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평소보다 좀 이른 퇴근을 했다. 오늘은 꼭 캔디를 찾아가야할 것 같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도 그녀의 꿈을 꾸었다. 품을 파고들던 그 몸짓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캔디를 보듬어 안던 꿈속의 감촉이 아직도 그의 피부 위에 살아 있는 듯하다.
잠시 그녀를 안고 혼곤한 행복에 취해 있던 순간, 돌연 새벽 자명종 소리가 잠을 깨웠다. 퍼뜩 눈을 뜨자 그의 빈 가슴엔 형용할 수 없는 허전함이 가득 고여 왔다. 그녀를 그렇게 떠나보내고야 말았던 자신의 실수를 되짚으며, 그는 어스름한 여명이 비쳐드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가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몰고나오자, 서쪽으로 뚫린 출구엔 따가운 햇살이 물처럼 고여 있다. 전면유리를 덮쳐드는 눈부심에 그는 눈살을 찌푸린다.
항상 매니저가 퇴근하길 기다렸다 사무실을 나올 때면, 주변은 늘 새벽 같은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해가 스러져가던, 밤도 낮도 아닌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매니저의 눈치 같은 건 볼 필요도 없이 후다닥 서류철을 접고 일어나 버렸다.
그는 대단치 않은 샐러리맨인 자신의 일상에 권태가 밀려올 때면 꼭 캔디의 꿈을 꾼다는 걸 안다. 통풍구가 없는 사각진방에 갇혀 어딘가 숨 쉴 곳을 찾아 헤매듯, 꿈속에서 그는 허둥허둥 캔디를 끌어안는 것이다.
그의 차는 주차장 입구에 고인 성가신 햇살을 지나쳐 거리로 들어선다. 고층 건물 사이를 흐르는 자동차 물결은 그래도 아직 교통 체증을 만들기 전이다. 건물 그림자가 만들어낸 알맞은 조도의 거리는 쾌적하다. 그는 캔디가 있는 서녘 바닷가로 가기 위해 프리웨이로 진입한다. 다시 전면유리로 쏟아지는 햇살을 참을 수 없어, 룸미러 옆에 붙은 실내 안경집에서 선글라스를 꺼낸다. 그다지 우뚝 서지도 못한 그의 빈약한 콧날에 촌스런 검은 안경이 걸린다.
햇살을 걸러낸 어두운 렌즈에 시야는 한결 고즈넉해진다. 그는 핸들을 잡은 채 길게 숨을 뱉어본다. 유행지난 선글라스에 그는 그토록 불편했던 세상이 갑자기 편안하게 느껴진다.
캔디를 사랑했던 것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견딜 수 없는 세상을 견딜만하게 하던······.
그가 캔디를 만났던 건 상처를 거듭 받은 뒤였다.
스물 살이었을 때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여자가 없다는 걸 슬퍼하지 않았다. 시험에 쫓겨 밤을 새느라 눈은 늘 충혈 되어 있었고, 그 눈을 사랑할 여학생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예쁜 여학생보다 A학점의 성적표가 더 좋았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에 패션 감각까지 뛰어난 룸메이트가 왁스로 머리칼을 세우고 데이트 나가는 주말이면 좀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맛있는 음식을 사다 혼자 먹으며 텔레비전을 봤다. 데이트를 한다면 음식 값이 두 배나 들 거라며 안도의 숨을 쉬는 것으로 족했다.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우수한 성적의 졸업장을 들고 거울을 보았다. 성적만큼 우수하진 못해도 자신의 인물이 낙제 점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곧 좋은 여자를 만나게 될 거라면서.
스물일곱 살이 되고 통장에 돈도 좀 모였다. 늘 혼자 밥을 먹으며 자신은 아직 여자를 찾을 나이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맘만 먹으면 언제고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어느덧 마흔 살이 되었다. 몇 번인가 회사를 옮기기는 했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흐르는 일상에서 그는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회사에 갔다.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며 혼자 저녁을 먹었다. 몇 번인가 동료에게서 여자를 소개받고, 그 중 서너 명은 그의 침대에 누웠다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모두 그를 떠났다. 첫 번째 헤어짐에서 그는 자신의 가슴 깊이에 날카로운 바늘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그리도 예리하고 날카롭게 살을 뚫고 나오던지 그 아픔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는 그 아픔은 단 한 번뿐일 거라고 믿었다. 오직 한 개 숨었던 바늘이 제 모습을 드러냈을 거라고, 그런 아픔이 또 오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나 스물일곱에서 마흔 살이 되기까지 그는 무한대의 바늘이 제 가슴에 숨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거듭해 갈수록 더 큰 통증을 가한다는 걸.
그는 점점 지쳐갔다. 여자들이 좋아해주지 않을 만큼, 자신이 전혀 매력 없는 사내라는 걸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다잡은 마음에도, 분화구처럼 흔적을 남긴 상처에서 자꾸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어느 날 퇴근 후 막 집에 들어서려던 그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 현관 앞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곧 결혼할 수 있으리라고 서른두 살 때 사들인 그의 낡고 작은 집은 오랫동안 손을 보지 않아 초라했다. 노숙자들이 판자 담장에 기대어 낮잠을 잔다면 제 집인 줄 착각하고 편안해할 만큼.
현관 도어에 열쇠를 꽂던 그는 바깥 쓰레기통 옆에 웅크린 무엇이 벌떡 일어서는 걸 보았다. 반쯤 열린 현관 도어를 잡은 채 그는 멈칫 멈추어 섰다. 집 앞에 켜진 불빛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나오던 그녀·······.
그녀는 얼마나 오랫동안 노숙 생활을 했는지 더럽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거기에다 시력이 없어 보이는 한 쪽 눈은 찌그러진 채 감겨있었고, 불빛 아래 반짝이던 다른 한 눈마저 왜 그런지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빈 눈에서 자신의 가슴에 불고 있는 쓸쓸한 바람을 느꼈다. 그는 더러운 그녀를 모른 척 지나쳐가려 했다. 문을 쾅 닫아버리면 제풀에 겨워 어디로든 떠날 것이라고.
그러나 그녀는 현관문이 닫히기 전, 잽싸게 그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한 쪽 눈에 애원의 빛이 어렸다.
나를 좀 붙잡아 주세요. 나를 사랑해 주세요.
그녀의 눈은 소리 없는 말로 물보라처럼 그의 가슴을 적셔왔다. 그는 자신의 무수한 상처를 떠올렸다. 그녀도 어쩌면 그렇게 수많은 버림을 받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파르르 떨던 그 작은 손은 생각보다 보드랍고 따뜻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끼룩끼룩 갈매기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목욕을 마친 그녀는 의외로 아름다웠다. 날씬한 몸과 긴 다리, 그리고 품에 안았을 때 그 보드라운 촉감은 무엇에도 비교되지 않았다. 그날 밤 그의 품에 다소곳이 기대어 잠이 든 모습을 보며,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버리지 않을 존재는 그녀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캔디와의 새 생활은 행복했다. 그는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녀 생각에 혼자 미소 지었고, 퇴근하기 무섭게 집으로 돌아왔다. 주변의 동료들은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금방 알아챘다. 어서 소개를 시키라고 짓궂게 놀려대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그는 함부로 캔디를 보여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쪽 눈이 감긴 그녀의 애꾸 얼굴을 보면 그들은 기어코 그를 놀려대고 말 것이었다. 그에게 잘 어울리는 짝을 만났다면서······.
봄에서 가을이 되었을 때 그는 서서히 캔디에게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순종적인 사랑이 그저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문득 자신이 버릴 수 있는 최초의 존재가 캔디라는 걸 깨달았다.
어느 주말 회사 동료들이 그의 집에 놀러오겠다고 했다. 그는 마지못해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지만 캔디를 소개시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은근히 주말이 되기 전에 캔디가 집을 떠나주었으면 했다. 일부러 그녀에게 박정하게 굴었다.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제 할 일만 하다가, 그녀가 먼저 품에 안겨오면 세차게 밀어버리기까지 했다. 그의 거센 손길에 몸을 벽에 부딪친 캔디는 끼룩끼룩 갈매기 울음소리를 내며 다시 울었다.
그 며칠 후 캔디는 정말 사라졌다. 그가 회사에서 돌아왔던 금요일 저녁, 하얀 곰 인형이 현관 앞에 떨어져 있었다. 그가 캔디에게 사다준 것 중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집에 놀러 오겠다던 동료들은 갑자기 일이 생겨 오지 못하겠다고, 이미 주말 방문을 취소한 뒤였다. 그는 어둑신한 현관 앞에서 캔디의 인형을 주어 올렸다. 몰캉, 그의 손아귀에 쥐어지는 그 촉감에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가슴 깊이에서 그렇게도 수많은 바늘이 솟고도 더 찔릴 바늘 끝이 숨어 있었던가.
그는 회사에 앉아서도 시무룩했다. 사는 일이 영 재미가 없었고 퇴근하는 발걸음도 무거워졌다. 주변에선 캔디가 그의 곁을 떠났다는 걸 금방 눈치 챘다. 더러 동정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지만, 누군가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비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그녀의 흔적은 집 안 곳곳에 남아 있었다. 침대에선 그녀의 냄새가 났다. 그는 그녀를 부러 박대했던 걸 후회했다. 캔디를 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며…….
이별의 상처가 서서히 가라앉고, 지병 같은 찬바람이 또다시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울 무렵 돌연 캔디가 나타났다. 그녀는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어두운 현관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처럼 더러웠고 냄새가 났다. 그러나 휑하니 비어보이던 한 쪽 눈엔 알 수 없는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오기 같기도 하고, 살기 같기도 했다. 그는 캔디의 눈빛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너무 반가워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을 때서야 만삭이 된 그녀의 배가 그의 몸에 닿는 것을 느꼈다.
생각지 않던 일에 놀랐지만 그는 침착하게 그녀를 씻겼다. 늘 절반쯤은 정신이 나가 보이는 캔디에게도 집요한 모성본능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곧 병원에 데려갔지만, 출산 날이 가까워오는 그녀의 몸을 진찰한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노숙 생활에서 임신을 하게 된 건, 본래부터 건강치 않았던 캔디에게 치명적인 일이라고 했다. 어쩌면 아이도 엄마도 다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한 쪽뿐인 눈을 빛내며 출산일까지 용케 견딘 캔디는 쌍둥이를 낳았다. 먼저 태어난 사내아이는 이미 죽은 상태였고, 5분 늦게 나온 여자아이는 용케 숨을 쉬고 있었다. 출산 직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캔디는, 고물대는 자신의 아기를 바라보다 하나 뿐인 눈마저 영원히 감고 말았다.
캔디의 몸을 화장하여 서녘 바다에 뿌리며 그는 울지 않았다. 본래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다시 되뇌었을 뿐.
그는 또 다른 이별이 싫었다. 눈도 뜨지 못한 캔디의 딸, 그 어린 것의 입양을 병원에 부탁해 놓고 벌써 두 달이 지나갔다. 그동안 얼마나 자라 있을 것인지. 어느 구석인가는 제 어미를 닮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찾아가볼 맘이 나지 않았다.
그는 꿈속에서 캔디를 품에 안다 잠을 깰 때마다, 누군가를 버린다는 건 버림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가 이제껏 수없는 헤어짐의 바늘에 찔려 고통을 당했어도, 캔디를 버렸던 고통보다는 덜 아팠었다는 걸.
서녘 바닷가에 노을이 붉다. 바다에 뿌려진 캔디가 붉은 파도로 운다. 제 딸을 품어달라는 울음소리인가.
끼룩 끼룩
검붉은 하늘 위를 갈매기가 비상하고 있다. 그는 문득 꼭 두 번 갈매기 소리로 울었던 캔디의 울음을 생각한다.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그로부터 외면당했을 때······.
바다와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진 다음에도 그 소리는 계속되고, 파도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온다.
오래도록 바닷가에 서 있던 그는 한순간 몸을 휙 돌려세운다. 그리곤 총총 제 자동차에 올라타 서둘러 차를 몬다.
밤이 되면 불빛으로 더 휘황해지는 거리, 그가 도착한 병원은 다행히 문을 닫기 직전이다. 막 적당한 입양 가정을 심사 중이었다는 의사는 그를 보자 반색을 한다.
그는 캔디의 딸이 지난 두 달 사이 몰라보게 자라 있는 것을 본다. 갓 태어났을 때 한줌만 하던 모습이 간 곳 없이, 캔디를 닮은 눈에 보송보송한 털을 온 몸에 세운 채.
동물 병원 케이지 안, 유난히 눈이 초롱초롱한 하얀 아기 강아지 한 마리가 그에게 앞발을 세운 채 꼬리를 흔들어대고 있다.
(미주한국일보 2008년 9월 23일자)
어젯밤에도 그녀의 꿈을 꾸었다. 품을 파고들던 그 몸짓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캔디를 보듬어 안던 꿈속의 감촉이 아직도 그의 피부 위에 살아 있는 듯하다.
잠시 그녀를 안고 혼곤한 행복에 취해 있던 순간, 돌연 새벽 자명종 소리가 잠을 깨웠다. 퍼뜩 눈을 뜨자 그의 빈 가슴엔 형용할 수 없는 허전함이 가득 고여 왔다. 그녀를 그렇게 떠나보내고야 말았던 자신의 실수를 되짚으며, 그는 어스름한 여명이 비쳐드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가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몰고나오자, 서쪽으로 뚫린 출구엔 따가운 햇살이 물처럼 고여 있다. 전면유리를 덮쳐드는 눈부심에 그는 눈살을 찌푸린다.
항상 매니저가 퇴근하길 기다렸다 사무실을 나올 때면, 주변은 늘 새벽 같은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해가 스러져가던, 밤도 낮도 아닌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매니저의 눈치 같은 건 볼 필요도 없이 후다닥 서류철을 접고 일어나 버렸다.
그는 대단치 않은 샐러리맨인 자신의 일상에 권태가 밀려올 때면 꼭 캔디의 꿈을 꾼다는 걸 안다. 통풍구가 없는 사각진방에 갇혀 어딘가 숨 쉴 곳을 찾아 헤매듯, 꿈속에서 그는 허둥허둥 캔디를 끌어안는 것이다.
그의 차는 주차장 입구에 고인 성가신 햇살을 지나쳐 거리로 들어선다. 고층 건물 사이를 흐르는 자동차 물결은 그래도 아직 교통 체증을 만들기 전이다. 건물 그림자가 만들어낸 알맞은 조도의 거리는 쾌적하다. 그는 캔디가 있는 서녘 바닷가로 가기 위해 프리웨이로 진입한다. 다시 전면유리로 쏟아지는 햇살을 참을 수 없어, 룸미러 옆에 붙은 실내 안경집에서 선글라스를 꺼낸다. 그다지 우뚝 서지도 못한 그의 빈약한 콧날에 촌스런 검은 안경이 걸린다.
햇살을 걸러낸 어두운 렌즈에 시야는 한결 고즈넉해진다. 그는 핸들을 잡은 채 길게 숨을 뱉어본다. 유행지난 선글라스에 그는 그토록 불편했던 세상이 갑자기 편안하게 느껴진다.
캔디를 사랑했던 것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견딜 수 없는 세상을 견딜만하게 하던······.
그가 캔디를 만났던 건 상처를 거듭 받은 뒤였다.
스물 살이었을 때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여자가 없다는 걸 슬퍼하지 않았다. 시험에 쫓겨 밤을 새느라 눈은 늘 충혈 되어 있었고, 그 눈을 사랑할 여학생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예쁜 여학생보다 A학점의 성적표가 더 좋았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에 패션 감각까지 뛰어난 룸메이트가 왁스로 머리칼을 세우고 데이트 나가는 주말이면 좀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맛있는 음식을 사다 혼자 먹으며 텔레비전을 봤다. 데이트를 한다면 음식 값이 두 배나 들 거라며 안도의 숨을 쉬는 것으로 족했다.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우수한 성적의 졸업장을 들고 거울을 보았다. 성적만큼 우수하진 못해도 자신의 인물이 낙제 점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곧 좋은 여자를 만나게 될 거라면서.
스물일곱 살이 되고 통장에 돈도 좀 모였다. 늘 혼자 밥을 먹으며 자신은 아직 여자를 찾을 나이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맘만 먹으면 언제고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어느덧 마흔 살이 되었다. 몇 번인가 회사를 옮기기는 했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흐르는 일상에서 그는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회사에 갔다.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며 혼자 저녁을 먹었다. 몇 번인가 동료에게서 여자를 소개받고, 그 중 서너 명은 그의 침대에 누웠다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모두 그를 떠났다. 첫 번째 헤어짐에서 그는 자신의 가슴 깊이에 날카로운 바늘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그리도 예리하고 날카롭게 살을 뚫고 나오던지 그 아픔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는 그 아픔은 단 한 번뿐일 거라고 믿었다. 오직 한 개 숨었던 바늘이 제 모습을 드러냈을 거라고, 그런 아픔이 또 오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나 스물일곱에서 마흔 살이 되기까지 그는 무한대의 바늘이 제 가슴에 숨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거듭해 갈수록 더 큰 통증을 가한다는 걸.
그는 점점 지쳐갔다. 여자들이 좋아해주지 않을 만큼, 자신이 전혀 매력 없는 사내라는 걸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다잡은 마음에도, 분화구처럼 흔적을 남긴 상처에서 자꾸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어느 날 퇴근 후 막 집에 들어서려던 그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 현관 앞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곧 결혼할 수 있으리라고 서른두 살 때 사들인 그의 낡고 작은 집은 오랫동안 손을 보지 않아 초라했다. 노숙자들이 판자 담장에 기대어 낮잠을 잔다면 제 집인 줄 착각하고 편안해할 만큼.
현관 도어에 열쇠를 꽂던 그는 바깥 쓰레기통 옆에 웅크린 무엇이 벌떡 일어서는 걸 보았다. 반쯤 열린 현관 도어를 잡은 채 그는 멈칫 멈추어 섰다. 집 앞에 켜진 불빛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나오던 그녀·······.
그녀는 얼마나 오랫동안 노숙 생활을 했는지 더럽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거기에다 시력이 없어 보이는 한 쪽 눈은 찌그러진 채 감겨있었고, 불빛 아래 반짝이던 다른 한 눈마저 왜 그런지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빈 눈에서 자신의 가슴에 불고 있는 쓸쓸한 바람을 느꼈다. 그는 더러운 그녀를 모른 척 지나쳐가려 했다. 문을 쾅 닫아버리면 제풀에 겨워 어디로든 떠날 것이라고.
그러나 그녀는 현관문이 닫히기 전, 잽싸게 그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한 쪽 눈에 애원의 빛이 어렸다.
나를 좀 붙잡아 주세요. 나를 사랑해 주세요.
그녀의 눈은 소리 없는 말로 물보라처럼 그의 가슴을 적셔왔다. 그는 자신의 무수한 상처를 떠올렸다. 그녀도 어쩌면 그렇게 수많은 버림을 받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파르르 떨던 그 작은 손은 생각보다 보드랍고 따뜻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끼룩끼룩 갈매기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목욕을 마친 그녀는 의외로 아름다웠다. 날씬한 몸과 긴 다리, 그리고 품에 안았을 때 그 보드라운 촉감은 무엇에도 비교되지 않았다. 그날 밤 그의 품에 다소곳이 기대어 잠이 든 모습을 보며,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버리지 않을 존재는 그녀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캔디와의 새 생활은 행복했다. 그는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녀 생각에 혼자 미소 지었고, 퇴근하기 무섭게 집으로 돌아왔다. 주변의 동료들은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금방 알아챘다. 어서 소개를 시키라고 짓궂게 놀려대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그는 함부로 캔디를 보여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쪽 눈이 감긴 그녀의 애꾸 얼굴을 보면 그들은 기어코 그를 놀려대고 말 것이었다. 그에게 잘 어울리는 짝을 만났다면서······.
봄에서 가을이 되었을 때 그는 서서히 캔디에게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순종적인 사랑이 그저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문득 자신이 버릴 수 있는 최초의 존재가 캔디라는 걸 깨달았다.
어느 주말 회사 동료들이 그의 집에 놀러오겠다고 했다. 그는 마지못해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지만 캔디를 소개시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은근히 주말이 되기 전에 캔디가 집을 떠나주었으면 했다. 일부러 그녀에게 박정하게 굴었다.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제 할 일만 하다가, 그녀가 먼저 품에 안겨오면 세차게 밀어버리기까지 했다. 그의 거센 손길에 몸을 벽에 부딪친 캔디는 끼룩끼룩 갈매기 울음소리를 내며 다시 울었다.
그 며칠 후 캔디는 정말 사라졌다. 그가 회사에서 돌아왔던 금요일 저녁, 하얀 곰 인형이 현관 앞에 떨어져 있었다. 그가 캔디에게 사다준 것 중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집에 놀러 오겠다던 동료들은 갑자기 일이 생겨 오지 못하겠다고, 이미 주말 방문을 취소한 뒤였다. 그는 어둑신한 현관 앞에서 캔디의 인형을 주어 올렸다. 몰캉, 그의 손아귀에 쥐어지는 그 촉감에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가슴 깊이에서 그렇게도 수많은 바늘이 솟고도 더 찔릴 바늘 끝이 숨어 있었던가.
그는 회사에 앉아서도 시무룩했다. 사는 일이 영 재미가 없었고 퇴근하는 발걸음도 무거워졌다. 주변에선 캔디가 그의 곁을 떠났다는 걸 금방 눈치 챘다. 더러 동정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지만, 누군가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비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그녀의 흔적은 집 안 곳곳에 남아 있었다. 침대에선 그녀의 냄새가 났다. 그는 그녀를 부러 박대했던 걸 후회했다. 캔디를 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며…….
이별의 상처가 서서히 가라앉고, 지병 같은 찬바람이 또다시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울 무렵 돌연 캔디가 나타났다. 그녀는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어두운 현관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처럼 더러웠고 냄새가 났다. 그러나 휑하니 비어보이던 한 쪽 눈엔 알 수 없는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오기 같기도 하고, 살기 같기도 했다. 그는 캔디의 눈빛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너무 반가워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을 때서야 만삭이 된 그녀의 배가 그의 몸에 닿는 것을 느꼈다.
생각지 않던 일에 놀랐지만 그는 침착하게 그녀를 씻겼다. 늘 절반쯤은 정신이 나가 보이는 캔디에게도 집요한 모성본능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곧 병원에 데려갔지만, 출산 날이 가까워오는 그녀의 몸을 진찰한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노숙 생활에서 임신을 하게 된 건, 본래부터 건강치 않았던 캔디에게 치명적인 일이라고 했다. 어쩌면 아이도 엄마도 다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한 쪽뿐인 눈을 빛내며 출산일까지 용케 견딘 캔디는 쌍둥이를 낳았다. 먼저 태어난 사내아이는 이미 죽은 상태였고, 5분 늦게 나온 여자아이는 용케 숨을 쉬고 있었다. 출산 직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캔디는, 고물대는 자신의 아기를 바라보다 하나 뿐인 눈마저 영원히 감고 말았다.
캔디의 몸을 화장하여 서녘 바다에 뿌리며 그는 울지 않았다. 본래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다시 되뇌었을 뿐.
그는 또 다른 이별이 싫었다. 눈도 뜨지 못한 캔디의 딸, 그 어린 것의 입양을 병원에 부탁해 놓고 벌써 두 달이 지나갔다. 그동안 얼마나 자라 있을 것인지. 어느 구석인가는 제 어미를 닮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찾아가볼 맘이 나지 않았다.
그는 꿈속에서 캔디를 품에 안다 잠을 깰 때마다, 누군가를 버린다는 건 버림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가 이제껏 수없는 헤어짐의 바늘에 찔려 고통을 당했어도, 캔디를 버렸던 고통보다는 덜 아팠었다는 걸.
서녘 바닷가에 노을이 붉다. 바다에 뿌려진 캔디가 붉은 파도로 운다. 제 딸을 품어달라는 울음소리인가.
끼룩 끼룩
검붉은 하늘 위를 갈매기가 비상하고 있다. 그는 문득 꼭 두 번 갈매기 소리로 울었던 캔디의 울음을 생각한다.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그로부터 외면당했을 때······.
바다와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진 다음에도 그 소리는 계속되고, 파도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온다.
오래도록 바닷가에 서 있던 그는 한순간 몸을 휙 돌려세운다. 그리곤 총총 제 자동차에 올라타 서둘러 차를 몬다.
밤이 되면 불빛으로 더 휘황해지는 거리, 그가 도착한 병원은 다행히 문을 닫기 직전이다. 막 적당한 입양 가정을 심사 중이었다는 의사는 그를 보자 반색을 한다.
그는 캔디의 딸이 지난 두 달 사이 몰라보게 자라 있는 것을 본다. 갓 태어났을 때 한줌만 하던 모습이 간 곳 없이, 캔디를 닮은 눈에 보송보송한 털을 온 몸에 세운 채.
동물 병원 케이지 안, 유난히 눈이 초롱초롱한 하얀 아기 강아지 한 마리가 그에게 앞발을 세운 채 꼬리를 흔들어대고 있다.
(미주한국일보 2008년 9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