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6.15 06:25

시냇가의 세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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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가슴 안엔 누구나 흐름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 문명의 발상지가 다 강가이고 보면 물과 인간은 실생활 면에서 친숙할 수밖에 없는 관계인가 보다. 그러나 먹고사는 실질적인 생활을 떠나서도 물의 흐름은 사람의 기억 안에 많은 정서적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고향집 근처를 흘러가던 시냇물에 대한 기억은 내 성장기의 정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같다.

고향의 시냇물을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친구 두 사람이 떠오른다. 그 시냇가 옆에 살던 K는 경찰서장의 지프차를 운전하던 말단 순경의 딸이었다.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하거나 동생들을 돌보곤 하던 K가 여름날 시냇가에서 빨래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사회 선생님의 딸인 M은 시냇가와 큰길을 잇는 골목길에 살았다. 그리고 나는 그 골목 끝에 있는 큰길가에 살았다.

셋이서 어우러져 땡볕 아래 냇물 속을 허우적거리던 추억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우리 셋이서 친해졌던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였던 것 같다. 똑같이 공부를 잘 했던 우리 사이엔 친하게 지내는 만큼 언제나 라이벌 의식이 팽팽했다. 같이 숙제를 하다가도 서로의 답이 맞다고 우기며 어느 땐 치열한 육박전까지 불사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쳤을 때 맨 먼저 내가 고향을 떠났다. 그 시절엔 지금 조기 미국유학이 유행하듯 조기 서울유학이 유행했던 까닭이다. 고향에서 초등학교까지 마친 M은 인근 대도시의 중학교로 진학했다. 결국 K만 고향에 남게 되었지만 우리는 방학 때마다 만나 서로의 키를 재며 성장하는 몸과 마음과 그리고 우정을 확인했다.

고향의 학교에서 수석을 지키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K는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취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M은 일찍이 신앙에 귀의하더니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신학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리고 M은 내가 대학 2학년이 되던 해 봄 클라스메이트와 결혼하여 개척교회를 열었다. 이듬해 겨울에는 K도 결혼을 했다.

일찍 아이엄마가 되어버린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없던 나는 차츰 그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가슴속에 늘 흐르고 있는 시냇물의 기억처럼 두 친구는 내 유년의 추억 속에 함께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나도 결혼하여 내 나름대로의 삶을 끙끙 앓던 어느 날, 나는 인천 어느 교회의 사모님이 되어있던 M을 찾아갔다. 흙바닥의 교회와 초라한 목사관, 결코 넉넉해 보이지 않는 삶이었지만 친구의 얼굴은 환하기만 했다. 얼른 인근에 살고 있다는 K는 불러들여 우리는 어린 시절처럼 끼득대며 시간 가는 줄을 몰라 했다. 옛친구란 헤어져 있던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결코 시들지 않는 우정을 지닌 그런 사이였다.

그 얼마 뒤 나는 미국으로 왔고, 태평양 건너의 거리 때문인지 우리는 다시 소식이 뜸하게 되었다. 잘 있겠거니 하며 한번 한국에 가게 되면 두 친구를 꼭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마도 한국의 IMF시대가 시작될 즈음이었을 게다. M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M의 가족도 어려운 경제를 못 이겨 미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해주는 소식은 K의 죽음이었다. 자신이 대학에 가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되었던 K는 딸아이를 극성으로 공부시켜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시켜놓고 자신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M의 미국 이주가 반갑기에 앞서 K의 죽음은 나를 슬픈 충격 속에 몰아넣었다.

"우리 셋은 왜 이리 팔자가 세니? 그 시냇가 고향 땅이 터가 세던가. 같은 시기에 같은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셋 중 하나는 젊어 죽고, 너랑 나랑은 멀기도 먼 미국까지 왔구나.“

울먹이는 내 목소리에 M은 오랫동안 사목자 부인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게. 우린 어릴 때부터 남달리 도가 넘치는 부분이 있었어. 그 넘침 때문에 나는 목사사모가 되어 온갖 고생을 다 했고, 너도 결국 너를 못 이겨 글을 쓰는 구나. 하지만 K는 그 넘치는 부분을 어떻게 할 수 없어 죽고 말았나 봐. 사는 게 다 이런 건 줄을 안다만 우리도 앞날을 모르니 서로 볼 수 있을 때 보고 살자.”

쉽게 만날 줄 알았지만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와 LA의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또 몇 년을 보냈다. 그런데 얼마 전 M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다음 달에 사목자 회의가 있어 LA에 온다는 것이다. 십 수 년만에  옛친구를 만날 일에 내 가슴은 벌써부터 설레고 있다. 그러나 시냇가의 세 아이 중 K는 어디 갔는가. 고향의 시냇물은 아직도 쉬임없이 흐르고 있을텐데........ 우리를 키워준 그 시냇물 소리는 오늘도 내 가슴을 아프게 흘러간다.  -미주한국일보 2001년 5월 29일자-



(이 글을 썼던 2001년 당시 M과 나는 결국 만나지 못했다.
더 시간이 지난 2002년 늦가을 내가 문학행사를 따라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서야 우리는 만날 수 있었고,
2003년 1월 M이 LA에 왔을 때 잠시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지난 주말 M은 홀연히 내 집을 찾아와 이틀 밤을 머물고 갔다.
지천명에 이른 서로의 늙어가는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는 끊임이 없었고
반가움과 우정과 그러나 뭔지 모를 슬픔에 가슴 아려했다.
30년도 넘는 세월 만에 밤을 지새며 이어졌던 우정.......
그런데 왜 마음이 아픈 걸까.
친구를 보낸 뒤 허전함에 이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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