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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형과 삼시 세판

동아줄 김태수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3학년 3월 초였다. 우리 학교는 3학년까지 줄곧 남녀공학의 한 학년이 한 학급인 시골 학교였다. 서너 명 만 빼고는 모두 중학 동창들이었다. 어느 날 형뻘 되어 보이는 낯선 사람이 교실에 나타났다. 교복을 입곤 있었지만 의젓해 보였다. 그는 내 초등학교 5년 선배였고 25살이었다. 우리는 그를 C형으로 불렀다. 집이 멀었던 나는 학교 근처에서 C형과 자취하며 학교에 다녔다.

  6월 초 농번기 방학을 이용하여 30여 명이 단체 여행을 가기로 했다. 들뜬 기분으로 준비물을 챙겨 버스를 타려다 생활지도 교련 선생님에게 걸렸다. “바쁠 때 집안일 도와주게 하려고 방학을 했는데 너희끼리 작당하여 놀러 가. 이놈들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는 호통에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속리산 여행을 감행하자는데 다시 의기투합하였다. 비상연락으로 모인 20여 명이 007작전 당일치기 졸업여행 겸 수학여행을 떠났다. 선생님의 지시를 무시하고, 미성년자인 남녀 학생들이 지도교사도 없이, 농사일은 돕지 않고, 단체로 놀러 간다는 것은 용납될 일이 아니었다. 실장이었던 나와 연장자였던 C형이 처벌받을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C형은 어렵게 편입학했는데 일이 잘못되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학우들을 위해 모험을 했던 것이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동생들을 보살펴야만 한다는 책임의식이 일었을 것이다. 그때에는 극장, 당구장에도 못 가게 했고, 끼리끼리 여행하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C형은 방과 후엔 사회인이었다. 그의 친구들과 어울려 자유롭게 담배와 술을 즐겼고, 가끔 나도 함께 형들과 어울렸다. 그런 C형이라서 교칙이라는 속된 기준보다는 순수한 개인의 자유 의지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돌아가려는데 속리산에서 대전까지 교통편이 문제였다. 늦게 출발하여 지연된데다가 막차 연결 편을 놓쳐 밤까지 귀가하기는 어려워져 갔다. 이때 C형이 기지를 발휘했다. 돌아가는 관광버스 기사와 흥정을 벌여 일반 차비를 계산해주고 대전까지 전세하기로 한 것이었다.

  차 안에서 우리끼리 마음껏 떠들고 놀았다. 그러다가 커브 길에서 서 있던 친구가 유리창 쪽으로 쏠려 나갔고, 팔꿈치로 들이받아 차창유리가 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변상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기사는 으름장을 놓았다. 친구의 멍든 팔과 찢어진 살갗은 문제가 아니었다. 피는 멈추고 상처는 아물면 될 일이지만 몰래 놀러 간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웠다. 이번에도 C형이 있는 돈 모아 타협하여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고 논리적이었다.

  관광버스 기사의 잘못도 컸다. 불법으로 돈을 받고 운행했고, 과속으로 급커브를 돌아 다치게 했고, 부상자를 방치했다. 어른이라는 사람이 순진한 학생들의 주머닛돈을 털어가고서도, 크게 선심 쓰듯 하며, 제멋대로 둘러 부치는 게 꼴사나워 보였지만,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의 약점을 잡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기사에게서 울분을 느꼈다. C형도 나와 같은 감정이었다. 그러나 C형은 기사의 잘못을 지적하여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리더란 하고 싶은 말 대신 먼저 들어주어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C형은 제대하고 편입학한 늦깎이 학생이었다. 편입하기 전까지의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입대하기 전까지 7, 8년간 몸으로 부딪치며 힘든 사회 초년생 과정을 경험했을 것이다.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할 만큼 가난했지만 기죽지 않았고, 제때에 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5년의 공백을 메꿔가는 그의 과정이었다. 그는 5년 과정을 1년에 따라잡고 졸업했다.

  나는 틀에 박힌 학교생활에 하기 싫은 과목을 공부해야만 하는 게 짜증이 나서 자퇴를 2번이나 하면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교 편의에 따라 짜인 교과 과정에, 하기 싫은 보충수업을 일률적으로 실시하는 학교가 싫었다. 나의 튀는 성격과 행동을 이해해주고 조언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C형이었다. 엉뚱하고 무모한 나의 행동에도 그는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용기라고 추켜올렸고,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아도 분석력과 비판의식이 뛰어나다고 감싸주었다.  

  C형은 중소기업 골재 회사 사장직을 정년퇴직하고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있다. 주역을 더 파고들어 볼 생각이란다. “형, 5년 더 살겠다는 약속 지키려 담배 끊었어? 이젠 10년은 더 살겠네. 괜히 나만 억울해지네.” 하는 나의 농담에 너는 동아줄처럼만 살라고 한다. 동아줄은 함께 자취할 때 그가 붙여준 나의 닉네임이다. 그 이름이 40년 만에 부활하여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 마다 따라다닌다. 지금도 그는 나의 친구이자, 형님이며, 조언자이다.

  다음 한국 방문 때에는 만사 제쳐놓고 C형과 함께 동창생 모임부터 가져보려 한다. 내가 미국에 이민 오는 바람에 가까이 지내는 열대여섯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4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친구들이다. 생각만 해도 그들의 모습이 자못 궁금해진다. 기타를 잘 쳤던 친구, 노래를 잘했던 친구, 피가 철철 흐르면서도 아무 소리 못 하고 풀이 죽었었던 그 친구, 땀흘리며 태권도를 함께 했던 친구들이 어디서 뭘 하며 살고 있는지?

  그는 나에게 말하곤 했다. 5년 더 살아야 한다고. 그 말 속에서 그의 의지가 꿈틀대고 있음을 느낀다. 문제는 늦은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고. 그 뒤 나도 C형의 말을 되새겨보곤 한다. 3년은 더 살아야 한다고. 정상적인 과정을 밟은 친구들에 비해 나는 3년 정도 늦었다. 학교 졸업, 군대, 취업, 결혼, 아이들 교육까지 차례대로 늦어졌다. 가끔 힘들 땐 나 자신에게 말하곤 한다. “ 3년은 해봐야지 않겠어?” “그래야 3년을 더 살 수 있는 자격이 있지 않겠어?” 시작했으면 3년, 3번은 도전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은 C형의 덕분이다. ‘삼시 세판’은 나를 끌어주는 원동력이 되더니 이제는 자신감(Confidence), 도전(Challenging mind), 협동(Collaboration)의 ‘3C 새 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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