본가(本家)에 갇힌 채 1년여 동안 숨을 죽이며 틈틈이 기회를 노려 경주 전역에 노방전도(路坊傳道)에 주력했다.
그러고는 가택구금이 해제된 다음 해 부모형제와 작별하고 아내인 라헬과 아들 넷, 딸 2명과 함께 이스라엘로 향했다.
한편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직후 5천 여명의 군중들은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님! 저희는 예수님의 고귀한 말씀을 듣고도 정작 보답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 예수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헌데, 저희가 배운 것이 없어 무식한지라 기도문(文)마저 어찌해야 할지 모릅니다. 주님께 청하 오니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은 무리들이 뜻밖의 요구를 하자 연민의 시선을 보내시며 기도하는 자세와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뒤 “너희는 나를 따라 해라.” 하시며 선창(先唱)의 운(韻)을 떼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예수님의 기도가 울려 퍼지자 구릉지에 운집한 군중들이 한 목소리로 복창(復唱)했다.
복창의 울림은 하르타볼 산을 흔들게 할 정도로 엄청난 진동(震動)을 일으켰다.
예수님의 선창(先唱)을 따라 복창하는 무리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거나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휘저었다.
만약 무신론자(無神論)인 그대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분위기에 취해 단박에 예수님을 믿고 따랐을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행간 행간은 행복으로 충만한 거대한 울림이었다.
불경을 읊을 때 명치(가슴과 배가 만나는 경계선)끝으로 전달되는 짜릿한 환희와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가 하면, 무리들의 요구를 받으신 예수님의 목소리는 청아했다.
원래 우아한 중저음(重低音)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는 마치 현악기처럼 부드럽고 한편으론 강하게 울려 펴졌다.
주기도문은 인간이 미혹(迷惑)과 혼돈(混沌)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주님께 길을 안내해 달라는 염원(念願)이었다.
기도의 종지부(終止符)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끝맺음 했다.
주기도문을 마치신 예수님이 군중을 향해 말씀하셨다.
“너희가 진리를 깨달으면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 따라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 하신 예수님은 요한의 안내를 받으시고 바위 뒤편으로 가셨다.
동시에 베드로가 다시 바위 위에 올랐다.
그는 술렁이는 군중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예수님에게 치유(治癒)를 원하는 병자가 너무 많은 탓에 한번에 모두 다룰 수가 없소. 그러니 웬만큼 위독하지 않은 병자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소. 오늘은 불치병 병자 12명 만 나오시오.”
베드로가 외치자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병자들이 몸을 밀치며 솥뚜껑 바위를 향해 나오려 안간힘을 썼다.
상상을 초월한 수였다.
이들을 목격한 베드로는 손사래를 치며 간곡히 청했다.
“형제자매님들. 이러면 아무도 치유할 수 없소. 오늘은 12병자만 고칠 것인 즉 그리 알고 서로 양보 하시오.”
이렇게 말한 베드로는 즉시 바위에서 내려와 뒤 켠으로 사라졌다.
그러고는 휴식을 취하고 계신 예수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베드로의 전언을 귀담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마태, 야고보, 요한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고침의 권세를 불어넣어 주신 뒤 가서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순간, 제자들은 놀라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였으나 예수님이 ‘어서 가라’는 명령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병자들에게 다가갔다.
바위 앞에 모인 병자들은 12명을 초과한 50명으로 늘어났 다.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각각 절반씩이었다.
의사인 내가 관찰한 바, 여자들은 대체로 혈우병(血友病)환자 이거나 암(癌)환자 또는 하혈(下血)로 고통을 받는 병자들이었다.
남자들은 다리를 심하게 절거나 백내장으로 시력을 상실한 소경 그리고 뇌전증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병자들이었다.
남자들 가운데는 어린아이도 섞여 있었다.
아이는 손과 발 등 사지가 뒤틀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다양한 병명의 병자들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앞다투어 치유를 원했다.
특별히 눈에 뛰는 이도 보였다.
이방인들 가운데 페르시아 출신의 젊은 여자가 남자의 부축을 받고 바위 앞에 나선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유창한 페르시아어 통역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 남자는 나에게 ‘이 여자는 나의 아내다. 끊임없는 하혈로 오랫동안 고생해 왔다. 페르시아에서 소문난 명의(名醫)가 진찰을 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나사렛 예수가 병자를 고치고 귀신도 내 쫓는다는 무역상인의 귀띔을 듣고 이곳까지 왔다. 정말로 나사렛 예수가 ‘주님’이시라면 내 가련한 아내의 병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하고 확신하 듯 애처롭게 말했다.
남자의 애뜻한 바램에 감동한 것일까!
바위 뒤편에서 휴식을 취하시던 예수님이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오셨다.
그러고는 페르시아 여성을 다가오라 하시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셨다.
순간 구릉지의 모든 시선이 예수님을 향했다.
이방인들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바리새인과 그 밖의 첩자들도 예수님의 전개과정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에 손을 얹으신 예수님이 낮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의 고통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너를 괴롭히는 아픔은 없다. 가거든 오늘의 일을 널리 알려라.”
이상이었다.
헌데, 예수님의 고침 때문인가, 여자가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무리들은 ‘혹시 저 여자가 갑자기 미친 것일까?’하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여자는 미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쉴 틈 없이 쏟아졌던 하혈이 갑자기 멈추고 더 이상 증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예수님의 다리를 부여 잡고 통곡하며 ‘주님은 진실로 하나님이십니다’를 페르시아어로 읊조렸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녀가 부르짖는 말을 통역해 알려주었다.
여자의 남편 역시 감격에 겨워 무릎을 끓고 예수님을 향해 외쳤다.
“주님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이방인 여자를 오랜 고통속에서 해방시킨 예수님은 나머지 치유는 제자들에게 맡기고 등을 보이셨다.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차린 제자들은 저마다 병자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치유의 축사를 했다.
놀랍게도 사지가 뒤틀린 병자가 정상을 회복했으며, 백내장으로 실명한 소경도 앞이 보인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웠다.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도 요한이 축사하자 피와 고름으로 범벅이었던 얼굴과 몸의 피부가 모두 두터운 껍질로 덥히기 시작했다.
이처럼 놀라운 이적이 눈 앞에서 펼쳐지자 모든 장면을 놓칠 세라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군중들은 할말을 잃고 우왕좌왕을 거듭할 뿐이었다.
이방인들도 마냥 놀라움에 두려움마저 느끼며 예수님의 신비(神秘)스러운 성령(聖靈)에 감화(感化)된 분위기였다.
예루살렘에서 시비(是非)거리를 가지고 잠입한 바리새인과 첩자들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애꿎은 침만 삼킬 뿐이었다.
이제껏 소문으로 들어왔던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적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귀담고 목격한 이들은 충격과 불안에 휩쓸리며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행동을 엿본 제자들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혼 줄을 내려 했으나 냉정한 사고(思考)를 지닌 젤롯 혁명당원 시몬의 제지로 실제 행동에는 옮기지 않았다.
이날 산상수훈 현장에는 출산 일보직전의 임산부 6명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임산부 여섯 가운데 다섯은 불가촉천민 출신 유대인이었고 나머지 한명은 사마리아 출신이었다.
임산부들은 제자들이 마련한 솥뚜껑 바위 뒤에 설치한 임시 천막 막사로 옮겨졌다.
막사로 옮긴 임산부들이 동시에 산통(産痛)을 하자 나사로의 누이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 제자들이 이들 곁을 지키며 분만(分娩)을 도왔다.
의사인 나도 임산부 곁을 오가며 분만을 거둘었다.
임산부들은 대부분 짧은 진통을 겪다 이이를 출산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여섯 명의 아이는 남자가 셋 여아가 셋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때마다 소지한 날카로운 단도로 탯줄을 자르고 신생아의 건강을 살폈다.
다행이 아이들은 건강상의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아이들이 모두 출산하자 예수님이 산모들 곁으로 다가와 모두를 축복하셨다.
그러고는 남아들에게는 12제자들 이름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나의 이름을 붙이셨다.
여아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매와 마르다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
최초의 공식 세례명이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 물로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은 성령의 이름으로 신생아들에게 세례를 명(名)을 주셨다.
이들 산모 가운데 사마리아 출신 여성은 즉석에서 예수님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제자가 되겠다고 서원(誓願)했다.
하르타볼 산에서 펼쳐진 성령이신 예수님의 산상수훈 헌장 선포는 역사적 기념비(記念碑)가 됐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분명하게 부각(浮刻)시키는 현장으로 기록됐다.
모든 것을 낱낱이 목격한 이방인들도 떠나기 직전 저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가 될 것을 천명했다.
따라서 시나위 산의 위엄(威嚴)을 영광(榮光)으로 승화(昇華)시킨 하르타볼 산의 산상수 헌장은 우주만물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이어질 것이었다.(계속)
이산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