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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 /김일석

구름은 아무 뜻 없이 제 몸을 펴지 않고
나무도 가지 하나 제멋대로 뻗지 않는데
무심한 호흡 한 줄기 지나는 자리마다
기억상실의 무게를 더하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시간의 눈금들이
일방통행 다리 되어 기다리고 있네

해 시침 지구 분침 따라 기껏해야 3만여 날
초침 되어 헐떡이며 일수 도장 찍는 목숨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구르고 넘어지며
마구 삼킨 욕심으로 소화불량 시달리나
티눈처럼 뿌리 뻗은 고집으로 매달리네

육체의 시작과 끝은 같은 방향이나
정신의 시작과 끝은 다른 방향이라
삶과 죽음의 시작과 끝은 허공이네

한낱 거미줄 같은 숨줄 기를 붙잡고
유한한 몸과 무한한 마음의 수평을 잡는 일
일등 꼴등도 잘잘못도 거기엔 없네

김일석 씨의 ‘수평’을 읽고 / 동아줄 김태수    

앵커리지 한인신문과 교차로에 많은 창작 글(시)들이발표되고 있다. 한국인의 정서와 아름다운 우리글을 갈고 닦는 동시에 글쓴이와 읽는 이가 함께 느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역할을 하는 의미 있는 일로 앵커리지 한인사회를 위해서도 좋은 현상이다. 한국문인들의 작품은 논외로 하고 최근에 실린 앵커리지 현지인들의 창작 글 중 눈에 띄는 시가 김일석 씨의 “수평”이었다.
발표된 대부분의 시가 깊은 사유에서 묻어나오는 시라기보다는 신앙고백적이거나 일상적인 감상이나 회상적인 느낌과 생각을 상투적으로 표현한 것들인데 반해 이 시는 그렇고 그런 시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는 다른 여타 시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첫연 부터 의미심장하다.
“구름은 아무 뜻 없이 제 몸을 펴지 않고/나무도 가지 하나 제멋대로 뻗지 않는데 “가 그렇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다 천지조화 속에 있고, 나뭇가지 하나도 제멋대로 뻗지 않고 자연 환경에 조응해 가는데 화자는 왜 무심하게 의미 없는 시간을 축내고 있는가? 하고 물음을 던진다. 한번 흘러가버리면 돌아오지 못하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일방통행 다리다.
일방통행 다리는 되풀이되는 생활 속에서 스테레오 타입이 되어버린 우리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의 생활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안고 가야만 하는 것이 현재 처해 있는 현대인의 삶이기도 하다.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기억상실의 무게를 더하지 않고는/지나갈 수 없는 시간의 눈금들이/일방통행 다리 되어 기다리고 있네 ” 부분이다. 너무 비틀어 놓아서 언뜻 무얼 말하려는지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시에 있어서 비틀기는 새로운 맛을 주는 것은 분명하나 그 의미가 모호해지도록 너무 비틀면 뜻의 전달이 불분명해진다.
시의 첫행은 아주 중요하다. 이 시는 이런 면에서 첫 연부터 독자의 눈을 붙들고 있다.

도입부인 첫 연의 바쁜 현대인의 일상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두 번째 연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화자의 시상을 펼쳐나가고 있다. 해의 공전은 1년인데 이를 시침으로 , 지구의 자전은 하루인데 이를 분침으로 그리고 하루하루의 삶은 초침으로 비유하며 너무 빨리 지나치는 시간의 덧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딪치고 해결해야 하는 일상의 일들은 분명 일수도장을 찍듯 의무적인 부담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집과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이것들을 좇아 소화불량이 되고 티눈이 되어 괴롭히는 어리석음으로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3연에서는 삶이란 무엇인가?  결국 무에서 왔다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시작과 끝이 둘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허공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연상케 한다. 육체의 시작은 태어남이고  끝은 죽음이다. 이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모두 같은 방향으로 간다. 그러나 정신세계는 시공을 초월하여 오감이 제 마음대로여서 같은 방향이라 말할 수 없다. 생각이 미치는 대로 자유왕래를 하니까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육체의 삶과 죽음의 세계,시작과 끝의 세계도 모두 허공 속에 묻혀 있다. 이는 분명히 선의 경지이고 도통의 경지이다.

이러한 도통의 경지에 비춰보다 화자는 문득 거미줄 같은 인생을 생각한다. 그리고 집착에서 벗어나 유연한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경쟁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부족하다고 탓할 필요도 없는 그런 세계를 동경한다. 결국, 수평을 잡는 일은 마음이 평정된 상태 선에 든 경지와 다를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류의 시관은 지나치면 달관주의나 신선사상에에 빠지기 쉽다. 극단적 허무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3연에서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을 직접 거론함으로써 큰 담론으로 치닫고 있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또한, 선의 경지, 허공으로 감싸고 모든 것을 품어버리는 좀 막연하고 너무 큰 담론을 구체적인 일상의 일로 형상화 시키지 못한 것도 부담으로 다가온다. 무릇 감동을 주는 시는 이러한 거창한 큰 담론보다는 작은 담론으로 구체적인 형상화가 뒷받침될 때 좋은 시가 된다.
그럼에도 앵커리지 다른 작가들의 시에서 보지 못했던 산뜻한 표현, 예컨대, 무심한 호흡 한 줄기 지나는 자리마다/
티눈처럼 뿌리 뻗은 고집으로 매달리네/한낱 거미줄 같은 숨줄기를 붙잡고 등은 매우 참신함을 더해주어 큰 담론의 경직감을 누그러뜨려서 좋다. 마지막 연이 전체의 흐름에 비해 좀 약한 느낌이다. 여운을 남기며 맺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눈에 띄는 참신한 표현 등은 앵커리지 한인사회에서 글 쓰는 사람들이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모처럼 앵커리지 한인신문에서 좋은 시 한 수를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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