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指紋)
이월란(09/10/11)
21년 전 구정이었겠다
태평양을 건너는 비자를 받아놓고, 티켓을 끊어 놓고
엄마는 말랑말랑 굳어가는 흰 떡가래 시루 앞에 나를 앉히며
떡을 썰으라 하셨다
내 어미 가슴 아래 웅크린 생애 마지막 명절이었다
이뿌게 썰거래이, 한석뽀이 엄마처럼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던 삶이 썰어내기 좋을만큼 굳어졌을 때를
엄마는 정확히 알고 계셨다
짓물러가는 가슴살을 현실의 날로 썰어내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계셨다
덜 굳었다면 떡살이 날을 물고 늘어질 것이며
너무 딱딱하다면 아무리 날선 칼도 돌처럼 굳은 기억을 깎아내진 못할 것이다
어쩐지 잘 썰린다 했다
잘려나가는 떡조각들은 생의 바다 한 가운데로
정처없이 버려지는 유년의 짧디 짧은 날들
똑깍똑깍 썰다 나는 왼손 검지 손톱 밑을 칼끝으로 찍고 말았다
가고나모 천날 만날 눈에 밟힐낀데 밟을거 모지라까바
살점까지 썰어놓고 가는기가
손가락을 싸매주시며 내 전신에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시던 손
지금도 남아 있는 반달모양으로 잘린 검지끝 지문이
내 가슴의 현주소를 묻는 지문감식대 앞에 설 때마다
잘린 기억의 강처럼 흐르다 잠시 멈춰
나를 식별해내는 몸끝 살갗의 무늬
지문보다 더 깊게 골진 칼자국에 일별을 던지는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