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 벌써 세 시간째……. 아내와 같이 살아온 25년의 세월동안 이토록 초조하게 아내를 기다려본 적은 없다. 그녀와 살아온 세월이 25년이라고는 하지만 서로를 알게 된 것으로 치자면 아마 40년이 넘을 것이다.
변변한 장난감도 없던 시절, 촌 동네에서 아이들의 놀이라곤 종이로 접은 딱지치기나 막대기를 깎아 만든 자치기 놀이가 고작이던 때가 있었다. 당시 여남은 살이나 되었을까했던 아내는, 그러니까 그 촌 동네의 한 계집아이는 꼭 사내아이들 틈새에서 억세게도 딱지를 치고, 자치기 막대를 휘두르던 선머스마였다. 큰길가에선 계집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지만 그 애는 아랑곳없이 사내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악을 쓰며 온 동네 딱지를 다 따먹고 우리를 울상 짓게 만들곤 했다.
딱지치기나 자치기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다. 가끔 우리는 나무칼을 들고 동네 뒷산에서 전쟁놀이를 하였는데, 그 선머스마는 그 때도 빠지지 않고 사내아이들 틈에 끼어들었다. 하긴 뜀박질을 하는 것이나 소리를 질러대는 게 여느 사내아이들보다 더 빠르고 용감해서 그 애가 빠지면 전쟁놀이가 재미없어지기도 했다. 하루라도 우리가 노는 길목이나 뒷산에 그 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지레 궁금하여 그 애네 싸리문 앞을 어정대며 힐끔거렸다.
그 애는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얌전하게 치마를 차려입은 적이 없었다. 위 아래로 남자 형제들뿐인 그 애의 옷차림은 언제나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런 모습이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입다 물려준 무릎이 헐어빠진 바지에다, 어떻게 그 촌구석까지 굴러 들어온 구호물자쯤으로 보이는 길이가 짧은 스웨터는 그 애가 나무칼을 휘두르느라 팔을 치켜 올릴 때마다 허리의 마른 살을 드러나게 하곤 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보낸 겨울 동안 동네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유난히도 키가 부쩍 자라났다. 나도 단벌뿐인 바지 길이가 껑충 올라간 채 발목의 복사뼈가 드러날 만큼 키가 자랐다. 포근해지는 날씨에 개울의 얼음이 녹아내려 썰매타기나 팽이를 지치는 일도 시들해졌던 우리는 전쟁놀이를 할 양으로 뒷산으로 몰려갔다. 누군가 선머스마의 이름을 들추었고, 한 아이가 그 애를 부르러 산을 내려갔다. 잠시 후에 달려온 선머스마는 겨울 사이 한자나 자란 키에 제 오빠가 새로 물려준 듯한 낡은 남자교복 바지를 둥둥 걷어 입고, 이제는 허리춤이 통째로 드러나는 구호물자 스웨터의 짧은 허리를 감추느라 제 어미의 꾀죄죄한 여닫이 스웨터를 어색하게 걸쳐 입고 있었다.
우리는 곧 편을 가르고 전쟁놀이를 시작했다. 대부분 다른 편이 되어 앙숙처럼 싸워대던 선머스마와 나는 그날의 편 가르기에서 웬일인지 같은 편이 되었다. 우리는 이마를 맞대어 작전을 짜고 곧 공격을 개시했다. 만만치 않게 달려드는 적군을 향해 용감히 나무칼을 휘두르는 내 옆에서 잽싸게 몸을 움직이는 선머스마의 꾀죄죄한 겉 스웨터 자락이 펄렁거렸다. 내 공격에 뒤로 밀리다 자빠진 적군으로부터 무기를 압수하고 막 몸을 돌리는데, 팔꿈치 끝으로 무엇인가 물컹-하는 것이 닿아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내 뒤에는 얼굴이 홍당무 빛이 된 선머스마가 나무칼을 든 채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어깨로 반쯤 벗겨져 내린 제 어미의 겉 스웨터 속에 터질 듯 몸에 달라붙은 구호물자 스웨터 위로 그 애의 봉긋한 가슴이 내 팔꿈치에 짓눌려있었다. 순간 그 애는 나무칼을 집어던지며 스웨터의 앞섶을 재빠르게 여미더니 바람처럼 산을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전쟁놀이에 나타나지 않았다. 딱지치기나 자치기에도 물론이었다.
그 해 봄 나는 그 애가 치마 입은 것을 처음 보았다. 진 감색의 교복을 입고 발목엔 하얀 양말을 얌전하게 걷어 신은 그 애는 개나리가 노랗게 핀 이장 집 울타리 곁을 지나다 나와 맞닥뜨렸지만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나도 물론 검은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쓴 채 어색한 걸음을 떼며 그 애를 외면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모른 체하며 어른이 되어갔다. 그럭저럭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근교 소도시에 취직이 되었던 내게 중매가 들어왔다. 알고 보니 어린 시절의 그 선머스마가 참한 처녀로 성장했다며 중매쟁이를 자청한 이장 집 아주머니에 의해 나는 동네 다방으로 불려나갔다. 허름한 다방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아리따운 처녀가 옛날의 그 선머스마라고는 상상되지 않을 만큼 그녀는 예쁘고 얌전했다. 앞단추가 단정히 여며진 분홍빛 블라우스 속에 탐스럽게 솟은 그녀의 가슴을 나는 몰래 훔쳐보았다.
우리는 단박에 결혼을 하고 내 직장 근처에 살림을 차렸다. 물론 나는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도 부드러운 아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매일 밤 잠이 들었다. 실로 아내의 가슴은 내게 신비요, 아름다움이었으며, 나의 휴식이었다.
그리고 첫 아이가 태어났다. 신비롭기만 하던 아내의 가슴은 유선이 팽창되고 흉하게 부풀어 올랐다. 갓난아이가 잠이 들어 젖먹일 시간을 지나치게 되면 아내는 부푼 가슴을 붙들고 아파했다. 그녀는 서슴없이 내 앞에 가슴을 드러내 놓고 사발에 뿌연 젖을 짜내기 시작했다. 유선이 울퉁불퉁 불거진 커다란 가슴과 그 가운데에 꺼멓게 돌출한 유두……. 아내의 가슴은 내게 더 이상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둘째 아이, 셋째아이가 태어나자 아내의 거침없음은 더해졌다. 세 아이를 젖 먹여 기르는 동안 아내의 가슴은 쌀자루처럼 늘어져 버렸다. 어쩌다 삼복더위의 외출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아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웃통을 벗어 던졌다. 그리곤 여배우의 얼굴이 인쇄된 부채를 찾아다 쌀자루처럼 늘어진 가슴을 치켜들고 그 밑에 고인 땀을 닦아대며 맹렬히 부채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아내의 가슴은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신비가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박봉으로 꾸려온 내 삶의 찌들음이요. 고달픔이었다. 나는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 한가한 시간이면 직장근처 찻집에 앉아 젊은 종업원 아가씨의 허벅지나 가슴을 흘끔거렸다. 때로는 월급을 축내 술을 마시고 외박도 했다. 당연히 아내는 옛날의 선머스마 기질을 동원해 나를 윽박질러왔다. 그 중에 아이들이 자라가고 아내는 내 박봉을 참을 수 없어하다 보험 외판원으로 취직을 했다. 아내가 밤바다 쪼그리고 앉아 주판을 퉁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귀가는 더 늦어졌고, 장대처럼 키가 자란 아이들이 손을 내미는 액수는 커져만 갔다. 생활의 짐을 떠맡은 아내의 어깨가 점점 찌그러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검은 기미가 내려앉은 어두운 얼굴로 수술실로 실려 들어갔다. 회사의 정기 건강 검진에서 오른쪽 유방에 암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한쪽 유방을 절단한 채 병원을 나왔다. 그 후 아내는 부쩍 우울해 졌지만 몸이 회복되자 아침이면 어김없이 채권 쟁이 같은 가방을 챙겨들고 보험회사로 출근을 했다. 방사선 치료로 부쩍 숱이 적어진 머리로 말이다. 물론 한쪽이 비어버린 아내의 브래지어 속엔 솜뭉치가 들어 있었다.
집에 돌아온 저녁이면 그 가방을 현관에 팽개쳐 둔 채 설거지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아내는 한숨을 쉬며 쓰러지듯 자리에 누워버렸다. 어느 날 생각 없이 돌아누운 내 등으로 아내의 등이 맞닿아 왔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등을 돌리고 누웠던가. 나는 그녀와 내 등 사이로 흐르는 서늘한 기운을 참을 수 없어하다 슬며시 몸을 돌려 그녀를 껴안았다. 내 팔 안에 갇힌 아내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아내의 가슴을 무심코 더듬다 한쪽이 떨어져 나간 가슴자리에 손이 닿자 나도 모르게 섬뜩 몸이 떨려왔다. 그러나 나보다 더 놀란 것은 그녀였다. 아내는 기어이 끄윽-끄윽- 울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때때로 그렇게 울던 아내는 이제 남은 왼쪽 유방에 마저 암이 돋쳐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녀를 기다린 지 벌써 3시간을 지나 네 시간이 되어간다. 나는 복도 의자에 쪼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켜 수술실 앞을 서성여 본다. 곧 아내는 침대에 실린 채 저 문을 나올 것이다. 남은 한쪽마저 떼어낸 그녀의 가슴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있겠지. 이제는 황량한 벌판처럼 평평해져 버렸을 아내의 가슴……. 그러나 아내여! 제발 살아 있어만 다오! 그렇게 벌판 같아진 가슴에 살을 도려낸 흉터를 남기고라도 내 앞에 있어만 다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어차피 당신의 가슴이 평평했던 시절, 이제부터는 그날로 돌아간 듯 동무처럼 살자꾸나.
수술실을 바라보고 선 내 눈 안으로 눈물이 고여 왔다. 나는 민숭해졌을 그녀의 가슴속 더 깊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싶어졌다. 이제는 아내의 가슴이 내 삶의 깊은 참회인 것처럼…….(*)
미주문학세계 1999년
변변한 장난감도 없던 시절, 촌 동네에서 아이들의 놀이라곤 종이로 접은 딱지치기나 막대기를 깎아 만든 자치기 놀이가 고작이던 때가 있었다. 당시 여남은 살이나 되었을까했던 아내는, 그러니까 그 촌 동네의 한 계집아이는 꼭 사내아이들 틈새에서 억세게도 딱지를 치고, 자치기 막대를 휘두르던 선머스마였다. 큰길가에선 계집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지만 그 애는 아랑곳없이 사내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악을 쓰며 온 동네 딱지를 다 따먹고 우리를 울상 짓게 만들곤 했다.
딱지치기나 자치기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다. 가끔 우리는 나무칼을 들고 동네 뒷산에서 전쟁놀이를 하였는데, 그 선머스마는 그 때도 빠지지 않고 사내아이들 틈에 끼어들었다. 하긴 뜀박질을 하는 것이나 소리를 질러대는 게 여느 사내아이들보다 더 빠르고 용감해서 그 애가 빠지면 전쟁놀이가 재미없어지기도 했다. 하루라도 우리가 노는 길목이나 뒷산에 그 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지레 궁금하여 그 애네 싸리문 앞을 어정대며 힐끔거렸다.
그 애는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얌전하게 치마를 차려입은 적이 없었다. 위 아래로 남자 형제들뿐인 그 애의 옷차림은 언제나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런 모습이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입다 물려준 무릎이 헐어빠진 바지에다, 어떻게 그 촌구석까지 굴러 들어온 구호물자쯤으로 보이는 길이가 짧은 스웨터는 그 애가 나무칼을 휘두르느라 팔을 치켜 올릴 때마다 허리의 마른 살을 드러나게 하곤 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보낸 겨울 동안 동네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유난히도 키가 부쩍 자라났다. 나도 단벌뿐인 바지 길이가 껑충 올라간 채 발목의 복사뼈가 드러날 만큼 키가 자랐다. 포근해지는 날씨에 개울의 얼음이 녹아내려 썰매타기나 팽이를 지치는 일도 시들해졌던 우리는 전쟁놀이를 할 양으로 뒷산으로 몰려갔다. 누군가 선머스마의 이름을 들추었고, 한 아이가 그 애를 부르러 산을 내려갔다. 잠시 후에 달려온 선머스마는 겨울 사이 한자나 자란 키에 제 오빠가 새로 물려준 듯한 낡은 남자교복 바지를 둥둥 걷어 입고, 이제는 허리춤이 통째로 드러나는 구호물자 스웨터의 짧은 허리를 감추느라 제 어미의 꾀죄죄한 여닫이 스웨터를 어색하게 걸쳐 입고 있었다.
우리는 곧 편을 가르고 전쟁놀이를 시작했다. 대부분 다른 편이 되어 앙숙처럼 싸워대던 선머스마와 나는 그날의 편 가르기에서 웬일인지 같은 편이 되었다. 우리는 이마를 맞대어 작전을 짜고 곧 공격을 개시했다. 만만치 않게 달려드는 적군을 향해 용감히 나무칼을 휘두르는 내 옆에서 잽싸게 몸을 움직이는 선머스마의 꾀죄죄한 겉 스웨터 자락이 펄렁거렸다. 내 공격에 뒤로 밀리다 자빠진 적군으로부터 무기를 압수하고 막 몸을 돌리는데, 팔꿈치 끝으로 무엇인가 물컹-하는 것이 닿아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내 뒤에는 얼굴이 홍당무 빛이 된 선머스마가 나무칼을 든 채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어깨로 반쯤 벗겨져 내린 제 어미의 겉 스웨터 속에 터질 듯 몸에 달라붙은 구호물자 스웨터 위로 그 애의 봉긋한 가슴이 내 팔꿈치에 짓눌려있었다. 순간 그 애는 나무칼을 집어던지며 스웨터의 앞섶을 재빠르게 여미더니 바람처럼 산을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전쟁놀이에 나타나지 않았다. 딱지치기나 자치기에도 물론이었다.
그 해 봄 나는 그 애가 치마 입은 것을 처음 보았다. 진 감색의 교복을 입고 발목엔 하얀 양말을 얌전하게 걷어 신은 그 애는 개나리가 노랗게 핀 이장 집 울타리 곁을 지나다 나와 맞닥뜨렸지만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나도 물론 검은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쓴 채 어색한 걸음을 떼며 그 애를 외면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모른 체하며 어른이 되어갔다. 그럭저럭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근교 소도시에 취직이 되었던 내게 중매가 들어왔다. 알고 보니 어린 시절의 그 선머스마가 참한 처녀로 성장했다며 중매쟁이를 자청한 이장 집 아주머니에 의해 나는 동네 다방으로 불려나갔다. 허름한 다방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아리따운 처녀가 옛날의 그 선머스마라고는 상상되지 않을 만큼 그녀는 예쁘고 얌전했다. 앞단추가 단정히 여며진 분홍빛 블라우스 속에 탐스럽게 솟은 그녀의 가슴을 나는 몰래 훔쳐보았다.
우리는 단박에 결혼을 하고 내 직장 근처에 살림을 차렸다. 물론 나는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도 부드러운 아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매일 밤 잠이 들었다. 실로 아내의 가슴은 내게 신비요, 아름다움이었으며, 나의 휴식이었다.
그리고 첫 아이가 태어났다. 신비롭기만 하던 아내의 가슴은 유선이 팽창되고 흉하게 부풀어 올랐다. 갓난아이가 잠이 들어 젖먹일 시간을 지나치게 되면 아내는 부푼 가슴을 붙들고 아파했다. 그녀는 서슴없이 내 앞에 가슴을 드러내 놓고 사발에 뿌연 젖을 짜내기 시작했다. 유선이 울퉁불퉁 불거진 커다란 가슴과 그 가운데에 꺼멓게 돌출한 유두……. 아내의 가슴은 내게 더 이상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둘째 아이, 셋째아이가 태어나자 아내의 거침없음은 더해졌다. 세 아이를 젖 먹여 기르는 동안 아내의 가슴은 쌀자루처럼 늘어져 버렸다. 어쩌다 삼복더위의 외출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아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웃통을 벗어 던졌다. 그리곤 여배우의 얼굴이 인쇄된 부채를 찾아다 쌀자루처럼 늘어진 가슴을 치켜들고 그 밑에 고인 땀을 닦아대며 맹렬히 부채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아내의 가슴은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신비가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박봉으로 꾸려온 내 삶의 찌들음이요. 고달픔이었다. 나는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 한가한 시간이면 직장근처 찻집에 앉아 젊은 종업원 아가씨의 허벅지나 가슴을 흘끔거렸다. 때로는 월급을 축내 술을 마시고 외박도 했다. 당연히 아내는 옛날의 선머스마 기질을 동원해 나를 윽박질러왔다. 그 중에 아이들이 자라가고 아내는 내 박봉을 참을 수 없어하다 보험 외판원으로 취직을 했다. 아내가 밤바다 쪼그리고 앉아 주판을 퉁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귀가는 더 늦어졌고, 장대처럼 키가 자란 아이들이 손을 내미는 액수는 커져만 갔다. 생활의 짐을 떠맡은 아내의 어깨가 점점 찌그러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검은 기미가 내려앉은 어두운 얼굴로 수술실로 실려 들어갔다. 회사의 정기 건강 검진에서 오른쪽 유방에 암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한쪽 유방을 절단한 채 병원을 나왔다. 그 후 아내는 부쩍 우울해 졌지만 몸이 회복되자 아침이면 어김없이 채권 쟁이 같은 가방을 챙겨들고 보험회사로 출근을 했다. 방사선 치료로 부쩍 숱이 적어진 머리로 말이다. 물론 한쪽이 비어버린 아내의 브래지어 속엔 솜뭉치가 들어 있었다.
집에 돌아온 저녁이면 그 가방을 현관에 팽개쳐 둔 채 설거지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아내는 한숨을 쉬며 쓰러지듯 자리에 누워버렸다. 어느 날 생각 없이 돌아누운 내 등으로 아내의 등이 맞닿아 왔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등을 돌리고 누웠던가. 나는 그녀와 내 등 사이로 흐르는 서늘한 기운을 참을 수 없어하다 슬며시 몸을 돌려 그녀를 껴안았다. 내 팔 안에 갇힌 아내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아내의 가슴을 무심코 더듬다 한쪽이 떨어져 나간 가슴자리에 손이 닿자 나도 모르게 섬뜩 몸이 떨려왔다. 그러나 나보다 더 놀란 것은 그녀였다. 아내는 기어이 끄윽-끄윽- 울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때때로 그렇게 울던 아내는 이제 남은 왼쪽 유방에 마저 암이 돋쳐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녀를 기다린 지 벌써 3시간을 지나 네 시간이 되어간다. 나는 복도 의자에 쪼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켜 수술실 앞을 서성여 본다. 곧 아내는 침대에 실린 채 저 문을 나올 것이다. 남은 한쪽마저 떼어낸 그녀의 가슴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있겠지. 이제는 황량한 벌판처럼 평평해져 버렸을 아내의 가슴……. 그러나 아내여! 제발 살아 있어만 다오! 그렇게 벌판 같아진 가슴에 살을 도려낸 흉터를 남기고라도 내 앞에 있어만 다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어차피 당신의 가슴이 평평했던 시절, 이제부터는 그날로 돌아간 듯 동무처럼 살자꾸나.
수술실을 바라보고 선 내 눈 안으로 눈물이 고여 왔다. 나는 민숭해졌을 그녀의 가슴속 더 깊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싶어졌다. 이제는 아내의 가슴이 내 삶의 깊은 참회인 것처럼…….(*)
미주문학세계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