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아, 수진아 (제 7 회)

2014.10.26 05:14

김영문 조회 수:97 추천:14

                         수진아, 수진아 (제 7 회)

                                      (11)  

  그렇게 해서 낙엽 지는 가을과 함께 제이콥이 자살해서 가버리고 또 다른 가을이 오고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봄이 되었다가 여름으로 바뀌면서 무심한 시간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추억이 안타까워서 잠시 흘리던 눈물은 시간과 함께 말라서 없어져 버리고 살아서 남아 있는 사람은 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바쁘게 자기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매년 판에 박은 듯 되풀이되는 인간사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엄청나게 큰 힘에 의해서 조종되고 있는 것처럼 싫증도 내지 않고 잘도 따라가면서 똑같은 체 바퀴를 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하다. 윤수진은 제이콥의 자살 사건이 있기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굳게 다물어 말이 없어진 입과 창백한 얼굴이 다시 그런 사건이 있기 전으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밤과 낮이 바뀐 생활을 하면서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마치 죽음이 임박한 사형수가 시간과 싸우듯이 미친 것처럼 그림만 그려대고 있는 이 윤수진을 나는 이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을 때 옆에서 거들어주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도 역시 침묵하며 윤수진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적합한 길이고 그것이 이 녀석이 가장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이콥의 자살 사건이 있은 후 반 년쯤 지나면서 내 개인 통장에 저금되어 들어 있던 몇 푼 안 되는 금액은 동이 나고 나는 무일푼 털털이가 되어 버렸다. 윤수진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따금 상당 금액을 내 은행 구좌에 입금하고 그 입금 전표를 나에게 주곤 했는데 이것이 더럽게도 나에게는 몹시 힘든 경험이 되어서 내 마음을 괴롭혔다. 더구나 그 사이에 나는 짧은 소설을 한 편 써서 잡지사에 응모해 보았는데 그 거지 같은 놈의 잡지사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적으로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제이콥의 자살로 충격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제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입 다물고 살고 있는 윤수진이 내 눈에는 점점 미운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대로 열심히 백지 위에 뭔가를 써내려고 애쓰며 번민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 내가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거의 잊고 살다시피 했던 그 고질적인 열등의식이 이 윤수진 짜식 때문에 새로운 형태로 재발해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따금 녀석이 그려내는 그림을 보고는 가슴 섬뜩하도록 느껴지는 그 감동에 나는 겉으로 나타내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감동적인 글을 써내지 못하는 나 스스로를 한탄하며 자폭적으로 더 깊은  열등의식의 구렁텅이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이 정신적 위축감 때문에 언제 부터인지 나는 윤수진과 성교를 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윤수진의 벌거벗은 몸과 부딪쳐도 나의 남성은 발기하기를 거부하고 축 늘어져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만 했다. 윤수진의 정신력에 위축되어 심리적으로 작아져 있는 나에게 윤수진은 내가 범할 수 있는 대상이기에는 너무 크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윤수진의 그 망할 놈의 위로하는 듯한 눈과 따뜻하게 나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은 더욱 나를 역겹게 느끼게 했고 더욱 성교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증거를 나는 스스로 경험하고 있는 셈이었다.
  윤수진은 한국에서 이루지 못했던 꿈, 화가로서의 자기 자리를 이 외방의 나라에서 꽤 단단히 굳혀가고 있었다. 모리스타운의 죠세프 화랑에서는 윤수진의 그림이 판매되면 그 지불금을 또박또박 우송해 주었다. 우편물 속에서 죠세프 화랑의 편지 봉투가 발견될 때마다 못되게도 내 마음 속에는 질투심이 일어나고 또 한쪽으로는 내 마음의 한 부분이 조금씩 죽어갔다. 고양이 같은 윤수진 이 자식이 나의 이런 마음을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내 얼굴이 붉어지면서 심장이 쿵쾅거리고 뛰는 것이었다. 윤수진은 아무 말 안했고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녀석이 도대체 얼마만큼 내 마음을 읽고 얼마만큼 내 마음 속의 갈등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불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나보다 똑똑한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이 진정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나는 실제로 경험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인생은 가시밭길이라는 그 유행가 가사가 이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또 두 편의 단편 소설을 써서 두 군데의 다른 신문사에 작품 응모를 해보았는데 이번에도 역시 예상했던 대로 양쪽 모두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윤수진에게는 비밀로 했으므로 이 녀석의 그 위로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실로 다행한 노릇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이상스럽도록 서로 말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 버렸고 같이 외출하는 일도 거의 없게 되었다. 같은 장소에 같은 시간에 존재하고 있지만 윤수진은 윤수진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 다른 생활을 하는 셈이었다.  
  제이콥이 샬리스의 저택에서 목매어 자살한 후 두 해가 훌쩍 흘러버리는 사이에 윤수진은 벌써 십 여점의 작품을 창작해서 죠세프 화랑에 내 놓았고 나는 뭔가를 쓰겠다고 시작할 때마다 앞이 꽉 막혀서 몇 시간씩 끙끙거리다가는 애꿎은 펜만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죄 없는 종이만 찢어발기곤 하고 있었다. 이 망할 놈의 글 쓴다는 일은 윤수진 녀석이 꼬드기지만 않았더라면 검정 홀대바지 시절로 막을 내리고 더 이상 돌아보지 않을 추억 정도로 끝났어야 하는 일인데 녀석이 괜스레 나서서 잿더미에 불을 붙여 나를 괴로운 지경으로 몰아넣어 버리고 만 셈이었다. 괘씸한 놈. 게다가 나는 녀석의 꼬드기는 말에 솔깃해서 드디어 또 글을 쓰기 시작하겠다고 우스꽝스럽도록 엄숙한 마음으로 다짐까지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현실적으로 더 큰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윤수진은 백만 불인지 이백만 불인지 뭔지 죠세프에게서 물려받은 돈에다가 화랑에서 작품이 팔릴 때마다 판매 금액의 51 퍼센트를 송금 받아서 점점 부자가 되어 가고 있는데 나는 무직자에 수입이 없었으므로 말하자면 윤수진에게 얹혀서 사는 멍청이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미 말했다시피 봉급쟁이하면서 모아 두었던 돈은 오래 전에 소진되어 버렸고 이따금 윤수진이 눈치껏 입금해주는 돈을 못이기는 척 받아서 용돈으로 쓰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돈을 받을 때마다 내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언제 갚을지도 모르면서 차용 증서라고 휙 갈겨써서 윤수진에게 주곤 했다. 나는 도무지 내가 나 스스로에게 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 곤두박질치고 만 것이었다.
  나는 이 생활에서 탈출해야 했다. 더구나 내 좁은 마음속에서 전연 이유 없이 윤수진에 대한 거부감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이 이유 없는 감정이 더 시커멓게 내 마음 속에 꽈리틀기 전에 윤수진의 곁을 떠나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먼 옛날에 닫혔던 검정 홀대바지 시절의 정열과 꿈과 신선했던 친구의 정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다시 열어서 더러 파괴하고 더러 오염시켜서 냄새나게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뒤늦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쉬움이 있더라도 멀리서 그저 안타깝게 그리워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관계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가슴 저리도록 그리운 추억을 파괴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윤수진도 나의 이런 마음의 변화를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 전하고는 다르게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졌고 윤수진의 이런 부자연스러운 태도는 나를 더욱 더 거북하고 역겹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 둘 사이는 점점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처럼 위태로운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윤수진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하면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 전에 했던 일이 무역과 물류업이었으므로 나는 그 방면으로 뭔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뉴욕 타임스와 한국 신문등의 구인 광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는 한국 신문에서 뜻밖에도 그 옛날 검정 홀대바지 시절의 동지 최명도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었다.
  최명도. 나와 같이 글을 쓰면서 기성 문단을 비판하고 지금 까지 보지 못했던 두드러진 작품을 쓰자고 기세를 부렸던 친구였다. 그 뜨거운 여름날 설악산에 갔다가 연극배우 지망생이던 김현석이와 함께 술에 취해서 수진이를 강간했던 녀석이었다. 그 아버지가 명동 입구에서 캘리포니아 양화점을 하면서 지체 높고 거룩한 공무원, 영화배우, 돈 많은 사업가등 고급 고객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꽤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용돈을 거의 도맡아서 조달해대던 친구였다. 그 신문 기사에는 그가 한인회 부회장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부회장. 한인회 부회장. 어쩐지 검정 홀대바지 시절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상과는 꽤 거리가 먼 직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했는데.
  나는 일단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신문 기사를 찢어서 보관하고 있다가 다음 날 전화번호를 찾아내어 한인회에 전화했다.
  “네, 부회장님이요? 지금 안 계신데요. 낮에는 사업을 하시기 때문에 오후가 되어야 사무실에 들리곤 해요.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겨 놓으세요.”
  나는 전화 받은 여자에게 한인회 부회장이라는 최명도가 내가 찾는 최명도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명동에서 구둣가게 하시던 분 어쩌고 하면서 신상 확인을 한 후 내 번호를 남겨 놓았다. 이철수라는 사람을 안다고 하면 전화를 부탁한다고 말해 놓았다. 한인회 부회장. 사업. 어쩐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오후 여섯 시쯤 되어서 최명도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철수, 야, 이게 웬 일인가? 이렇게 오랜만에 이역만리에서 만날 기회가 생기다니. 이 인연을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 전에 듣던 목소리와 다르게 굵고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가 마치 신파극의 연사처럼 들리고 전연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처럼 서먹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지냈냐고 묻자 최명도는 다짜고짜 호기 있게 말했다.
  “철수야, 너하고 나 사이에 이렇게 전화로만 말하면 되겠니? 만나서 우선 얼굴을 봐야 할 것 아니냐?”
  그렇게 해서 나는 다음 날 최명도가 말하는 음식점에서 만나기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진이에게 말할까 하다가 나는 침묵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설악산 바위 밑에서 생겼던 강간 사건이 윤수진의 머릿속에 불로 지진 듯 남아있을 터인데 악몽을 되살려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 저녁에 그가 지정한 고급 한식점에서 만난 최명도는 놀랍게도 하얀 드레스 셔츠에 넥타이에 번쩍거리는 기지로 만든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정 홀대바지 시절을 생각하던 나의 눈에 그는 거의 믿기지 않는 모습으로 변신되어 있었다. 더구나 최명도는 똑같이 양복을 입고 반질반질하게 생긴 대학생 또래의 사람을 하나 대동하고 있었다.
  “햐, 오랜만이구나. 너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어떠냐? 요새는 살기가 괜찮냐?”
  최명도는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 같이 온 젊은이에게 턱짓으로 앉으라고 지시했다.
  젊은이는 나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럽게 최명도의 옆 자리에 앉았다.
  의아해하는 나의 눈을 읽었는지 최명도가 그 젊은이를 소개했다.
  “아, 내 비서야. 오랜만에 널 만났으니까 술을 좀 마셔야할 것 같아서 운전 좀 하라고 데리고 왔지. 이봐 챨리, 인사해. 학교 다닐 때 둘도 없이 단짝이었던 내 친구야.”
  앉았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서 나에게 꾸벅 절을 했다.
  “챨리 김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 상투적인 인사법에 어쩐지 입맛이 써지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눈을 돌려 최명도를 보고 물었다.
  “글은 많이 쓰고 있니? 학교 다닐 때 너는 글을 쓰는 것만이 너의 존재 이유라고 말하곤 했는데.”
  “글? 그거 집어 치운지 오래됐어. 돈도 생기지 않는 놈의 것 붙잡고 씨름해봤자 승산이 없는 거야. 글 쓰겠다고 나온 놈 천 명 중에 한 명 정도가 그 짓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실로 다행한 노릇이야. 그 것도 바닥 치는 생계를 말이야. 나는 승산 없는 게임에는 말려들지 않는 사람이야.”
  최명도는 식사 전에 술부터 한 잔하자고 하더니 소주를 두 병째 바닥내면서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최명도가 잔을 비울 때마다 어김없이 이 챨리 김이라는 젊은이는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워 놓았다.
  곰탕 한 그릇을 먹겠다는 나를 마다하고 한사코 최고급 고기로 만들었다는 전골인지 뭔지를 주문해서 권하면서 최명도는 손가락에 번질번질 기름을 묻히며 식욕 좋게 잘도 먹어대었다.
  그러던 최명도가 갑자기 취기 어린 얼굴에 느글거리는 웃음을 띠우고 물었다.
  “야, 너 윤수진이 기억하지?”  나는 최명도가 수진이 이름 다음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를 미리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흐, 흐. 그 때 그 설악산 말이야. 기억나? 물에 젖은 옷 속에 수진이 녀석 진짜 터질 것처럼 잘 익어 있었어.”
  최명도는 또 술잔을 비우고 비서 찰리 김은 눈을 반짝거리며 듣다가 얼른 술잔을 채웠다.
  “바지를 벗겨내자 반항하면서 요동을 쳤는데 그게 더 미치게 만들더라구. 내가 먼저 한탕 치루고 나서 김현석이 녀석에게 너도 한 번 하라고 하니까 짜식 숫기가 없어서 주저하더라구. 그래도 그 눈은 수진이 벗은 아랫도리에 붙어서 꼼짝도 안 하는 거야. 흐, 흐.”
  또 술잔을 비우는 최명도는 이제 꽤 취해 있는 모양이었다.
  “야, 최명도. 그건 강간이야. 뭐가 자랑스럽다고 다시 끄집어내서 말하겠다는 거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흐, 흐, 쏘리, 쏘리. 그러고 보니까 네가 윤수진이를 꽤 사랑하고 있었지. 그걸 나는 나중에 알았어.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그런 짓하지 않았겠지.”
  말하는 최명도의 취기어린 눈에 다소 승자의 오만함이 배어 있다고 느낀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쓸데없이 옛날 생각만 하고 이 녀석에게 전화했던 것을 이미 한참 전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최명도의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서 의자에서 튀어 일어날 뻔 했다.
  “참, 너, 이거 아니? 김현석이 자살했어.”
  “뭐야? 현석이가? 자살?”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녀석, 자살했지. 연극을 한답시고 극단을 따라다녔는데 항상 외톨이였어. 한 번도 무게 있는 역을 맡아보지 못했지. 연극은 여럿이 모여서 하는 팀워크인데 이 짜식은 그런 팀워크에는 맞지 않는 성격이었던 거야. 나도 한참 못 만나다가 우연히 명동에서 부딪친 적이 있었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더군. 데리고 가서 밥 사 먹이고 둘이서 막걸리를 취하도록 마셨지. 이야기도 많이 했어. 헤어질 때 주머니에 있던 돈 다 집어주고 힘내서 살라고 말해줬는데 그 며칠 후에 하숙집에서 수면제를 잔뜩 먹고 죽은 거야. 내 전화번호가 짜식 수첩에 있어서 전화가 왔었지. 연극하는 사람들이 얼마씩 모았고 나도 상당한 금액을 보태서 화장해 버렸어. 불쌍한 자식. 꿈은 컸는데 이루기에는 너무 힘겨운 꿈이었던 것 같아. 차라리 나처럼 미리 포기하고 속세에 타협했으면 그런대로 무난한 한 세상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김현석이 자살했다는 말이지? 나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김현석. 착한 자식이었는데. 가슴 속에 무엇인가가 꽉 막혀서 넘어가지 않고 목젖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이제 이 세상에 김현석이 같은 착한 사람이 설 땅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이 최명도 같이 느글거리면서 속물화된 놈들이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해서 번성하게 되는 것이겠지.
  나는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그 섬세하고 예술가 기질이 다분하던 김현석이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서로 보지 못하는 먼 곳에서 살아도 이 세상 어딘가에 있어서 언제인가 기회가 되면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영원히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다른 것이다. 마지막 보았을 때 학사 주점에서 윤수진 강간 사건을 질타하고 따귀를 때리자 울먹거리면서 외면하던 그의 얼굴이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선하게 내 눈앞에 떠올라왔다.
  내 앞에 앉아서 대수롭지도 않게 김현석이 자살했다고 말하고 술잔을 들고 있는 이 최명도를 보면서 나는 점점 적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부회장. 사업. 비서. 이런 생소한 단어들을 코끝에 걸고 이 최명도는 이 세상을 잘도 헤엄질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그 홀대바지 시절 같이 몰려다닐 때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재능이었다.
  “사업을 한다고 했는데 무슨 사업을 하고 있지?”
  “구두. 아버지가 양화점을 했지 않아. 그렇게 연줄이 되어서 미국으로 구두 수출을 하기 시작하고 내가 뉴욕으로 이사 와서 지사를 만들어 운영하다가 영주권 받고 주저앉았지.”
  나는 갑자기 우울해진 기분으로 내 앞에 놓인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현석이. 너, 현석이 이야기 좀 더 해봐. 녀석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자살했는지 말이야.”
  “하, 하. 너는 전에도 그랬지만 아직도 정이 많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소식 모르고 살았어도 아직도 정이 남아 있어.”
  최명도의 술기운에 풀어진 눈이 나를 지긋이 보고 있었다. 잠시 입 다물고 있던 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는 그 때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차갑고 외톨이 성격이었지만 정이 많이 있었지. 겉으로는 가시 돋친 듯 가까워지기 힘든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야. 사실 너는 속으로는 따뜻한 녀석이었어.”
  말하면서 최명도는 팔을 뻗어 손으로 내 뺨을 툭툭 쳤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김현석이. 짜식. 불쌍한 녀석이었어.”
  최명도가 한숨 쉬듯 말했다.
  “윤수진과의 사건이 있고나서 우리는 모두 헤어져 버렸잖아. 너도 잠적해 버려서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었고. 김현석이, 이 녀석만 이따금 거리에서 부딪치곤 했지. 꼴이 말이 아니었어. 자살하기 며칠 전에 만났을 때는 정말 거지꼴이었지.”

                                     (12)

  그 때 최명도는 졸업반 강의를 대충 때워가면서 시간 날 때마다 아버지의 구두 가게 “캘리포니아 슈 살롱”에 가서 일을 거들면서 배우고 있었다. 구두 가게는 을지로 2가 명동 입구 내무부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도 꽤 고급스럽게 치장이 잘 된 가게였다.      
  그 날도 최명도는 미도파 백화점 앞에서 버스를 내려 명동 거리를 가로질러 아버지의 가게로 가다가 앞에서 휘적거리며 걷고 있는 눈 익은 사람을 발견하고 얼른 뒤따라가 얼굴을 확인했다.
  “야, 현석아.”
  흠칫 놀라며 돌아보는 김현석의 눈이 굵은 안경 뒤에서 흐릿했다.
  “어, 명도. 너 최명도구나.”
  김현석은 그 언젠가에 입고 다니던 검정 홀대바지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짜식, 요즘은 어때? 연극하는 일은 잘되고 있어?”
  김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큰일이다, 뭔가가 돼야할 텐데 말이야.”
  김현석은 코를 훌쩍하고 굵은 안경을 손끝으로 밀어서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너, 돈 있니?”
  “돈? 무슨 돈? 얼마나?”
  김현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최명도를 외면했다.
  “나, 배가 고프다.”
  말을 끝낸 김현석의 초점 없는 눈이 그저 대상 없이 허공을 보고 있었다.
  “난 또 뭐라고. 현석아, 따라와. 나도 특별히 할 일이 없던 참이니까 우리 밥도 먹고 막걸리도 한 잔 하자.”
  최명도는 김현석의 팔을 끌고 가까운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식사가 나오자 김현석은 최명도의 눈치를 보다가 허겁지겁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참이 지나는 동안 최명도는 막걸리를 자작해서 마시며 그런 김현석을 지켜보았다.
  허기가 채워진 김현석이 제 정신이 돌아왔는지 다소 얼굴을 붉히면서 당황해했다.
  “나, 추하게 보이지?”
  어색함을 채워주기 위해서 최명도는 일부러 크게 웃었다.
  “야, 김현석이. 네 앞에 앉아 있는 게 나야, 나. 최명도야. 알겠어? 내 눈에는 네가 내 친구 김현석으로 보일 뿐이야. 더구나 우리는 구멍 동서라는 걸 기억하라구.”
  갑자기 김현석이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 얘기는 하지 마.”
  “어? 짜식. 왜?”
  “우리가 잘못했어.”
  김현석의 초췌한 얼굴을 보던 최명도가 큰 소리로 웃었다.
  “야, 김현석. 너 기억나니? 그 날 우리는 무지하게 취했지. 게다가 그 윤수진이는 너무 예뻤어. 물에 젖어서 터져 나올 것 같았던 그 몸을 보고 사나이가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었다는 말이야.”
  “명도야. 그만 해. 그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말이야.”
  최명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김현석을 보다가 웃고 말았다.
  “야, 알았다. 술이나 마셔라. 그 이야기는 더 안 할 테니까.”
  막걸리 주전자가 비자 최명도는 또 한 주전자를 주문했다. 김현석은 몸이 허약해져서 그런지 막걸리 석 잔에 이미 상당히 취해가고 있었다.
  “명도야.”
  취한 목소리로 김현석이 최명도를 불렀다.
  “왜?”
  “우리 그 때 참 괜찮았는데. 우리 넷이서 말이야. 참 많은 말을 같이 했지. 나는 내 살아온 중에서 그 때가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짜식, 너 약해진 모양이구나. 힘내, 임마. 강한 사람은 앞날을 이야기하고 약한 사람은 지나간 일을 이야기한다는 걸 몰라? 젊은 사람은 앞날을 설계하고 늙은 사람은 지나간 추억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거야. 너는 지금 옛날이야기를 할 나이가 아니야.”
  초점 없이 식탁을 내려다보며 김현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 굵은 안경 뒤에서 흐릿하던 눈이 막걸리 기운에 더욱 흐릿하게 보였다. 앞에 놓여 있던 막걸리 잔을 들어서 입으로 가져가던 손이 갑자기 와들거리며 떨었다. 하얀 막걸리가 식탁 위로 흘러 떨어졌다. 김현석은 마치 온몸의 힘을 잃어버린 듯 막걸리 잔을 식탁 위에 덜컥 떨어트리듯 내려놓았다.
  “왜 그래, 임마?”
  최명도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현석의 울 것 같은 얼굴이 한참을 식탁만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시골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몰라.”
  “짜식, 난 또 뭐라고. 전화 한 번 해드리면 되잖아.”
  최명도의 말이 귀에 안 들어가는 듯 김현석은 식탁만 내려다보면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아마 내가 죽었는줄 알고 있을 거야. 소까지 팔아서 입학금을 내 주셨는데.”
  최명도도 다소 숙연한 얼굴이 되어 있다가 또 한 주전자의 막걸리를 주문했다.
  “내가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해서 고향을 떠날 때 아버지 어머니는 너무 자랑스러워서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 잔치를 했거든. 나보다 아홉 살이나 아래인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이 아이도 동네 다 돌아다니면서 오빠가 서울 간다고 자랑하고 다녔지.”   최명도가 아무 말 없이 주전자를 들어 자기 잔을 채웠다.
  “야, 현석아, 마셔. 좀 마시고 취해라. 너 지금 그 기분이 심상치 않다. 너무 가라앉아 있어.”
  “경희. 내 동생 이름이야. 그게 그러니까 벌써 8년 전 일이야. 지금은 다 큰 처녀가 되어 있겠지. 성공해서 돌아올 오빠를 기다리다가 포기한지 오래 되었을 거야.”    김현석이 힘없이 와들거리는 손으로 잔을 들어 몇 모금 마셨다. 안경 뒤의 눈이 젖어 있었다.
  “나는 열심히 했어. 나는 내 최선을 다한 거야. 그래도 안됐어.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았어.”
  막걸리 잔을 내려놓는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다가 마침내 김현석은 흑, 하고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 사이로 김현석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 것도 안 됐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그저 그렇게 끝나 버리고 만 거야.”
  듣고 있는 최명도의 마음속에 어떤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을 그는 애써 지워버렸다.
  “야, 현석아. 세상 일이 모두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잘 된다면 고민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괜찮아 보이지만 모두 저마다의 고민을 안고 살고 있는 거야. 너만 그렇게 엄청난 짐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니야. 알겠어? 너만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야. 모두 괜찮은 것처럼 살지만 다 자기만의 세계에 들어가서 문 닫아 걸고 나면 저마다 남모르게 울면서 사는 거란 말이야.”
  김현석의 귀에 최명도의 말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김현석은 이미 현실을 떠난 사람인 것처럼 말이 없었고 최명도는 그런 무거운 침묵을 참을성을 가지고 감내하다가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 취한 김현석의 다리가 걸을 때마다 꼬였다.
  “야, 현석아, 괜찮겠니? 내가 집까지 같이 가줄까?”
  현석은 최명도를 뒤로하고 걸어가면서 손만 들어서 흔들었다.
  “괜찮아. 나 버스 타면 돼. 잘 갈 수 있어.”
  최명도는 허우적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김현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왈칵 그 홀대 바지 시절이 생각나서 그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꼈다. 잠시 보고 있다가 아무 말 없이 뒤따라가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꺼내어 김현석의 주머니에 쑤셔 넣어 주었다.
  “현석아, 나는 네가 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알겠니? 힘내서 살아라.”
  취해서 휘청거리는 현석의 어깨를 끌어안고 최명도는 팔에 힘을 주었다.
  “현석아. 내가 하는 대로 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나는 어차피 그 놈의 되지도 않는 글 쓰는 짓을 포기한지 오래됐어. 현실에 맞춰서 살아야 하겠다는 진리를 새삼 터득한 거야. 글 써서 돈 잘 벌고 잘 사는 놈 몇이나 되는지 생각해 본거야. 몇 안 돼. 아주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는 모두 반쯤 굶으면서 사는 놈들뿐이더라는 말이야. 그래서 나는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하기로 했지. 그러고 나니까 모든 것이 편해졌어. 모든 것이 아주 편해졌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하다는 느낌이더라는 말이야. 너도 마찬가지야. 어차피 안 되는 일 잊어버려. 타협하고 일자리를 찾아서 생활비 벌 길을 마련하라는 말이야. 홀대 바지 입고 돌아다니면서 온갖 잡소리 해대던 시절은 지나갔다고 생각하면 돼.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도 변해야 하는 것 아니겠니? 시간은 흐르고 나이는 드는데 어제하고 똑 같은 생각만 가지고 살 수는 없다는 말이야.”
  김현석의 눈이 방향을 잃고 허공을 헤매다가 최명도의 시선을 피해 땅을 내려다보았다. 힘없는 목소리가 혼자 소리하듯 중얼거렸다.
  “그럴 거야. 아무리 애써도 해낼 수 없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을 거야. 노력한다고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을 테니까.”
  김현석은 돌아서서 가던 길을 다시 휘적휘적 가기 시작했고 최명도는 그런 김현석을 잡지 않았다.

                                      (13)

  “현석이는 그렇게 해서 가버린 거야. 그 날 현석이를 본 것이 마지막이 되어 버린 거야.”
  최명도는 이제 상당히 취해 있었다.
  나는 마지막 까지 애쓰다가 참패해서 생을 거두어버린 현석을 생각하고 깊이 모를 허망함에 속으로 울면서 목젖을 울멍이고 있었다. 윤수진처럼 순수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려했고 자기의 목표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친구였다. 윤수진은 나름대로 성공했고 그에 따라 부수적으로 들어온 금전적 대가에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으로 생존해나가는 데에 문제가 없게 되었지만 김현석은 그렇지 못했다는 차이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는 그 차이가 결국은 한쪽의 죽음으로 이어져 버리지 않았는가. 죽음으로 몰려가기까지의 김현석의 고통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김현석 본인 이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겠지. 많은 무관심한 사람 속에 동댕이쳐져서, 또 더러 비아냥대는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그래도 무엇인가를 해보겠다고 애쓰다가 참패한 김현석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최명도와 어떻게 헤어졌고 어떻게 운전해서 집에 왔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도 한참을 끊어진 기억장치를 꿰어 맞춘 후에야 나는 내가 내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 밤 최명도와의 만남과 김현석의 죽음이 내 마음 속에 다시 떠올랐다. 울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그저 한없이 울고 싶었다.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한없이 울고 그리고 나서 잊고 싶었다. 들판의 야생마처럼 거침없이 돌아다니면서 하고 싶은 말 다 지껄이고 하고 싶은 짓 다하고 우리 멋대로의 세계에서 우리 멋대로의 철학을 만들고 우리 멋대로의 도덕률을 만들어서 가지고 살 수 있었던 시절은 이제 가고 없다. 치기만만했던 그 용기는 나이와 함께 마모되어 없어지고 맹렬히 타오르던 열망도 재가 되어 식어간다. 그 사이에 김현석이처럼 자기의 꿈만을 쫓다가 실패한 인간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서 도태되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인간은 군집 동물이기에 혼자 살 수 없고 그래서 나처럼, 아니면 최명도처럼 꿈을 버리고 백기를 집어든 사람은 이제 그 절대다수의 기존 사회 규범과 틀에 맞추어 들어가서 그 속에 얌전히 엎드려서 복종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 것이 싫고 구역질난다면, 그 틀 속에 안주하는 것에 혐오감이 있다면 그 것을 탈출하는 꼭 하나 남아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이 절대다수의 규격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사는 기존 사회를 탈출하는 확고부동의 방법이다. 죽음. 자살. 그것은 가장 치열한 항거다. 그것은 마지막 반항의 외침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계화되고 타인에 대한 감정이 둔화된 이 대중 사회 속에서 아무의 관심도 동정도 끌지 못하는 고독한 단말마의 비명이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서 찬물로 샤워를 했다. 어제 밤 마신 소주의 취기는 없어졌지만 김현석에 대한 추억은 내 가슴 속에 그대로 남아 내 마음을 납덩어리처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다가 나는 흠칫 멈췄다. 지난 2년 동안을 항상 자기 침실과 아틀리에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던 윤수진이 거실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내 쪽을 등지고 창문을 내다보며 앉아 있는 윤수진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윤수진 앞쪽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이상하게도 처음 만나는 사람 대하듯 내 마음이 불안정하고 쑥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타월을 목에 걸고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무엇인가 할 말을 찾고 있었는데 윤수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웬 술을 그렇게 마셨니? 게다가 운전까지 하고 말이야.”
  뜻밖에도 윤수진이 보통 때와 같은 보통의 말을 꺼내왔으므로 나는 한결 마음을 놓았다. 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뭐, 그냥,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있어서.”
  “오랜만에 만난 사람? 최명도?”
  나는 놀라서 윤수진을 보았다.
  “어? 너 어떻게 그걸 알았어?”
  윤수진은 그저 감동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아침에 전화가 왔었어. 어제 술 마시고 운전해서 갔는데 잘 들어갔냐고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 뭐라고 했어?”
  나는 다급히 물었다. 최명도가 수진이와 전화를 통했다니.
  “이철수. 바보. 내가 뭐라고 했겠어? 물론 잘 들어왔다고 했지. 잘 들어왔으니까.”
  “그런데, 그.....”
  나는 그걸 묻고 싶었는데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어서 헤매고 있었다. 윤수진이 되레 내 물음을 대신해서 대답해줬다.
  “부인되시죠?, 하고 정중하게 묻더라. 그렇다고 했지. 내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어.”
  나는 그 대답에 한숨 돌리고 있었다.
  “그랬더니 뭐래?”
  “그 녀석도 별 수 없군요, 결혼을 하다니, 하기야 시간이 흐르면서 사는 방법이 다 달라지기는 하는 거니까요, 그러더라.”
  나는 아무 소리 안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후후 웃었다.
  “나는 결혼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모양이지? 영광스럽군.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두 사람 있어.”
  “또 한 사람은? 윤수진?”
  윤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최명도를 찾아냈어?”
  나는 잠시 망설이며 생각하다가 다 말해버렸다. 이 집을 나가서 독립생활을 하기 위해서 신문의 구인 광고를 뒤지다가 최명도가 한인회 부회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전화해서 만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수진아. 김현석. 그 연극하겠다던 김현석이 자살했대. 수면제를 잔뜩 먹고 잠자리에 들어간 후 깨어나지 않았다는 거야.”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좀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윤수진의 얼굴이 이번에는 흔들렸다.
  “현석이가?”
  “응. 자살했대.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안됐던 모양이야. 비관되었겠지. 살기도 힘들고. 자기의 뜻을 굽히고 타협하는 것은 현석이가 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을 테니까.”
  윤수진은 잠시 가만히 앉아 있다가 입속으로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현석이가. 자살했다는 말이지?”
  윤수진은 그리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서 또 한참이 지난 후에 역시 아무 말하지 않고 일어나서 자기 아틀리에로 들어가 버렸다.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돌아설 때 언뜻 보인 그 눈에는 눈물이 고여 거실의 불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그런 일이 있고 한 달 정도가 지난 어느 날 나는 엉뚱한 전화를 받았다.
  “기억나시는지요? 저는 그날 최명도 부회장님을 모시고 갔던 비서 챨리 김입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최명도가 자기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서 비서를 시켜서 전화하게 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숨길 수 없는 거역감을 느꼈다.
  “그런데요?”
  내 차가운 거역의 목소리를 상대도 읽었겠지.
  “죄송합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전화를 하게 돼서.”
  이 비서라는 사람은 진실이 담기지 않은 겸손을 과도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만약 최명도 부회장인지가 나하고 할 말이 있다면 직접 전화하라고 말하시오.”
  전화를 끊으려는 나를 이 비서는 다급히 잡았다.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잠시만 말씀드릴 기회를 주십시오.”
  그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을 수가 없었고 결국은 집 근처의 맥도널드에서 잠깐 만나기로 했다.
  비서라는 챨리 김은 뜻밖에도 육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신사와 함께 미리 약속 장소에 나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자 벌떡 일어나서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같이 있던 신사복의 육십 대도 덩달아 일어나서 마치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챨리 김이 그 노신사를 소개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번에 있을 한인 회장 선거에 입후보하신 김만혁 회장님 되십니다.”
  더욱 어리둥절해서 나는 엉거주춤 서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회장 선거 후보? 그런데요?”
  “일단 앉으시지요.”
  김만혁 회장이라고 소개된 노신사가 의자를 권했고 나는 앉았다.
  챨리 김이 반들거리는 눈을 굴리며 설명했다.
  “이번에 회장 선거가 있습니다만 선거는 형식적인 것이고 모든 여론 조사로 미루어 보아서 여기 회장님께서 당선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왜 이런 설명을 나에게 하고 있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번 선거에 최명도 부회장님께서도 입후보를 하시겠다는 겁니다.”
  더욱 모를 일이었다.
  “왜 내게 이런 설명을 하지요? 이 일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요?”
  회장 입후보라고 소개 받은 김회장이라는 노신사가 입을 열고 육중하게 무게를 깔고 부언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이해를 못하시겠습니다만, 회장이 되려면 일단 나이도 지긋하고 재력도 상당히 있어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최명도가 꽤 똑똑한 젊은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막 마흔이 될동말동한 사람이 회장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언어도단일뿐더러 한인회를 모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챨리 김이 끼어 들었다.
  “회장님께서 두어 번 만나서 회장 후보에서 사퇴하라고 충고를 했지만 이 분이 당돌하게도 회장님의 호의어린 충고를 듣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부득이 선생님을 만나서 도움을 받고자 부탁드리기로 했던 것입니다.”
  “나보고 최명도가 회장 후보에서 사퇴하라고 종용하라는 말입니까?”
  나는 드디어 이 사람들이 나를 불러낸 사유를 알아내고 어처구니없어서 웃고 말았다.
  “아니,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 그 사람이 그렇게 호락호락 사퇴할 사람도 아니고요.”
  “그럼 뭐죠?”
  챨리 김이 김회장이라는 그 노신사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 육중한 무게를 깔고 김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 김비서의 말에 의하면 지난 번 최명도를 만났을 때 학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 중에 언제인가 등산 갔다가 최명도가 같이 간 어떤 여학생을 강간했다면서요? 이 사실을 증언해 주실 수 있다면 최명도는 자동적으로 회장 후보에서 탈락하게 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입니다.”
  챨리 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물론 우리 회장님께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이 회담의 목적을 이해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탁자 위에서 식어가고 있는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다가 말했다.
  “챨리 김이라고 했던가요? 지난 번 소개할 때는 최명도의 비서라고 들었는데 지금은 아닌 모양이지요? 지금은 이 분의 비서가 되어 있습니까?”
  그래도 약간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지 챨리 김의 얼굴에 붉은 기가 조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급료 액수의 문제도 있고 앞으로의 전망도 생각하고 여러 가지 고려해서 자리를 옮겼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누가 누구를 강간했다고요?”
  김회장이 끼어들었다. 역시 정치하는 사람의 잘 발달된 눈치로 판단해서 일이 제대로 되어갈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옛날이야기이긴 하겠지만 있는 대로 솔직하게 말해 주시면 이역만리에서 고생하면서 사는 우리 동포들이 더 좋은 한인 사회를 구축하고 진정으로 헌신해서 일할 수 있는 회장을 선출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챨리 김이 또 끼어들었다.
  “회장님께서는 후한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 더 좋은 한인 사회를 구축하고 진정으로 헌신해서 일할 수 있는 회장이 당신인가요?”
  나는 일어났다. 두 사람이 당황해서 나를 보았다.
  “모든 여론 조사에서 당선된 것과 다름없다면서 왜 최명도를 없애려고 하지요?”
  노련한 정치꾼 김회장이라는 사람은 짐짓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하고 있었고 챨리 김은 얼굴을 벌겋게 달구었다.
  “여하튼 나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누가 누구를 강간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군요. 그런데 그 후한 대가는 내가 받고 싶습니다. 사실은 내가 돈이 좀 필요하거든요. 회장 선거에 입후보한 김회장이라는 분이 회장 선거 경쟁자를 퇴치하기 위한 야비한 수단으로 내게 다른 경쟁 후보가 강간 사건을 저지른 일이 있었다고 증언해주면 후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제의했다는 사실을 신문사에 기고하면 일 터지겠지요? 후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나는 두 사람을 등 뒤에 놓아두고 맥도날드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이 사건에 대해서 나는 윤수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후 나는 EXPRESS SERVICE INTERNATIONAL이라는 물류 회사에 고용되어 출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급료는 내 희망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아파트 세내고 너무 아쉽지 않게 살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 회사에서는 마침 중동에 나가 있는 한국계 건설회사의 자재 수출을 위해서 이중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국계 직원을 찾던 참이었으므로 기회를 제대로 만난 셈이었다.
  “이철수. 너 정말 나가야 돼?”
  내 방에서 부산스럽게 이사 준비를 하고 있는 나에게 윤수진이 물었다. 문간에 기대서서 안을 들여다보는 수진의 얼굴이 창백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이며 짐을 쌌다.
  “안 나가면 안 돼?”
  내가 아무 대답도 안하자 한참을 보고 있던 윤수진이 기어들어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하고 같이 있는 게 좋아.”
  나는 우뚝 멎었다가 허리를 펴고 윤수진의 얼굴을 보았다. 윤수진의 눈에 그전과 다른 약한 빛이 있다고 느껴졌다. 매달리고 싶어 하는 빛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그전에는 윤수진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어쩐지 가련해 보이는 그 모습이 나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된 사실이다.
  “멀리 가는 거 아니야. 같이 한 집에 있을 때보다 더 자주 만나게 될지도 몰라.”
  내 말투는 내 생각과 다르게 부드러웠다. 여기서 같이 살면서 수진이 네가 벌어오는 돈에 얹혀서 네 심부름해주면서 사는 데에 지쳤어, 나도 내 자존심을 살리고 내 생활을 찾기로 했단 말이야, 하고 쏘아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수진의 매달리는 눈을 보면서 내 마음은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된 사실이다.
  짐을 싸고 있는 나를 한참 지켜보고 있던 윤수진은 낙심한 듯 고개를 떨구고 돌아서서 나갔다. 그 뒷모습에서 나는 처음으로 약한 윤수진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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