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6.26 02:53

가수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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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유명가수였던 초로의 남자와 무명작가인 그녀가 마주 앉아 있다. 엘에이 한인 타운의 한 허름한 사무실, 그녀는 긴장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부러 여유 있는 표정을 짓는다.

며칠 전, 신문에서 가수가 운영하는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를 구한다는 내용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녀는 생각 끝에 가수를 찾아오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은 돈을 생산하지 못하는 작가란 호칭을 그녀의 직업이라 인정해 주지 않았다. 무명작가, 그것도 남의 나라 넓은 땅 한 귀퉁이에 형성된 이민사회 안에서 그녀의 이름 밑에 작가란 호칭이 따라 다니는 건 거추장스럽기만 한 액세서리 하나를 몸에 달고 다니는 거나 똑같았다.
  
가수는 점잖게 미소를 띠우며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도 보통 때 함부로 까르르 거리는 자신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조심을 하며, 상냥한 미소로 그의 질문에 답변할 준비를 한다.
  
절대로 오만하지 않게, 하지만 약간은 품위 있게…….  조금은 애처롭고 비굴해 보여도 좋았다. 지금 그녀의 목적은 박봉이라도 한 달에 얼마간의 실질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직업을 얻어야 하는 것이므로…….  
  
미소 속에 팽팽하게 당겨진 가수와 그녀의 시선 사이로 돈, 돈, 돈, ‘돈’이란 단어가 구슬처럼 꿰어진다.
  
'문학 나부랭이나 한다는 이 여자가 내 광고에 쓸데없는 수식어들을 집어넣어 장사를 망쳐놓지는 않을까?’
  
'이 퇴역 가수가 나를 채용해 적당히 부려먹고 일정양의 돈을 매달 공급해 줄 수 있을까?’
  
가수의 점잖은 미소와 그녀의 우아한 미소 사이에서 소리 없는 말들이 부딪친다.
  
맘에도 없는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눈에 비친 가수의 모습은 초라하다. 그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녀는 그가 인기 절정에 있을 때 어디서고 음악이 울려오던 곳이면 들을 수 있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젊음과 문학을 지병처럼 앓던 그녀가 친구들과 어울려 커피를 마시거나 생맥주 한 잔 하고 있을 때, 가수의 음성은 그녀의 젊음에 낭만을 더해 주었다.
  
지금 멜로디를 잃어버린 가수가 미소에 가려진 빳빳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는데, 그녀는 문득 요즘 서점가에서 판을 치고 있는 연예인들의 책 무더기를 떠올린다. 만약 가수가 유령작가를 고용해 인기를 누리던 자신의 지난 시절과 지금 사업가로서의 삶을 쓴 책을 출판한다면, 당연히 정통 문학적인 작품보다 훨씬 많이 팔릴 거라는 생각을 한다.
  
가수와 작가는 대중의 선호도에 따라 그 인기와 수입이 결정된다는 것도 같지만, 대한민국에서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는 직업 중의 하나라는 것도 똑같다. 그리고 무명의 가수나 작가가 빛을 보는 데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필요하다는 것도 비슷하다. 그렇게 해서 무명 딱지를 뗀다 해도 든든한 수입이 보장될 만큼 정작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벼락 맞아 죽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것도 같다.

그러나 가수는 세상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면 그만이지만, 작가는 세상이 좋아하는 것보다는 적어도 세상을 위한 것을 써내야 한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결국 그녀가 고수해온 그 고루한 의식, 세상을 위한 것을 써야한다는 생각은 이렇게 허물어지고, 그녀는 지금 가수 앞에서 직업을 구걸하는 조금은 착잡한 심정이 되어 있다.
  
언제부턴가 그녀의 정수리에 흰머리가 돋기 시작했다. 혹 맘을 먹는다면 일본을 휩쓸었다는 소설 ‘실락원’을 방불케 하는 침대 위의 쾌락을 묘사해 써내려 간다 해도 못할 것도 없는 나이이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창피를 떨어도 수입이 생기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녀는 차라리 박봉으로나마 채용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가수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잠시 생각 속에 빠졌던 그녀의 흐린 시선을 비집고 낭만이 탈색한 가수의 목소리가 비정하게 울린다.
  
"문학을 하시는 분이 이렇게 상업적인 광고 문구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면 순두부 선전 같은 것인데……. 이 일에는 적합하지 않으실 것 같군요. 저희는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박또박 예의 바르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순간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베이고 지나간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무언가를 구걸해 본 적이 없던 그녀는 목에 걸린 굴욕감이 토사물을 밀어 올릴 것 같아 가만히 일어서 가수의 사무실을 빠져나온다.
  
낡은 건물의 계단을 짚고 내려오는 그녀의 두 다리가 휘청거린다. 공연한 짓을 했다는 후회감이 들었지만 이미 끝난 일이다.

“돈이 좌지우지하는 세상, 일찌감치 돈이나 벌었어야 했는데……. 무슨 놈의 얼어 죽을 정통 문학? 계란으로 바위를 치랴? 이 혹독한 세상이 나 혼자의 순수로 변할 것도 아닌데…….”
  
그녀의 마른 입술에서 욕지거리 같은 말마디가 튀어나온다. 그러나 아직은 목구멍에 거미줄은 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든다. 이 이민사회는 이상하게도 초기 이민자들의 재산을 털어먹는 습성이 있었다. 그 몇 번인가의 털림 뒤에도 아주 비싼 뿌띠끄 샵이 아니라면  맘에 드는 옷 한 벌 정도는 살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득 자신의 삶이 아직 건재한 것은 그녀가 그나마 자신의 작은 순수를 지키려고 밤마다 자판을 두들겨 댄 그 고된 작업에 대한 보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언뜻 물질의 횡포 같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섭리 때문이란 깨달음이 희미하게 느껴져 온다. 그 섭리를 올바르게 따라가는 한 적어도 그녀의 삶이 그다지 찌그러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선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어떠리? 골짜기를 흐르던 연약한 물의 흐름도 오랜 세월 계속되다 보면 땅의 모양을 변하게 하거늘……. 누군가 소용도 없어 보이는 순수를 지키고 있기에 세상은 이렇게 지탱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가수의 광고 문구에 자신의 붓끝이 팔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가수와 벌였던 보이지 않는 실랑이에 피곤해진 그녀의 얼굴 위로 투명한 미소가 어려 온다.
                                      
                         (미주한국일보 1998년 11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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