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동아줄 김태수
음식 없는 모임은 맛이 없다.밋밋하다. 음식은 사람이 모일 때에 마음을 이어주는 촉매 역할을 한다. 친지들이 가끔 우리 집에 모인다. 각자 집에서 요리해 온 음식을 상위에 펼쳐놓고 정겨운 이야기를 나눈다. 배가 부르고 흥이 오른다. 얼굴에는 웃음꽃이 핀다. 접시와 그릇에도 웃음꽃이 묻어나 수북이 쌓인다.
접시와 그릇들이 허기진 감정과 배를 채워주고 돌아와 개수대에 몸을 부린다. 포만감을 담아 나른 흔적만 남긴 채 쑤셔박힌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만, 화려한 변신을 기다린다.
씻어내고 헹궈놓은 접시들이 윤이 난다. 물기를 닦아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기분도 상쾌해진다. 찌꺼기가 말라붙어 있으면 여간해서 벗겨지지 않는다. 제때에 씻어 닦아놓지 않고 묵히면 때가 절어 벗겨내는 데도 힘이 든다. 자국이 남기도 한다.
일상에서 겪은 스트레스도 그때그때 씻고 닦아내지 않으면 병이 되기도 한다. 마음의 때도 시간이 지날수록 벗겨내려면 더 힘들게 만든다. 마음의 설거지도 자주 해야 할 일이다. 그 마음의 설거지가 자성과 묵상이 아닐까? 자신을 되돌아보고 용서하는 일 말이다.
설거지는 순서가 중요하다. 당장 필요한 용기를 먼저 부셔야 함은 당연하다. 간단한 것, 작고 가벼운 것, 쉽게 씻어낼 수 있는 것부터 한다. 찌꺼기가 달라붙어 있는 것과 눌은 음식들은 먼저 물에 불려놓는다.
일에도 순서가 있다. 기한 안에 처리해야 할 일, 간단하고 쉽게 끝낼 수 있는 것부터 한다. 복잡하고 판단이 잘 서지 않는 일은 다음으로 미룬다. 엉겨붙은 생각이 명상에 잠겨있다 보면 풀리기도 하고, 어디서 맺고 끊어야 할지 우선순위가 정해지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시작은 화려하게 해 놓고 마무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여태까지 벌여놓았고 이뤘으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끝내라는 식이다.
용두사미나 유종의미가 설거지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뒤처리는 어수선하고 불필요한 찌꺼기들이 끼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볼품도 없고 생색도 나지 않는 뒤처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지치고 고단한 하루를 잠속에 내려놓아야 산뜻한 새 아침을 맞을 수 있듯이 설거지도 그렇다. 맛있는 요리를 받쳐주는 것은 깨끗한 그릇이다.
아들딸 자리 잡고 살게 되면 부모는 석양의 단풍잎이 된다. 인생의 설거지가 시작되는 셈이다. 곧 낙엽이 되어 가족과 사회라는 나무를 떠나게 된다. 자신을 내려놓고 새봄으로 스며야 한다. 나목이 새잎을 돋우고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화려했던 지난날과 가슴 한편에 쌓인 원망과 아쉬움의 때를 벗어던져야 한다. 아집을 경륜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진취적인 기상을 꺾거나 가르치려 들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집안의 설거지는 여자들 몫이었다. 남자들이 부엌에 들어가는 것조차 채신머리없는 일로 여겼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란 탓으로 결혼하고 나서도 설거지는 그대로 대물림해 왔다. 초창기 바쁜 이민생활에서도 아내는 맞벌이 일을 하며 집안일과 설거지를 도맡아 해왔다. 그때는 이를 당연히 여겼다.
요즘은 음식을 먹고 난 다음 내가 먼저 설거지통으로 가는 일이 잦다. 가끔 아내가 먼저 설거지를 시작하면 남은 음식 정리하여 냉장고에 보관하는 일과 설거지가 끝난 그릇을 닦아 제자리로 갖다 놓은 일을 한다.
세척기와 건조기를 이용해서 설거지하는 가정이 많다. 나는 설거지를 할 때 될 수 있으면 합성세제를 쓰지 않는다. 세척기와 건조기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기름기가 많아 어쩔 수 없이 세제를 쓸 때에도 꼭 필요한 만큼의 최소한으로 줄인다. 종이컵과 종이 접시 등 일회용 용기도 편리하긴 하지만 사용하는 만큼 산림을 황폐화하고 오존층을 파괴한다고 믿어 될 수 있으면 삼간다.
종교의식에 세례가 있다. 속세에 물든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의식이다. 죄악을 씻어내고 깨끗한 몸과 마음을 견지하겠다는 약속이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다짐이다. 이는 자신을 뉘우침과 기도로 깨끗이 씻고 말씀과 계율로 닦으며 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교의 가르침 속에 자신을 담가 가며 씻고 닦는 설거지인 셈이다.
자연과 생태계도 설거지를 통해 새로워진다. 해묵은 찌꺼기를 봄비로 씻어내고, 맑은 햇살로 말려 윤기를 낸다. 깨끗하게 씻은 자연이라는 그릇에 파릇하게 윤기나는 새봄이라는 음식을 담는다. 이름만 다를 뿐이지 설거지를 통해 세상은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진다. 세차, 목욕, 청소 등 겉모습을 씻어내는 일뿐만 아니라 영성 수련과 묵상, 참선, 명상 등 인성 내면을 정화하는 일들이 설거지일 것이다.
설거지의 필요조건은 비움이며 충분조건은 기다림이다. 찬장을 열어본다. 그릇들이 사랑과 정성과 배부름을 담아 건네주기 위해 한몸이 된 채 빈 몸으로 기다리고 있다. 찬장마다 모양과 색깔, 크기는 제각각이어도 끼리끼리 어울려 한 생각을 담고 있는 듯이 가지런하다. 쓸데없는 욕심을 비우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