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일이 순례의 길이라 하더니만 내 나라를 떠나온 것만도 가슴이 시린 일인데 삶의 터전을 또 옮겨왔다.
그래도 남보다는 한 자리에서 오래 사는 성격이라 이번의 이사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삿짐을 싸며 짐을 정리하다 보니 왜 그리 묵은 것들이 많은지? 서울을 떠나올 때 묵은 살림을 거의 버리고 홀가분하게 왔건만 그 사이 쓸데없는 것들이 참 많이도 늘었다. 필요한 것들 보다는 다만 버리기가 아까워 오랫동안 보관해 왔던 것들이 더 많다.
창고에서 나온 자주빛 샌들 한 켤례와 밤색 부츠를 만지작거리다가 멀쑥하게 키가 커버린 틴에이저 아들을 올려다 보았다.
"얘야! 이 부츠는 엄마가 너를 임신하고 있을 때 샀던 것이야. 일부러 굽이 낮은 걸로..... 그리고 이 샌들은 너를 갖기도 전에 엄마가 아주 신혼시절에 샀던 것이란다. 엄마가 옛날엔 강남 멋쟁이가 아니었겠니? 그러니까 이 샌들은 너보다도 나이를 더 먹었구나! "
무표정하게 내 얘기를 듣고있던 아들이 미국식 제스추어를 쓰며 하는 말은 "So what? "이 고작이다. 그것이 자기에게 무슨 의미를 갖느냐는 말인가 보다. 아니면 그 아이가 늘 말하듯 엄마는 너무 감상적이고, 작은 일에도 쓸데없이 많은 의미를 두려고 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그렇게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공연히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박스를 쌀 때 이곳의 날씨에는 필요가 없는 부츠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 부츠를 사던 새댁 시절의 기억이 같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져 왔다,
굽이 높은 자주빛 샌들은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박스에 넣어 이곳 새 집에까지 가져와 신발장에 넣어 놓았다. 결국 추억이나 기억을 절단해 버리는 것에는 몹시도 서투른 내 성격이 그 샌들에 담긴 세월을 그대로 새 집까지 옮겨온 셈이다.
새 삶의 공간은 기대했던 것보다 밝고 아늑하다. 창이 많은 이 집은 아침녁의 동쪽 햇살부터 한낮의 남쪽 햇살, 해질 무렵의 노을까지를 수용한다.
조용한 시간, 홀로 앉아있다보면 건너 집에 혼자 사는 미국 할머니의 기침소리가 외롭게 울려온다. 아직은 얼굴도 모르는, 다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헐리우드에서 분장사로 일하는 할머니라는 소문만 들은 이웃이다.
나는 이집에 살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그 할머니의 기침소리에 익숙해져야 했다. 사람들이 잠들기 시작하는 깊은 밤이 되면 왜 그런지 건너 집의 기침소리는 더 심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어둠에 누워 그 기침소리 속에 그녀의 늙은 얼굴을 마음대로 상상해 본다. 한때는 그녀에게도 젊음이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리라는 것도..... 그때는 그녀도 홀로가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아침이면 내 집 쪽으로 창이 뚫린 건너 집의 욕실에서 밤새 끓은 가래를 뱉어내는 그녀의 더 깊은 기침소리가 들려온다. 환한 햇살 속에 그녀가 가래침을 뱉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쉬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 시작되고 마모되는 삶의 아이러니에 눈물이 난다. 해말간 얼굴로 백팩을 메고 학교에 가는 늘씬한 내 아들의 시작되는 삶 곁에 건너 집 그녀의 마모되는 삶이 함께하는 것이다.
내 삶은 어디쯤 와 있을까? 아마도 이미 절반 이상은 허비해 버린 빈 털털이의 삶이 아닐까?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 속에서 건너 집 할머니의 기침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물이 찔끔 솟는다. 아니 어쩌면 아침 햇살만큼이나 눈이 부신 내 아이의 아름다운 젊음에 눈물이 솟았는지도 모른다.
여린 커피를 끓여 놓고 가만히 컴퓨터 앞에 앉아 프랑스 작가 로맹가리의 [벽]이란 꽁트를 떠올려 본다.
가난하고 외로운 한 대학생이 빈민가의 아파트에서 옆집에 사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처녀를 짝사랑하다가 고독에 못 이겨 자살한 이야기.....
그는 어느 날 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 처녀의 방에서 괴이한 신음 소리를 듣는다. 그녀의 신음과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를 들으며 쉽게 남녀의 추잡한 정사장면을 상상하던 그는 절망과 고독에 못 이겨 목을 매고 만다.
그러나 알고보니 그 처녀 역시 고독과 가난 때문에 독약을 먹고 숨이 끊어지기까지 침대에 누워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하나의 벽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태워보지도 못하고 고독 속에 각자 숨을 거두었다.
나는 건너 집 할머니의 기침소리 속에 로맹가리의 알싸한 고독을 되씹어 본다. 그리곤 혼자서 생각한다.
그래! 그때도 고독했다. 그 자주빛 샌들을 샀을 때도, 아들을 품고 그 부츠를 샀을 때도, 그리고 서울에 살 때도, 미국에 와서도...... 이제 내 아들이 저렇게 빛나는 청춘이 되었어도 나는 고독한 것이다.
새 집엔 묘하게도 햇빛처럼 밝은 환희와 도시적 잿빛 외로움이 어우러져 있다. 나는 이 내 삶의 새 공간 안에서 로맹가리의 작품처럼 알싸한 고독이 번지는 소설을 하나 써야겠다.
여기 새 집엔 빛남과 고독이 함께있고, 시작과 끝이 같이 있다. 그 교차점 쯤에 선 나의 삶, 이만하면 삶의 의지가 짙은 작품을 하나 써내기에 안성맞춤이 아닌가?
연하게 우려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문득 생각한다.
그래! 이 커피보다는 좀 진한 소설을 써야겠구나! 더 쓰고 더 향기로운....
새삼 내 삶의 공간이 사랑스럽다.
2000년 9월 LA KOREAN NEWS
그래도 남보다는 한 자리에서 오래 사는 성격이라 이번의 이사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삿짐을 싸며 짐을 정리하다 보니 왜 그리 묵은 것들이 많은지? 서울을 떠나올 때 묵은 살림을 거의 버리고 홀가분하게 왔건만 그 사이 쓸데없는 것들이 참 많이도 늘었다. 필요한 것들 보다는 다만 버리기가 아까워 오랫동안 보관해 왔던 것들이 더 많다.
창고에서 나온 자주빛 샌들 한 켤례와 밤색 부츠를 만지작거리다가 멀쑥하게 키가 커버린 틴에이저 아들을 올려다 보았다.
"얘야! 이 부츠는 엄마가 너를 임신하고 있을 때 샀던 것이야. 일부러 굽이 낮은 걸로..... 그리고 이 샌들은 너를 갖기도 전에 엄마가 아주 신혼시절에 샀던 것이란다. 엄마가 옛날엔 강남 멋쟁이가 아니었겠니? 그러니까 이 샌들은 너보다도 나이를 더 먹었구나! "
무표정하게 내 얘기를 듣고있던 아들이 미국식 제스추어를 쓰며 하는 말은 "So what? "이 고작이다. 그것이 자기에게 무슨 의미를 갖느냐는 말인가 보다. 아니면 그 아이가 늘 말하듯 엄마는 너무 감상적이고, 작은 일에도 쓸데없이 많은 의미를 두려고 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그렇게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공연히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박스를 쌀 때 이곳의 날씨에는 필요가 없는 부츠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 부츠를 사던 새댁 시절의 기억이 같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져 왔다,
굽이 높은 자주빛 샌들은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박스에 넣어 이곳 새 집에까지 가져와 신발장에 넣어 놓았다. 결국 추억이나 기억을 절단해 버리는 것에는 몹시도 서투른 내 성격이 그 샌들에 담긴 세월을 그대로 새 집까지 옮겨온 셈이다.
새 삶의 공간은 기대했던 것보다 밝고 아늑하다. 창이 많은 이 집은 아침녁의 동쪽 햇살부터 한낮의 남쪽 햇살, 해질 무렵의 노을까지를 수용한다.
조용한 시간, 홀로 앉아있다보면 건너 집에 혼자 사는 미국 할머니의 기침소리가 외롭게 울려온다. 아직은 얼굴도 모르는, 다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헐리우드에서 분장사로 일하는 할머니라는 소문만 들은 이웃이다.
나는 이집에 살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그 할머니의 기침소리에 익숙해져야 했다. 사람들이 잠들기 시작하는 깊은 밤이 되면 왜 그런지 건너 집의 기침소리는 더 심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어둠에 누워 그 기침소리 속에 그녀의 늙은 얼굴을 마음대로 상상해 본다. 한때는 그녀에게도 젊음이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리라는 것도..... 그때는 그녀도 홀로가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아침이면 내 집 쪽으로 창이 뚫린 건너 집의 욕실에서 밤새 끓은 가래를 뱉어내는 그녀의 더 깊은 기침소리가 들려온다. 환한 햇살 속에 그녀가 가래침을 뱉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쉬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 시작되고 마모되는 삶의 아이러니에 눈물이 난다. 해말간 얼굴로 백팩을 메고 학교에 가는 늘씬한 내 아들의 시작되는 삶 곁에 건너 집 그녀의 마모되는 삶이 함께하는 것이다.
내 삶은 어디쯤 와 있을까? 아마도 이미 절반 이상은 허비해 버린 빈 털털이의 삶이 아닐까?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 속에서 건너 집 할머니의 기침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물이 찔끔 솟는다. 아니 어쩌면 아침 햇살만큼이나 눈이 부신 내 아이의 아름다운 젊음에 눈물이 솟았는지도 모른다.
여린 커피를 끓여 놓고 가만히 컴퓨터 앞에 앉아 프랑스 작가 로맹가리의 [벽]이란 꽁트를 떠올려 본다.
가난하고 외로운 한 대학생이 빈민가의 아파트에서 옆집에 사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처녀를 짝사랑하다가 고독에 못 이겨 자살한 이야기.....
그는 어느 날 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 처녀의 방에서 괴이한 신음 소리를 듣는다. 그녀의 신음과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를 들으며 쉽게 남녀의 추잡한 정사장면을 상상하던 그는 절망과 고독에 못 이겨 목을 매고 만다.
그러나 알고보니 그 처녀 역시 고독과 가난 때문에 독약을 먹고 숨이 끊어지기까지 침대에 누워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하나의 벽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태워보지도 못하고 고독 속에 각자 숨을 거두었다.
나는 건너 집 할머니의 기침소리 속에 로맹가리의 알싸한 고독을 되씹어 본다. 그리곤 혼자서 생각한다.
그래! 그때도 고독했다. 그 자주빛 샌들을 샀을 때도, 아들을 품고 그 부츠를 샀을 때도, 그리고 서울에 살 때도, 미국에 와서도...... 이제 내 아들이 저렇게 빛나는 청춘이 되었어도 나는 고독한 것이다.
새 집엔 묘하게도 햇빛처럼 밝은 환희와 도시적 잿빛 외로움이 어우러져 있다. 나는 이 내 삶의 새 공간 안에서 로맹가리의 작품처럼 알싸한 고독이 번지는 소설을 하나 써야겠다.
여기 새 집엔 빛남과 고독이 함께있고, 시작과 끝이 같이 있다. 그 교차점 쯤에 선 나의 삶, 이만하면 삶의 의지가 짙은 작품을 하나 써내기에 안성맞춤이 아닌가?
연하게 우려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문득 생각한다.
그래! 이 커피보다는 좀 진한 소설을 써야겠구나! 더 쓰고 더 향기로운....
새삼 내 삶의 공간이 사랑스럽다.
2000년 9월 LA KOREAN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