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아, 수진아 (제 5 회)

2013.07.14 04:39

김영문 조회 수:191 추천:24


                                              수진아, 수진아 (제 5 회)

(8)

  곤하게 잠들었던 윤수진은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소스라쳐서 깨어났다. 짐승의 울음 소리처럼 괴기한 비명 소리에 섞여서 칼로스가 다급히 외쳐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쾅거리는 거친 발소리도 어지럽게 섞여왔다. 평소에 조용하고 소리를 내지 않던 개 버디가 미친 것처럼 짓고 있었다.
  "유 셧업. 캄 다운. (입 닥치고 진정해)"
  보통 때는 절대로 큰 소리를 내지 않던 칼로스가 외쳐댔다.
  뛰는 가슴을 누르며 윤수진은 놀라서 일어나 본능적으로 문으로 가서 잠금쇠를 다시 확인했다.
  잠시 무섭게 난동하던 비명 소리와 칼로스의 고함이 모두 허덕거리며 지쳐서 잦아 들기 시작했다.
  밖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잇즈 마리아. 마리아예요. 문 꼭 잠그고 있어요. 아침에 내가 데리러 올 때 까지는 절대 문을 열면 안 돼요."
  윤수진은 떨며 문에 대고 소리쳤다.
  "오케이. 오케이."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였다. 윤수진은 다시 잠들지 못하고 나머지 밤을 꼬박 새웠다. 아침 여덟시 쯤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리아예요. 다 괜찮아요. 문 열어도 돼요."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잠금쇠를 따고 문을 열자 마리아가 쟁반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커피잔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놀랐지요?"
  마리아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윤수진이 아직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마리아에게 물었지만 마리아는 마치 못 본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예요? 왜 그랬어요?"
  마리아는 윤수진을 안심시키려는 듯 윤수진의 팔을 살짝 잡아보며 말했다.
  "칼로스가 설명해 줄 거예요. 큰 일은 아니에요. 이따금 마귀가 들어와요. 마귀가 들어와서 장난치는 거예요."
  아침 식사 때 항상 같이 있던 제이콥이 보이지 않았다. 그 키 큰 개 버디도 없었다.
  "늦잠을 자고 있어요. 오후에나 일어날 거예요."
  마리아가 설명했다.
  맞은 쪽에서 같이 식사하는 칼로스를 보며 윤수진이 물었다.
  "무슨 일이었어요? 어젯밤의 소동이?"
  칼로스가 수프를 먹던 숟가락을 놓고 난처한 표정을 했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니까 말씀 드리지요."
  그 것은 제이콥이였다. 교통 사고로 다친 머리가 이따금 비정상으로 작동하면 마귀가 들어가서 발작이 일어나고 무서울 정도로 거칠어져서 난동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 때는 제이콥 본인도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연 알지 못한다고 칼로스는 말했다. 기묘한 노릇은 개 버디가 이런 발작이 일어나기 바로 전쯤에 이미 알고 맹렬히 짖어댄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전연 짖는 일이 없던 버디가 이렇게 미친 것처럼 짖어대면 제이콥이 발작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칼로스가 뛰어나와 제이콥을 담요에 말아서 짓누르고 발작이 끝날 때 까지 타고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발작이 일어나고 칼로스가 미처 붙잡기 전에 빠져 나가서 부엌에서 칼을 집어 들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벽이고 창문이고 손 닫는 대로 난도질을 하다가 제풀에 지쳐서 주저앉은 적이 있었다고 칼로스는 진저리 치며 말했다. 마침 죠세프 스타인버그가 샬리스에 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졌고 하마터면 죠세프가 제이콥의 칼부림에 크게 다칠뻔한 사고가 있은 후 집에 있는 모든 문을 방범 문으로 바꾸고 이중 잠금 장치를 했다는 것이다.
  윤수진은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평소에 그렇게 착한 제이콥이 칼로스가 말하는 것 같은 포악한 동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윤수진은 믿을 수 없었다.
  "알고 있어요. 제이콥이 그렇게 포악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예요. 그건 제이콥이 아니에요. 그 건 악마가 들어가서 제이콥을 잠시 잡아먹고 제이콥을 조종하는 거예요. 제이콥의 방이 내 방 바로 옆에 있는 것은 이런 악마의 발작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서 스타인버그 씨가 내린 조치예요. 악마가 빠져 나갈 때 까지 담요에 싸서 타고 앉아 있어야 해요. 날카로운 칼이나 무기로 쓸 수 있는 물건이 옆에 있으면 안돼요."
  다소 미신적인 칼로스의 설명이었다.
  "그렇게 발작이 있고 나면 제이콥은 언제나 기진해서 하루 종일 잠을 자요. 깨어나면 언제 그랬더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요. 본인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연 모르고 있어요."
  그런 일이 있은 날 하루 종일 칼로스의 설명처럼 제이콥은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아침에야 비로소 윤수진은 제이콥을 볼 수 있었다.
  "하이, 수진. 굿모닝."
  제이콥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예전과 같이 상냥하게 웃으며 윤수진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윤수진은 애써 태연한 척 하려 했지만 경계심으로 굳은 얼굴을 풀 수가 없었다. 그걸 본 제이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당황하는 표정이더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칼로스가 말한 대로 제이콥은 자기가 어젯밤 무엇을 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버디도 보통 때처럼 점잖게 제이콥의 옆에 앉아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 듯 눈으로 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 이후 윤수진은 제이콥에 대한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 왜 모든 문이 그렇게 두껍고 이중 잠금 장치가 되어 있는지 알게 된 이후 부터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 무엇보다 먼저 문을 닫아서 잠그어 버리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그로 부터 거의 반 년이 아무 일 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또 똑같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잠을 자던 윤수진은 버디가 맹렬히 짖어대는 소리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버디는 윤수진의 침대 아래에서 귀청이 떠나가게 짖고 있었다. 그리고 윤수진의 바로 눈앞에 제이콥이 있었다. 놀라서 윤수진은 네 발 걸음으로 뒤로 물러섰다. 오래 동안 아무 일도 없었으므로 방심하고 어젯밤 문 잠그는 것을 잊었던 모양이었다.
  "돈 터지 미. 돈 캄 클로스. 건드리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윤수진을 노려보고 있는 눈은 제이콥의 눈이 아니었다. 무섭게 성나 번쩍거리고 있는 그 눈은 동물의 눈이었다. 그 야성의 눈이 윤수진을 노려보다가 흐트러진 잠옷 사이로 드러난 윤수진의 알몸을 훑었다. 손으로 윤수진의 발목을 잡고 더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 끌었다. 섬세하고 연약한 제이콥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발목을 잡은 제이콥의 손아귀에는 억센 힘이 있어서 윤수진을 꼼짝도 못하게 했다.
  이 때 윤수진의 그 전갈처럼 독기 있는 기질이 발동한 것이다. 제이콥이 미처 피하기 전에 윤수진의 손이 그의 뺨을 거세게 갈겼다.
  "제이콥. 스탑 잇. 멈춰. 나야. 수진이야."
  표독스럽게 변한 윤수진의 눈이 제이콥을 붙잡고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을 듯 한참을 쏘아보다가 윤수진은 갑자기 제이콥의 눈에서 그 짐승의 번득이는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미친 듯이 짖어대던 버디가 뚝 멎었다. 밖에서 칼로스가 담요를 들고 헐떡거리며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담요로 제이콥을 덮어 씌우려는 것을 윤수진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제이콥의 눈이 점점 정상으로 되돌아오고 마침내 그는 마치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다는 듯 윤수진의 침대 위로 쓰러져 버렸다. 칼로스가 불안한 눈으로 지켜 보는 사이에 윤수진은 조심스럽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서 제이콥의 머리를 부둥켜 안았다.
  "제이콥. 나야. 수진이야."
  제이콥은 헐떡이며 윤수진의 손에 머리를 맡겨놓은 채 소리없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임 쏘리, 맘. 엄마, 미안해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윤수진은 아, 하면서 깨달았다. 제이콥의 눈물 흐른 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윤수진은 그의 머리를 가슴에 안았다. 아기에게 하듯이 등을 토닥거리며 윤수진은 가만히 끄덕였다. 이 제이콥은 자기가 낸 자동차 사고로 어머니를 죽게 만든 죄책감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자기 정신을 잃었을 때 나오는 이 거친 행동은 그 죄책감으로 인한 자기 학대가 아닐까?
  "제이콥. 에브리 씽 이스 화인. 모두 괜찮아. 다 괜찮아."
  윤수진은 계속 아기 다루듯 제이콥을 가슴에 안고 볼을 쓸어주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카락에 가리어서 보이지 않았던 그 속에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상처와 수술 자국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 흉터를 만지며 윤수진은 제이콥의 발작을 이해하는 첫번째 사람이 되고 있었다.
  제이콥의 뒤에서 담요를 들고 들어온 칼로스가 이 놀라운 변화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발작이 이렇게 빨리 끝나는 것은 이 번이 처음이에요. 악마가 이렇게 빨리 빠져 나가 본 적이 없어요."
  제이콥은 반쯤 혼수상태에 빠져서 윤수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아기처럼 입으로 찾아서 윤수진의 젖꼭지를 물고 빨았다. 윤수진은 물리치지 않고 제이콥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잠시 후 제이콥은 완전히 정신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윤수진이 눈짓하자 칼로스가 다가와서 들고 있던 담요로 제이콥을 싸서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나갔다.
  "문을 잠그세요."
  등뒤로 말을 남기고 칼로스가 나가며 문을 닫았다. 방안의 공기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정체되었다.
  윤수진은 문을 잠그지 않았다. 이제 제이콥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이콥이 발작을 일으키는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어머니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제이콥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 것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돌발적인 사고였고 제이콥의 잘못으로 어머니가 죽은 것이 아니라고 제이콥을 타일러 이해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착한 제이콥의 마음 속 골 깊은 곳에 아직도 도사리고 떠나지 않고 있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어떻게 해서든 없애주어야 그가 다시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하루 종일 제이콥은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마침내 윤수진은 제이콥을 발견했다. 아틀리에에서 캔바스 위에 연필로 정물화의 틀을 잡고 있을 때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윤수진은 얼른 연필을 놓고 어쩐지 긴장되는 마음으로 아틀리에를 나와 그 기타 소리를 따라 복도를 걸어갔다. 중간에 있는 방문이 열리고 칼로스가 나와 걱정스러운 눈으로 윤수진을 보았다.
  제이콥은 그림과 골동품이 많이 장식되어 있는 거실에서 이쪽에 등을 보이고 앉아서 혼자서 기타를 퉁기고 있었다. 언제나 처럼 그 옆에 점잖게 앉아 있던 버디가 먼저 윤수진이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벌떡 일어나서 그 순하게 보이는 눈으로 윤수진을 보았다. 버디의 시선을 따라 얼굴을 돌린 제이콥의 눈이 윤수진과 마주쳤다. 윤수진은 일부러 크고 환하게 미소하며 다가갔다.
  "제이콥, 오랫만이에요. 어제는 하루 종일 볼 수가 없었어요."
  제이콥이 윤수진의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기타를 더 쳐 봐요. 얼마나 듣기 좋은지 몰라요."
  말하며 윤수진은 제이콥의 옆 안락의자에 앉았다. 다소 굳은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 보다가 제이콥은 아주 조심스럽게 기타 줄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들릴 듯 말 듯 나는 기타 소리는 그래서 더 슬프게 들렸다. 그 기타 소리 사이로 제이콥이 말했다.
  "미안해요.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윤수진은 그 말을 듣고 그 때 제 정신으로 돌아오면서 윤수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며 죽은 어머니를 찾았던 것을 제이콥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아기처럼 윤수진의 젖꼭지를 빨았다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제이콥, 아무 것도 미안해 할 것이 없어요. 나는 제이콥이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이제 알았어요. 왜 다른 사람들이 제이콥의 마음을 더 빨리 이해해 줄 수가 없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바닥을 내려다 보며 윤수진의 시선을 피하던 제이콥이 눈을 반짝 빛내며 윤수진을 보았다. 그 눈에 말로 표현하지 않은 기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윤수진은 알았다.
  제이콥의 손이 다시 기타 줄을 퉁기기 시작했다. 어디에선가 많이 들었던 선율인 것처럼 느껴지는 곡이었다.
  "그 사고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긴 했지만 그 건 제이콥이 막을 수 없었던 사고예요. 아무도 제이콥을 나무라는 사람이 없어요, 제이콥 본인 이외에는."
  갑자기 기타 소리가 커졌다. 윤수진도 기타 소리에 따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제이콥은 이미 일어나서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그 사고를 빨리 잊어 버리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서 제이콥이 그렇게도 원하는 대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싶지 않으세요? 하늘에 계신 어머니도 제이콥이 그렇게 모든 것을 잊고 즐겁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원한다고 나는 믿고 있어요."
  기타 소리가 뚝 멎었다. 제이콥은 손을 멈추고 굳은 얼굴을 윤수진으로 부터 외면하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방을 나가 버렸다. 버디가 윤수진과 제이콥을 번갈아 보며 망서리다가 제이콥의 뒤를 껑충거리며 따라갔다.
  그런 일이 있은 십여 일 후, 죠세프 스타인버그가 뉴저지에서 돌아왔다. 칼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제이콥에 대해서 그 동안 벌어진 일을 다소 과장기를 섞어가며 떠벌렸다. 수진이 제이콥의 머리 속에 들어온 악마를 그렇게 순식간에 쫓아내버린 것은 성모 마리아를 통한 기적이라고 덧붙였다.
  "수진은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어요. 정신을 잃고 미쳐서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제이콥의 눈을 똑바로 드려다 보면서 악마야 물러가라고 소리 질렀어요. 나는 그 조그만 동양 여자가 그렇게 독한 기질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러자, 오 마이 갓, 잠시 후 진짜 악마가 도망가 버리고 제이콥은 정상으로 되돌아 왔어요. 그렇게 빨리 발작이 끝나 본 것은 이 번이 처음이에요. 그러고 나서 제이콥은 곧 잠이 들고 수진이 나에게 안고 방으로 데리고 가라고 했어요. 어쩐지 그 이후 제이콥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그 전보다 더 조용하고 말이 없어졌어요. 항상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멍한 눈으로 살고 있어요. 틀림없이 제이콥의 마음 속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마음 속으로 또 악마가 들어가는 것을 수진이 막아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칼로스의 다소 미신적인 성격을 이미 알고 있는 죠세프는 그의 설명을 들을 부분만 들으면서 주의 깊게 생각했다. 어쩌면 제이콥이 정상으로 되돌아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느꼈다.
  "또 한 번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으면 완치 시킬 수 있다는 담당 의사의 소견이 있었는데 수진은 어떻게 생각하나?"
  저녁 식사 후 단 둘이 마주 앉은 죠세프가 수진에게 물었다.
  "천만에요. 전연 맞지 않는 말이에요. 제이콥은 그런 위험한 수술이 필요 없어요. 제이콥은 지금도 정상적인 사람이에요. 제이콥이 필요한 것은 사랑이에요.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어머니로 부터 너무나 큰 사랑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보통 어머니와 아들의 사이 보다도 훨씬 더 가깝고 친밀하고 더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강했던 모양이에요. 그런 어머니를 제이콥은 자기의 부주의로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아직도 그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어요. 누군가가 제이콥을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주어야 해요. 그건 외과적 수술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죠세프는 윤수진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의 위험 부담이 있는 수술을 피하고도 제이콥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당연히 그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뜻밖에도 그 일을 수진이 제이콥의 좋은 친구가 되어서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외딴 곳에서 폐쇄된 생활을 하고 있는 제이콥에게는 좋은 친구가 필요하겠다고 그 전부터 생각했었다. 수진을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결속하여 이런 곳으로 오게 한 데에는 사실 죠세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제이콥의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어했던 의도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제이콥을 결혼시키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런 외진 곳에 정신 발작 증세가 있는 제이콥과의 결혼을 승낙하고 오겠다는 여자라면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나 헌신보다는 재산을 탐하는 불순한 이유 때문일 것이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 이틀 동안을 죠세프는 제이콥의 일은 까맣게 잊은 듯 윤수진의 아틀리에에 파묻혀 그 동안 윤수진이 그린 그림들을 하나씩 꺼내서 검사하듯 조목조목 들여다보며 보냈다. 그림을 보고 있는 죠세프의 눈은 거의 광적이었고 제이콥의 일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림이 많이 좋아지고 있어. 아주 많이 좋아졌어. 수진은 틀림없이 대가가 될 소질을 갖추고 있어. 그림에서 그 번득이는 재치가 느껴져. 빛나는 열정이 느껴져. 수진은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
  죠세프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잊은 사람처럼 수진의 그림을 하나씩 점검하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제이콥은? 제이콥은 아버지의 사랑도 필요해요. 한참씩 떨어져 있다가 나타나서는 그냥 잘 있었느냐고 말하고는 훌쩍 떠나 버리는 그런 식으로는 안돼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줘야 해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이지?"
  그림에 열광하여 정신을 잃고 있는 죠세프에게 윤수진의 목소리는 그저 귀 바깥쪽에서 들리는 소음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이런 그림은 안돼. 이런 종류의 그림은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어.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말이야."
  죠세프는 윤수진에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는 것처럼 그림 하나를 들고 말하고 있었다.
  "대개 바보 같은 녀석들이 순수 예술을 하기 때문에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도도한 척 말하지만 그건 자기 변명에 불과해. 자기의 무딘 예술 감각을 감추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허깨비 소리야. 작품이 진짜 높은 예술이 되려면 예술적 가치를 지니면서 또 대중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 거야. 빈센트 밴 고흐나 모네의 그림들은 대중들 속에서도 인기 있고 복사본이 걸려 있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어. 대중이 외면하는 예술을 나는 존경 안 해.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 진정으로 높은 예술이야. 창고 속에 갇혀서 외면당하고 사장되어 있는 작품을 나는 높은 예술품이라고 평가해줄 수 없어. 모르지. 몇 십년 또는 한 세기쯤이 지난 다음에 다른 평가를 받게 될지는 몰라. 그러나 그 것은 나의 관심 밖의 일이야. 나는 오늘을 평가하고 오늘을 사랑하고 있는 게야. 나는 오늘 살아서 숨 쉬고 있는 예술을 사랑하는 게야."
  죠세프의 열광적인 태도와 집념에 윤수진도 조금씩 제이콥의 일을 잊고 그의 말에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그 것은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감정과 정열을 다른 사람이 공유해주게 만들고 공감대를 유발해 낼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죠세프가 말하는 오늘 살아서 숨쉬고 있는 예술이라는 것은 진정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죠세프는 윤수진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아틀리에에서 골라온 여러 점의 그림들을 뉴저지로 가져갈 수 있도록 포장하라고 칼로스에게 지시했다.
  "이 그림들이 뉴저지로 가서는 어떻게 되죠?"
  윤수진이 묻자 죠세프는 어깨를 움찔하며 당연한 듯 말했다.
  "물론 전시되었다가 원매자가 나타나면 팔려 나가지. 수진이 그린 그림들은 아주 잘 팔리는 쪽에 속해. 수진이 그린 그림들은 대개의 경우 전시된지 두 달도 되지 않아서 팔려나가고 있으니까."
  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이 팔려나간다는 것은 어쩐지 몸의 일부분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었다.
  죠세프가 그런 윤수진을 힐끗 보고 말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언짢게 생각할 필요 없어. 어떤 물건이건 만들어 놓은 것이 팔리지 않는다면 그 것은 실패의 증거일 뿐이야. 내가 만든 것을 다른 사람이 보고 느끼고 감탄하고 탐내고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면 그 건 환영해야 할 대 성공이야."
  "그림은 물건이 아니에요."
  "그림은 물건이 아니라고? 호오, 그럼 뭐지?"
  윤수진은 반발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하, 그림은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군. 그리고 예술은 돈으로 환산해서 계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야. 잇즈 클리세이. 진부한 말이야. 자본 주의 국가에서 돈은 성공의 척도야."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아들의 이야기보다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그림 이야기에 더 열정을 쏟고 있는 죠세프를 윤수진은 마음 속으로 미워하고 있었다.
  "그럼 죠세프는 대단한 성공을 한 셈이군요."
  시선을 들어 윤수진을 잠시 보던 죠세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나갔다.
  "나는 내 아버지처럼 침묵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면서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일에 도구로 사용되지 않기로 결심했을 뿐이야. 세상에는 두 가지의 사람이 있어. 앞서 가는 사람과 그 뒤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 무엇인가를 만들고 이룩하는 사람과 거기에 도구로 사용되는 많은 사람들. 박수를 받는 사람과 그 사람에게 박수를 쳐주는 많은 사람들. 세상의 사람들은 이렇게 분류되어 있는 거야. 나는 나의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그저 그렇게 남의 들러리나 들어주면서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야. 전쟁터에서 장군의 어깨에 별 하나를 더 달아주기 위해서 죽어야 하는 많은 병사중의 하나가 되지 않겠다고 나는 결심했을 뿐이야."
  그림 몇 점을 더 골라서 뉴저지로 보낼 소포 더미 속에 넣은 후 죠세프는 허리를 폈다. 윤수진을 잠시 내려다 보다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더 얘기해주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말이야. 아버지의 손에 끌려서 소련을 탈출해서 방황하다가 여기 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말이야. 소련에서 죽은 내 어머니와 여기 이 추운 도시에서 노예처럼 봉사하다가 또 그렇게 노예처럼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은 내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나면 수진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돼. 수진이 지금 비지니스에만 집념하고 있는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
  죠세프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윤수진을 보았다.
  "제이콥을 그렇게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마운 노릇이야. 그 아이는 내 아들이야. 나는 그 아이를 잘 알고 있어. 입으로 말하고 행동으로 나타내지는 않지만 내가 자기를 몹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 아이도 알고 있어. 게다가 제이콥은 어른이야. 자기 한 몫의 구실을 해야 하는 나이야. 아직도 그러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을 나의 탓으로 돌리면 안돼."
  아틀리에 안을 한 번 둘러본 후 죠세프는 윤수진을 가볍게 안아보고 이마에 키스했다.
  "하느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도록 만들지 않았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여러 가지를 버려야 해. 목적도 달성하고 또 가지고 싶은 다른 모든 것도 다 가지고 즐기면서 살게 되어있지는 않아. 결단을 내리고 불필요한 것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없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는 거야. 말 안하고 보고만 있었지만 수진도 자기가 가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버리고 사는 사람이야.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보통 사람의 생활을 다 포기하고 사는 사람이야. 그림 그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 때문에 사랑이 없으면서도 나와 결혼까지 하지 않았겠어? 그래서 나는 수진을 좋아해. 제이콥은 그런 꿈이 없어. 꿈을 이루고자 하는 치열한 욕망이 없어. 불행한 노릇이야."  
  다음 날 죠세프는 칼로스가 포장해준 그림 꾸러미를 가지고 뉴저지로 떠났다.
  "아버지는 갔어요."
  죠세프가 탄 차를 몰고 칼로스가 공항으로 떠난 후 제이콥이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허전하고 공허했다.
   "이제 또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 오게 될 거예요."
  아들이 나이답지 않고 제 구실을 못한다고 매몰차게 뿌리쳐 버리는 아버지를 제이콥은 그래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이콥.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그 사람의 생활이 있어요. 아버지가 여기 없는 동안은 아버지를 잊어버리고 제이콥 자신의 생활을 찾아야 해요. 제이콥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야 해요."
  윤수진의 강한 눈길을 피하며 제이콥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기어 들어가 듯 말했다.
  "나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 일이 있은 한 달쯤 후에 제이콥은 또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번의 발작은 그 전의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곤하게 잠들었던 윤수진은 이상한 느낌에 깨어났다. 제이콥이 아주 조심하며 윤수진의 발과 다리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놀라서 침대 위에 벌떡 일어나 앉은 윤수진이 숨을 죽이며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비명 지르듯 불렀다.
  "제이콥."
  위험하게 공격적으로 변하던 그 전의 발작과 다르게 제이콥은 윤수진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 깔고 애원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고 숨도 가쁘게 몰아 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버디가 보이지 않았고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이콥. 안돼. 나한테 이러면 안돼."
  윤수진은 제이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아래 층의 칼로스 부부가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어둠 속에서 제이콥의 눈이 번들거렸다. 항상 어린아이 같이 순진하게만 보이던 그 눈에 지금은 욕망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제이콥의 손이 벗은 윤수진의 다리를 잡아 당기며 그 위로 다가왔다.
  "안돼. 가까이 오지 마. 돈 캄 클로스. 돈 터치 미."
  발작이 일어나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제이콥의 손에는 엄청난 힘이 있어서 윤수진은 그 힘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제이콥은 윤수진의 발목을 아프도록 움켜쥐고 당기고 헐떡거리며 그 위로 올라갔다. 발목을 놓고 자기 몸으로 윤수진을 덮치며 무서운 힘으로 윤수진의 몸을 끌어 안았다.
  "으, 으, 으, 으."
  윤수진의 보드라운 맨 살을 온몸으로 느끼며 제이콥이 이상스러운 소리로 신음했다. 제이콥의 숨소리가 터질 것처럼 위태롭게 거칠어지고 있었다. 가늘고 섬세하기만 한 제이콥의 몸에 어울리지 않게 괴물스럽게 큰 그의 성기가 철물처럼 단단하게 발기해서 윤수진의 아래 배를 압박했다.  
  윤수진은 그 억센 손아귀를 힘을 써서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제이콥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내버려 두었다. 그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귀에 대고 아주 침착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제이콥, 아 유 오케이? 디스 이스 맘. 괜찮니? 난 네 엄마야."
  헐떡거리며 윤수진의 위에서 느슨한 잠옷을 벗겨내던 제이콥이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제이콥. 디스 이스 유어 맘. 아이 러브 유."
  윤수진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제이콥의 마음을 깨웠다. 이제 제이콥은 분명히 윤수진의 목소리를 정상적인 마음으로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이콥의 거칠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러다가 제이콥은 온몸을 화들거리며 떨기 시작했다.
  "오우, 노, 노, 노. 마이 갓, 노."
  목소리까지 떨며 부르짖던 제이콥이 윤수진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외면하며 벌떡 일어나서 뛰어나갔다.
  그 후 삼 일 동안을 제이콥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리아가 끼니 때마다 날라다 주는 식사도 거의 남아서 도로 나오고 방안에는 사람이 있는 기척조차 나지 않았다.
  "수진, 무슨 일이 있었어요?"
  마리아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윤수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제이콥은 윤수진과 같이 있는 시간을 가급적 피하며 아주 서먹하게 대했다. 그 후 수년 동안 제이콥은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모두 제이콥이 완쾌되었다고 좋아했고 그 마을에 있는 작은 수퍼마켓에도 파트 타임으로 취직해서 정상인의 생활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 작은 마을의 성품 착한 사람들은 교통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자신도 머리를 다쳐 오래 동안 폐인처럼 살다가 다시 갱생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제이콥을 친절하게 대하며 도와 주려고 애썼다. 거기에 발 맞추듯 제이콥도 또 열심히 노력하며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샀다.
  그렇게 하면서 꽤 오래 동안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뉴져지에서 죠세프가 급성 암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실신한 상태에서 앰뷰런스를 타고 병원에 실려 들어가 진단을 받았는데 혈액 암이 전신에 퍼져 손을 쓸 단계를 지나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심한 당뇨와 고혈압 등이 겹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치료의 가능성을 크게 줄여주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칼로스와 마리아는 밤낮 가리지 않고 방에 걸어 놓은 성모 마리아 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 했고 제이콥도 수퍼마켓을 그만두고 집에서 불안한 얼굴로 하루 종일 뉴져지의 소식만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마침내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의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고 환자 본인의 의사에 따라서 죠세프를 퇴원시켰다. 그리고 죠세프는 자기 생의 마지막을 샬리스에서 보내겠다고 간청하여 특별기 편으로 간호사 둘과 함께 샬리스로 돌아왔다. 뉴져지의 병원에서는 죠세프 스타인버그의 환자 관리를 샬리스에서 가까운 쎄인트 룩스 메디칼 센터로 이관해 주었고 죠세프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암 전문의 한 명과 간호사 둘이 죠세프의 샬리스 저택으로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샬리스에서 가까운 곳의 유태인 교회 시나고그에서 랍비도 와서 종교 예식을 준비하고 돌아갔다. 뉴져지에서 죠세프를 간호하며 따라온 간호사가 메디칼 챠트를 새로 온 의사와 간호사에게 이관해 주고 환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했다.
  마리아와 칼로스는 분주하게 돌아가며 그 동안 쓰지 않던 방들을 청소하고 침대 시트를 바꾸며 갑자기 늘어난 방문객들이 묵을 준비를 했다.
  다음 날 뉴져지의 간호사들은 다시 비행기로 돌아가고 그 며칠 후에는 말끔한 양복을 입은 두 명의 변호사와 뉴져지 저택 관리인이 도착하여 죠세프의 임종 이전에 있을 마지막 유언을 들을 준비를 했다.
  침울한 얼굴의 제이콥은 그러나 냉정할 만큼 침착했다. 평소에는 쓰지 않던 유태인의 키파 모자를 쓰고 거실 한 구석에 가만히 앉아서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었다. 언제나 처럼 그 옆에는 충직스런 버디가 앉아서 제이콥의 침울한 기분을 알아챈 듯 자기도 침울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버디는 이미 노년으로 접어든 나이가 되어 움직임이 둔해져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쇠약해지고 있는 죠세프는 이미 오래 전에 작성해 놓았던 유언장을 보완하고 고치면서 변호사와 뉴져지 관리인과 함께 녹음기에 육성 녹음으로 많은 유언을 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죽음에 굴복하는 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죠세프 스타인버그는 마치 남의 죽음을 관망하는 사람처럼 담담하고 여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따금 윤수진을 불러서 머리맡에 앉혀 놓고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이따금 미소 까지 보였고 윤수진을 보는 눈에는 정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버티던 죠세프는 10월 19일 6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바깥의 날씨가 차지기 시작하고 온 천지의 나무들이 불타듯 빨갛게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계절이었다.
  시나고그에서 여러 명의 유태교 신도들을 데리고 온 랍비는 유태인 장례 예법에 따라 종교 절차를 마치고 저택의 뒤뜰 죠세프의 아버지가 묻힌 옆에 그의 관을 내렸다.

  그렇게 죠세프가 세상을 떠나고 무겁고 뒤숭숭한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윤수진은 이제 이 샬리스를 떠나기로 마음 먹고 칼로스와 마리아에게 짐을 꾸려 달라고 부탁했다. 짐이라야 거의 모두가 그 동안 그렸던 그림들과 그림 그리는 도구들에 불과했고 윤수진 개인의 사물은 몇 점 되지 않았다. 이상하게 인연이 되어 한국에서 발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만난 이방인 죠세프와 전연 알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곳에 와서 보낸 십 년은 돌아 보니 마치 꿈속에서 살았던 것만 같은 세월이었다.
  윤수진이 그렇게 떠날 차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제이콥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파랗게 변해서 돌처럼 꼼짝도 안하고 몇 시간을 앉아 있다가 저녁이 되어 겨울 해가 순식간에 기울고 집안에 전기 불이 켜지기 시작할 때 드디어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잠잠하던 버디가 갑자기 맹렬하게 짓어댔다. 수년 동안 이런 일이 없었으므로 칼로스도 처음에는 버디가 왜 갑자기 그렇게 맹렬하게 짖어대는지 몰라 당황하다가 상황을 기억해내고 허둥거리며 담요 한 장을 들고 제이콥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이제 칼로스도 나이 들어 몸이 쇠약해져서 그 전처럼 재빨리 제이콥을 붙잡아 타고 앉을 수가 없었다. 칼로스의 손길이 닿지 못하자 제이콥은 괴물처럼 소리지르며 집안의 기물을 때려 부수다가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 윤수진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수진, 못 가. 돈 고우. 여기서 살아야 해. 여기서 나하고 살아야 해."
  떠나기 위해서 가방을 꾸리던 수진이 놀라서 물러섰다.
  평소에 순하게만 보이던 제이콥의 눈이 번들거리며 야만스러운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나는 수진이 필요해. 수진은 여기서 살아야 해. 여기를 떠날 수 없어."
  제이콥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 것은 외마디 비명 소리 같았다.
  그 기세에 놀라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서던 윤수진은 침대에 걸려 쓰러졌다. 그 위로 제이콥이 달려들어 타고 눌렀다. 윤수진의 두 어깨를 잡고 누르는 힘이 괴물처럼 억셌다.
  "수진은 여기 있어야 해. 나하고 살아야 해. 나하고 살아야 해. 나하고 살아야 해."
  같은 말을 비명처럼 되뇌이며 제이콥은 더욱 무서운 힘으로 윤수진을 타고 눌렀다.
  헐떡거리며 뒤따라 뛰어 올라온 칼로스가 마침내 제이콥의 뒤에서 담요로 덮치고 끌어안아 윤수진에게서 떼어 놓으려 했다. 그러나 발작과 함께 괴물이 된 제이콥의 괴력 앞에서 이미 나이 들어 쇠약해진 칼로스의 힘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제이콥의 휘두르는 팔에 가슴을 얻어맞은 칼로스는 힘없이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제이콥. 정신 차려. 나는 네 엄마야. 가까이 오지마. 내 몸에서 손을 떼."
  찢어지는 것처럼 윤수진이 소리쳤다. 그러나 제이콥은 이제 윤수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괴력으로 윤수진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그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제이콥은 거센 숨결 사이로 소리지르고 있었다.
  "수진은 나를 떠날 수 없어. 수진은 내 손을 벗어날 수 없어. 절대 안돼."
  윤수진은 목덜미에 쏟아지는 제이콥의 불처럼 뜨거운 숨결을 느끼고 전율했다.
  칼로스가 또 허둥지둥 달려들어 제이콥을 뜯어내려 하다가 자빠졌다.
  버디가 제이콥의 등 뒤에서 귀청이 떨어질 것처럼 맹렬히 짖어대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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