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6.20 03:08

이제야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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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노인은 정확하게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근 50년간 지켜온 기상 시간이 땅을 옮겨왔다고 해서 변할 리 없다. 정년퇴직을 하고 서울 거리를 할 일 없이 돌아다니던 그때도 그는 새벽 6시가 되면 눈이 떠져 긴 하루를 보내곤 했다. 생각하니 두 해 전 세상을 떠난 아내와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은 감지덕지한 세월이었다.

어찌 그리 명이 짧단 말인고. 평생을 초등학교 교장의 박봉으로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왔던  아내는, 이제 남은 인생을 여행이나 하며 살자고 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버렸다. 한 번도 살이라곤 올라 본 적 없이 바싹 마르기만 했던 아내가 고혈압이었다니……. 그게 될 법이나 한 말인가. 자식이라고 달랑 하나 있는 아들은 처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버리고, 사실 아무도 아내의 건강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웬만해서는 잘 앓아눕지도 않던 그녀에게 정기 건강검진이라도 받게 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터라 김  노인은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남들은 그렇게 혈압으로 쓰러지면 족히 몇 년은 앓아누워 남은 식구들 진을 다 빼고 나서 죽는다는데……. 아내는 무심하게도 그날로 세상을 떠버렸다.

정년퇴임을 한지 5년, 김 노인의 나이 70세였다. 하는 수 없이 아들이 사는 미국 땅으로 들어온 것이 벌써 6개월째이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것은 보고 싶던 손자 놈들과 함께 살 아들 집이 아니라 한인 타운 중심가에 있는 원룸의 노인 아파트였다.

"아이들이 한국 말을 잘 못해 아버님도 불편하실 거고요. 또 저도 직장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빈집에 계시는 것보다는 여기가 나으실 것 같아서요. 비슷한 또래의 노인 분들도 계시니 친구도 삼으시고요. 그 대신 주말엔 꼭 저희 집에 오셔서 지내세요. 밑반찬은  제가 늘 만들어다 드리겠습니다.”
  
당당한 며느리의 말 앞에 멀뚱멀뚱 딴 곳만 바라보고 앉았던 아들의 얼굴엔 그래도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 노인은 서울의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정리하지 않고 온 게 다행이다 싶었다. 이왕에 이렇게 된 것, 한 1년만 채우고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혼자 살 바에는 그래도 내 나라 땅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는 벌써 6시 10분으로 기울고 있는 시계 바늘을 바라보며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면 그 수다스런 정 여사가 새벽기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다 그렇고 그런 한국 노인들이 모여 사는 이 아파트에서, 말하자면 김 노인은 할머니들에게 인기 최고의 할아버지였다. 원래 젊어서부터 몸 관리를 잘 해 온 탓도 있지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굽은 곳 없이 반듯한 허리의 옷맵시가 젊은이 못지않은 그였다. 거기에다 오랫동안 교단에 서 왔던 그에게선 은은한 지식인의 분위기가 풍겼고, 아직은 캘리포니아의 따가운 햇볕에 덜 그을은 그의 흰 피부는 귀족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또 서울에 얼마간의 재산이라도 갖고 있다는 게 암암리에 소문이 나고 보니 이 노인 아파트에서 그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십중팔구는 나라에서 나오는 연금에 의존해 사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김 노인의 존재는 독신 할머니들에게 마치 백마 탄 기사나 다름없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김 노인에게 접근해 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정 여사였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서울에선 무슨 보석상을 했었다던가. IMF 때 다 털어먹고 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왔다는데, 그녀는 매일 일을 나가는 며느리 대신 살림하는 것이 싫어 스스로 노인 아파트로 나왔다고 했다. 듣기에 김 노인보다 두서너 살 아래라고 들었지만 피둥피둥한 살집에 짙은 화장을 한 모습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보석상을 했었다는 게 헛소문이 아닌 듯 그녀의 손가락엔 늘 눈깔사탕만 한 보석 반지가 색색으로 끼워져 있었다. 언뜻 보면 이 요정 저 요정으로 굴러먹은 유한마담 출신인 것도 같았다. 그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교태를 머금는 자태가 때때로 눈에 거슬리는 김 노인이었다.

“아이쿠! 꼴에 저 나이를 먹어서도 여자라고? 어림도 없다! 내가 저 따위 천한 몸치장을 하는 할망구에게 넘어갈 성이나 싶으냐?”

시도 때도 없이 찌개냄비를 들고 오거나 빨래를 해 주겠다고 덤벼드는 정 여사를 대할 때마다 김 노인은 골백번도 더 그 말을 되씹었다. 거기에다 웬 놈의 향수는 그리 뿌려대는지 그녀가 다가올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들꽃 향기 같은 체취에 김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천한 여편네 같으니라구. 다 늙은 것이 어디서 암내를 풍긴담!”

그녀의 요염한 표정 앞에 입속말을 우물우물 삼킬 때마다 그는 세상을 떠난 아내를 생각했다. 평생 화장품 냄새라고는 피워본 적이 없는 아내였다. 아내 옆에 가면 간장 냄새 같기도 하고 마늘 냄새 같기도 한 체취가 늘 풍겨왔다. 그 냄새가 싫었다면 어떻게 평생을 살았을까. 그는 아내의 체취를 맡을 때면 그저 소르르 졸음이 밀려왔다. 평생 마른 체질이었던 아내의 몸은 아무리 정겹게 안아보아도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기만 했다. 어떻게 저 여자와 아이를 만들어 낳았던가 싶게 김 노인이 자신이 남성임을 잊은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어머니처럼 편안함을 주는 그런 여자였다.

"죽은 내 마누라가 얼마나 음전한 여자였는데……. 선생 마누라로는 제격이었지. 그런데 어디서 저 천한 것이 내 앞에 교태를 부린단 말 인고…….”

살이 찐 엉덩이를 실룩대며 정 여사가 돌아가고 난 후면 김 노인은 깊은 신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한껏 휘젓고 돌아간 김 노인의 집엔 정 여사의 향수 냄새가 둥둥 떠다녔다. 그럴 때마다 그는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곤 했다.

노인 아파트에서 김 노인과 정 여사 사이를 두고 수근 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였지만 어느 주말 불쑥 며느리가 꺼내는 말에는 기가 막혀왔다.

“아버님! 여기 사시는 노인 분들 말씀이 아버님이 어떤 분과 친하게 지내신다고 하던데요. 사실은 그래서 저희가 좀 알아보았습니만 그분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돌아가신 어머님과는 너무나 달라서……. 이제 연세도 연만하신데 이왕에 사귀시려면 좀 점잖으신 분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시애비를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내가 그런 여편네를 거들떠볼 성이나 싶으냐?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라. 내 곧 서울로 돌아갈 계획이니까.”

며느리의 말을 잘라버린 건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간다는 말에 며느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것이 홀로 살 시아버지를 걱정해서가 아니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머지않아 서울의 남은 재산을 정리해 가져오라고 할 참인데 돌아가겠다니 난처한 모양이었다. 저희들 딴엔 그 돈을 가져다 아들 가게도 넓히고, 집도 좀 더 나은 동네로 옮겨 보려는 심산이 있다는 걸 짐작했던 김 노인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주말이면 꼭 김 노인을 자기 집으로 모셔가던 아들부부는 한 달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생각하면 괘씸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김 노인은 쓸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토록 밉살스런 정 여사가 살찐 몸을 흔들어대며 나타날 게 기다려질 지경이었다.

김 노인은 한 번도 믿음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어쩐 일인지 일요일만 되면 우르르 교회로 몰려갔다. 거기에다 새벽 5시가 되면 노인 아파트의 단짝 할머니들은 새벽기도라는 것을 갔다. 그들이 몰려나가는 새벽이면 김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뜨고 가만히 정 여사의 발걸음 소리를 헤아려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6시 30분 정확하게 김 노인의 집을 방문하는 정 여사의 벨소리를 기다렸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외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식 아침을 준비한다며 커피를 끓이고 베이컨을 굽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몇 번이고 곱씹었다.

“어림도 없지. 대쪽 같이 살아온 내 꼿꼿한 인생에 어떻게 저런 여자를 받아들인단 말인고. 어서 서울로 돌아가야지. 이게 다 외로움 때문이라고.”


김 노인은 욕실에서 면도를 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아침햇살 속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이상하게도 화색이 돌고 있었다. 갑자기 정 여사의 들꽃 향기 같은 체취가 어디선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묵지근해 져왔다. 그는 그만 전기면도기를 떨어뜨린 채 얼른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감쌌다.  


“내가 주책이지. 이 나이에…….”

그는 혼자 얼굴이 붉어져 중얼거렸다. 세면기 속에 떨어뜨린 면도기를 도로 집어 올리며 그는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욕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시계를 보니 어느새 6시 30분이 가까웠다. 그는 서둘러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도 반듯하게 정리를 해놓고 창문을 열어 산뜻한 아침공기도 들어오게 했다. 그러나 정 여사가 오는 기척이 없었다. 시계바늘은 어느새 7시가 넘어 있었다.

그때 누군가 헐레벌떡 복도를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김 노인 집 도어 벨이 급히 울렸다. 그는 필경 정 여사이지 싶어 일부러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정 여사가 아닌 그녀의 단짝 최 여사였다.

“김 선생님! 큰일 났어요! 글쎄! 정 여사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다 길에서 쓰러졌어요. 평소에 혈압 약 먹는 것을 보았는데 아무래도 고혈압인 것 같아요. 지금 막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갔는데 저는 이리로 달려왔어요. 그래도 김 선생님한테 먼저 알려야 할 것 같아서요. 병원으로 가보시겠어요?”

그녀는 오이지처럼 조글조글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김 노인은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 왔다. 그는 더듬더듬 벽에 걸어놓은 열쇠를 찾아 들었다.

“어느 병원입니까? 어서 가십시다.”

그의 침착한 목소리에 호들갑을 떨던 최 여사가 머뭇댔다.

“예? 그런데 김 선생님 신발은 신으셔야지요!”

벌써 현관문 밖에 선 자신이 맨발임을 그때야 깨달은 김 노인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구두를 발을 꿰었다. 식탁 위엔 엊저녁 정 여사가 깎아다 놓은 과일 접시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 여사! 제발 오늘 이 길로만 떠나지 말아주오. 남들은 혈압으로 쓰러져 십 년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데……. 제발…….  

최 여사의 종종걸음을 따라 병원으로 향하는 김 노인의 물기어린 눈가로 무심한 아침햇살이 하얗게 쏟아졌다.
                              (미주 문학세계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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