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7.14 07:19

체리 향기 옆에서

조회 수 872 추천 수 47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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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벌건 노을이 주변을 물들였다. 상석 앞에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자 마주 보이는 산이 불그늘에 잠긴 듯 아슴해 보였다. 아이는 언제부턴가 묘지를 내려가는 대리석 돌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내게는 철부지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애는 어느새 서른다섯 살이다. 내가 자신의 엉덩이가 걸쳐진 바로 뒤 계단에 서 있는 것도 모른 채 그 애는 연신 담배필터를 빨고 연기를 뱉어냈다. 그 모습은 마치 무엇엔가 걸신 든 사람처럼 보였다.
하긴 왜 안 그렇겠는가. 저 나이에 벌써 두 번의 이혼이라니……. 나도 모르게 혀가 끌끌 차지는 소리에 그 애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언니! 이제 그만 가야지.”
그 애는 무안한 듯 얼른 담배를 발밑 대리석 위에 던지고 발로 부벼 껐다. 어떻게 그런 신발을 신고 산길을 올라왔는지 그 애의 맨발엔 굽이 뾰족한 붉은 샌들이 걸쳐져 있었다. 물이 바랜 청바지에 꼭 끼는 빈약한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 선 그 애는 마치 소풍을 마치고 가듯 가벼운 걸음으로 산 중턱을 내려갔다. 너만 사내아이로 태어났어도……. 나는 그 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열 살을 갓 넘겼을 때였나. 아들을 낳지 못한 어머니는 동네 청상과부를 아버지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깟 가난한 여편네쯤이야 밭떼기나 좀 사주면 되지 뭐. 그 멀쩡한 허우대에 실한 아들이나 하나 낳아주면 감지덕지지. 어머니는 그녀를 아버지 방에 들여보낸 날 밤 건넌방에 나와 나란히 누워 그렇게 중얼거렸다. 슬며시 돌아눕는 어머니의 눈가에 번진 눈물이 창으로 스며든 달빛에 반짝이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어머니 생각처럼 여자의 뱃속에 아이는 쉽게 들어서지 않았고, 아버지와 그 여자 사이에 흐르는 묘한 정감 가운데서 어머니는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그렇게 일 년을 기다렸던가.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그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밤이 더 많아졌던 즈음, 여자는 입덧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여자 사이에 흐르던 그 묘한 기운을 헤집고 들어가 당당히 그들을 갈라놓았다. 아무 소리 못하고 자신의 오막살이로 돌아가 혼자 배를 불리던 여자는 아버지의 눈 속에 타는 듯한 그리움이 간신히 가라앉을 무렵에야 딸을 낳았다.
하루 종일 턱을 괴고 앉았던 어머니는 공연히 방 안을 서성이는 아버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할 수 없소! 그렇다고 더는 시앗 자식을 볼 수도 없으니 그 핏덩이는 데려다 내가 기르고 그 여자한테는 돈이나 좀 줘서 이 동네 뜨게 합시다! 나중에 이 아이한테 호주상속 시키면 될 것 아니오. 데릴사위 말이외다. 어머니는 돌아앉아 숙제를 하고 있는 나를 턱으로 가리켰다.
갓 태어난 아이는 그날로 내게로 와 동생이 되었고 그 애 엄마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내가 혼기에 이르러 이씨 집안 상속자인 내게 일생을 바쳐줄 부모님의 데릴사위를 고르고 있을 무렵, 한창 사춘기에 이른 아이는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아이는 교복을 입은 채 술에 취해 들어와 단발머리를 흔들며 악을 썼고, 때론 며칠씩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그런대로 싹싹한 한 청년을 이씨 집안 희생물로 지목하고 혼사를 서두르고 있을 무렵, 아이는 아예 짐을 싸 가출해 버렸다. 내가 고분고분 삶을 잘 살아가는 동안 최씨 아버지에게서 씨를 받아 태어난 내 아이들은 이 아무개란 이름으로 내 아버지의 호적에 오르고, 가출을 했던 이복동생은 웬 건달을 하나 데리고 나타나 결혼을 시켜달라고 했다. 송씨 건달에게 시집을 간 동생은 송씨 아이를 하나 낳았다. 잠시 무덤덤한 세월이 흐르던 동안 아버지는 얼마간의 재산과 호적을 내게 상속하고 세상을 떠났다.
거기 뒤로는 나지막한 산세가 있고, 앞이 툭 트여 멀리 마주 보이는 산의 기상이 고고한 곳에 내 묘자리를 사 두었다. 거기 묻어다오. 아버지의 유언대로 도시와 고향 읍내의 중간쯤 되는 지점, 높지도 낮지도 않은 구릉에 산소를 마련했다. 과연 뒤에 받쳐진 산도 아늑했고, 맞은편 멀리 골이 깊은 산에선 우람한 정기가 흘러나오는 듯한 명당이었다. 주변엔 드문드문 산지기 집 몇 채가 있을 뿐 여름이면 들풀이 우거져 산을 오르는 길조차 찾기 어렵도록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이복동생이 송씨 건달과 때론 메치고 엎어 치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 나의 최씨 남편은 장인이 물려준 재산을 어쭙잖은 사업으로 다 날려버렸다. 아내의 집안에 성씨를 묻어버렸던 그는 다른 남자의 두 배만큼 가장의 권위를 내세웠다. 재산권마저 내가 휘두르는 것은 그를 더 처참하게 만드는 것 같아 돈을 다 내주었더니 거덜 내고 만 것이다.
머리를 싸매고 누운 어머니를 이복동생에게 맡기고 서둘러 바다 건너로 탈출했던 삶이 벌써 10년, 그나마 우리나라에서는 최씨 성으로 자신의 이름이 남아있던 남편은 미국에 건너가면서 세대주인 내 성을 따라 이씨가 되었다. 남편은 때론 너무 의기소침했지만 그 반대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사나와지기도 했다. 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는 뻔 한일이었다. 쥐뿔도 없는 시골부자 집안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야! 호적에 네 아버지 이름자가 묻어 내 아이들에게 상속되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본국에선 호주제 폐지를 검토한다더라. 술에 취한 남편은 허망한 듯 클클 웃어댔다.

“언니 우리 저기 아래서 뭐 시원한 거라도 한잔 마시고 가자.”
이복동생은 벌건 노을 속에 가녀린 몸을 흔들며 산길을 걷다가 휙 나를 돌아보았다. 그 애가 돌아봄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부모님 산소를 바라보았다. 노을마저 비켜간 동그란 봉분 두 개가 엷은 어둠 속으로 막 잠겨들고 있었다.
“그러렴. 근데 아예 조금 있다 저녁을 먹지 그러니?”
대답대신 그 애가 킥킥 웃는 소리를 냈다.
“나 약속 있어.”
그 애는 혼자 말처럼 중얼대며 노을 속을 느적느적 걸었다.
산 아래는 몰라보도록 변해 있었다. 식당과 편의점이 들어서고, 조금 안쪽 숲에 싸인 곳엔 몇 채인가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서 있었다. 그 애는 편의점 앞 비치파라솔 밑에 털썩 주저앉으며 또 담배를 빼어 물었다.
“언니! 콜라나 하나 씩 사와.”
그 애는 밤색 바둑판무늬의 손바닥 만 한 명품 핸드백을 열더니 만 원권 한 장을 꺼냈다.
내가 떠난 얼마 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시골집을 지키던 이복동생은 송씨 남편과 갈라섰다고 했다. 이혼사유는 그나마 하나 남은 이씨 집안의 재산인 시골집을 통째로 먹으려는 그 남자가 괘씸해서였단다. 그 뒤 그 애는 또 한 번 결혼 했었지만 혼인신고도 하기 전에 헤어져버렸다고 했다. 지금 이복동생은 송씨에게서 낳은 아들과 함께 시골집을 지키며 산다. 부모님 산소를 번듯하게 돌보아 놓은 것도 사실 그 애의 공이었다.
콜라 캔 두 개를 사들고 오니, 그 애는 어느새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뾰족한 샌들 뒷굽으로 막 부벼 끄던 참이었다. 주변은 어느새 어둠이 들어차고 편의점 유리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우리가 앉은 파라솔 주변을 아슴푸레 비췄다.
“얘야! 그런데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니? 송 서방이 네게 떼어준 것도 없다면서……. 시골집 아래채 월세 받는 것 갖고는 어림도 없을 텐데…….”
그 애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콜라 캔의 뚜껑을 잡아당겼다. 픽-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압축되었던 탄산수 거품이 열린 뚜껑께로 몽골몽골 솟아오르자 그 애는 얼른 입술을 갖다 댔다. 하얀 알루미늄 캔 위에 그 애의 립스틱이 검붉게 묻어났다.
“언니는 사는 게 괜찮아? 그 많은 돈 다 날리고 미국 가더니 그래 괜찮은 거냐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그 애의 유달리 검은 눈에 물기가 스쳤다. 흐릿한 기억 속에, 눈이 검던 그 애의 생모가 언뜻 떠올랐다.
“나 곧 미국 시민권 딸까 해. 그러면 호적이 말소 되는데……. 너라도 아버지 호적을 이어받을 수 없을까?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시던 일이었으니……. 사실 그 얘기 하려고 왔어.”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애는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웃느라 그 애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손에 들린 콜라 캔에서 꿀럭꿀럭 갈색의 탄산수가 넘쳐났다. 가까스로 웃음을 그친 그 애는 입에 머금은 콜라까지 뱉어내고야 말을 했다.
“언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우리 아버지는 저기 체리 향기 옆에 누워계시는데…….
저길 보란 말야. 아버지 산소 근처…….”
나는 그 애가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이제 짙어진 어둠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아버지의 산소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 가까이에 불빛을 훤히 밝힌 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어둡기 전까지만 해도 별로 눈에 띄지 않던 곳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처럼 온통 건물 테두리에 꼬마전구를 밝혀 놓은 게 꼭 아라비안나이트의 궁전처럼 보였다. 꼭대기 근처에 세로로 걸린 커다란 간판엔 ‘체리 향기’라는 붉은 글씨가 네온을 번쩍이고 있었다.
“뭐하는 곳인데?”
의아해 하는 내게 그 애는 다시 피식 웃음을 날렸다.
“러브호텔!”
“뭐?”
“이 주변을 봐. 저 숲 속 깊숙이 들어앉은 건물들이 뭐 하는 곳인가를…….”
과연 그 말대로 좀 전에 정체를 알 수 없던 건물들은 어느새 번쩍번쩍 불을 켠 채 유혹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고? 그런 사람이 있어. 나와 가끔 만나고 용돈도 주는……. 난 그 돈으로 일꾼을 사서 아버지 산소에 벌초를 한단 말야. 알아? 하지만 그냥 사랑이라고 믿어줘.”
나는 갑자기 아연해졌다. 할 말을 잃은 내게 그 애는 다시 퍼붓듯 말했다.
“고려시대에 책을 남긴 학자? 조선시대 전후기를 합쳐 두 분의 성리학자와 실학자? 그 대단한 선조의 자손인 여주이씨 집안이라……. 아버지가 입이 닳도록 말하셨지. 하지만 말야. 지금 우리 아버지는 저기 ‘체리 향기’ 옆에 누워계신다고……. 체리 향기!”
그 애는 캔에 남은 콜라를 마저 마시더니 벌떡 일어섰다.
“나 가야해. 저기로…….”
그 애는 재빨리 ‘체리 향기’를 향해 난 샛길로 들어서더니 총총히 걸어가 버렸다. 나도 모르게 그 애를 따라 일어섰다. 어둠에 잠겨 보이지도 않는 아버지의 봉분과 눈이 부신 ‘체리 향기’의 불빛 사이에서 나는 그 애의 체온이 남은 콜라 캔을 손에 쥐고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 애의 입술 자국이 찍힌 알루미늄 캔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내렸다.

                                                 (국회보 200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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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 2005.07.14 07:49
    루치나님, 안녕하시죠...!
    표시된 시간으로 봐서, 조금 전에
    글을 입력하셨나 봐요, 쪼매~ 궁금했걸랑요.
    혹...'불무장등'이란 시집을 받으셨는지요?
    앞의 주소로 지난 달에 보낸 것 같은데...
    하여튼 뜬금없이 루치나님 생각나 몇자 남깁니다.
    히유~~~ 긴 장마...!
    언젠가는 빵끗한 햇님 뵐날이....

  • ?
    박경숙 2005.07.14 08:25
    제가 시집 잘 받고 감사의 카드 보냈는데
    아직 못받으셨나요?
    그 사서함 주소로요.
    저도 뭔가 글씨로 보내고 싶어 일부러 이메일 안드렸는데.....
    안나님 글씨가 너무 예술적이었어요~
  • ?
    안나 2005.07.17 08:17
    그랬군요. 오늘 사서함 열어 볼께요~!
    요즘 공무원들 토요일(16일) 휴무제라...헛걸음했걸랑요.
    주말을 여성회 수련회에 다녀 왔더니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진 듯 합니다.
    아이들, 젊은이들과 함께 한 프로그램이
    무척 즐거웠고 새삼~ 나이를 깨닫게^^...!
    카드 궁금하네요, 그럼 나중에 또~
  • ?
    안나 2005.07.18 08:36
    뜻하지 않은 시간에,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어제 저녁엔 요즘 열중하고 있는
    영상편집 교육 중에 산동우회 아우의
    부친상 비보를 듣고
    삼천포를 다녀 왔지요.
    예순 넷에 간암으로 가셨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더군요.
    돌아오는 길에 일찍 가신 부모님 생각나기도...
    제 글씨가 예술이라면 루치나님의 글씨는
    너무나 인간적이라고나 할까, 후후~!
    역시 정감이 갑니다.
    정말 부산에서 뵐 수가 있을까요.
    기대해 볼까요, 그럼 건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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