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기
이월란(10/03/28)
텅 빈 아침과 점심을 빈둥거리는 두 발로 굶긴 하루
지는 해를 업고 들어온 남편에게 저녁상을 바친 후
나도 세상이 고파왔다
길지 않았던 시집살이 동안 시어머닌 밥 한 톨을 버리지 못해
남은 찌개나 국에 국수를 삶아 드시곤 했었다
밥알을 헤아리기엔 해가 너무 기울었나
갑자기 그게 먹고 싶어져 엔젤헤어 국수를 삶아 남은 찌개랑 끓였다
배가 고파야 세상이 맛있다, 후루룩, 쩝쩝, 정신이 없는데
카우치에서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남편이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잘도 먹는구나, 네가 잘 먹음 난 행복해져
울 아부지 흉내를 내고 있다
학 두 마리 그려진 비단금침 아래 누워 계시던 울 아부지도 그랬었다
윗목에 쪼르르 앉아 사과를 먹으며 명화극장을 보고 있던 우리더러 그랬었다
어쩌면 그렇게 잘 씹어도시노, 잘도 먹어 제끼는구나
신이 난 어린 것들은 더 요란하게, 사탕처럼 사과를 깨물어 먹었었다
자식이 먹는 소리와 마누라가 먹는 소리가 화음을 이룬 세월
아기짓을 할 때마다 면박을 주며 내쳤었는데
흰머리가 자꾸만 많아지는 젊은 영감도 가끔은 엄마 품이 그리울까
이젠 나도 쭈글쭈글 휘감기는 엄마가 되어 주고 싶은 저녁
우린 착하게도, 나란히 늙어가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