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동거 중
이월란(09/05/10)
새장같은 침묵의 아파트 입구, 홋수가 보이지 않아 계단입구마다 살피는데
그녀의 흔적이 나를 붙든다, 철제의자 등받이에 그려진 들꽃
그녀의 주소는 지상에 없는 저 들꽃의 숫자이다
아파트 문을 열자 거슴츠레하면서도 영민하게 쏘아보는 콜레트가
싹트고, 꽃피고, 날아다닌 것들을 모두 초월한 눈으로 이렇게 묻는다, 넌 대체 누구니
문을 닫으며 뒤돌아보면 굶주린 어린 영혼같은 들꽃
한 묶음을 손에 쥔 티베트소녀가 랏채의 하늘을 담은 두 눈을 깜빡이고 있다
커텐마저 삭제당한 발코니 옆에는
사람을 들이받기도, 물고기를 들이받기도, 나라 잃은 사람들을 싣고 떠나기도,
노을 앞에서 울부짖기도, 그러다 흰소가 되어 살다 간 이중섭이 어둠을 빚고 있고
그녀의 작업실에선 이작폴만이 비브라토의 안료를 흩날리고 있다
기억의 박물관처럼 낱낱이 베껴놓은 정지된 인물들이 나를 쳐다본다
비장한 생애가 압축되어 걸린 벽들은 저마다의 길이 뚫려 있다
D단조의 아다지오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무의식의 물감처럼 떨어지는 세월이 개여 부적처럼 걸려 있다
화보집 같은 작은 아파트 속에서
그녀의 현실은 오늘도 채색되어 농담 짙은 액틀에 끼워지고 있다
지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다는 그녀
아크릴의 추운 하늘 아래서만 따뜻해지는 그녀
싱글인 그녀는 늘 동거 중이었다
그녀 자신은 그녀가 마지막 작업 중인 미완의 그림이었다
* 여류화가 방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