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이월란(09/05/08)
때론 귀 없는 네게 열 마디, 백 마디의 말을 속삭이는 것은
서로의 목청이 되려 함이라
때론 입이 없는 네게 간 맞춘 유즙을 넣어 주는 것은
서로의 눈 앞에서 이제 막 눈뜬 신생아가 되려 함이라
해지면 돌아올 서로의 뒷모습을 가끔씩 돌아보는 것은
시간이 멈추었을 때조차 기억으로 남는 추상이 되려 함이라
세상이 시릴 때마다
냄새로 산란지를 찾아가는 눈맑은 연어처럼 서로의 체온 속에 알을 품는 것은
서로의 기원이 되려 함이라
원형반지같은 둥근 지붕 아래 내일이면 허물어질 둥지를 치는 것은
어둠의 칙령이 해치 못할 서로의 맹세가 되려 함이라
순간의 빛이 되어 서로의 몸을 수정처럼 통과하는 것은
서로의 광채가 되려 함이라
때론 빛의 칼처럼 서로의 가슴을 절단하기도 하는 것은
숨겨진 한 다발씩의 프리즘으로 살아있는 보석을 세공하는
서로의 장인이 되려 함이라
서로의 열망이 뒤엉켜 폭풍으로 몰아쳐올 때조차
잡은 손 놓치 못하는 것은 서로의 기념비를 세우는 빈터가 되려 함이라
서로의 자기장으로 목적지를 찾아가는 나비가 되려 함이라
여든여덟 개의 건반으로 두드려질 서로의 피아노가 되려 함이라
서로에게 다시 편집되길 원하는 오래 묵은 서적이 되려 함이라
서로의 창세기가 되려 함이라
바람도 쉬어가는 서로의 기슭을 따라 나란히 노을 아래 걸어가는 것은
서로의 내력이 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