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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담는 그릇
                                                                                                                                                                               동아줄 김태수(Thomas Kim)

   의자는 필수품이다. 사람 사는 곳엔 어디든 의자가 있다. 앉아서 부담스러운 것이 있고, 앉아보고 싶은 것이 있고, 앉아야만 하는 의자가 있다. 의자는 사람과 단짝을 이루어 무슨 일이든 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졌다. 사람을 변화시킨다. 외로울 땐 다정한 벗이고, 복잡할 땐 대화이고 피곤할 땐 쉼터이다. 어디 이뿐인가. 우리가 지키고 가꿔가야 할 자리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모습과 생활을 하는 것처럼 의자도 각양각색이다. 또한, 놓인 위치에 따라 주목받는 의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의자가 있다. 바쁜 의자가 있고 한가한 의자가 있다.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다정하다.

   마주하고 있는 의자는 대화하는 의자다. 식탁에 둘러앉아 마주하며 가족이 식사를 즐긴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일체감을 가진다. 원탁 테이블에 마주하고 앉은 회의 석상은 난제를 풀어가가는 대화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의자는 서로 다른 이야기와 주장을 연결하는 연결고리 의자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뛰어다니는 징검다리다.

   비어 있는 의자는 기다리는 의자다. 있어야 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아서 주인을 기다린다. 왠지 허전하다. 결속력과 구속력이 없어서 끄는 힘이 없다. 그렇지만 비어 있으니 꾸밀 것도 감출 것도 없다. 오히려 헛된 자존심을 지키려 앉아 있는 의자보다 백번 낫다. 당연히 있어야만 한다는 편견도 없다. 있으면 더 좋고 없어도 지낼 만한 괜찮은 존재, 때로는 한동안 없이 지내는 빈 의자가 필요할 때도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호숫가와 공원 산책길 옆에 놓여 있는 긴 의자가 그렇다. 다정한 연인들의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는 의자다. 뜨는 해를 맞이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 의자다. 자연에 순응하며 순리대로 살아가는 의자다. 비가 오면 빗물에 흠뻑 젖어보고, 눈이 오면 하얀 이불을 뒤집어쓰고 겨울잠을 잔다.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을 때도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만 찾아오면 누구든 불러올 수가 있다고 믿어 묵묵히 기다린다. 그러다가 꽃이 피면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고, 피곤한 사람이 다가오면 기꺼이 자리 내줌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법원의 의자는 권위와 서열의 의자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변명하는 의자다. 제각기 보호색으로 치장하고 유리한 점만 돋보기를 들여댄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니 이를 바로 잡아가야 할 권위가 필요하다. 행여 불리한 진술이 될까 봐 잔뜩 긴장하고 말을 아낀다. 조심스러운 의자들이라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높은 자리의 의자는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닫힌 벽 속에 가두기도 한다.

   우리 몸은 구조상 오래 서 있거나 구부린 동작을 계속하고 있으면 피로를 빨리 느낀다. 바른 자세로 편안하게 앉아있으면 몸과 마음도 편안해져 바른 생각이 담긴 기대와 집중력이 나온다.
허리가 좋지 않은 나는 쉽게 피로를 느낀다. 가게에서 온종일 서 있으면 다리가 뻐근해진다. 그럼에도 얼마 전 이 허름한 높은 의자를 사들이기 전까지는 온종일 서서 일했다. 앉기를 거부했다. 피곤해도 다리 근력과 건강을 위해 서서 버텼다. 의자가 있으면 나태해질까 봐 아예 있는 의자까지 치워버렸다. 의자에 길들면 더 편해지고 싶어하므로.

  그런데 아들은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시간만 있으면 의자에 앉아 컴퓨터와 죽고 못 산다. 골프장에서도 가끔 젊은 친구들이 전동차를 운전하며 라운딩하는 모습을 본다. 젊은 사람은 운동이 그리 필요하지 않으니까 편히 앉아 쉬어도 되지만, 나이 먹은 사람일수록 운동이 더 필요하니 걸어야한다는 게 나의 주관이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건강이 받쳐줄 때 일이지 몸이 말을 안 듣는 데는 방도가 없다. 이러한 나의 주관이 바뀐 것은 최근의 일이다. 피부가 가려워 피부과에서 준 처방 약을 바르고 먹어도 그때뿐이고 낫질 않았다. 자연식과 체질 개선을 결심하고 3일 단식을 실시했다. 단식 둘째날 일하면서 어지러움이 일고 힘이 빠질 때 새삼 의자의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저 엉덩이라도 걸터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음은 고마울 뿐이다. 이제는 나도 아들을 많이 닮아가고 있다.

   손님이 없을 때 한가해지면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본다. 온몸의 피로를 의자 위에 내어 놓는다. 밋밋하고 꾸밈이 없는 딱딱하고 보잘 것 없는 의자다. 그래도 나는 이 의자가 좋다. 내 온몸을 받쳐주면서도 한마디 불평이 없다. 언제든 내 마음대로 깔고 짓누르며 뭉개대도 아프다는 소리 한 마디 없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몸이 편하니 마음도 편해져 낯빛이 좋아진다. 의자의 표정은 앉아 있는 그 사람의 얼굴빛이다. 힘겹게 싸워 쟁취한 그 자리는 승리의 환한 빛이 감돌고, 패배자, 낙선자의 그 자리는 얼굴에 아쉬움과 실망의 빛이 감돈다.

   건강한 사람의 얼굴빛은 맑다. 성격이 불같은 사람은 화를 낼 때마다 붉어질 것이며, 어두운 사람은 근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솔직한 사람은 얼굴빛도 분위기에 좌우됨 없이 당당하고 담담할 것이다. 생각의 옷을 깔끔하게 자신의 크기에 알맞게 맞춰 입은 사람은 말과 행동이 어눌해도 샘물처럼 담백한 맛이 배 있다. 원칙적인 사람은 삿된 생각과 욕심을 베어내니 그 얼굴엔 정갈함이 스며 있다. 싫어함과 좋아함이 확실한 사람은 은밀한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니 자아의식이 뚜렷하다. 겸양한 자의 얼굴엔 구도의 빛이 맴돈다.

   나는 믿는다. 얼굴은 그 사람의 살아온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을. 그래서 생각과 뜻을 담은 그릇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 얼굴빛도 자리매김에 따라 달리 평가된다. 힘들고 거친 길을 달려온 사람의 얼굴엔 고난의 깊은 골이 파였어도 뜻을 이룬 자에게는 연륜과 지혜의 표징이 된다. 그러나 실패한 자에게는 그것은 험상궂은 얼굴일 뿐이다. 이처럼 의자는 앉아있는 사람의 자리매김이고 얼굴 표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 사람을 담는 그릇이고 인생을 담는 그릇이다.

  오직 사람들만 인위적으로 의자를 만들어 자리보존을 하고 있다. 동물은 만들어 놓은 자리 틀이 없으니 자연 속에서 길들어 당연한 것으로 잘도 적응하며 살고 있다. 자연스러운 동작이 이끄는 대로 앉거나 눕거나 날고 뛰어다닐 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의자를 만들어 형식을 앉혀놓았다. 권위를 앉혀 놓고 질서를 유지해 왔다. 보이지 않는 끈을 그 위에 앉혀 놓고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싫어도 앉아야만 하는 의자가 됐다.

   나의 의자는 어떤 의자일까? 생각해본다. 앉아서는 안 되는 의자. 남들이 권유하면 내게 어울리는 걸로 생각하고 슬그머니 못 이긴 채 앉아버리는 수락 의자. 지금 앉아 있는 의자가 정이 들고 편안하여 버리지 못하고 애착을 갖는 미련 의자. 떠날 때 아쉬움 남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지 못하고 남겨둔 빈의자. 폐기된 의자 대신 어떻게든 다른 것으로라도 사용해보려는 대체 의자. 무엇보다도 이웃과의 나눔에 나서지 못하고 자신의 주위만 챙기며 빙글빙글 도는 안일한 회전의자는 아닌지.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내가 살아온 의자를 물려받아 마주앉아 있을까? 김치 냄새, 가족 냄새 풍기는 식탁에 둘러앉았던 이 의자를. 내가 앉아 있는 의자를 흔들어 본다. 아직은 멀쩡하다. 멀쩡한 의자를 놓아두고 더 좋은 고급 의자로 바꿀 생각은 전혀 없다. 내게 맞는 의자로 함께해온 편안함을 그저 즐기고 싶다. 때가 되면 힘들여 만든 이 편안한 의자 위에 책임과 의무를 앉혀 물려줘야만 한다. 그 때까지 나는 지금 의자의 점유권 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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