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팸 햄

 

아시아인의 미국이민문호가 개방된 후 70년대에 한국에서는 새 생활의 터전을 찾는 많은 이민자들이 이민보따리를 챙겨들고 미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으로의 이민이 지금보다 훨씬 쉬웠던 시절 살기 힘든 한국을 떠나 수중에 몇 백 불의 미화를 소지하고 나도 미국행을 택했다. 한국인이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새로 이민자가 들어오면 이미 들어와서 어설프게나마 자리 잡고 살던 한국인들이 반가워하며 같이 모여서 신참자가 거처를 찾을 때 까지 방을 빌려주기도 하고 담요, 그릇 또는 집에서 쓰던 가구 따위 새로 생활을 시작하는 데에 필요한 물건을 들고 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도록 도와주곤 했다. 이 시절 한인교회는 이런 이민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는데 교회를 이끄는 목사님이 이삿짐도 날라주고 영어로 된 아파트 계약서도 읽어주고 같이 청소도 해주면서 풍요롭지 못한 이민자들의 힘이 되어 진정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 일했다. 요새 로스앤젤레스에서 돈 많은 대형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어 군림하면서 금전사고, 여신도와의 스캔들 따위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그런 위선적 부류와는 전연 다른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아마 금전과 성공 앞에서는 하느님의 사역자 역시 타락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 당시 우리는 모두 가난했지만 같이 도와주고 서로 기대면서 주류사회 사람들이 혀를 차고 놀라며 칭송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주말에는 돌아가면서 하우스 파티하고 한국에서는 제대로 먹어볼 수 없었던 고기, 스팸 햄, 쏘시지 등을 불판에 구어서 나눠먹으며 우리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하고 울먹이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한국에서 이상한 짓해서 많은 돈 축적했다가 빼돌려서 가지고 온 부자들은 국민의 눈을 두려워하며 워싱턴디씨의 저택에서 살았는데 같은 한국에서 온 한국인이지만 우리에게 그들은 마치 외계인 같이 생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돈이 있었지만 우리는 떳떳했고 이웃이 있었고 정이 있었고 외롭고 어려우면 기댈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보다 행복했다.

내가 정착했던 볼티모어에 그 당시 리커스토어를 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던 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의 열일곱 살 난 딸아이가 자꾸 가출을 하고 학교에도 제대로 가지 않아서 무척 고민하고 있었다. 그 부모님은 모두 사교성 있고 남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훌륭한 분들이었는데 사랑으로 가정교육을 잘 시켜도 이상하게 비뚤어지기만 하는 딸을 그렇게도 걱정했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흑인아이와 연애를 하기 시작해서 마치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었다. 어느 날 이 딸은 그 흑인아이와 가출하여 뉴욕으로 달아나 버렸다. 전화가 와서 간단하게 엄마 나 뉴욕에 왔어, 잘 있어, 걱정하지 마, 하고 미처 뭘 물어볼 사이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단다.

그로부터 7개월여 후, 장대같은 비가 억수로 퍼붓던 날 밤, 리커스토어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오니까 문간에 생쥐처럼 젖은 딸아이가 만삭이 다 되어가는 배를 부둥켜안고 떨며 엉엉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임신중절수술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서 이제는 그냥 낳는 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하며 울던 어머니의 절망적인 얼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열일곱 살 아이는 아기를 낳았다. 강보에 싸여 아무것도 모르고 조그만 팔다리를 휘젓고 있던 유난히도 까만 갓난아기를 나도 보았다. 그 때 열일곱 살이었던 그 딸도 이제 중년이 되었겠다. 그렇게 축복 없이 태어났던 아기는 지금 청년이 되어 있겠지. 그 점잖고 친절하며 새로 한국에서 이민 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임시거처를 제공하기도 하고 일자리를 주선해 주기도 하며 좋은 일을 많이 하던 그분들은 아직도 생존해 계실까?

(20191021일 조선일보 김영문의 응접실게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1 신이 버린 땅 (중편 소설) 김영문 2019.10.23 100
50 글 쓰는 것은 취미가 아니다 [2] 김영문 2019.10.23 209
49 곽셜리씨의 출판기념회에 붙이는 글 김영문 2019.10.23 82
» 007 스팸 햄 (조선일보 칼럼 '김영문의 응접실' 102119) 김영문 2019.10.23 55
47 006 익스클루시브 (조선일보 칼럼 '김영문의 응접실' 101419) 김영문 2019.10.23 50
46 005 형님 (조선일보 칼럼 '김영문의 응접실' 100719) [1] 김영문 2019.10.23 62
45 "법치국가와 법" 조선일보 김영문의 응접실 제 4 회 김영문 2019.09.30 74
44 "풍요 속의 빈곤" 조선일보 김영문의 응접실 제 3 회 김영문 2019.09.29 60
43 "이민 초년병" 조선일보 김영문의 응접실 제 2 회 [1] 김영문 2019.09.27 65
42 "백인 예찬" 조선일보 김영문의 창작실 제 1 회 김영문 2019.09.27 38
41 여름이 끝나는 계절 김영문 2019.09.27 24
40 마지막 대화 김영문 2019.09.27 15
39 미주한인방송 1일 DJ 방송 [2] 김영문 2016.12.14 179
38 오인동 박사님의 "밖에서 그려보는 통일의 꿈"을 읽고 [1] 김영문 2014.11.02 386
37 수진아, 수진아 (제 8 회) 김영문 2014.10.26 492
36 수진아, 수진아 (제 7 회) 김영문 2014.10.26 104
35 CHRISTMAS AND JACK 김영문 2014.10.26 150
34 수진아, 수진아 (제 5 회) 김영문 2013.07.14 197
33 수진아, 수진아 (제 6 회) 김영문 2013.07.14 349
32 백야 김영문 2013.07.14 182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1
전체:
17,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