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희는 벌써부터 취해 있었다. 넓은 거실을 아스름히 비추고 있는 수직형 램프 밑의 긴 소파에 무너질 듯한 자세로 앉아 키득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말해봐! 네가 사랑에 빠졌단 말이지?”
흐느적대는 수희의 태도에 이미 속을 털어놓을 맘이 가셔버린 나는 크리스탈 잔에 절반쯤 남은 붉은 와인을 덜썩 입에 털어 넣었다.
“얘! 너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말 안 할거야? 그게 누구냐니까?”
“그만둬. 내가 괜한 소리 했나봐. 그리고 너 좀 취한 것 같아. 그만 들어가 자라.”
갑자기 쌀쌀해진 내 목소리에 수희가 발끈했다.
“너 정말? 자긴 뭘 자! 이 절호의 찬스에 매력 있는 과부친구 우리 혜빈이의 사랑 얘기 좀 듣자는 데 뭐가 어때? 오늘 남편은 부재중. 그 사람은 골프시합이 있는 주말이면 밤새워 술을 마시고 어디서 뭘 하다 오는지 오후나 되어야 기어들어 온단 말야. 아들놈도 제 아빠 하는 짓 따라 꼭 오늘 같은 날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안 들어오거든. 그 녀석하고 같이 나간 네 아들도 오늘 들어오긴 틀렸으니 그리 알아라. 그게 사내자식들이니까 내버려두지. 계집애 같으면 내 속이 다 타버렸을 거야. 안 그래?”
수희는 아까부터 잠옷 바람이다. 앞가슴이 깊이 파인 올리브색 실크 나이트가운의 앞자락이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풍만한 가슴 골로 모였다가 펴지곤 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슬며시 웃음을 머금었다.
“수희야! 사랑에 빠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인 것 같아. 너 아주 섹시한데! 너 사실은 내 얘기를 듣기보다 네 속 얘기가 하고싶은 것 아냐? 항상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하는 것도 너고 자꾸 나를 재촉하는 것이....... ”
“야! 넌 참 눈도 없다. 내가 무슨 사랑에 빠질 자격이 있니? 너처럼 얼굴이 예쁘길 하니? 몸매가 봐 줄만 하길 하니?”
수희는 몸을 굽혀 커피 테이블에 놓인 와인 병을 거칠게 집어들었다. 헐렁한 나이트가운 사이로 그녀의 두 가슴이 둥근 공처럼 불거져 나왔다. 거의 병 바닥에 남은 와인을 컵에 따른 그녀는 그것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나는 수희가 곧 잠에 떨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여기 머물러온 지난 두 달 반 동안 그녀가 술에 취해 잠들어 버린 것이 벌써 여러 번이다. 나는 그녀의 그 자유가 부러웠다. 제 집이라고 아무렇게나 입고 아무렇게나 술에 취해 고꾸라지는 방종에 가까운 그 자유가 부럽기만 했다.
어느새 소파에 벌렁 드러누운 채 몸을 뒤척이는 그녀의 긴 잠옷자락은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 가 있었다. 옷자락 밑으로 드러난 수희의 탄탄한 두 종아리가 가위처럼 엇갈린 채 벌어졌다 오무려졌다 하기를 거듭했다. 그녀는 제 말대로 예쁜 여자는 아니었지만 나이치고는 아직 싱싱한 건강미가 있었다. 학교시절 해맑던 피부가 캘리포니아의 따가운 햇살 탓인지 좀 거무스름해 진 것이 오히려 그녀의 그런 매력을 더 돋보이게 했다. 그러니까 밤이면 남편의 손길이 그 탄력 있는 종아리를 스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그런........
순간 내 머리 속엔 수희와 그 남편이 몸을 뒤엉켜 누운 장면이 휙 지나갔다. 나는 흠칫 놀라 얼른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니 친구 집이랍시고 이렇게 오래 묵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이제는 그들의 안방 풍경까지 상상을 해보니 말이다.
그래. 석 달만 있다가 가. 아니 그보다 더 있어도 되지만 네 시누이가 석 달 동안만 휴가를 주었다면서. 그것도 네 남편 죽고 나서 5년 만에. 석 달이면 네 아들이 여기 적응할 시간으로는 충분해. 우리 아들놈하고 동갑이니 같이 붙여놓으면 영어도 금방 늘 거야. 걱정 말고 편히 있다가 가.
내 아이를 유학차 데리고 왔으니 좀 맡아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했던 것은 나인데 오히려 그녀가 내게 애원하고 있었다.
백인 부촌이라는 수희 네 집 근처의 사립 고등학교에 아이의 유학수속을 마치고 곧 돌아가려던 나는 그녀의 애원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처음엔 3개월의 휴가 중 한 달만 수희 집에서 지내고 나머지 두 달은 서울로 돌아가 무작정 쉬려던 참이었다. 그러던 것이 벌써 두 달 반이나 여기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금쪽같은 휴가는 이제 보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내 발목을 잡은 것은 사실 수희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희의 사촌 시동생 제임스 민이다. 나는 지금 그 얘기를 수희에게 하려던 참이었다. 네 사촌 시동생 제임스에게 발목이 아닌 마음을 잡힌 것 같다고 말이다.
수희는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옆으로 허물어진 그녀의 울퉁불퉁한 몸매 사이로 광택이 나는 실크잠옷이 제멋대로 휘감겨 있었다. 유복한 집안의 딸로 학교시절 조금은 천방지축이던 수희는 그런대로 인생을 잘 살아왔다. 미국이민을 준비하던 남자와 중매로 만나 결혼을 하자마자 서울을 떠났던 그녀는 처음 한 10년 동안은 1년에 한번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10년 만에 서울에 다니러 왔을 때 막 병치레를 시작하던 남편 수발에 시들어 가는 내 모습이 측은해 어쩔 줄을 모르더니 그 뒤부터 한 달에 한번은 꼭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대학시절, 그녀가 주선했던 미팅에서 만난 남자가 바로 내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수희는 나름대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달에 한번씩 수희의 전화를 꼭 예순 번 받았을 때, 그러니까 위암이란 진단을 받은 지 5년 만에 두 번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고통 속에 숨을 거두었다. 그가 떠난 후부터 수희는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그 모든 것이 자기 탓이기나 한 듯이.
출판사를 경영하던 손위 시누이는 혼자된 나를 자기 사무실로 끌어들였다. 남편의 병 수발에 얼마 안 되는 재산이 바닥이 난 것을 뻔히 아는 터라 호구지책으로 출판사에 나와 잡일이라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엔 홀로된 젊은 올케가 딴 짓을 못하게 감시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제 까짓 것, 한 10년 붙들고 있으면 어디를 가겠어. 그러면 쉰이 가까울텐데 설마 그 나이에 딴 짓을 하려고. 내 동생이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인데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딴 짓 못하게 꼭 붙들어두어야지.
아마 시누이는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출판업계에서는 성공한 편이었고, 시누이 남편의 사업도 번창하던 터라 혼자된 올케를 적당히 먹여 살리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남편의 생전에 시누이와 각별했던 정에 감복한 듯 군소리 않고 날마다 그녀의 사무실로 출근했다. 닥치는 대로 교정도 보고 경리장부도 정리하다보니 출판사 일 전체가 손바닥에 훤히 들어왔다. 그것이 몇 년 지나다보니 나는 어느새 출판사의 부사장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 겉모습은 부사장이 아니라 잡역부처럼 초라하기만 했다. 조금 짙은 립스틱만 발라도 눈을 치뜨는 시누이 때문에 나는 거의 화장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짧은치마나 몸에 꼭 끼는 옷은 입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봐. 올케. 혼자 사는 여자가 그렇게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다니면 어떻게 해. 날 좀 잡아 잡수 하는 것 같지 않아.
그녀의 그 점잖은 타이름에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젊음이 촌스러운 차림새 속에서 남모르게 가고 있었다.
나를 만났던 첫날 남편이 밤잠을 설쳤을 만큼 내가 예쁜 여자였다는 것을 있은 지는 오래였다. 나는 퍼머기 없는 머리를 하나로 동여매고, 늘 긴 치마와 헐렁한 블라우스를 입고 출근했다. 사장인 시누이에 의해 금단의 여자로 금이 그어진 내 앞에서는 사무실을 드나드는 작가나 서점 관계자들까지도 함부로 웃거나 농담조차 붙이지 않았다.
나는 고독했다. 그러나 시누이가 아니라면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보험설계사가 되거나 길거리 구멍가게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사실 고독해 할 자격조차 없었다.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대학시절이었을 망정 그래도 글줄 깨나 읽었다는 이력이 그나마 출판사의 일을 견뎌내게 했고, 시누이의 그늘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생활 중에 유일한 낙이 있다면 일주일에 한번씩 미국에서 걸려오는 수희의 전화였다. 딴엔 나를 위로한다고 비싼 국제전화를 걸어왔지만 사실 그녀도 이국생활을 무척 외로워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5년이 흘렀을 때 나는 감옥 아닌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었다. 그 빌미는 이미 유행처럼 번진 아들아이의 미국유학이었다. 너도나도 유학을 가는 것이 그만 세태가 되어버렸는지라 시누이는 쉽게 수긍을 했다. 그토록 사랑하는 동생이 남기고 간 일점혈육인데 싶어 눈물까지 글썽이던 그녀는 아이가 적응할 동안 미국에 머물다 오라는 허락을 했다. 그것이 3개월이었다.
수희는 내가 도착하던 이튿날부터 나를 백화점으로 끌고 다녔다. 촌스런 내 모습이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헐렁한 내 블라우스를 벗기고 몸에 꼭 맞는 셔츠를 입혔다. 무릎 밑에서 찰랑대는 구식 샤넬라인 스커트 대신 발목에서 허벅지까지 길게 찢어진 긴 스커트를 엉덩이가 꼭 끼게 입혀 놓았다. 그리고 발가락이 드러나는 붉은 샌들을 신겨주었다. 물론 피처럼 붉은 패티큐어와 함께.
순식간에 나는 선정적인 여자로 변신하고 말았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울려야 영어가 빨리 는다며 내 아들아이를 자기 아이에게 붙여놓고 그녀는 일요일이면 나를 데리고 교회에 갔고,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도 나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그녀를 따라 가는 곳마다 제임스 민이 있었다. 그는 수희와 같은 교회에 다녔고, 같은 동네에 살았으며 그들이 어울리는 사람들도 늘 같았다. 수려하고 세련된 외모에 항상 미소를 머금고있던 그는 나에겐 바로크시대 인물화 속의 주인공만 같았다. 그러니까 호기심과 아름다움에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기는 해도 내 개인과는 무관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수희네 시댁보다도 먼저 미국에 와 정착했던 수희 시 큰아버지의 막내아들이었으며 그가 미국에 온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고 했다. 제임스 민의 나이는 44세, 그러니까 수희와 나와 그는 동갑내기였다. 유창한 영어와 조금은 단어수가 빈약한 한국말, 그는 확실히 별세계 사람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의 아내는 아예 미국에서 태어난 교포 2세였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이국에서 태어난 탓인지 한국적 분위기라곤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그녀는 몹시도 세련되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은 둘 다 미국직장에 근무하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교포커플이었다.
몇 번인가 인사를 나누고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익숙해 졌을 무렵의 어느 토요일 아침 그가 불쑥 수희 네 집을 찾아왔다. 그 전날 골프를 친 수희의 남편은 버릇대로 밤에 들어오지 않았고 수희는 예의 나와 한밤에 술 파티를 벌이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어버렸다. 새벽에 들어온 아이들도 늦잠을 자고있던 터라 하는 수 없이 나 혼자서 그를 맞아야했다.
그는 동네를 산책하고라도 온 듯 연 하늘색 셔츠에 불루진을 입고 있었다.
“또 그 토요일이군요. 형님이 골프를 치고 외박하는 날 말입니다. 형수님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나요? 전에는 밤새도록 서울의 친구와 전화를 하고 새벽에나 잠이 든다더니 이제 그 친구 분이 아예 여기로 오셨으니 국제통화료라도 절약되는 셈인가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의 싱긋한 웃음을 바라보다 나는 그때서야 수희가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오던 날이 언제나 토요일 오후였음을 기억했다. 그러니까 LA시간으로 금요일 자정 무렵이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전화를 걸어오던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군요.”
내가 새삼스럽다는 듯 중얼대는 사이 그는 부엌 쪽을 기웃거렸다.
“아직 아침식사 전 이신가요? 이 집 주부는 일어나려면 멀었을 테구요. 이 집 주인도 아이들도 오리무중이군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나가셔서 간단한 아침식사라도 하시겠어요? 저는 토요일 아침이면 산책을 하다가 혼자 식사를 하기도 하죠.”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왜 그런지 가슴이 아스라히 내려앉았다. 뒷마당으로 뚫린 부엌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에 눈부시게 어렸다.
“네? 아침을요?”
나는 다만 그의 얼굴에 내려앉는 햇살에 눈이 부실 뿐이라는 듯 공연히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 집 아이들과 아내도 오늘 아침은 다 제각각 입니다. 그야말로 주말 아침이거든요. 어때요? 같이 가시겠어요?”
미소를 머금은 그의 두 눈이 은근히 나를 압박해 왔다.
“그 그러죠. 뭐.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대로 나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뭐 좀 찍어 바르고 옷이라고 갈아입어야지요.”
허둥대는 내 모습에 그가 싱긋이 웃음을 머금었다.
“대충하고 나오세요. 나는 여자들의 긴 화장시간에 질린 사람입니다. 혜빈씨는 그냥 그대로도 아름답습니다.”
갑자기 내 눈이 번뜩 뜨였다.
아름답다고? 그대로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니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본지가 언제였던지 기억이 아득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는 내 발걸음이 구름 위를 딛는 것 같았다. 입고있던 헐렁한 홈웨어를 급히 벗어버리고 수희가 사준 긴 스커트를 입었다. 옆이 길게 찢어진 검은 스커트 자락 사이로 허연 허벅지가 거울에 비춰졌다. 브래지어만 걸친 매끈한 상체가 옷을 갈아입느라 몸을 움직일 때마다 거울 속에서 어지럽게 흔들렸다. 언뜻 언젠가 시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얀 브래지어 사이로 불거져 나온 도톰한 가슴과 매끈한 내 어깨는 마치 날 잡아 잡수 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른 레몬 색 니트 셔츠를 꿰었다. 역시 수희가 사준 것이다. 거울 속에는 몸에 꼭 달라붙는 옷 속에 탐스런 몸매를 감춘 젊지도 늙지도 않은 한 여자가 속되게도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여자들의 긴 화장시간에 질렸다는 그의 말이 생각나 맨 얼굴에 립스틱만 바르고 방을 나오자 그는 벌써 현관밖에 서 있었다.
“아주 빠르시군요. 저기 내 자동차가 서 있는데 내 차로 가시지요.”
산책을 나왔다는 그의 말이 생각나서 나는 집 앞에 서 있는 베이지색 지프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 산책을 마치는 길로 집에서 자동차를 갖고 왔습니다. 혜빈씨와 아침식사 하러 가려고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성큼성큼 지프차로 걸어간 그는 조수석의 문을 열고 내가 타기를 기다렸다. 자동차로 다가가는 내 발걸음이 굽이 높은 샌들 탓인지 이상하게 뒤뚱거려 졌다. 문을 잡고 선 그의 눈길 속에서 나는 먼저 한 발을 차안에 올려놓았다. 수희가 칠해준 붉은 패티큐어가 진회색 카펫의 자동차 바닥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좌석에 앉기 위해 자동차 안으로 몸을 들이미는 찰나 옆구리가 터진 스커트 사이로 스타킹을 신지 않은 맨 다리가 허옇게 드러났다. 막 자동차 문을 닫으려던 그의 시선이 잠깐 내 다리에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무색하여 내가 스커트 자락을 여미는 사이 그는 어느새 운전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핸들에 얹혀진 그의 가무스름한 손에서 남성용 콜론수의 향이 코끝으로 슬며시 번져왔다. 부르릉-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반짝이는 아침 햇살 사이로 경쾌하게 퍼져 나갔다. 가로수의 잎새에 숨어있던 검은 새 몇 마리가 그 소리에 놀란 듯 푸드득 날아올랐다. 언덕길을 미끄러지는 자동차 안에 클래식 음악이 은은하게 울렸다.
“혜빈씨는 무슨 음악을 좋아하시죠?”
마치 그 옛날의 대학 시절, 미팅에서 처음 만났던 남편이 묻던 그런 말투였다. 언뜻 그 시절의 한 귀퉁이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익히 보았던 초상화 속의 인물과 같이 낯이 익으면서도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이 남자와 함께.
“뭔지는 몰라도 나는 클래식 음악이 좋더군요. 확실한 곡명을 모르는 것이 더 많지만 그래도 항상 클래식을 듣지요.”
“아 그렇군요. 그 점에 있어서는 나도 같아요. 이런 음악은 뭔가 영혼을 울리거든요.”
자동차가 커브를 도느라 내 몸이 잠깐 그에게로 쏠렸다. 한 순간 차창으로 쏟아지는 아침햇살과 카스테레오의 음악이 빛과 소리라는 엄연한 구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는 듯 했다. 깜박 내 머리 속의 모든 생각이 정지되었다고 느낀 순간 익숙한 음율의 곡명이 떠올랐다.
“이건 진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군요.”
“아 그래요? 참 그렇군요. 시벨리우스..... 나도 그 정도는 안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음악취향을 갖고 있는 셈이군요.”
그가 별로 웃을 일도 아닌데 한바탕 웃음을 머금었다. 한산한 도로에서 잠시 중앙선을 이탈한 자동차가 잠깐동안 지그재그로 달려갔다.
“조심하세요. 만약 이대로 사고가 난다면 우린 큰 오해를 받는답니다. 사실은 오해를 받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는 사람들이 말이지요.”
좁은 자동차 안에서 내 목소리가 비음을 내며 멋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교태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걱정 말아요. 혜빈씨 때문에 정신을 잃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말이죠.”
나직히 중얼대는 그의 말에 나는 의아한 심정이 되었다.
“무슨..... 무슨 그런 말을....... 제임스씨는 그저 내 친구 수희의 사촌이고 우리는 그냥 아침 한끼를 먹으려는 건데......”
더듬대는 내 말에 그는 다시 한바탕 웃어 제쳤다.
“그렇군요. 단지 아침 한끼 먹으려는 건데...... 내가 너무 과장했군요.”
곡선 길을 따라 내려가던 자동차가 다시 중앙선을 침범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은색 자동차 한 대가 멈칫 속도를 늦추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빼어 우리를 돌아보았다. 안경을 코에 걸친 백인 할머니였다.
창 밖으로 하늘과 바다가 펼쳐진 해변의 레스토랑에서 마신 향이 짙은 커피는 기분을 더 들뜨게 했다. 알싸한 커피 향기가 온통 내 머리 속을 흔들어 놓는 것 같았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감미로운 음악처럼 그는 싱긋한 미소와 낮으막한 말투로 그 아침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적어도 나를 위해서. 초상화 속의 그 인물은 이제 무대로 나와 오직 객석에 홀로 앉은 나를 위해 웃고 속삭여 주는 것이다. 시간이 길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정오가 가까워오자 창 밖의 햇살이 따갑게 느껴졌다. 연 하늘색이던 바다는 깊게 푸르러졌고 우리의 식사가 끝난 지는 오래였다. 붉은 샌들을 또각 거리며 레스토랑을 나오던 나는 머리 위를 스칠 듯 날아가는 커다란 갈매기에 소스라쳐 단 한번 그의 팔을 잡았다. 세상 무엇이라도 견디게 해줄 것 같은 단단한 그의 팔을......
그리고 다시 그의 자동차로 날름 올라탔을 때 또 옆구리가 찢어진 긴 스커트 자락 사이로 내 허연 허벅지가 보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태우고 수희의 집으로 돌아오며 한두 번 중앙선을 넘어 지그재그로 달렸고, 클래식 음악과 웃음과 시덥잖은 말 몇 마디가 자동차 안에서 달아올랐다. 그가 나를 내려놓고 돌아갈 때까지도 수희와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고 그녀의 남편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제임스 민과 데이트 비슷한 것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범죄라면 완전 범죄였다.
그 뒤 거의 매 주 토요일 그는 불쑥 찾아와 나를 태우고 바닷가로 달렸다. 나는 수희와 술 파티를 벌이는 금요일 저녁이면 공연히 달떠 히죽거렸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수희는 모처럼 시누이 그늘에서 놓여난 내가 갈수록 요염해 진다며 놀려댔다. 금요일 밤 내내 수희와 파티를 벌일 때면 우리는 지난 시절의 구석에 처박혀 먼지를 뒤집어쓴 기억까지도 탈탈 털어 내어 화제를 삼았다. 스쳐지나간 아무 것도 아닌 것들까지 지껄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팅을 주선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사실은 내 남편을 파트너감으로 찍어놓았었다는 수희의 고백 같은 것이었다. 또 결혼식장에서 나를 보았던 수희의 남편이 내가 맘에 드는지 미국에 와서도 몇 번이나 내 얘기를 하더라는 얘기까지도. 그러니까 우리는 복선으로 그어진 인연의 멀고 가까운 교차점 안에서 서로를 흘깃거리며 살고있는 별 수 없는 족속들이었다.
제임스 민과 나도 새로 그어진 희미한 인연의 선상에서 한차례 재미난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필경에는 떨어지고야 말 서투른 줄타기를. 첫 번째 데이트에선 갈매기에 놀란 내가 그의 팔을 잡았고, 두 번째 데이트에서는 레스토랑을 나오던 그가 자연스레 내 어깨를 감쌌으며, 셋째 날은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았고, 넷째 날은 황혼까지 이어진 데이트에서 붉은 노을 속에 그가 나를 포옹했고, 밤까지도 돌아오지 못한 우리는 그날 기어이 입을 맞추고 억제할 수 없는 열정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하는 수 없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수희가 알 리 없었다. 다행히 그날 밤 내가 돌아왔을 때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금요일 저녁 집을 비운 수희의 남편은 보통 토요일 저녁이면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외식을 하는 것으로 그 전날의 외박을 얼버무렸다. 거기에 요즘은 아내의 친구와 그 아들이 합류하는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그 다음 금요일 밤, 와인을 가득 따라놓은 수희는 나를 다그쳤다.
“너 바람났지? 말해봐. 도대체 지난 토요일 어디를 갔었어? 자동차도 없고 길도 잘 모르는 게 어디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 나 너의 사촌 시동생 그 미끈한 제임스 민과 바람이 났다고. 갈 수 없는 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막 한발을 들여놓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수희와 술 파티를 벌이는 금요일과 제임스 민과 데이트를 즐기는 완전범죄의 토요일이 몇 번인가 지나갔을 때 나는 스스로를 태우는 열정에 입술이 타들어 갔다. 제임스 민은 이제 객석에 홀로 앉은 나를 위해 무대에서 속삭이는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성큼성큼 이미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온 나의 사람이었다. 영혼과 육체의 합일을 함께 꿈꾸는......
나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입술에서는 언제나 똑 같은 고백이 반복되었다.
“탐나!”
“무엇이요?”
“혜빈씨의 모든 것이 다!”
“그럼 그건 사랑이 아니군요.”
“모르겠어.”
“혹시 당신의 표현할 길 없는 외로움이 나에게로 이렇게 분출되는 것이 아닌가요? 당신의 잔잔한 일상에서 좀 낯선 존대인 나를 통해서 말이죠.”
“모르겠어. 그런 혜빈씨는?”
“그래요. 나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오랜 세월 억제된 나의 그 무엇이 당신으로 인해 이렇게 쏟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게 사랑인지 그건 나도 몰라요. 그러나 나는 금요일 저녁부터 당신을 만날 토요일을 기다려요. 당신이 보고싶어서요. 난 당신처럼 탐이 난다는 한마디 말로 나를 표현할 수가 없군요. 일주일을 잘 견디고 나면 그저 금요일 저녁부터 당신이 보고싶어 견딜 수가 없다고요. 마치 약효가 떨어진 마약환자처럼......”
그가 나를 안았던 손을 느슨히 풀며 웃었다.
“그럼 나는 혜빈씨의 마약인가? 단지 한순간을 몽롱하게 만드는...... 그건 결국 사람을 상하는 하는 성분을 지닌 것이잖아.”
“맞아요. 어쩌면 나는 당신으로 인해 상해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이런 순간의 몽롱함을 즐기느라 아주 깊은 내면은 병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를 올려다보던 내 눈앞이 흐려졌다. 말쑥한 그의 얼굴선이 두 개로 엇갈려 보였다. 내 눈가로 물기가 번져 나갔지만 그는 다시 내 허리를 잡아당겼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요.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통해 자신에 대한 이탈을 잠시 꿈꾸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렇죠. 당신은 전혀 한국적인 이미지를 지니지 못한 아내에게서 못 느끼는 향수를 내게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나한테서는 아직 서울냄새가 날 테지요. 그 복잡한 거리의 매연 속에 하얗게 바래버린 내 시니컬한 표정에서 말이죠. 그 반대로 당신에게서는 이국 냄새가 나요. 내가 알 수 없는 아스라한 세계처럼...... 거기엔 내 아픔을 잊게 해 줄 그 무엇이 숨어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요? 당신은 그런 영약을 숨기고 있는 건가요?”
나는 긴 숨을 머금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다와 하늘 한 가운데에는 타는 듯한 붉은 해가 걸려 있었다. 비스듬히 석양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 반쪽에 붉은 기운이 넘실댔다.
“모르겠어. 그저 난 혜빈씨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고요함이 좋아. 아니 그 고요함 속에 숨은 남보다 더 뜨거울 것 같은 어떤 열정이 좋아. 그리고 그 말투, 그 걸음걸이, 당신의 머리 속에 든 서울 거리, 그 익숙한 생활....... 모르겠어. 그냥 당신이 탐나!”
“그렇군요. 당신은 도대체 탐이 난다는 말밖에는 할 줄 모르는군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처음에 불쑥 나타나서 아침을 먹자고 할 때부터요.”
“아니...... 그냥 혜빈씨에게 다가가고 싶었어.”
“내게서 풍기는 서울 냄새에 끌려서?”
그가 말없이 웃었다. 수평선에 걸려있던 붉은 해가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붉은 기운에 젖어있던 그의 얼굴이 엷은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당신은 서울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당신은 나를 통해 이제는 잊혀져 가는 지난날의 익숙함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난 당신의 세계를 몰라요. 그 이국생활을 요. 나는 아마도 모르는 것을 동경하고 있나봐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보다 훨씬 위험해요.”
“그런 말하지마. 나는 우리말을 잘 엮어내는 기능조차 상실한 사람이야. 오래 전에...... 내 속엔 늘 영어와 한국말이 뒤범벅 되어있지. 하루 종일 직장에서 영어를 지껄이다 집에 오면 한국말 발음이 잘 되지 않아. 아예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아내와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 한국 신문을 보고 한국 텔레비전을 바라보지. 때로는 불편한 눈길로 바라보는 아내와 아이들의 눈 속에서 나는 어느 땐 동물원의 원숭이가 되는 것 같아. 그렇다고 내가 완벽한 미국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나의 세계란 별 것이 아니야. 고국의 정서를 잊어버린 외로움 그 이상은 아니거든.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고 있을 뿐.......”
내 허리를 꼭 끌어안는 그의 손길에서 깊고 차가운 고독이 내게로 밀려드는 듯 했다. 가슴 언저리가 몹시도 뻐근해 왔다.
“우린 다 외로워요. 그러나 서로 다르게 외로울 뿐이죠.”
길고 깊은 포옹을 했지만 우리는 둘 다 길이 없는 사막에 두 발을 다 빠뜨리진 못했다. 방향을 감 잡을 수 없는 사랑의 사막에 한 발을 넣고 서로 그렇게 껴안고 있었을 뿐. 헤어지는 순간엔 애써 체념된 열정이 그와 나의 눈 안에 고즈넉이 잠겨있었다. 일부러 수희의 집 뒤쪽 길에 나를 내려주고 가는 그의 자동차 꽁무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올 때면 그가 오늘밤은 아내와 더 깊은 잠자리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 오는 내 발걸음은 그와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점점 쓸쓸해졌다.
수희는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그나마 오늘은 겨우 와인 한 병에 잠이 든 그녀이다. 보통은 거의 두 병의 와인이나 어느 때는 그 이상 마셔댈 때도 있었다. 처음엔 그녀를 따라 곧잘 취기가 오르던 나는 제임스 민과 남몰래 만나면서부터 거의 한잔 선에서 술을 자제했다. 과음을 한 부석한 얼굴로 그를 만날 수는 없었으며 누구 앞에서보다도 나는 아름다워야 했다.
뭔가 괴로운 듯 몸을 뒤척이던 수희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혜빈아! 말해봐. 네가 누구하고 바람이 났느냐는 말야? 궁금해서 잠도 잘 안 오는구나.”
그녀는 유령처럼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헝크러진 머리칼과 퀭한 그녀의 눈이 한순간 내 기분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뭐야? 너 잠들지 않았어?”
“그래. 잤지. 그런데 꿈속에서도 궁금증을 못 이겨 도로 일어났어. 그러니 어서 말해봐.”
그녀는 잠이 덜 깬 무거운 눈까풀을 애써 치뜨더니 벌떡 일어나 찬장 안의 새 와인 병을 들고 왔다.
“어쩐지 오늘은 한 병에서 끝낸다 했더니......”
더듬대며 코르크마개에 와인따개를 쑤셔 넣는 수희의 손길엔 잠이 덜 깬 흔적이 역력했다.
“이리 줘. 내가 해줄께.”
나는 와인 병을 빼앗아 코르크마개를 비틀며 금방이라도 도로 잠이 들어버릴 것 같은 그녀의 충혈 된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수희야! 너 왜 그렇게 마셔대는 거야? 혹 네 남편 바람피우니? 그러니까 금요일마다 말야.”
무심히 내 손놀림만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입가로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바람피느냐고? 아니..... 그 반대야. 내가 바람이 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왜? 너 행복하잖아. 네 남편은 교포 1세로는 드물게 성공한 사업가이고 부자 백인동네에서 이 좋은 집에 살면서..... 아들아이도 그만하면 잘 키웠잖니. 서울에서 모두 부러워하는 미국교육을 시키고 말야. 아무렴 과부가 된 나에 비할려고......”
안간힘을 다해 따개를 비틀자 코르크 마개가 뻥 튀어나왔다. 향기로운 새 와인 냄새가 짜릿하게 코끝을 적셔왔다. 나는 이미 물기가 말라버린 수희의 크리스탈잔에 와인을 절반쯤 따라 주었다.
“과부? 너만 과부야? 사실은 나도 과부란다.”
수희는 힘없이 중얼대며 와인잔을 들었다.
“무슨 말이야? 과부라니.......”
의아해 하는 내 눈길 속에서 벌컥벌컥 와인을 들이키던 수희가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입가엔 붉은 와인이 피처럼 얼룩져 있었다.
“우리 남편 남자 구실 못한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서울에 나가던 그 10년 전부터..... ‘
나는 입을 벙긋 벌리고 한 순간 그녀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주말이 되면 더 죄책감이 느껴지는지 골프를 핑계로 집을 비운단다. 골프가 끝나면 아마 어디 마사지 팔러나 그런 데에 가서 젊은 여자에게 섹스가 없는 서비스를 받으면서 자신을 달래고 오는지도 모르지. 처음엔 그것이 한 달에 한 번쯤이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한 달에 한번씩 전화를 걸기 시작했을 때쯤....... 언젠가부터 그것이 일주일에 한번이 되더구나. 나는 너한테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를 걸기 시작했지. 그러니까 금요일 밤마다 혼자 술을 마시면서 말야.”
나는 갑자기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 왔다.
“그러면 네가 서울에 다니러 왔을 때 막 병치레를 시작하던 남편에게 시달리는 내가 측은해서 한 달에 한번씩 전화를 걸었던 것이 아니란 말이니? 그리고 내 남편이 죽고 나서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왔던 것도 그럼 우연의 일치였단 말야? 네 남편이 금요일마다 외박을 하기 시작한 것과........”
나를 바라보는 수희 눈에 서글픔이 어렸다.
“미안해. 혜빈아. 너를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견딜 수가 없었어. 어떻게 너의 불행과 나의 불행이 시간적으로 일치했을 뿐이야. 서로 다른 불행이었지만..... ”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허탈한 중얼거림이 내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나는 빈 내 술잔에 와인 병을 기울였다. 꾸륵 꾸륵 순식간에 와인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붉은 액체가 크리스탈잔 밖으로 넘치기 시작했지만 나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수희가 와인병을 나꿔챘다.
“혜빈아! 정신차려! 이 세상에 완벽하게 너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나도 그래. 내 고독에 못 이겨 너에게 국제전화를 걸었지. 그리고 내 고독에 너를 우리 집에 불렀고, 너를 통해서라도 즐거워지고 싶어 너의 예쁜 몸매를 돋보이게 해 줄 옷들을 사들인 거야. 나는 남편 사랑도 잃은 것이 몸매까지 망가졌지 않니. 너는 아직 아름다워.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기다릴 자격이 있어.”
나는 이미 커피 테이블로 흥건히 넘쳐난 술잔에 입을 대고 새처럼 와인을 들이켰다. 유리잔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내 귀속으로 수희의 냉정한 목소리가 바늘처럼 꽂혀왔다.
“이 바보야! 내 남편이 멀쩡했다면 내가 너같이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과부를 내 집에 불러들였을 것 같으니? 젊어서부터 네가 매력적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내 남편 눈에 이제 그림의 떡이 되어버린 너니까 불렀지.”
순간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힘이 모아졌던 눈까풀이 맥없이 풀어져 내렸다. 그저 비실비실 웃음이 머금어졌다.
“그랬어? 그래도 나는 너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어. 항상 나는 그래. 상대의 의도보다 더 많은 호의를 감지하고 살 때가 많거든. 사실 너로 인해 그 긴 시간을 잘 견딜 수가 있었어.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남편에게 이제는 모르핀조차도 효과가 없게 되었을 때도 태평양을 건너 울려오는 벨 소리와 함께 뭔가 혼곤한 듯한 너의 목소리를 기억했거든. 시누이의 잔소리에 시들어 가는 내 젊음이 억울할 때도 네 목소리를 기억했어. 나는 상관없어. 그것이 네 고통을 헤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해도.......”
잔잔히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에 수희가 흑 울음을 머금었다.
“빌어먹을 생활이란 것이 우리를 이렇게 좀 먹었구나. 백인 놈들 사이에서 악다구니를 물고 사업을 키워가던 내 남편은 어느 정도 사업이 궤도에 오를 무렵부터 시들해지기 시작했지. 스트레스로 인한 임포텐스였어. 그리고 영 회복되지 않더구나.”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멍청하게 바라보던 나는 그저 잔을 들어 와인을 덜썩 들이켜 버렸다. 그리곤 물었다.
“외로워? 그래서 외로운 거야?”
수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섹스라이프를 즐길 수 없는 것이 외로우냐고? 아니, 그건 아니야. 섹스가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냥 산다는 것이 서글플 뿐이야. 내 남편이 불쌍하고......”
“그렇구나.”
한동안 눈물만 찍어내던 수희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얘기 해봐. 네 상대는 누구야? 너 요즘 부쩍 달라졌어. 눈빛부터....... 네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해. 그렇지?”
수희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나에게 사건이 생겼어. 하지만 나는 또 상대의 아무렇지도 않은 호의를 너무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몰라. 너의 경우처럼....... 그 남자에게는 꼭 한 부분 외로움이 일렁이지. 극히 한 부분에서만 말야. 우연히 그의 외로움의 빈자리에 내가 꼭 맞아 들어갔을 뿐이야. 완벽하게 맞추었으나 단지 한 조각 찾을 수 없는 퍼즐조각처럼 우연히도 나는 거기에 딱 맞는 모양새를 하고있는지도 모르지.”
“그 사람이 누군데?”
“너도 아는 사람. 그러니까 너와도 가까운 사람.”
“설마 내 남편은 아닐테고....... 누구지?”
“숨기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어서 말해봐.”
“그래. 말할께. 그 사람....... 제임스 민.”
“뭐? 제임스?”
수희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전혀 짐작 못했니?”
“그래. 제임스는 약삭 바르다 싶을 정도로 침착한 남자야. 섣불리 일을 벌이거나 그럴 타입이 아니거든.”
“맞아.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어. 토요일마다 여러 차례 같이 밥을 먹었지. 파도소리가 들리는 해변에서......”
나는 긴 숨을 내쉬며 커피테이블 앞에 쪼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새벽으로 가는 어둠이 조금씩 엷어지고 있었다.
“혜빈아! 제임스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얘기해 줄까? 물론 이건 내 남편과 제임스가 남자들끼리만 했던 얘기지만 말야. 제임스는 내 남편이 남성기능을 상실했다는 얘기를 듣고 난 후부터 와이프와의 잠자리도 캘린더에 계획을 세워놓고 한다더라. 자기를 지킬 만큼 더도 덜도 아니게........ ”
창가에 망연히 선 내게로 이미 혀가 꼬부라진 수희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울려왔다.
“그리고 제임스는 말야. 무엇에든 정신을 잃지 않는 타입이야. 그 사람한테 자기를 잃을 정도로 사로잡힐 일이란 없어. 왜냐면 제임스는 자기 스스로에게 사로잡힌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나르시스처럼........ 그가 만일 너에게 몰입하고 있다면 정말 사랑을 하고있거나 아니면 잠시의 자기이탈일 거야.”
수희가 발음이 잘 안 되는 말투로라도 뭔가 분명히 말해두려 하는 것이 역력히 느껴졌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긴 숨소리와 함께 소파 위로 무거운 몸을 덜썩 눕히는 소리가 들렸다.
“내 심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사랑이길 바래. 그러니까 내가 서울로 돌아가고 난 후라도 내 모습을 진정한 사랑으로 남기고 싶다면 욕심일까?”
독백처럼 중얼대는 내 말에 갑자기 수희의 목소리가 커졌다.
“바보! 이 바보야! 너 제임스네 가족이 엊저녁에 여행을 떠난 것 알아? 그 사람이 오늘도 날이 밝는 대로 너한테 온다고 했니? 네가 떠나기까지 주말은 겨우 두 번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순간 찬바람이 휙 내 가슴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수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소파에 반듯이 누운 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제임스는 차근차근 자기 삶을 계획 속에 잘 운영하는 사람이지. 하지만 때론 정이 떨어지는 타입이야. 그 약은 인간이 잠시 우리 혜빈이를 이용했을까? 서울에서 온 너를 말야. 서울 생각이 났던 게지. 그렇지만 너를 정말로 좋아했을 수도 있어. 만약 그렇다면 내가 너를 위해 레이스가 달린 예쁜 속옷을 사주마. 그 속옷을 입고 다음 토요일엔 제임스와 여행이라도 다녀오렴. 갈 수 있다면 ......”
절반쯤 눈을 감은 수희의 목소리는 점점 힘이 없어졌다. 그녀가 잠에 빠져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마구 구겨진 채 엉덩이까지 말려 올라간 그녀의 잠옷자락을 내려주었다. 금새 그녀의 눈이 완전히 감기고 숨소리가 깊어졌다.
나는 커피 테이블 앞에 쪼그리고 앉아 수희의 잠든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마음이 너무도 고적해 왔다. 마치 한 잎의 가랑잎이 되어 어두운 벼랑으로 떨어져 날리는 것처럼..... 수희의 빈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잠이 든 그녀를 향해 잔을 치켜들었다.
수희야! 우리 파티를 계속하자. 잠이 들어 버리면 어떻게 해? 나는 하고싶은 말이 많은걸. 어찌 보면 나는 오래 전부터 네 고독에 희롱을 당해왔구나. 지난 10년 네 우정으로 내 생활을 잘 견디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어. 그런데..... 아니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네 덕분에 내가 잘 견디어냈던 것은 사실이니까.
나는 수희의 입 자국이 얼룩진 자리에 내 입술을 대고 천천히 와인을 들이켰다. 마치 그녀의 고독에 내 고독을 일치시킬 듯이........ 빈 잔을 내려놓을 때는 차가운 와인에 식혀진 온몸에 진저리가 쳐졌다. 이번엔 아직 절반이나 남은 내 술잔에 와인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 찰랑대는 붉은 액체를 잠이 든 수희의 얼굴 앞에 다시 치켜들었다.
자, 나의 친구야! 건배하자. 우리 이 밤의 파티를 계속하자. 우리의 한 자락 남은 젊음이 이렇게 가고있잖니. 어서 이 고독한 파티를 마무리해야지. 생각하면 고독해야할 시간도 사랑할 수 있는 시간도 그다지 길 것 같지는 않구나. 남은 생은 아직 가보지 않아서 그런지 무미건조한 흑백풍경일 것만 같아. 그래. 네 말대로 제임스가 잠시 날 이용했다해도 괜찮아.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말아. 일어나! 수희야! 너 그 말을 네게 해줘야지. 다만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아니 사랑이라고 말해 줘. 그리고 네 말대로 나에게 레이스가 달린 속옷을 사주지 않겠니. 정말 다음 토요일엔 그와 멀리 떠나고 싶다.
나는 또 한잔의 와인을 꿀꺽꿀꺽 마셨다.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둡던 창밖에 아스름히 빛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얼결에 창가로 다가가려고 일어선 내 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실내 풍경이 45각도로 기울어져 보였다. 새벽빛에 제 빛을 잃어 가는 노오란 램프와 그 아래 누운 수희의 풍만한 몸이 기울어진 채 숨을 쉬느라 배 언저리가 들썩거렸다. 가까스로 창가로 다가간 나는 새벽기운에 차가운 유리창에 볼을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길가로 뚫린 커다란 창문엔 흐린 수채화처럼 희끄무레한 새벽 풍경이 적요하게 걸려있었다.
제임스의 자동차가 미끄러져 들어올 토요일 아침을 이 새벽마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런데 그는 없다. 적어도 오늘 아침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수희의 말대로 그가 여행을 떠났다면......
마치 창을 밀고 밖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유리에 바싹 밀착되었던 볼 위로 차츰 얼얼한 기운이 느껴졌다. 5월이지만 캘리포니아의 새벽기운은 너무나 차가웠다. 마치 싸늘한 이성을 지녔다는 그의 한 부분처럼.......
이 찬 새벽에 그는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아직 너무 차갑기 때문이다. 햇살이 퍼질 무렵이면 그가 나타나리라. 꼭 오늘이 아니라도 말이다. 그리고 사랑이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좋다. 왜냐면 이 세상엔 꼭 사랑인 것도 없고 사랑이 아닌 것도 없으니까. 너는 너의 외로움으로 너를 찾고, 나는 나의 외로움으로 나를 찾아갈 뿐이니까. 우리에게 누군가를 위하여 자신의 고독을 바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얘긴가. 모두가 자기를 위하여 스스로의 고독을 태울 뿐이다.
얼얼한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허공을 딛듯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앉은 내 눈 속에서 잠결에 몸을 뒤척이는 수희의 모습이 흔들렸다. 고급스레 꾸며진 그 리빙룸이 통째로 흔들리고, 수희와 나의 삶이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침내 세 번째 와인의 병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쓸쓸히 울려오고, 그 밤의 파티는, 그 새벽의 파티는 그렇게 나 홀로 계속 되었다. 햇살이 번지는 따뜻한 아침이 오기까지.(2002년)
-2003년 [한국소설] 7월호- 2003년 발간 소설집 [안개의 칼날]에 수록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말해봐! 네가 사랑에 빠졌단 말이지?”
흐느적대는 수희의 태도에 이미 속을 털어놓을 맘이 가셔버린 나는 크리스탈 잔에 절반쯤 남은 붉은 와인을 덜썩 입에 털어 넣었다.
“얘! 너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말 안 할거야? 그게 누구냐니까?”
“그만둬. 내가 괜한 소리 했나봐. 그리고 너 좀 취한 것 같아. 그만 들어가 자라.”
갑자기 쌀쌀해진 내 목소리에 수희가 발끈했다.
“너 정말? 자긴 뭘 자! 이 절호의 찬스에 매력 있는 과부친구 우리 혜빈이의 사랑 얘기 좀 듣자는 데 뭐가 어때? 오늘 남편은 부재중. 그 사람은 골프시합이 있는 주말이면 밤새워 술을 마시고 어디서 뭘 하다 오는지 오후나 되어야 기어들어 온단 말야. 아들놈도 제 아빠 하는 짓 따라 꼭 오늘 같은 날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안 들어오거든. 그 녀석하고 같이 나간 네 아들도 오늘 들어오긴 틀렸으니 그리 알아라. 그게 사내자식들이니까 내버려두지. 계집애 같으면 내 속이 다 타버렸을 거야. 안 그래?”
수희는 아까부터 잠옷 바람이다. 앞가슴이 깊이 파인 올리브색 실크 나이트가운의 앞자락이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풍만한 가슴 골로 모였다가 펴지곤 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슬며시 웃음을 머금었다.
“수희야! 사랑에 빠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인 것 같아. 너 아주 섹시한데! 너 사실은 내 얘기를 듣기보다 네 속 얘기가 하고싶은 것 아냐? 항상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하는 것도 너고 자꾸 나를 재촉하는 것이....... ”
“야! 넌 참 눈도 없다. 내가 무슨 사랑에 빠질 자격이 있니? 너처럼 얼굴이 예쁘길 하니? 몸매가 봐 줄만 하길 하니?”
수희는 몸을 굽혀 커피 테이블에 놓인 와인 병을 거칠게 집어들었다. 헐렁한 나이트가운 사이로 그녀의 두 가슴이 둥근 공처럼 불거져 나왔다. 거의 병 바닥에 남은 와인을 컵에 따른 그녀는 그것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나는 수희가 곧 잠에 떨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여기 머물러온 지난 두 달 반 동안 그녀가 술에 취해 잠들어 버린 것이 벌써 여러 번이다. 나는 그녀의 그 자유가 부러웠다. 제 집이라고 아무렇게나 입고 아무렇게나 술에 취해 고꾸라지는 방종에 가까운 그 자유가 부럽기만 했다.
어느새 소파에 벌렁 드러누운 채 몸을 뒤척이는 그녀의 긴 잠옷자락은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 가 있었다. 옷자락 밑으로 드러난 수희의 탄탄한 두 종아리가 가위처럼 엇갈린 채 벌어졌다 오무려졌다 하기를 거듭했다. 그녀는 제 말대로 예쁜 여자는 아니었지만 나이치고는 아직 싱싱한 건강미가 있었다. 학교시절 해맑던 피부가 캘리포니아의 따가운 햇살 탓인지 좀 거무스름해 진 것이 오히려 그녀의 그런 매력을 더 돋보이게 했다. 그러니까 밤이면 남편의 손길이 그 탄력 있는 종아리를 스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그런........
순간 내 머리 속엔 수희와 그 남편이 몸을 뒤엉켜 누운 장면이 휙 지나갔다. 나는 흠칫 놀라 얼른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니 친구 집이랍시고 이렇게 오래 묵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이제는 그들의 안방 풍경까지 상상을 해보니 말이다.
그래. 석 달만 있다가 가. 아니 그보다 더 있어도 되지만 네 시누이가 석 달 동안만 휴가를 주었다면서. 그것도 네 남편 죽고 나서 5년 만에. 석 달이면 네 아들이 여기 적응할 시간으로는 충분해. 우리 아들놈하고 동갑이니 같이 붙여놓으면 영어도 금방 늘 거야. 걱정 말고 편히 있다가 가.
내 아이를 유학차 데리고 왔으니 좀 맡아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했던 것은 나인데 오히려 그녀가 내게 애원하고 있었다.
백인 부촌이라는 수희 네 집 근처의 사립 고등학교에 아이의 유학수속을 마치고 곧 돌아가려던 나는 그녀의 애원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처음엔 3개월의 휴가 중 한 달만 수희 집에서 지내고 나머지 두 달은 서울로 돌아가 무작정 쉬려던 참이었다. 그러던 것이 벌써 두 달 반이나 여기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금쪽같은 휴가는 이제 보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내 발목을 잡은 것은 사실 수희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희의 사촌 시동생 제임스 민이다. 나는 지금 그 얘기를 수희에게 하려던 참이었다. 네 사촌 시동생 제임스에게 발목이 아닌 마음을 잡힌 것 같다고 말이다.
수희는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옆으로 허물어진 그녀의 울퉁불퉁한 몸매 사이로 광택이 나는 실크잠옷이 제멋대로 휘감겨 있었다. 유복한 집안의 딸로 학교시절 조금은 천방지축이던 수희는 그런대로 인생을 잘 살아왔다. 미국이민을 준비하던 남자와 중매로 만나 결혼을 하자마자 서울을 떠났던 그녀는 처음 한 10년 동안은 1년에 한번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10년 만에 서울에 다니러 왔을 때 막 병치레를 시작하던 남편 수발에 시들어 가는 내 모습이 측은해 어쩔 줄을 모르더니 그 뒤부터 한 달에 한번은 꼭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대학시절, 그녀가 주선했던 미팅에서 만난 남자가 바로 내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수희는 나름대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달에 한번씩 수희의 전화를 꼭 예순 번 받았을 때, 그러니까 위암이란 진단을 받은 지 5년 만에 두 번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고통 속에 숨을 거두었다. 그가 떠난 후부터 수희는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그 모든 것이 자기 탓이기나 한 듯이.
출판사를 경영하던 손위 시누이는 혼자된 나를 자기 사무실로 끌어들였다. 남편의 병 수발에 얼마 안 되는 재산이 바닥이 난 것을 뻔히 아는 터라 호구지책으로 출판사에 나와 잡일이라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엔 홀로된 젊은 올케가 딴 짓을 못하게 감시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제 까짓 것, 한 10년 붙들고 있으면 어디를 가겠어. 그러면 쉰이 가까울텐데 설마 그 나이에 딴 짓을 하려고. 내 동생이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인데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딴 짓 못하게 꼭 붙들어두어야지.
아마 시누이는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출판업계에서는 성공한 편이었고, 시누이 남편의 사업도 번창하던 터라 혼자된 올케를 적당히 먹여 살리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남편의 생전에 시누이와 각별했던 정에 감복한 듯 군소리 않고 날마다 그녀의 사무실로 출근했다. 닥치는 대로 교정도 보고 경리장부도 정리하다보니 출판사 일 전체가 손바닥에 훤히 들어왔다. 그것이 몇 년 지나다보니 나는 어느새 출판사의 부사장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 겉모습은 부사장이 아니라 잡역부처럼 초라하기만 했다. 조금 짙은 립스틱만 발라도 눈을 치뜨는 시누이 때문에 나는 거의 화장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짧은치마나 몸에 꼭 끼는 옷은 입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봐. 올케. 혼자 사는 여자가 그렇게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다니면 어떻게 해. 날 좀 잡아 잡수 하는 것 같지 않아.
그녀의 그 점잖은 타이름에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젊음이 촌스러운 차림새 속에서 남모르게 가고 있었다.
나를 만났던 첫날 남편이 밤잠을 설쳤을 만큼 내가 예쁜 여자였다는 것을 있은 지는 오래였다. 나는 퍼머기 없는 머리를 하나로 동여매고, 늘 긴 치마와 헐렁한 블라우스를 입고 출근했다. 사장인 시누이에 의해 금단의 여자로 금이 그어진 내 앞에서는 사무실을 드나드는 작가나 서점 관계자들까지도 함부로 웃거나 농담조차 붙이지 않았다.
나는 고독했다. 그러나 시누이가 아니라면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보험설계사가 되거나 길거리 구멍가게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사실 고독해 할 자격조차 없었다.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대학시절이었을 망정 그래도 글줄 깨나 읽었다는 이력이 그나마 출판사의 일을 견뎌내게 했고, 시누이의 그늘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생활 중에 유일한 낙이 있다면 일주일에 한번씩 미국에서 걸려오는 수희의 전화였다. 딴엔 나를 위로한다고 비싼 국제전화를 걸어왔지만 사실 그녀도 이국생활을 무척 외로워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5년이 흘렀을 때 나는 감옥 아닌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었다. 그 빌미는 이미 유행처럼 번진 아들아이의 미국유학이었다. 너도나도 유학을 가는 것이 그만 세태가 되어버렸는지라 시누이는 쉽게 수긍을 했다. 그토록 사랑하는 동생이 남기고 간 일점혈육인데 싶어 눈물까지 글썽이던 그녀는 아이가 적응할 동안 미국에 머물다 오라는 허락을 했다. 그것이 3개월이었다.
수희는 내가 도착하던 이튿날부터 나를 백화점으로 끌고 다녔다. 촌스런 내 모습이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헐렁한 내 블라우스를 벗기고 몸에 꼭 맞는 셔츠를 입혔다. 무릎 밑에서 찰랑대는 구식 샤넬라인 스커트 대신 발목에서 허벅지까지 길게 찢어진 긴 스커트를 엉덩이가 꼭 끼게 입혀 놓았다. 그리고 발가락이 드러나는 붉은 샌들을 신겨주었다. 물론 피처럼 붉은 패티큐어와 함께.
순식간에 나는 선정적인 여자로 변신하고 말았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울려야 영어가 빨리 는다며 내 아들아이를 자기 아이에게 붙여놓고 그녀는 일요일이면 나를 데리고 교회에 갔고,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도 나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그녀를 따라 가는 곳마다 제임스 민이 있었다. 그는 수희와 같은 교회에 다녔고, 같은 동네에 살았으며 그들이 어울리는 사람들도 늘 같았다. 수려하고 세련된 외모에 항상 미소를 머금고있던 그는 나에겐 바로크시대 인물화 속의 주인공만 같았다. 그러니까 호기심과 아름다움에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기는 해도 내 개인과는 무관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수희네 시댁보다도 먼저 미국에 와 정착했던 수희 시 큰아버지의 막내아들이었으며 그가 미국에 온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고 했다. 제임스 민의 나이는 44세, 그러니까 수희와 나와 그는 동갑내기였다. 유창한 영어와 조금은 단어수가 빈약한 한국말, 그는 확실히 별세계 사람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의 아내는 아예 미국에서 태어난 교포 2세였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이국에서 태어난 탓인지 한국적 분위기라곤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그녀는 몹시도 세련되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은 둘 다 미국직장에 근무하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교포커플이었다.
몇 번인가 인사를 나누고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익숙해 졌을 무렵의 어느 토요일 아침 그가 불쑥 수희 네 집을 찾아왔다. 그 전날 골프를 친 수희의 남편은 버릇대로 밤에 들어오지 않았고 수희는 예의 나와 한밤에 술 파티를 벌이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어버렸다. 새벽에 들어온 아이들도 늦잠을 자고있던 터라 하는 수 없이 나 혼자서 그를 맞아야했다.
그는 동네를 산책하고라도 온 듯 연 하늘색 셔츠에 불루진을 입고 있었다.
“또 그 토요일이군요. 형님이 골프를 치고 외박하는 날 말입니다. 형수님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나요? 전에는 밤새도록 서울의 친구와 전화를 하고 새벽에나 잠이 든다더니 이제 그 친구 분이 아예 여기로 오셨으니 국제통화료라도 절약되는 셈인가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의 싱긋한 웃음을 바라보다 나는 그때서야 수희가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오던 날이 언제나 토요일 오후였음을 기억했다. 그러니까 LA시간으로 금요일 자정 무렵이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전화를 걸어오던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군요.”
내가 새삼스럽다는 듯 중얼대는 사이 그는 부엌 쪽을 기웃거렸다.
“아직 아침식사 전 이신가요? 이 집 주부는 일어나려면 멀었을 테구요. 이 집 주인도 아이들도 오리무중이군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나가셔서 간단한 아침식사라도 하시겠어요? 저는 토요일 아침이면 산책을 하다가 혼자 식사를 하기도 하죠.”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왜 그런지 가슴이 아스라히 내려앉았다. 뒷마당으로 뚫린 부엌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에 눈부시게 어렸다.
“네? 아침을요?”
나는 다만 그의 얼굴에 내려앉는 햇살에 눈이 부실 뿐이라는 듯 공연히 얼굴을 찡그렸다.
“우리 집 아이들과 아내도 오늘 아침은 다 제각각 입니다. 그야말로 주말 아침이거든요. 어때요? 같이 가시겠어요?”
미소를 머금은 그의 두 눈이 은근히 나를 압박해 왔다.
“그 그러죠. 뭐.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대로 나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뭐 좀 찍어 바르고 옷이라고 갈아입어야지요.”
허둥대는 내 모습에 그가 싱긋이 웃음을 머금었다.
“대충하고 나오세요. 나는 여자들의 긴 화장시간에 질린 사람입니다. 혜빈씨는 그냥 그대로도 아름답습니다.”
갑자기 내 눈이 번뜩 뜨였다.
아름답다고? 그대로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니 아름답다는 말을 들어본지가 언제였던지 기억이 아득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는 내 발걸음이 구름 위를 딛는 것 같았다. 입고있던 헐렁한 홈웨어를 급히 벗어버리고 수희가 사준 긴 스커트를 입었다. 옆이 길게 찢어진 검은 스커트 자락 사이로 허연 허벅지가 거울에 비춰졌다. 브래지어만 걸친 매끈한 상체가 옷을 갈아입느라 몸을 움직일 때마다 거울 속에서 어지럽게 흔들렸다. 언뜻 언젠가 시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얀 브래지어 사이로 불거져 나온 도톰한 가슴과 매끈한 내 어깨는 마치 날 잡아 잡수 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른 레몬 색 니트 셔츠를 꿰었다. 역시 수희가 사준 것이다. 거울 속에는 몸에 꼭 달라붙는 옷 속에 탐스런 몸매를 감춘 젊지도 늙지도 않은 한 여자가 속되게도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여자들의 긴 화장시간에 질렸다는 그의 말이 생각나 맨 얼굴에 립스틱만 바르고 방을 나오자 그는 벌써 현관밖에 서 있었다.
“아주 빠르시군요. 저기 내 자동차가 서 있는데 내 차로 가시지요.”
산책을 나왔다는 그의 말이 생각나서 나는 집 앞에 서 있는 베이지색 지프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 산책을 마치는 길로 집에서 자동차를 갖고 왔습니다. 혜빈씨와 아침식사 하러 가려고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성큼성큼 지프차로 걸어간 그는 조수석의 문을 열고 내가 타기를 기다렸다. 자동차로 다가가는 내 발걸음이 굽이 높은 샌들 탓인지 이상하게 뒤뚱거려 졌다. 문을 잡고 선 그의 눈길 속에서 나는 먼저 한 발을 차안에 올려놓았다. 수희가 칠해준 붉은 패티큐어가 진회색 카펫의 자동차 바닥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좌석에 앉기 위해 자동차 안으로 몸을 들이미는 찰나 옆구리가 터진 스커트 사이로 스타킹을 신지 않은 맨 다리가 허옇게 드러났다. 막 자동차 문을 닫으려던 그의 시선이 잠깐 내 다리에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무색하여 내가 스커트 자락을 여미는 사이 그는 어느새 운전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핸들에 얹혀진 그의 가무스름한 손에서 남성용 콜론수의 향이 코끝으로 슬며시 번져왔다. 부르릉-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반짝이는 아침 햇살 사이로 경쾌하게 퍼져 나갔다. 가로수의 잎새에 숨어있던 검은 새 몇 마리가 그 소리에 놀란 듯 푸드득 날아올랐다. 언덕길을 미끄러지는 자동차 안에 클래식 음악이 은은하게 울렸다.
“혜빈씨는 무슨 음악을 좋아하시죠?”
마치 그 옛날의 대학 시절, 미팅에서 처음 만났던 남편이 묻던 그런 말투였다. 언뜻 그 시절의 한 귀퉁이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익히 보았던 초상화 속의 인물과 같이 낯이 익으면서도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이 남자와 함께.
“뭔지는 몰라도 나는 클래식 음악이 좋더군요. 확실한 곡명을 모르는 것이 더 많지만 그래도 항상 클래식을 듣지요.”
“아 그렇군요. 그 점에 있어서는 나도 같아요. 이런 음악은 뭔가 영혼을 울리거든요.”
자동차가 커브를 도느라 내 몸이 잠깐 그에게로 쏠렸다. 한 순간 차창으로 쏟아지는 아침햇살과 카스테레오의 음악이 빛과 소리라는 엄연한 구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는 듯 했다. 깜박 내 머리 속의 모든 생각이 정지되었다고 느낀 순간 익숙한 음율의 곡명이 떠올랐다.
“이건 진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군요.”
“아 그래요? 참 그렇군요. 시벨리우스..... 나도 그 정도는 안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음악취향을 갖고 있는 셈이군요.”
그가 별로 웃을 일도 아닌데 한바탕 웃음을 머금었다. 한산한 도로에서 잠시 중앙선을 이탈한 자동차가 잠깐동안 지그재그로 달려갔다.
“조심하세요. 만약 이대로 사고가 난다면 우린 큰 오해를 받는답니다. 사실은 오해를 받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는 사람들이 말이지요.”
좁은 자동차 안에서 내 목소리가 비음을 내며 멋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교태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걱정 말아요. 혜빈씨 때문에 정신을 잃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말이죠.”
나직히 중얼대는 그의 말에 나는 의아한 심정이 되었다.
“무슨..... 무슨 그런 말을....... 제임스씨는 그저 내 친구 수희의 사촌이고 우리는 그냥 아침 한끼를 먹으려는 건데......”
더듬대는 내 말에 그는 다시 한바탕 웃어 제쳤다.
“그렇군요. 단지 아침 한끼 먹으려는 건데...... 내가 너무 과장했군요.”
곡선 길을 따라 내려가던 자동차가 다시 중앙선을 침범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은색 자동차 한 대가 멈칫 속도를 늦추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빼어 우리를 돌아보았다. 안경을 코에 걸친 백인 할머니였다.
창 밖으로 하늘과 바다가 펼쳐진 해변의 레스토랑에서 마신 향이 짙은 커피는 기분을 더 들뜨게 했다. 알싸한 커피 향기가 온통 내 머리 속을 흔들어 놓는 것 같았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감미로운 음악처럼 그는 싱긋한 미소와 낮으막한 말투로 그 아침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적어도 나를 위해서. 초상화 속의 그 인물은 이제 무대로 나와 오직 객석에 홀로 앉은 나를 위해 웃고 속삭여 주는 것이다. 시간이 길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정오가 가까워오자 창 밖의 햇살이 따갑게 느껴졌다. 연 하늘색이던 바다는 깊게 푸르러졌고 우리의 식사가 끝난 지는 오래였다. 붉은 샌들을 또각 거리며 레스토랑을 나오던 나는 머리 위를 스칠 듯 날아가는 커다란 갈매기에 소스라쳐 단 한번 그의 팔을 잡았다. 세상 무엇이라도 견디게 해줄 것 같은 단단한 그의 팔을......
그리고 다시 그의 자동차로 날름 올라탔을 때 또 옆구리가 찢어진 긴 스커트 자락 사이로 내 허연 허벅지가 보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태우고 수희의 집으로 돌아오며 한두 번 중앙선을 넘어 지그재그로 달렸고, 클래식 음악과 웃음과 시덥잖은 말 몇 마디가 자동차 안에서 달아올랐다. 그가 나를 내려놓고 돌아갈 때까지도 수희와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고 그녀의 남편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제임스 민과 데이트 비슷한 것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범죄라면 완전 범죄였다.
그 뒤 거의 매 주 토요일 그는 불쑥 찾아와 나를 태우고 바닷가로 달렸다. 나는 수희와 술 파티를 벌이는 금요일 저녁이면 공연히 달떠 히죽거렸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수희는 모처럼 시누이 그늘에서 놓여난 내가 갈수록 요염해 진다며 놀려댔다. 금요일 밤 내내 수희와 파티를 벌일 때면 우리는 지난 시절의 구석에 처박혀 먼지를 뒤집어쓴 기억까지도 탈탈 털어 내어 화제를 삼았다. 스쳐지나간 아무 것도 아닌 것들까지 지껄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팅을 주선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사실은 내 남편을 파트너감으로 찍어놓았었다는 수희의 고백 같은 것이었다. 또 결혼식장에서 나를 보았던 수희의 남편이 내가 맘에 드는지 미국에 와서도 몇 번이나 내 얘기를 하더라는 얘기까지도. 그러니까 우리는 복선으로 그어진 인연의 멀고 가까운 교차점 안에서 서로를 흘깃거리며 살고있는 별 수 없는 족속들이었다.
제임스 민과 나도 새로 그어진 희미한 인연의 선상에서 한차례 재미난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필경에는 떨어지고야 말 서투른 줄타기를. 첫 번째 데이트에선 갈매기에 놀란 내가 그의 팔을 잡았고, 두 번째 데이트에서는 레스토랑을 나오던 그가 자연스레 내 어깨를 감쌌으며, 셋째 날은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았고, 넷째 날은 황혼까지 이어진 데이트에서 붉은 노을 속에 그가 나를 포옹했고, 밤까지도 돌아오지 못한 우리는 그날 기어이 입을 맞추고 억제할 수 없는 열정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하는 수 없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수희가 알 리 없었다. 다행히 그날 밤 내가 돌아왔을 때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금요일 저녁 집을 비운 수희의 남편은 보통 토요일 저녁이면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외식을 하는 것으로 그 전날의 외박을 얼버무렸다. 거기에 요즘은 아내의 친구와 그 아들이 합류하는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그 다음 금요일 밤, 와인을 가득 따라놓은 수희는 나를 다그쳤다.
“너 바람났지? 말해봐. 도대체 지난 토요일 어디를 갔었어? 자동차도 없고 길도 잘 모르는 게 어디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 나 너의 사촌 시동생 그 미끈한 제임스 민과 바람이 났다고. 갈 수 없는 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막 한발을 들여놓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수희와 술 파티를 벌이는 금요일과 제임스 민과 데이트를 즐기는 완전범죄의 토요일이 몇 번인가 지나갔을 때 나는 스스로를 태우는 열정에 입술이 타들어 갔다. 제임스 민은 이제 객석에 홀로 앉은 나를 위해 무대에서 속삭이는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성큼성큼 이미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온 나의 사람이었다. 영혼과 육체의 합일을 함께 꿈꾸는......
나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입술에서는 언제나 똑 같은 고백이 반복되었다.
“탐나!”
“무엇이요?”
“혜빈씨의 모든 것이 다!”
“그럼 그건 사랑이 아니군요.”
“모르겠어.”
“혹시 당신의 표현할 길 없는 외로움이 나에게로 이렇게 분출되는 것이 아닌가요? 당신의 잔잔한 일상에서 좀 낯선 존대인 나를 통해서 말이죠.”
“모르겠어. 그런 혜빈씨는?”
“그래요. 나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오랜 세월 억제된 나의 그 무엇이 당신으로 인해 이렇게 쏟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게 사랑인지 그건 나도 몰라요. 그러나 나는 금요일 저녁부터 당신을 만날 토요일을 기다려요. 당신이 보고싶어서요. 난 당신처럼 탐이 난다는 한마디 말로 나를 표현할 수가 없군요. 일주일을 잘 견디고 나면 그저 금요일 저녁부터 당신이 보고싶어 견딜 수가 없다고요. 마치 약효가 떨어진 마약환자처럼......”
그가 나를 안았던 손을 느슨히 풀며 웃었다.
“그럼 나는 혜빈씨의 마약인가? 단지 한순간을 몽롱하게 만드는...... 그건 결국 사람을 상하는 하는 성분을 지닌 것이잖아.”
“맞아요. 어쩌면 나는 당신으로 인해 상해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이런 순간의 몽롱함을 즐기느라 아주 깊은 내면은 병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를 올려다보던 내 눈앞이 흐려졌다. 말쑥한 그의 얼굴선이 두 개로 엇갈려 보였다. 내 눈가로 물기가 번져 나갔지만 그는 다시 내 허리를 잡아당겼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요.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통해 자신에 대한 이탈을 잠시 꿈꾸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렇죠. 당신은 전혀 한국적인 이미지를 지니지 못한 아내에게서 못 느끼는 향수를 내게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나한테서는 아직 서울냄새가 날 테지요. 그 복잡한 거리의 매연 속에 하얗게 바래버린 내 시니컬한 표정에서 말이죠. 그 반대로 당신에게서는 이국 냄새가 나요. 내가 알 수 없는 아스라한 세계처럼...... 거기엔 내 아픔을 잊게 해 줄 그 무엇이 숨어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요? 당신은 그런 영약을 숨기고 있는 건가요?”
나는 긴 숨을 머금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다와 하늘 한 가운데에는 타는 듯한 붉은 해가 걸려 있었다. 비스듬히 석양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 반쪽에 붉은 기운이 넘실댔다.
“모르겠어. 그저 난 혜빈씨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고요함이 좋아. 아니 그 고요함 속에 숨은 남보다 더 뜨거울 것 같은 어떤 열정이 좋아. 그리고 그 말투, 그 걸음걸이, 당신의 머리 속에 든 서울 거리, 그 익숙한 생활....... 모르겠어. 그냥 당신이 탐나!”
“그렇군요. 당신은 도대체 탐이 난다는 말밖에는 할 줄 모르는군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처음에 불쑥 나타나서 아침을 먹자고 할 때부터요.”
“아니...... 그냥 혜빈씨에게 다가가고 싶었어.”
“내게서 풍기는 서울 냄새에 끌려서?”
그가 말없이 웃었다. 수평선에 걸려있던 붉은 해가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붉은 기운에 젖어있던 그의 얼굴이 엷은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당신은 서울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당신은 나를 통해 이제는 잊혀져 가는 지난날의 익숙함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난 당신의 세계를 몰라요. 그 이국생활을 요. 나는 아마도 모르는 것을 동경하고 있나봐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보다 훨씬 위험해요.”
“그런 말하지마. 나는 우리말을 잘 엮어내는 기능조차 상실한 사람이야. 오래 전에...... 내 속엔 늘 영어와 한국말이 뒤범벅 되어있지. 하루 종일 직장에서 영어를 지껄이다 집에 오면 한국말 발음이 잘 되지 않아. 아예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아내와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혼자 한국 신문을 보고 한국 텔레비전을 바라보지. 때로는 불편한 눈길로 바라보는 아내와 아이들의 눈 속에서 나는 어느 땐 동물원의 원숭이가 되는 것 같아. 그렇다고 내가 완벽한 미국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나의 세계란 별 것이 아니야. 고국의 정서를 잊어버린 외로움 그 이상은 아니거든.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고 있을 뿐.......”
내 허리를 꼭 끌어안는 그의 손길에서 깊고 차가운 고독이 내게로 밀려드는 듯 했다. 가슴 언저리가 몹시도 뻐근해 왔다.
“우린 다 외로워요. 그러나 서로 다르게 외로울 뿐이죠.”
길고 깊은 포옹을 했지만 우리는 둘 다 길이 없는 사막에 두 발을 다 빠뜨리진 못했다. 방향을 감 잡을 수 없는 사랑의 사막에 한 발을 넣고 서로 그렇게 껴안고 있었을 뿐. 헤어지는 순간엔 애써 체념된 열정이 그와 나의 눈 안에 고즈넉이 잠겨있었다. 일부러 수희의 집 뒤쪽 길에 나를 내려주고 가는 그의 자동차 꽁무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올 때면 그가 오늘밤은 아내와 더 깊은 잠자리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 오는 내 발걸음은 그와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점점 쓸쓸해졌다.
수희는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그나마 오늘은 겨우 와인 한 병에 잠이 든 그녀이다. 보통은 거의 두 병의 와인이나 어느 때는 그 이상 마셔댈 때도 있었다. 처음엔 그녀를 따라 곧잘 취기가 오르던 나는 제임스 민과 남몰래 만나면서부터 거의 한잔 선에서 술을 자제했다. 과음을 한 부석한 얼굴로 그를 만날 수는 없었으며 누구 앞에서보다도 나는 아름다워야 했다.
뭔가 괴로운 듯 몸을 뒤척이던 수희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혜빈아! 말해봐. 네가 누구하고 바람이 났느냐는 말야? 궁금해서 잠도 잘 안 오는구나.”
그녀는 유령처럼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헝크러진 머리칼과 퀭한 그녀의 눈이 한순간 내 기분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뭐야? 너 잠들지 않았어?”
“그래. 잤지. 그런데 꿈속에서도 궁금증을 못 이겨 도로 일어났어. 그러니 어서 말해봐.”
그녀는 잠이 덜 깬 무거운 눈까풀을 애써 치뜨더니 벌떡 일어나 찬장 안의 새 와인 병을 들고 왔다.
“어쩐지 오늘은 한 병에서 끝낸다 했더니......”
더듬대며 코르크마개에 와인따개를 쑤셔 넣는 수희의 손길엔 잠이 덜 깬 흔적이 역력했다.
“이리 줘. 내가 해줄께.”
나는 와인 병을 빼앗아 코르크마개를 비틀며 금방이라도 도로 잠이 들어버릴 것 같은 그녀의 충혈 된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수희야! 너 왜 그렇게 마셔대는 거야? 혹 네 남편 바람피우니? 그러니까 금요일마다 말야.”
무심히 내 손놀림만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입가로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바람피느냐고? 아니..... 그 반대야. 내가 바람이 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왜? 너 행복하잖아. 네 남편은 교포 1세로는 드물게 성공한 사업가이고 부자 백인동네에서 이 좋은 집에 살면서..... 아들아이도 그만하면 잘 키웠잖니. 서울에서 모두 부러워하는 미국교육을 시키고 말야. 아무렴 과부가 된 나에 비할려고......”
안간힘을 다해 따개를 비틀자 코르크 마개가 뻥 튀어나왔다. 향기로운 새 와인 냄새가 짜릿하게 코끝을 적셔왔다. 나는 이미 물기가 말라버린 수희의 크리스탈잔에 와인을 절반쯤 따라 주었다.
“과부? 너만 과부야? 사실은 나도 과부란다.”
수희는 힘없이 중얼대며 와인잔을 들었다.
“무슨 말이야? 과부라니.......”
의아해 하는 내 눈길 속에서 벌컥벌컥 와인을 들이키던 수희가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입가엔 붉은 와인이 피처럼 얼룩져 있었다.
“우리 남편 남자 구실 못한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서울에 나가던 그 10년 전부터..... ‘
나는 입을 벙긋 벌리고 한 순간 그녀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주말이 되면 더 죄책감이 느껴지는지 골프를 핑계로 집을 비운단다. 골프가 끝나면 아마 어디 마사지 팔러나 그런 데에 가서 젊은 여자에게 섹스가 없는 서비스를 받으면서 자신을 달래고 오는지도 모르지. 처음엔 그것이 한 달에 한 번쯤이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한 달에 한번씩 전화를 걸기 시작했을 때쯤....... 언젠가부터 그것이 일주일에 한번이 되더구나. 나는 너한테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를 걸기 시작했지. 그러니까 금요일 밤마다 혼자 술을 마시면서 말야.”
나는 갑자기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 왔다.
“그러면 네가 서울에 다니러 왔을 때 막 병치레를 시작하던 남편에게 시달리는 내가 측은해서 한 달에 한번씩 전화를 걸었던 것이 아니란 말이니? 그리고 내 남편이 죽고 나서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왔던 것도 그럼 우연의 일치였단 말야? 네 남편이 금요일마다 외박을 하기 시작한 것과........”
나를 바라보는 수희 눈에 서글픔이 어렸다.
“미안해. 혜빈아. 너를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견딜 수가 없었어. 어떻게 너의 불행과 나의 불행이 시간적으로 일치했을 뿐이야. 서로 다른 불행이었지만..... ”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허탈한 중얼거림이 내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나는 빈 내 술잔에 와인 병을 기울였다. 꾸륵 꾸륵 순식간에 와인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붉은 액체가 크리스탈잔 밖으로 넘치기 시작했지만 나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수희가 와인병을 나꿔챘다.
“혜빈아! 정신차려! 이 세상에 완벽하게 너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나도 그래. 내 고독에 못 이겨 너에게 국제전화를 걸었지. 그리고 내 고독에 너를 우리 집에 불렀고, 너를 통해서라도 즐거워지고 싶어 너의 예쁜 몸매를 돋보이게 해 줄 옷들을 사들인 거야. 나는 남편 사랑도 잃은 것이 몸매까지 망가졌지 않니. 너는 아직 아름다워.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기다릴 자격이 있어.”
나는 이미 커피 테이블로 흥건히 넘쳐난 술잔에 입을 대고 새처럼 와인을 들이켰다. 유리잔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내 귀속으로 수희의 냉정한 목소리가 바늘처럼 꽂혀왔다.
“이 바보야! 내 남편이 멀쩡했다면 내가 너같이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과부를 내 집에 불러들였을 것 같으니? 젊어서부터 네가 매력적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내 남편 눈에 이제 그림의 떡이 되어버린 너니까 불렀지.”
순간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힘이 모아졌던 눈까풀이 맥없이 풀어져 내렸다. 그저 비실비실 웃음이 머금어졌다.
“그랬어? 그래도 나는 너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어. 항상 나는 그래. 상대의 의도보다 더 많은 호의를 감지하고 살 때가 많거든. 사실 너로 인해 그 긴 시간을 잘 견딜 수가 있었어.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남편에게 이제는 모르핀조차도 효과가 없게 되었을 때도 태평양을 건너 울려오는 벨 소리와 함께 뭔가 혼곤한 듯한 너의 목소리를 기억했거든. 시누이의 잔소리에 시들어 가는 내 젊음이 억울할 때도 네 목소리를 기억했어. 나는 상관없어. 그것이 네 고통을 헤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해도.......”
잔잔히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에 수희가 흑 울음을 머금었다.
“빌어먹을 생활이란 것이 우리를 이렇게 좀 먹었구나. 백인 놈들 사이에서 악다구니를 물고 사업을 키워가던 내 남편은 어느 정도 사업이 궤도에 오를 무렵부터 시들해지기 시작했지. 스트레스로 인한 임포텐스였어. 그리고 영 회복되지 않더구나.”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멍청하게 바라보던 나는 그저 잔을 들어 와인을 덜썩 들이켜 버렸다. 그리곤 물었다.
“외로워? 그래서 외로운 거야?”
수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섹스라이프를 즐길 수 없는 것이 외로우냐고? 아니, 그건 아니야. 섹스가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냥 산다는 것이 서글플 뿐이야. 내 남편이 불쌍하고......”
“그렇구나.”
한동안 눈물만 찍어내던 수희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얘기 해봐. 네 상대는 누구야? 너 요즘 부쩍 달라졌어. 눈빛부터....... 네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해. 그렇지?”
수희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나에게 사건이 생겼어. 하지만 나는 또 상대의 아무렇지도 않은 호의를 너무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몰라. 너의 경우처럼....... 그 남자에게는 꼭 한 부분 외로움이 일렁이지. 극히 한 부분에서만 말야. 우연히 그의 외로움의 빈자리에 내가 꼭 맞아 들어갔을 뿐이야. 완벽하게 맞추었으나 단지 한 조각 찾을 수 없는 퍼즐조각처럼 우연히도 나는 거기에 딱 맞는 모양새를 하고있는지도 모르지.”
“그 사람이 누군데?”
“너도 아는 사람. 그러니까 너와도 가까운 사람.”
“설마 내 남편은 아닐테고....... 누구지?”
“숨기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어서 말해봐.”
“그래. 말할께. 그 사람....... 제임스 민.”
“뭐? 제임스?”
수희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전혀 짐작 못했니?”
“그래. 제임스는 약삭 바르다 싶을 정도로 침착한 남자야. 섣불리 일을 벌이거나 그럴 타입이 아니거든.”
“맞아.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어. 토요일마다 여러 차례 같이 밥을 먹었지. 파도소리가 들리는 해변에서......”
나는 긴 숨을 내쉬며 커피테이블 앞에 쪼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새벽으로 가는 어둠이 조금씩 엷어지고 있었다.
“혜빈아! 제임스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얘기해 줄까? 물론 이건 내 남편과 제임스가 남자들끼리만 했던 얘기지만 말야. 제임스는 내 남편이 남성기능을 상실했다는 얘기를 듣고 난 후부터 와이프와의 잠자리도 캘린더에 계획을 세워놓고 한다더라. 자기를 지킬 만큼 더도 덜도 아니게........ ”
창가에 망연히 선 내게로 이미 혀가 꼬부라진 수희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울려왔다.
“그리고 제임스는 말야. 무엇에든 정신을 잃지 않는 타입이야. 그 사람한테 자기를 잃을 정도로 사로잡힐 일이란 없어. 왜냐면 제임스는 자기 스스로에게 사로잡힌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나르시스처럼........ 그가 만일 너에게 몰입하고 있다면 정말 사랑을 하고있거나 아니면 잠시의 자기이탈일 거야.”
수희가 발음이 잘 안 되는 말투로라도 뭔가 분명히 말해두려 하는 것이 역력히 느껴졌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긴 숨소리와 함께 소파 위로 무거운 몸을 덜썩 눕히는 소리가 들렸다.
“내 심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사랑이길 바래. 그러니까 내가 서울로 돌아가고 난 후라도 내 모습을 진정한 사랑으로 남기고 싶다면 욕심일까?”
독백처럼 중얼대는 내 말에 갑자기 수희의 목소리가 커졌다.
“바보! 이 바보야! 너 제임스네 가족이 엊저녁에 여행을 떠난 것 알아? 그 사람이 오늘도 날이 밝는 대로 너한테 온다고 했니? 네가 떠나기까지 주말은 겨우 두 번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순간 찬바람이 휙 내 가슴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수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소파에 반듯이 누운 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제임스는 차근차근 자기 삶을 계획 속에 잘 운영하는 사람이지. 하지만 때론 정이 떨어지는 타입이야. 그 약은 인간이 잠시 우리 혜빈이를 이용했을까? 서울에서 온 너를 말야. 서울 생각이 났던 게지. 그렇지만 너를 정말로 좋아했을 수도 있어. 만약 그렇다면 내가 너를 위해 레이스가 달린 예쁜 속옷을 사주마. 그 속옷을 입고 다음 토요일엔 제임스와 여행이라도 다녀오렴. 갈 수 있다면 ......”
절반쯤 눈을 감은 수희의 목소리는 점점 힘이 없어졌다. 그녀가 잠에 빠져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마구 구겨진 채 엉덩이까지 말려 올라간 그녀의 잠옷자락을 내려주었다. 금새 그녀의 눈이 완전히 감기고 숨소리가 깊어졌다.
나는 커피 테이블 앞에 쪼그리고 앉아 수희의 잠든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마음이 너무도 고적해 왔다. 마치 한 잎의 가랑잎이 되어 어두운 벼랑으로 떨어져 날리는 것처럼..... 수희의 빈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잠이 든 그녀를 향해 잔을 치켜들었다.
수희야! 우리 파티를 계속하자. 잠이 들어 버리면 어떻게 해? 나는 하고싶은 말이 많은걸. 어찌 보면 나는 오래 전부터 네 고독에 희롱을 당해왔구나. 지난 10년 네 우정으로 내 생활을 잘 견디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어. 그런데..... 아니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네 덕분에 내가 잘 견디어냈던 것은 사실이니까.
나는 수희의 입 자국이 얼룩진 자리에 내 입술을 대고 천천히 와인을 들이켰다. 마치 그녀의 고독에 내 고독을 일치시킬 듯이........ 빈 잔을 내려놓을 때는 차가운 와인에 식혀진 온몸에 진저리가 쳐졌다. 이번엔 아직 절반이나 남은 내 술잔에 와인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 찰랑대는 붉은 액체를 잠이 든 수희의 얼굴 앞에 다시 치켜들었다.
자, 나의 친구야! 건배하자. 우리 이 밤의 파티를 계속하자. 우리의 한 자락 남은 젊음이 이렇게 가고있잖니. 어서 이 고독한 파티를 마무리해야지. 생각하면 고독해야할 시간도 사랑할 수 있는 시간도 그다지 길 것 같지는 않구나. 남은 생은 아직 가보지 않아서 그런지 무미건조한 흑백풍경일 것만 같아. 그래. 네 말대로 제임스가 잠시 날 이용했다해도 괜찮아.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말아. 일어나! 수희야! 너 그 말을 네게 해줘야지. 다만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아니 사랑이라고 말해 줘. 그리고 네 말대로 나에게 레이스가 달린 속옷을 사주지 않겠니. 정말 다음 토요일엔 그와 멀리 떠나고 싶다.
나는 또 한잔의 와인을 꿀꺽꿀꺽 마셨다.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둡던 창밖에 아스름히 빛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얼결에 창가로 다가가려고 일어선 내 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실내 풍경이 45각도로 기울어져 보였다. 새벽빛에 제 빛을 잃어 가는 노오란 램프와 그 아래 누운 수희의 풍만한 몸이 기울어진 채 숨을 쉬느라 배 언저리가 들썩거렸다. 가까스로 창가로 다가간 나는 새벽기운에 차가운 유리창에 볼을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길가로 뚫린 커다란 창문엔 흐린 수채화처럼 희끄무레한 새벽 풍경이 적요하게 걸려있었다.
제임스의 자동차가 미끄러져 들어올 토요일 아침을 이 새벽마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런데 그는 없다. 적어도 오늘 아침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수희의 말대로 그가 여행을 떠났다면......
마치 창을 밀고 밖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유리에 바싹 밀착되었던 볼 위로 차츰 얼얼한 기운이 느껴졌다. 5월이지만 캘리포니아의 새벽기운은 너무나 차가웠다. 마치 싸늘한 이성을 지녔다는 그의 한 부분처럼.......
이 찬 새벽에 그는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아직 너무 차갑기 때문이다. 햇살이 퍼질 무렵이면 그가 나타나리라. 꼭 오늘이 아니라도 말이다. 그리고 사랑이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좋다. 왜냐면 이 세상엔 꼭 사랑인 것도 없고 사랑이 아닌 것도 없으니까. 너는 너의 외로움으로 너를 찾고, 나는 나의 외로움으로 나를 찾아갈 뿐이니까. 우리에게 누군가를 위하여 자신의 고독을 바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얘긴가. 모두가 자기를 위하여 스스로의 고독을 태울 뿐이다.
얼얼한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허공을 딛듯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앉은 내 눈 속에서 잠결에 몸을 뒤척이는 수희의 모습이 흔들렸다. 고급스레 꾸며진 그 리빙룸이 통째로 흔들리고, 수희와 나의 삶이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침내 세 번째 와인의 병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쓸쓸히 울려오고, 그 밤의 파티는, 그 새벽의 파티는 그렇게 나 홀로 계속 되었다. 햇살이 번지는 따뜻한 아침이 오기까지.(2002년)
-2003년 [한국소설] 7월호- 2003년 발간 소설집 [안개의 칼날]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