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감옥
이월란(09/05/12)
나는 당신의 장시이고 싶습니다
운율이 맞지 않아도, 난해한 듯 난해하지 않은
읽어도 읽어도 끝나지 않는 장시이고 싶습니다
쉼표 없이도 지치지 않고
횡성수설 장황해도 권태롭지 않는
나는 당신의 장시이고 싶습니다
행간마다 생소한 강이 흐르고
자간마다 꽃들의 담론이 피고 져
시간이 끝나도 여운으로 살아있는
나는 당신의 장시이고 싶습니다
그림처럼 보여지고 소나타처럼 들려지며
꽃처럼 맡아지고 애완견처럼 만져지는
나는 당신의 장시이고 싶습니다
김서린 거울같은 당신의 가슴에 따뜻한
나의 손가락으로 글을 쓰면
글씨만큼의 길이와 넓이로 내가 비치기 시작합니다
첫눈처럼 돌아서는 뒷모습 아래
와르르 쏟아져내린 글자들은
빙판길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습니다
입술로만 잃혀지는 세상에 눈먼 죄로
결박당한 절박한 인연마다 수의를 입히고
비겁한 세월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말아
해 아래 수직으로 쓰여질 때도
별 아래 수평으로 쓰여질 때도
눈 먼 당신 앞에서 점자처럼 더듬어지는
나는 당신의 장시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비평이 시작되지 않도록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장시
출구 없는 길을 끝없이 걸어가면
가슴 속 길은
걸어도 걸어도 문이 없습니다
한 번 들어와버린 나는 결코 나갈 수 없습니다
중세의 가을이 뚝뚝 떨어져내리는 하늘 아래
당신은 나의 각운을 떼어 쌓아올린
빛나는 감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