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가 없으면 전체도 없다.-
1989년 2월말이었다. 새벽부터 또 옥식각신하다 대충 가방 하나를 꾸려 휭 현관을 나오고 말았다. 번지르르한 넉넉함을 갖춘 삶이었지만 왜 그런지 힘들기만 하던 날이었다.
너는 틀렸어. 그것이 신앙이야? 네 감수성 그것만 채우면 다야?
가장 가까운 사람의 핀잔 속에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조건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산 속 기도원을 가보라는 친구의 권유에,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태백시에 내리니 어둑어둑 해가 져갔다. 봄이 가까운 날이었는데도 산골엔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친구가 가르쳐준 대로 기도원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려했지만, 눈이 많이 쌓여 그날은 버스가 떠나지 못한다고 했다.
난감한 일이었다. 서울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고,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하룻밤 묵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섰다. 어떻게 정한 임시숙소 낯선 방에 처량한 심정으로 몸을 오그린 채 앉았다가, 문득 그날이 주일인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근처에 성당이 있다는 말에 나는 얼른 골목길을 따라 성당을 찾아갔다.
그러나 어둑신한 성당마당에 들어선 찰나, 갑자기 청소년 한 떼가 몰려오더니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나는 급히 성당 문을 잡아당겨 보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금방 울음이 터질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사제관’이라는 팻말이 붙은 낮은 건물의 출입문을 마구 두들겼다. 잠시 후 마음 좋게 생긴 아저씨 한분이 문을 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분은 그 성당 주임이신 김지석 신부님이셨다.
무조건 안으로 들어 선 나는 사제관의 낡은 의자에 앉자마자 그만 울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끝도 없는 내 푸념에 밤이 깊어가고, 내내 온화한 미소를 짓고 계시던 신부님은 내게 가만히 말씀하셨다.
“자매님이 다 옳아요. 자매님은 틀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너무 힘들군요. 이제 집에 돌아가면 이곳에 다녀갔던 걸 활력소 삼아 또 열심히 사시면 돼요.”
그 순간 내 가슴엔 상처의 피가 멎고, 벌어진 살 틈이 메워지는 것 같았다. 치유! 그것은 참말 치유의 기적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인정받는다는 기쁨에 달디 달게 잔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 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생활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또 힘겨워 울었고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그때마다 신부님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미주알고주알 편지를 쓰는 동안이면 이상하게도 내 맘 안에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렇게 2년쯤 흘렀을 때 내가 다니던 개포동 성당 주보에 강원도 산골 신부님의 사진이 커다랗게 실렸다. 원주교구 새 주교님으로 취임하신다는 것이었다. 주교님의 성성식 날 난생처음 가본 강원도 원주 땅, 우리나라 모든 주교님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한 식이 거행되었다. 식이 끝난 후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인 주교님께 겨우 30초쯤 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며 가슴속이 쓸쓸해 왔다.
이제는 전체를 보셔야 할 주교님! 저의 푸념은 그만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편지를 드렸다. 그러나 주교님은, 개체가 없으면 전체도 없습니다. 나에겐 자매님의 신앙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는, 주교님이 내게 베푸시는 존재의 봉사 속에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다.
지금도 고국에 갈 때마다 나는 꼭 원주에 들러 주교님의 덕스런 인품에서 평화를 충전 받는다. 내 생애 가장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인연, 오래 전 그 산골의 밤 나의 눈물은 실로 은총이었다.(*)
[아름다운 인연] 2007년 12월호
1989년 2월말이었다. 새벽부터 또 옥식각신하다 대충 가방 하나를 꾸려 휭 현관을 나오고 말았다. 번지르르한 넉넉함을 갖춘 삶이었지만 왜 그런지 힘들기만 하던 날이었다.
너는 틀렸어. 그것이 신앙이야? 네 감수성 그것만 채우면 다야?
가장 가까운 사람의 핀잔 속에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조건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산 속 기도원을 가보라는 친구의 권유에,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태백시에 내리니 어둑어둑 해가 져갔다. 봄이 가까운 날이었는데도 산골엔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친구가 가르쳐준 대로 기도원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려했지만, 눈이 많이 쌓여 그날은 버스가 떠나지 못한다고 했다.
난감한 일이었다. 서울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고,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하룻밤 묵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섰다. 어떻게 정한 임시숙소 낯선 방에 처량한 심정으로 몸을 오그린 채 앉았다가, 문득 그날이 주일인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근처에 성당이 있다는 말에 나는 얼른 골목길을 따라 성당을 찾아갔다.
그러나 어둑신한 성당마당에 들어선 찰나, 갑자기 청소년 한 떼가 몰려오더니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나는 급히 성당 문을 잡아당겨 보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금방 울음이 터질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사제관’이라는 팻말이 붙은 낮은 건물의 출입문을 마구 두들겼다. 잠시 후 마음 좋게 생긴 아저씨 한분이 문을 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분은 그 성당 주임이신 김지석 신부님이셨다.
무조건 안으로 들어 선 나는 사제관의 낡은 의자에 앉자마자 그만 울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끝도 없는 내 푸념에 밤이 깊어가고, 내내 온화한 미소를 짓고 계시던 신부님은 내게 가만히 말씀하셨다.
“자매님이 다 옳아요. 자매님은 틀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너무 힘들군요. 이제 집에 돌아가면 이곳에 다녀갔던 걸 활력소 삼아 또 열심히 사시면 돼요.”
그 순간 내 가슴엔 상처의 피가 멎고, 벌어진 살 틈이 메워지는 것 같았다. 치유! 그것은 참말 치유의 기적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인정받는다는 기쁨에 달디 달게 잔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 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생활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또 힘겨워 울었고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그때마다 신부님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미주알고주알 편지를 쓰는 동안이면 이상하게도 내 맘 안에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렇게 2년쯤 흘렀을 때 내가 다니던 개포동 성당 주보에 강원도 산골 신부님의 사진이 커다랗게 실렸다. 원주교구 새 주교님으로 취임하신다는 것이었다. 주교님의 성성식 날 난생처음 가본 강원도 원주 땅, 우리나라 모든 주교님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한 식이 거행되었다. 식이 끝난 후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인 주교님께 겨우 30초쯤 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며 가슴속이 쓸쓸해 왔다.
이제는 전체를 보셔야 할 주교님! 저의 푸념은 그만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편지를 드렸다. 그러나 주교님은, 개체가 없으면 전체도 없습니다. 나에겐 자매님의 신앙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는, 주교님이 내게 베푸시는 존재의 봉사 속에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다.
지금도 고국에 갈 때마다 나는 꼭 원주에 들러 주교님의 덕스런 인품에서 평화를 충전 받는다. 내 생애 가장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인연, 오래 전 그 산골의 밤 나의 눈물은 실로 은총이었다.(*)
[아름다운 인연] 2007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