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그 허상 앞에
이월란(09/04/30)
내 스스로
시를 쓰는 건 병이라 했다
주검같은 싸늘한 이마 위에 입술을 찍듯, 백지 위에 활자를 찍어대는 건 병이라 했다
공방에 쳐진 하얀 휘장같은 종이 위에 피를 토하듯 마음을 토해놓는 건
그저 병이라 했다
차고도 넘치는, 상온에선 부패하기 쉬운 생각을 보관하기 위해 종일 온몸이 시려야하는
티끌만한 독설로도 치사량이 되어버리는 詩의 몸을 연명하기 위해
되려 詩의 몸을 파먹고 사는,
이젠 더 이상의 출혈도 없이 투명한 피가 흐르는 전신에 눈부신 옷을 입혀두고
공허한 끝말잇기 놀이에 지쳐 잠든 내 허상 앞에
검증받지 못할 면죄부의 기록으로 오늘도 투숙해버린
내 침묵의 날이여
오늘도 거저 왔다 거저 가는가
하여
환청같은 산울림 한 가닥마저 바람이 걷어가 버린 모랫벌 위에
상처를 새겨 두는 건 그저 병이라 했다
결코 닿지 않을 지평선을 향해
시리고도 푸른 사막의 파도를 짓는 건 분명 병이라 했다
감정의 포로가 되어
한 겹 한 겹 족쇄를 풀 듯 인연의 사슬을 마저 짓고마는
그런 병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