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6.23 02:54

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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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3시, 미셸은 기지개를 켜며 책상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환한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로 다가가 낡은 하늘빛 커튼을 제쳤다. 그리고 그녀의 눈길은 습관처럼 아래층의 분수대 근처로 비스듬히 내리꽂혔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분수대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물줄기가 솟구쳤던 것이 언제인지도 모를 만큼 낡고 메마른 폐쇄된 분수대였다. 그녀는 이 가난한 소시민의 거리에 무엇 때문에 그 분수대가 만들어졌던지 가끔 생각해 볼 때가 있었다.  
   미셸은 햇빛이 내리쬐는 분수대 난간에 오늘도 어김없이 나와 앉은 미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하얀 레이스 뜨개질 감을 가지고 나와 고요하게 분수대 난간에 앉아있다. 자그맣고 홀쭉한 몸매로 보면 언뜻 젊은 처녀 같지만, 그 조용한 앉음새나 수심이 깊은 표정은 여러 번 삶의 아픔을 거쳐온 3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그녀가 언제나 오후 3시가 되면 그곳에 나와 한 시간정도 앉아있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 였는지  미셸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두 달쯤 전 그녀는 책상에 앉아 일을 하다가 피로감에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던 적이 있었다. 드르륵- 하고 그녀의 낡은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고 짧은 미소를 짓던 미미는 화장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에 햇살을 가득 받고 있었다. 그 때 미셸은 미미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사실 멀리서 보기에도 미미는 결코 미인의 얼굴이 아니었지만 그날 미셸의 마음 속에 그녀는 아름다운 여자라고 새겨졌다. 그날은 햇빛과 미미의 슬픈 미소가 잘 어우러져 있던 아름다운 오후였다.
  그날 이후 미셸은 오후 3시가 되면 책상에서 일어나, 창문을 통해 분수대를 내려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녀의 이름이 미미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미셸이 분수대의 그녀를 내려다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큰 한 남자가 미미를 찾아왔다. 분수대에 앉은 그녀를 발견한 남자가 성큼성큼 긴 다리로 걸어오자 미미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 도망가기 시작했다. 여자를 쫒아가는 남자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울려왔다.
  “미미! 미미! 잠깐만 있어! 미미! ”
  그러나 그녀는 미로처럼 뒤엉킨 좁은 골목 사이로 사라져버렸고, 남자는 허탈한 듯 서 있다가 그녀가 앉았던 분수대 근처에 걸터 앉았다. 그는 미미의 초라한 옷차림과는 어울리지않을만큼 최신 유행의 새 양복을 입은 멋쟁이였다. 거기에다 짐작하기에 미미보다는 나이가 훨씬 젊어 보였다.  미셸은 잠깐 동안 미미와 그 남자의 사이를 멋대로 상상해 보았다. 아마 이루어지지 못할 연인관계이거나 미미를 일방적으로 쫒아다니는 돈많은 얼간이일거라고...... 그러나 그 남자가 분수대 근처에 나타나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고, 미셸은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 미미는 오후 3시가 되면 언제나 혼자였으며 손에는 레이스 뜨개질감이 들려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뜨개질 하는 것을  미셸은 본적이 없었다. 언제나 미미의 손은 뜨개질감을 들고 멈춰진 채 그녀의 눈길은 어딘가 알 수 없는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꽃무늬가 어른거리는 긴 스커트에 베이지빛 셔츠를 입고, 아이보리색 털실로 짜여진 숄을 어깨에 두른 미미의 한결같은 모습은 날마다 미셸의 오후와 함께 있었다.
  미셸은 햇빛 속에 앉은 미미를 바라볼 때마다 적당히 초라하고 빛이 바랜 자신의 삶을 떠올렸다. 그녀는 한 두 번은 사랑에 빠져 혼미해진 정신 속에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 몇 번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시간을 함께 보낸 남자들도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들이 제공하는 돈과 명예와 섹스가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미셸은 자유롭다. 용감하게 그들을 박차고 나와 박한 보수일망정 프랑스말로 된 동화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이따금 커피가 떨어질 정도로 곤란한 지경에 이르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영혼은 한없이 맑아만 졌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분수대에 앉은 미미를 바라보는 시간이 되면 그녀는 알 수 없는 평화를 느꼈다. 미셸은 생각했다. 만약 저 분수가에 앉은 사람이 미미가 아니라 언젠가 미미를 찾아왔던 멋쟁이 남자였다면 자신은 이렇게 평화롭지가 못하리라는 것을...... 그 남자는 2층 창가에 선 미셸에게 자주 미소를 보낼테고, 그들은 머지않아 같이 차를 마시고, 와인이 곁들여진 식탁에 앉아 취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곧 사랑한다고 믿는 관계에 빠져버릴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허우적대다 그들은 꿈을 깰테고, 서로를 미워하고 저주하며 돌아설 것이다.
미셸은 같은 여성인 미미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편안했다. 그녀의 가난이 점점 편안해 오듯이....... 미셸은 자신의 번역일과 가난과 오후 3시의 미미를 사랑했다.            
  그렇게 미미를 바라본지 벌써 서너 달쯤 지난 어느 날 미셸은 여행을 떠났다. 번역료로 받은 돈이 얼마간 모이자 한동안 잊었던 고향엘 다녀오고 싶었다. 새벽기차를 타기 위해 어두운 길을 걸어나가던 미셸은 좁은 골목에서 짙은 술 냄새를 풍기는 한 여자와 부딪쳤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붉은 비단드레스가 몸에 딱 달라 붙어있는 그녀의 굴곡진 몸매는 몹시 고혹적이었다. 검은 수술이 달린 붉은 모자를 얼굴 깊숙히 눌러쓴 그녀의 핏빛 립스틱이 한 순간 시야를 스쳤을 뿐 미셸은 무심히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이 초라한 골목에서 그렇게 화려한 여자라면 필경 밤일을 하는 여자일 것이 분명했다.
  두 주가 지나 미셸은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새벽기차를 탔기 때문에 그녀가 도착한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다. 피곤함에 아침 내내 잠이 들어버렸던 그녀는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시계바늘은 어느새 3시 50분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창가로 다가갔다. 꼭 3시에서 4시까지 해바라기를 하는 미미가 아직 분수대에 앉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낡은 분수대의 난간엔 아무도 없었다. 그 뒤 미셸은 날마다 오후 3시가 되면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다시는 미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미셸은 자신의 가난한 생활 속에 겨우 자리잡은 평화가 서서히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날마다 초조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햇빛 속에 텅빈 잿빛 분수대..... 미셸의 얼굴은 점점 초췌해져 갔다.
  그녀는 오후 3시가 되면 아예 분수대 근처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미미가 연출했던 조금은 슬픈 평화를 찾아서...... 그녀는 전에 미미가 했던 것처럼 오후 3시가 되면 폐허가 된 분수대 난간에 앉아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했다. 어느 날 그녀가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분수대에서 일어섰을 때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미! 미미! ”
  언뜻 고개를 드니 전에 미미를 찾아왔던 멋쟁이 남자가 저만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미셸을 미미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미미의 소식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미! 미미! 거기 서 있어! 가지마! 미미! ”
  그가 긴 다리로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멀리서 보기에 멋쟁이로 보였던 그의 모습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상한 느낌을 풍겼다. 최신 유행의 고급양복은 때가 꼬죄죄 했고 낭만적으로 보이던 그의 곱슬머리는 뒤엉킨 채 허연 비듬이 떨어져 내렸다. 거기다가 멀리서는 슬프게만 보이던 그의 눈빛은 게게 풀어진 것이 그녀의 가슴을 섬찟하게 만들었다. 그가 막 그녀에게로 더러운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길가 집의 노파가 마침 구정물을 버리려고 양동이를 들고 나왔다. 노파는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대뜸 구정물을 사내에게 끼얹으며 욕지거리를 했다.
  “아니 이 미친놈이 또 왔네! 저리 가지 못해? 도대체 미미가 누구라고 가끔 나타나서 불러대는 거야? ”
  구정물 세례를 받은 사내는 입 속에 들어간 더러운 물을 퉤퉤 뱉어내며 뒷걸음질 치더니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양동이에 남은 구정물을 길가에 쏟아버린 노파가 막 돌아서려 할 때 미셸은 다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저- 전에 매일 여기 나와 앉아있던 여자의 이름이 미미가 아니던가요? "
  노파는 무슨 소리냐는 듯 미셸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어디로 갔죠? 항상 오후 3시가 되면 여기 나와 있던 여자 말이에요. ”
  “그건 색시 당신 아니야? ”
  “아니 저 말고 전에 나와있던 여자요.”
  잠시 생각해 보는 듯 노파가 잿빛 눈알을 굴렸다.
  “아! 그 술집여자? 죽었어! 술 먹고 새벽에 들어오다가 교통사고로 사지가 찢겨져 죽었대.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어. 날마다 여기 나와 앉아있던 것은 술독 때문에 몸이 죄다 망가져서 햇빛이라도 쏘여야 한다고 의사가 그랬다나 봐. 이 골목 인생들이 그렇지 뭐. ”
  노파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빈 양동이를 흔들며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미셸은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난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도 멀리서 보아야 아름다울 뿐 가까이 가면 증오와 질투가 뒤엉켜 있듯, 아름다운 가난도 환상이었던 것일까?
   미미! 미미! 그녀는 작게 읊조려 보았다. 그녀의 외로움과 가난을 한동안 견디게 했던 이름...... 미셸은 자신이 더 이상 이 생활을 견딜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천천히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귓가로 전화벨 소리가 작게 울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필경 얼마전부터 치근대는 그 돈 많는 놈팽이 일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미셸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곤 가파른 층계를 두 계단 씩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미주문학세계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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