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2013.07.14 03:52

김영문 조회 수:172 추천:18

                                      백야

                                                                                                                                                                                                                                                        (1)

  불행은 소리없이 온다. 불행은 예고하지 아니하고 전연 생각할 수 없었던 때에 생각할 수 없었던 곳에서 생각할 수 없었던 형태로 온다. 나는 이것을 소름 끼치도록 잘 알고 있다.
  
  이선영은 여자다운 조심성을 가지고 빙판길을 운전하고 있었다. 해가 빨리 지는 12월 오후 6시쯤. 주위는 벌써 깜깜했다.
  목적지 까지의 나머지 부분을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해서 나는 운전대를 맡긴 후 옆 좌석에 앉아서 차창 밖에서 다가왔다가 뒤로 물러나는 풍경을 반쯤 졸리워 가라앉은 눈으로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아무런 불길한 조짐도 없었다. 바깥의 얼어붙은 날씨와는 상관 없이 히터가 작동하고 있는 차 안은 쾌적했다. 좌석 등받이를 반쯤 뒤로 제치고 편안히 앉은 나는 두 팔을 깎지 끼어 베개 삼아 머리 뒤에 대고 게으름을 피우며 멀거니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 속도로 간다면 아직도 두 시간 정도는 더 가야 서울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앞뒤 좌우의 모든 차량들도 눈 온 뒤 얼어붙은 미끄러운 빙판 길을 조심스럽게 서행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나의 눈에 대향 차선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트레일러 트럭이 아주 먼 곳에서부터 유난히도 나의 주의를 끌고 있었다. 꾸물거리는 차량의 물결에 섞여 조그맣게 보이는 그 트럭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것처럼 모였는데도 유독 나의 눈을 끌었다. 트럭은 점점 더 가까워져왔다. 그 것은 건축용으로 보이는 철근 파이프를 여러 개 실은 덮개 없는 평판 트레일러였다. 더 가까워져서 자세히 보이게 되자 내 눈에는 이상하게도 굵은 파이프 하나가 트레일러에 고정시키고 있는 쇠사슬에서 빠져 나와 그 뒤 부분이 육중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만약 내가 했다면 중간 중간 두어 군데 더 쇠사슬을 써서 고정시켰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트럭은 더 가까이 다가오고 앞 부분의 쇠사슬로만 고정되어 있던 그 파이프가 어느 순간에라도 튕겨져 나올 것이라는 위험이 확실해졌다.        
  이 위태로운 상황을 본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위의 차량들이 다급히 경적을 울려대며 트럭 운전수에게 위험 신호를 보냈다.
  "어마, 저 트럭 봐. 위험해."
  운전하던 선영이 소리 질렀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트럭 운전수는 악셀을 밟아 속력을 내 버렸고 앞쪽의 사슬로 간신히 매달려 있던 무거운 쇠 파이프는 드디어 뒤로 빠져 나와 얼어붙은 아스팔트 길에 한 번 튕겼다가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악! 안 돼!"
  내가 마지막 들은 선영의 비명 소리였다.
  엄청난 굉음이 들리고 살을 베어내는 것 같은 찬 바람이 태풍처럼 쏟아져 들어온 후 내 모든 감각은 작동을 정지해 버리고 말았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기억 나지 않았다.
  얼마만한 시간이 흘렀는지 나는 모른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비명 소리와 여러 명의 외치는 소리에 나는 조금씩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내 정신이 희미하게 들어오면서 처음 느낀 것은 손에 흠뻑 젖어 만져지고 있는 끈적거리는 액체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얼굴과 머리가 깨져서 반쪽만 남아 내 가슴에 기대어 누워 있는 선영을 보았다. 그 쪼개져 벌어진 두개골에서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무서운 추위 속에서 덩어리져 가는 피 속에 선영의 깨진 머리에서 나온 하얀 골수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리 위에는 지붕을 뚫고 들어온 그 시커먼 쇠 파이프가 거대한 공룡의 다리 모양을 하고 멎어 있었다.
  나는 짐승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온 몸에 힘이 모두 빠져 나가서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사지가 걷잡을 수 없이 와들와들 떨렸다. 반만 남은 선영의 머리가 내 가슴에 괴물처럼 놓여서 엄청나게 많은 피를 쏟아내고 있어도 그 것을 치워낼 힘이 없었다. 피가 엉겨 붙은 두 손을 허공에 들고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그저 무의미하게 짐승의 소리 같은 비명만 내지르고 있었다.

                                                                                                                                                                                                                                                (2)

  매일 똑같은 생활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다가 갑작스럽게 그 틀이 깨어지면 이질감을 느끼게 되고 어리둥절해져서 마치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된다.                    지난 3일 동안을 나는 그런 기묘한 느낌으로 살았다. 마치 오래 동안 감옥소에 있다가 해방되어 보따리 하나 들고 길바닥으로 팽개쳐진 죄수처럼 익숙하지 않은 자유에 가슴 설레면서 어쩔 줄 몰라 서성거리는 엉거주춤한 상태로 살았다.
  항상 정신을 못 차리게 뛰고 떠들고 부수고 난장판을 만들던 네 살, 여섯 살 짜리 두 아들을 데리고 그 아이들 못지않게 목소리가 거센 아내가 공휴일이 낀 3일의 주말을 이용해서 친정 부모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나들이를 다녀 온다고 해서 비행장 까지 데려다 주고 온 것이 3일 전이다. 그 후 그 이상하게 텅 빈 것 같은 3 일 동안을 나는 마치 미아가 된 기분으로 살면서 이 혼자만의 호젓한 시간을 최대한으로 살려서 평소에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려고 애썼지만 그 사흘 동안 내가 한 것은 묵은 책을 뒤적이다가 낮잠을 자거나 혼자서 공원에 나가 우두커니 앉아서 오가는 사람 구경하다가 들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오래 동안을 직장과 집 사이만 오가며 한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아이들과 거센 아내의 돌풍 속에서 똑같은 생활을 쳇바퀴 돌듯 반복해 살아온 나는 이제 내가 평소에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잊어버린 백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창 패기만만하던 시절에는 그렇게도 많은 꿈과 벅찬 희망이 있었는데 지금 그 모든 것은 그저 그런 한 때도 있었다는 추억 정도가 되어 힘없이 등뒤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이상을 품고 살았는지 조차 기억해 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허망한 기분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집 앞의 공원에 나가서 길 잃은 아이처럼 벤치에 앉아 멍하니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나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어슬렁거리며 걸어서 집으로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15분. 밤 9시 45분 비행기로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아내와 행동력이 막강한 두 아이들의 삼인조 부대를 마중 나가서 태우고 집으로 오는 일 이외에는 더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오후였다.
  아파트로 돌아온 나는 문을 따고 들어섰다. 너무나도 조용하고 평온한 그 안의 분위기가 마치 남의 집에 들어온 것 같아서 서먹하게 까지 느껴졌다. 별로 한 것도 없이 훌쩍 지나가 버린 그 3일 동안의 연휴가 허전하고 아까웠다. 그러나 꼭 무엇을 하며 지냈어야 가치 있고 만족스러운 연휴였을까 하고 스스로 물어보니 그 또한 똑똑한 답이 없었다. 시간을 아끼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것들을 했어야 한다고 후회해 보지만 그 진짜 하고 싶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나 스스로도 정확하게 알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직장과 가정에 매어서 살면서 나는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것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진짜 바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선 음악을 틀어 놓자. 옛날에 듣던 음악을 들으면서 이제 남은 몇 시간을 무엇을 할 것인지, 얼마나 알차게 이 나 혼자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가치 있게 쓸 것인지 생각하기로 하자.
  나는 플레이어에 전원 스위치를 올리고 콘솔에서 아무 거나 손에 닿는 씨디 음반을 하나 꺼내 꽂았다. 잠시 기다리자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 곡이!  나의 가슴이 쿵쾅거리고 뛰기 시작하고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져 달아나며 나는 카펫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필이면 이 곡이! 그 것은 내가 선곡했고 그 날 콩쿠르에서 이선영이 피아노로 연주했던 곡이었다.
  나는 간신히 떨리는 손을 뻗어 플레이어를 중단시켰다. 방안은 다시 무겁게 침잠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한참을 정신 잃고 서 있던 나는 후들거리는 무릎으로 쏘파로 가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생각해서는 안 되는 그 날이 다시 되돌아 오고 있었다.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산에서 열린 전국 음악 콩쿠르에서 대상을 차지하고 서울로 돌아오던 피아니스트 이선영이 고속 도로에서 교통 사고로 현장에서 숨졌다. ..... 피투성이로 처참한 사고 현장에는 흐트러진 꽃다발이..... 동승했던 애인 이철수는 앰뷸런스에 실려서 병원으로 이송되고....
  음악계의 원로들도 사고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말하고 있다.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재능을 가진 음악도가 미처 피어나지도 못하고....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반쪽만 남은 머리에 피 흘리며 내 가슴에 안겨 있던 이선영과 그 참혹했던 순간이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 났다. 두 손에 끈적거리고 흘러내리던 피도 그냥 내 손에 묻어서 흘러 내렸다.
  나는 부들거리고 떨며 몸을 일으켜 부엌의 벽장 속에서 위스키 병을 꺼냈다. 급히 컵을 찾아 거칠게 붓고 선 자리에서 꿀꺽거리며 숨도 쉬지 않고 몇 모금 마셨다. 그 처참했던 사고 현장은 잊으려고 애쓰는 만큼 더 생생하게 남아 있다가 지금처럼 뜻하지 않은 때에 발작하듯 되살아 나서 나를 괴롭히곤 했다. 마음 속에서 씻어 버리려고 그렇게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고 마치 망령처럼 끈질기게 따라다니다가 이렇게 이따금 튀어나와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위스키의 화끈거리는 열기가 목을 지나가더니 잠시 기다리자 떨리던 손이 조금씩 멎었다. 나는 다시 몇 모금 더 마셨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잊혀질 것인가. 얼마나 더 살아야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될 것인가.
  갑자기 들이킨 위스키가 위력을 발휘하는지 온몸이 화끈거리고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취기가 돌면서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다. 나는 더 마시고 더 취하고 싶어졌다. 9시 몇 분인가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 아내는 택시를 타고 오면 된다. 나는 마시고 싶다. 마시고 취해서 잊고 싶다.
  나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참 이상하다. 그렇게 서로 하나가 없어지면 죽을 것 같이 사랑했는데, 선영이가 없어진 다음에도 나는 죽기는 커녕 다른 여자 찾아서 아이 둘 낳고 떠들면서 잘 살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참 이기적인 동물이다. 이선영이 죽은지 불과 한 두 해 남짓의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안타깝고 가슴 찢어질 것 같이 괴롭던 감정도 희석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그저 그렇게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아직도 기억 나는 것은 그 끔찍스러운 반쪽만 남은 선영의 괴물 같은 얼굴이, 사랑과 애정이 아니고 공포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선영의 죽음이 아니고 그 것을 보고 느껴지는 나 자신의 앞으로 올 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기적인 나는 그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 남이 알까 봐 가슴 구석에 숨겨둔 비열한 생각. 그 날 운전대를 선영이에게 맡기지 않고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소름이 오싹 돋아 가슴을 쓸어 내리며 나는 천만 다행한 노릇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또 마셨다. 그렇게 순수하다고, 그렇게 순결한 사랑이라고 서로 고백했던 모든 것이 그 끔찍한 죽음 앞에서 모두 허물어지고 무효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더 마시면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아주 먼 곳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 거야? 문 두드리는 소리에 섞여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꿈 속에서처럼 들렸다. 철수야, 야, 철수야. 문 열어. 나야. 나 황가다, 임마. 국현이야. 황국현.
  황국현?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 다닐 때 등산 반장을 하며 혈기와 의리로 뭉쳐 있던 단짝이었다. 선영이가 부산 콩쿠르에 갈 때도 응원단이랍시고 다른 차에 친구를 네 명 싣고 갔다 오다가 내가 탄 차 바로 뒤에서 사고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한 친구였다.
  나는 귀를 기울이고 기다렸다. 그럴 리가 없지. 국현이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겠어. 더구나 국현이는 한국에 있는데. 한참 동안 서로 연락도 없었지 않아.
  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번에는 좀 더 가깝게 들렸다. 거기 섞여서 분명한 국현이 목소리가 평소처럼 거칠게 소리 질렀다. 야, 문 열라니까 말이야. 나 황가야. 황국현.
  황가. 짜식 제 별명 제가 부르고 있다는 말이지?
  쏘파에서 일어나자 나는 휘청하고 쓰러질 뻔 했다. 취했다 이거야. 중얼거리며 나는 문으로 가서 고리를 따고 문을 열었다.
  내 기억에 아직도 선한 그 시절 학교 다닐 때 모습 그대로의 국현이가 문 밖에 서 있다가 반갑게 소리 질렀다.
  "야, 이철수, 임마. 뭐 하느라고 그렇게 꾸물거렸어? 어? 술 마셨구나. 좋다. 빨리 가자. 빨리 장비 챙겨."
  "장비? 무슨 장비? 어딜 가?"
  "잔말 말고 따라와. 내가 너한테 꼭 보여 줘야 할 데가 있어. 빨리 등산 장비 꺼내 오란 말이야."
  그러고 보니 국현이는 이미 등산 파카에 등산화와 배낭 등 완전 겨울 등산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야, 너 미쳤니? 갑자기 나타나서 등산 가자는 말이냐? 나 그런 거 안 한 지 벌써 십년이 다 돼가, 임마. 장비가 무슨 장비야? 그런 거 없어."
  등산화를 벗지도 않고 황국현이는 뚜벅 뚜벅 집안으로 들어와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익숙하게 벽장을 열더니 배낭과 등산 파카, 등산화, 아이젠 등을 꺼내서 바닥에 던지듯 꺼내 놓았다.
  "야, 네 장비를 너희 집 어느 구석 어디다 뒀는지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 빨리 입어. 빨리 신어. 시간 없어."
  갑자기 마신 독주가 국현이 설치는 바람에 더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나는 황국현이 불현듯 내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아파트에 아무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벽장 속에 내가 가지고 있었다고 기억할 수 없는 겨울 등산 장비를 나도 모르는 곳에서 척척 끄집어내는 것이 취기 몽롱한 머리 속에 꿈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5월인데 이런 겨울 등산 장비를 가지고 오를 산이 로스엔젤레스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구, 국현아, 너 좀 돈 놈 아니냐? 설치지 말고 설명 좀 해봐. 어디를 간다는 야?"
  황국현은 눈 까지 부라리면서 나를 재촉했고 나는 얼결에 술 취한 몸을 휘청거리며 녀석이 시키는 대로 방한복에 등산 파카를 뒤집어 썼다.
  밖으로 나오자 역시 5월 로스엔젤레스의 찬란한 태양이 에베레스트라도 등정할 듯 완전 군장한 우리 둘을 비웃으며 내려 쏟아지고 있었다.
  "짜식, 내가 뭐랬어? 이래도 겨울 등반할 산이 여기 있다고 우기는 거야?"
  황국현은 대꾸 안하고 나를 자기의 헌털뱅이 차 안에 쑤셔넣고 쾅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가서 앉았다.
  "한 세 시간 정도는 운전해야 할 거야. 참새처럼 짹짹대지 말고 그 동안 잠이나 좀 자 두라구. 알았어?"
  끼익, 끼익, 하면서 낡은 엔진은 몇 번을 힘겹게 헛돌더니 마침내 시동이 걸렸고 황국현은 쿨럭 쿨럭 소리 내는 차를 몰고 아파트 단지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열어 놓은 차창으로 보드라운 바람이 기분 좋게 밀려 들어와 얼굴에 닿았다. 창밖에는 오월의 태양이 찬란했다.
  짜식, 이런 화창한 날씨에 겨울 등반을 한단 말이지? 오래 동안 못 보고 사는 사이에 황가 놈 머리가 좀 돈 거 아냐? 그런데 나 사는 곳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 소식도 없이 찾아왔지?
  나는 혼자서 생각하다가 취기와 졸음에 스르르 눈을 감고 말았다.

                                                                                                                                                                                                                                                (3)

  눈을 뜨자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깨끗하고 하얀 천장이었다. 초점이 맞아지지 않는 흐릿한 눈으로 한참이나 그 천장을 올려다 보며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이 곳이 어디인지,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 누워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상기해 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도무지 왜 내가 이런 곳에 누워 있는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깨어나셨어요?"
  목소리에 눈을 돌리자 하얀 가운을 입은 간호사가 다가왔다.
  "진정제를 주사해 드렸더니 좀 주무셨어요."
  나는 아직도 모든 기억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서 멍한 눈으로 간호사를 보다가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키려고 버둥거렸다.
  "아니, 아직 안 돼요. 잠시 더 누워 계세요.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올 게요."
  간호사는 나를 말려서 다시 눕혀 놓고 밖으로 나갔다.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에 조금씩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트럭, 철근 파이프, 무서운 굉음,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폭풍 같은 찬 바람, 공룡의 다리. 그리고, 선영의 머리. 반만 남은 깨진 구멍 속에서 진한 피를 뿜어 대던 그 괴물 같은 머리.
  거기 까지 생각이 나자 나는 눈을 부릅뜨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비명 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우, 우, 우, 하며 괴상한 소리만 입 안에서 맴돌았다.
  의사가 들어왔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의사는 크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적입니다. 그런 큰 사고가 났는데도 환자 분께서는 다친 곳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다만 정신적 쇼크가 심한 것 같은데 그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지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쇼크가 심했겠지요. 사고 현장이 처참했다고 들었습니다. 본인이 이 사고를 빨리 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는 의사의 말 뜻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그를 멀거니 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빨리 잊으려고 노력해야...... 이런 말들이 나의 마음 속으로 아프게 파고 들었다. 이선영. 시간이 지나면서..... 빨리 잊으려고.....
  나는 눈을 감았다. 지금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자. 지금 말고 나중에, 천천히, 천천히. 열에 들떠서 꽃다발을 받아 들고 청중에게 인사하던 상기된 얼굴의 선영이 생각났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렇게 집요하게 매달려서 연습하더니 결국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주위에서 보는 사람 아랑곳 않고 벌떡 일어나서 미친 것처럼 박수를 쳐댔다.
  나의 감은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진정제를 한 번 더 주사해 드릴까요?"
  의사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의사는 위로하 듯 나의 팔을 가만히 만져 본 후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한참을 그렇게 하얀 천장만 물끄러미 올려다 보고 있으려니 그 몽롱하게 꿈 속에서 일어난 일인 것 같이 느껴지던 것들이 조금씩 현실감을 되찾으며 마음 속으로 와서 쌓였다. 그러면서 마침내 나는 선영이가 이제 죽어서 이 세상에서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침대 모서리를 거머쥔 손에 더 힘을 주며 나는 통곡하고 말았다. 그러나 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꺼억, 꺼억하는 내 우는 소리는 내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4)

  거칠게 흔들려져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열린 차창 안으로 매섭게 찬 눈보라가 휘몰아쳐 들어오고 있었다.  
  "다 왔다. 여기서 부터는 걸어야 해."
  황국현이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다 왔다구? 어딜?"
  정신을 차리면서 내다 보니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날씨는 무섭도록 추웠다. 그 불행한 사고가 나던 날도 삼년 만의 강 추위라고 했는데 지금 이 추위도 그에 못지않게 사나웠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서 좌석에 앉아 있다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국현아, 여기가 어디야? 왜 이렇게 추워? 우리는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 거야?"
  황국현이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어쩐지 그의 얼굴이 악의를 담고 일그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그런 일그러진 웃음이 나를 섬찍하게 만들었다. 무엇인지 모든 것을 다 알면서 안 가르켜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로스엔젤레스 근처에 이렇게 추운 곳이 있을 수 없어. 어디야? 여기가 어디냐구?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황국현의 어깨를 잡아 당기며 소리 질렀다.
  황국현은 지금 까지의 부드러웠던 태도를 버리고 갑자기 차가운 쇠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야, 이철수. 더 말 시키지 말고 따라와. 네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야. 이 산 줄기를 타고 두 시간 정도 올라가면 돼. 좀 춥고 힘들어도 참아야 하는 거야. 알겠어?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저절로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야. 노력하고 힘들여서 쟁취해야 하는 거야. 이 정도의 추위 속에서 두 시간 남짓 고행하고 십 년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건 꽤 괜찮은 거래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어때, 네 생각은?"
  나는 도무지 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이 황국현 녀석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야? 누구를 만나러 간다는 거야?"
  황국현은 대꾸 않고 배낭을 짊어지더니 아이젠을 장착한 등산화에 의지하며 마치 평지를 걷듯 익숙한 발걸음으로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줄 모르며 서서 눈보라 속에서 순식간에 희미해져 가는 황국현의 뒷 모습을 애원하 듯 바라보았다.
  걷던 황국현이 멈추더니 돌아보며 소리 질렀다. 그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올 거야? 여기서 안 따라오면 너는 지옥으로 떨어져. 너는 이미 돌아설 수 없는 곳 까지 와 있단 말이야."
  나는 다급히 망설이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눈보라가 시야를 가리며 사납게 휘날리고 잠시라도 가만히 서 있으면 동상에 걸려 버릴 것처럼 무섭게 추웠다.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서 있다가 다른 도리 없이 등산 파카의 후드를 머리 위로 뒤집어 쓰고 자꾸 멀어져서 눈보라 속에 파묻혀가는 황국현을 허겁지겁 쫓아가기 시작했다. 녀석은 눈발 속에 묻혀 거무스름하게 그림자만 보이면서 마치 유령이 걸어가듯 힘도 안 들이고 빠른 속도로 가고 있었다.
  "야, 국현아, 임마. 천천히 가."
  나는 무릎까지 파묻히는 눈 속을 뛰다시피 헐떡이며 쫓아가서 매달리듯 황국현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 보는 황국현의 얼굴은 황국현이 아니었다. 그 금속성의 차가운 눈이 눈발 사이로 내 몸을 뚫었다.
  나는 기겁을 하게 놀라서 손을 놓고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섰다.
  "너, 너는 누구야?"
  그 낯선 사람이 말했다.
  "야, 왜 이래, 임마. 돌았어? 나야, 나."
  그 것은 황국현이었다. 나는 혼돈 상태 속에서 왈칵 공포감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국현아. 국현이구나. 우리 그냥 돌아갈 수 없니? 누구를 만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 그 사람 안 만나도 돼. 그냥 돌아가자."
  황국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그 금속성의 빛을 발하는 눈으로 나를 쏘아 보며 말했다.
  "안돼. 이제 너무 늦었어. 너는 이 산을 올라가야 해. 지금 포기하면 너는 죽게 돼. 너는 지금 돌아갈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거야."  
  황국현은 나의 파카 멱살을 잡아서 엄청난 힘으로 번쩍 들어서 앞에 세우고 등을 호되게 밀었다.
  "걸어! 계속 걸어. 잠시 올라가면 눈이 멎을 거야. 걷기가 쉬워질 거야. 산 꼭대기에 불빛이 보일 때 까지 계속 걸어."
  내가 주춤거리자 뒤에서 다시 호되게 등을 때리며 밀었다. 나는 걷기 시작했다. 무엇인지 모를 공포감에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같이 학교 다니며 큰 이 황국현이 지금은 전연 낯선 사람처럼 두렵게 보였다.
  허덕거리며 눈 속에 쓰러졌다 일어나고 다시 쓰러지며 한참을 걸었다. 쓰러지면 황국현이 일으켜 세워서 떠밀고 또 쓰러졌다 떠밀리면서 영겁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오랜 시간을 걸었다.
  "저기 보이지? 불빛이? 저기야. 거의 다 왔어. 곧 따뜻한 곳에서 너를 기다리는 사람과 만나게 돼. 힘을 내."
  한참 만에 처음으로 황국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러고 또 얼마인가를 더 걸었다. 시야를 가리며 휘몰아 치던 눈발이 멎었다. 태풍 같던 바람도 좀 누그러진 것처럼 느껴졌다.
  가물거리는 불빛을 보며 한참을 걷고 나니까 눈 위에 반사된 달빛에 뿌우옇게 통나무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다 왔다. 살면서 생기는 일들의 대부분은 잊어 버려도 되지만 그 중에는 잊을 수 없는 일도 있게 마련이야. 또 너는 잊어 버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너를 아는 다른 사람이 잊지 못하는 일도 있겠지.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것이 묘한 거야. 네가 나를 잊어 버리고 살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너를 잊을 수 없었거든. 나처럼 너를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지도 몰라. 나는 네가 그 것을 확인하도록 도와 주고 싶은 거야."
  그 통나무 집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눈에 파묻힌 가파른 언덕을 비추는 곳 까지 가까워지자 나는 우뚝 서서 숨을 죽였다.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이런 곳에서 피아노 소리가! 더구나 이 곡은?
  옆에 다가온 황국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알겠지? 이선영씨를 만나러 온 거야."
  나는 전율했다.
  "이선영? 선영이는 죽었어!"
  사고 현장에서 얼굴과 머리 반쪽이 깨어져서 괴물스런 형태로 피 흘리던 이선영을 상기하자 등줄기로 얼음장 같은 공포가 지나갔다.
  "올라가. 만나보면 알게 돼."
  황국현이 나의 등을 밀었다.
  나는 두려워서 공포심에 와들거리며 떨었다. 그렇게 사랑하고 결혼 까지 약속했던 이선영이지만 죽음의 저쪽에 파묻힌 그 괴물 같은 반쪽 얼굴의 선영은 이제 나에게는 사랑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는 안 가. 나는 안 만나. 나는 도로 내려갈 거야."
  황국현의 눈이 아까처럼 차갑게 변해서 날카롭게 말했다.
  "중간에서 멈추면 너는 죽게 돼. 혼자서 내려가다가는 벼랑에서 떨어져 죽게 되어 있어."
  황국현의 어디서 났는지 모를 엄청난 힘에 반쯤 끌리면서 나는 그 통나무 집 앞 까지 가게 되었다. 이제 훨씬 더 크게 들리는 피아노 소리는 분명히 내가 선곡했고 이선영이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그 곡이었다.
  삐이꺽. 황국현이 몹시 무거워 보이는 문을 열었다. 피아노 소리가 왈칵 커졌다. 관솔 불 하나만이 침침하게 밝히고 있는 실내를 나는 쿵쾅거리고 뛰는 가슴을 누르며 둘러 보았다. 바깥에서 쏟아져 들어온 바람에 관솔 불이 펄럭였다.
  황국현은 문간에서 서성거리는 나의 어깨를 잡아서 안으로 끌어 넣고 문을 닫았다.
  불빛이 닿지 않는 저쪽 끝에서 피아노 소리가 멎고 사람의 그림자가 일어났다. 나는 터질 듯 뛰는 가슴을 누르며 그 긴 그림자를 응시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주춤 주춤 물러섰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뒤를 돌아 보았지만 황국현은 없었다.
  그림자가 불빛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 얼굴이 나타나자 나는 훅 숨을 들이켰다. 그 것은 선영이었다. 그 날 콩쿠르에서 입었던 검정 색 이브닝 드레스에 머리에는 얼굴을 반쯤 가릴 만큼 큰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달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 붙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이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마음 속에서 맹렬히 부르짖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선영이 탁자에 있는 병에서 무엇인가를 컵에 가득 부어서 들고 왔다. 그리고 깊은 눈으로 나를 보며 내 입술에 대주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그 것을 마셨다. 달고 향기로운 이름 모를 음료였다. 잠시 있으니 마음이 가라 앉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써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이 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외치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고 온 몸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그 달고 향기로운 음료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선영이 나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나에게 온 몸으로 기대며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아 안았다. 선영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몸의 감촉에서 나는 어쩐지 울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선영이 하고 나는 이렇게 오래 오래 행복하게 같이 살기로 작정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선영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그 눈은 선영의 눈이 아니었다. 그 것은 낯선 여자의 눈이었다. 그 것은 도발적이고 육감적이고 선영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교태가 흐르는 눈이었다.
  나는 왈칵 두려워져서 겁먹은 얼굴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여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그 얼굴은 다시 차분하고 내성적이고 소박한 선영의 것이 되었다.
  나는 더욱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몸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뜻 모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어두웠던 내 마음이 풀리면서 나는 이상스럽게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쪽 팔로 안은 선영의 가냘픈 어깨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러움을 느끼고 나는 숨을 들이쉬며 울음을 삼켰다. 눈을 내리깐 선영이 나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엉거주춤 서 있는 내 손을 선영이 끌고 피아노로 가서 앉았다. 여러 번 그랬던 것처럼 내가 선영의 옆에 앉자 선영이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죽을 때 까지 잊을 수 없는 그 선율이 통나무 집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곡은 점점 빨라지더니 미친 것 같은 피아노 소리가 더욱 커지며 내 귀를 찢었다.
  그렇게 많은 꿈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무서울 정도의 정열을 기울여서 맹렬히 부딪치며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려고 애썼다. 그 무서운 집념이, 그 치열한 도전이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한 순간에 죽음 앞에서 허물어져 버리지 않는가.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뜨거운 열정으로 꿈을 이루어가다가 공중으로 산화해버린 선영을 생각하며 나는 내 옆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또 하나의 선영을 보며 울고 있었다. 나는 처연한 마음으로 선영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피아노 치던 손을 멈추고 선영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빨간 장미꽃에 반쯤 가려진 얼굴로 나를 보는 선영의 눈은 살인적으로 요염했다. 몽롱해지는 정신으로 나는 내 앞의 얼굴을 보았다. 그 것은 선영이 아니었다.
  너, 너는 누구야? 누구야? 등골로 찬 바람이 휘익 지나갔다. 나는 몸을 가누며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애썼다. 휘청 쓰러질 것 같은 나를 여자가 일어나서 억센 손으로 부축해 바로 세웠다. 그리고 내 허리를 감고 조심스럽게 끌었다.
  말해. 너는 누구야? 왜 이런 곳에 있어? 왜 나를 이런 곳으로 오게 만든 거야?
  나는 소리 질렀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내 목소리는 내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선영이는 죽었어. 선영이는 십년 전에 죽었어. 너는 누구야?
  나를 부축하며 걷던 여자가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아, 그런데 그 것은 선영이었다. 부딪쳐 오는 선영의 보드랍고 따뜻한 몸의 감촉이 나를 미칠 것 같은 혼돈의 세계로 몰고 갔다. 다리에서 온 힘이 다 빠져나가고 나는 어디에건 주저앉고 싶어졌다. 어떻게 된 일인가? 이 여자는 누구야? 선영이는 내 눈 앞에서 죽었어. 너는 누구야? 선영이 같은 얼굴을 한 너는 도대체 누구야?
  선영이 나를 피아노 옆에 있는 침대에 눕혔다. 괜찮아요. 철수씨, 나예요. 나 선영이예요. 선영이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선영은 무엇인지 모를 그 음료를 또 잔에 따라서 내밀었다. 이 번에는 내가 빼앗듯이 받아 들고 단숨에 마셨다. 내 머리는 더욱 혼돈스러워졌고 나는 이제 거의 될 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정신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나의 몸은 점점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다.
  내 눈 앞에서 선영이 옷을 벗었다. 우리 오래 만에 만났어요. 나는 철수씨와 더 깊이 더 가깝게 만나고 싶어요. 선영의 눈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같이 있어야 해요. 잠시 사이에 옷을 모두 벗어버린 선영이 나의 옷도 벗기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서 출렁거리는 그 젖가슴이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 무엇인지 모를 음료수가 나의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고 나는 이제 조금씩 와 닿는 선영의 벌거벗은 몸에서 오는 감촉에 성욕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었다.
  마침내 옷을 모두 벗겨낸 선영이 나를 감싸 안으며 그 나신을 내 몸 위에 쓰러트렸다. 나는 참을 수 없어 소리 지르며 몸을 일으켜 선영의 몸을 밑으로 하고 그 허벅지 사이로 허겁지겁 함몰되어 들어갔다.
  숨막히는 적막 속에 가쁜 숨소리가 높아지고 관솔 불이 펄럭거렸다. 밖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통나무 집 안으로 조그맣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숨결이 더욱 거칠어지며 시간이 흘렀다.
  선영과 나는 허덕거리며 으스러지듯 부둥켜 안고 희열의 마지막 고비를 향해 치달렸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이 쾌락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죽음도 슬픈 것이 될 수 없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을 수 있었다. 선영의 거친 숨결이 뜨겁게 나의 귀뿌리에 쏟아졌다. 나도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헐떡이며 선영의 몸 위에서 율동했다. 지금 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깊고 거역할 수 없는 쾌락의 늪 속에서 나와 선영은 정신을 잃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악, 소리지르며 선영이 전신을 떨었다. 나의 몸을 감은 선영의 다리가 힘주어 조여지면서 나도 온 몸을 떨고 소리 질렀다. 내 몸의 모든 것이 선영의 깊은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마침내 선영의 몸을 부둥켜 안은 채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헐떡거리며 지친 몸을 경련했다. 잠시 지나면서 거칠게 몰아 쉬던 우리 둘의 숨결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관솔 불이 펄럭거렸다.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꿈결 같았다.
  쾌락이 잦아들면서 나의 혼미하던 정신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내 손에 끈적거리는 액체가 느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나는 내 몸 아래 누워 있는 선영의 나신이 차갑다는 것을 느끼고 놀라서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관솔 불이 펄럭했다. 물결처럼 지나가는 그 불빛 아래서 나는 내 몸 아래 누워있는 선영을 보았다. 붉은 장미 송이가 없었다. 그 자리에는 반쯤 부서져 나간 머리와 얼굴이 누워 있고 거기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끈적거리는 진한 피 속에 하얀 골수가 섞여 있었다.
  아, 아, 아, 나는 의미 없는 비명을 지르며 그 얼굴을 밀쳐내고 그 몸에서 떨어지려고 발버둥쳤다. 어찌 된 노릇인지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나는 그 피투성이의 얼굴을 내 몸 밖으로 밀어낼 수 없었다.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공포 속에서 계속 비명만 질러댔다. 아, 아, 아.

                                                                                                                                                                                                                                                (5)

  아, 아, 아.
  나는 비명 지르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쾅, 쾅, 쾅. 부서질 듯 때려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한참 동안을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며 애쓰다가 드디어 정신이 들면서 눈을 뜨고 나는 벌떡 일어났다.
  쾅, 쾅, 쾅. 밖에서 아파트 문을 때려 대고 있었다. 거기 섞여서 아내의 거센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문 열란 말이야. 뭐하는 거야? 문 열어. 문 열어."
  나의 온 몸에 끈적거리며 진땀이 배어나와 있었다. 얼굴도 땀 투성이었다. 뛰는 가슴을 잠시 진정시키다가 나는 휘청거리며 일어나서 문으로 갔다. 잠금쇠를 열었다.
  열린 문으로 아내의 무섭게 성난 얼굴과 그 비슷하게 화난 두 아이들이 노도와 같이 밀려 들어왔다.
  "아니, 뭐하는 거예요? 공항에서 그렇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지금 문 두드린지가 이십 분도 넘었어요. 이웃에서 무슨 사고가 난 것 같다고 경찰을 부르자고 하잖아요. 내가 온다고 마중 나오라고 그렇게 단단히 일렀는데, 아니, 당신 술 마셨군요?"
  나는 내 눈에 익숙한 그 거센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도 아직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가슴이 뛰고 있었다. 손에 묻어서 진하게 끈적거리던 감각을 아직도 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것이, 그 것이 그러면 꿈이었다는 말인가? 꿈이었다는 말이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내일 출근할 사람이 술을 그렇게 마시면 어떻게 해요? 내가 없으면 꼭 이렇게 된다니까."
  아내는 아이들을 채근하면서 친정에서 챙겨준 선물을 한아름 안아 들고 들어갔다. 아직도 뛰는 가슴을 아내 모르게 쓸어 내리면서 나는 아내의 거센 목소리와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나를 내 원래의 생활로 되돌려 주고 있어서 크게 안도감을 느끼며 마음 속으로 감사했다.
  마음을 놓으며 아내의 등 뒤에서 아파트 문을 닫고 돌아서다가 나는 아연해서 얼어 붙었다. 가라앉으려던 심장이 그 자리에서 멎고 온 몸의 피가 머리 위로 거꾸로 치솟아 올라갔다.
  아파트 문 안쪽에는 방금 벗어 놓은 듯 하얀 눈이 수북이 묻어서 녹아 흐르고 있는 등산 파카와 등산 구두와 아이젠이 놓여 있었다.

김영문 (2013년 3월 24일 일요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1 신이 버린 땅 (중편 소설) 김영문 2019.10.23 87
50 글 쓰는 것은 취미가 아니다 [2] 김영문 2019.10.23 198
49 곽셜리씨의 출판기념회에 붙이는 글 김영문 2019.10.23 72
48 007 스팸 햄 (조선일보 칼럼 '김영문의 응접실' 102119) 김영문 2019.10.23 42
47 006 익스클루시브 (조선일보 칼럼 '김영문의 응접실' 101419) 김영문 2019.10.23 41
46 005 형님 (조선일보 칼럼 '김영문의 응접실' 100719) [1] 김영문 2019.10.23 54
45 "법치국가와 법" 조선일보 김영문의 응접실 제 4 회 김영문 2019.09.30 64
44 "풍요 속의 빈곤" 조선일보 김영문의 응접실 제 3 회 김영문 2019.09.29 55
43 "이민 초년병" 조선일보 김영문의 응접실 제 2 회 [1] 김영문 2019.09.27 57
42 "백인 예찬" 조선일보 김영문의 창작실 제 1 회 김영문 2019.09.27 29
41 여름이 끝나는 계절 김영문 2019.09.27 18
40 마지막 대화 김영문 2019.09.27 10
39 미주한인방송 1일 DJ 방송 [2] 김영문 2016.12.14 172
38 오인동 박사님의 "밖에서 그려보는 통일의 꿈"을 읽고 [1] 김영문 2014.11.02 379
37 수진아, 수진아 (제 8 회) 김영문 2014.10.26 486
36 수진아, 수진아 (제 7 회) 김영문 2014.10.26 97
35 CHRISTMAS AND JACK 김영문 2014.10.26 143
34 수진아, 수진아 (제 5 회) 김영문 2013.07.14 191
33 수진아, 수진아 (제 6 회) 김영문 2013.07.14 340
» 백야 김영문 2013.07.14 172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16,7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