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수저

2006.05.05 22:52

김세명 조회 수:69 추천:27

놋수저
                                                                                                  김세명



     아버지의 임종은 평소 쓰시던 놋수저를 깡마른 손에서 놓치는 순간이었다.아무런 말씀도 하실 기력도 없이 그렇게 생을 마감하셨다. 호사다마라던가? 동생이 새집을 장만하여 다녀오신다며 건강한 모습으로 상경 하시어 청천 병력 같은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그리된 것이다.
예전에 연탄난방 시 흔히 당하는 사고였다.놋수저는 어머니의 혼수였다. 8남매를 낳아 거두시면서도 어머께서는  놋수저와 방자밥그릇은 마치 아버지의 상징인 양 지성으로 섬기셨다.평생을 힘든 농사일로 먹고 사는 일에 치중 하신 관계로 혹시 아비 없이 밥이라도 굶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놋수저를 놓아 유언을 대신한 게다. 누구나 생을 이어가는 동안에는 먹어야 하고 수저야 말로 매일 대하는 긴요한 식기다.

제사나 명절을 앞두고 멍석 위에 주르르 놋그릇을 내놓으시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번쩍번쩍 윤기나게 놋그릇을 닦으셨다, 기와가루를 분가루처럼 곱게 갈아서 짚 수세미로 박박 닦은 뒤 우물가로 옮겨 놋그릇들을 씻으면 눈부신 황금색 알몸을 드러내던 놋그릇들이 어린 내 눈에도 귀하고 정갈하게 보였다. 놋그릇을  하얀 광목천으로 마른 행주질을 해서 손으로  들고 보면 마치 거울 같이 얼굴도, 사물도 훤하게 비춰졌다. 놋그릇은 방짜유기로 양질의 구리와 주석 외에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고 두드려서 만든 것이라 주물 놋그릇보다 고급스럽고 음식의 온도유지나, 살균작용이 탁월하다. 경건함이 느껴지는 젯상 앞에서 정갈한 놋그릇에 담긴 정성어린 제수음식들이 차례차례 진설되면 차례 상차림은 끝나고 수고로운 일을 하고도 여자들은 모두 뒷전에서 손을 앞에 모아쥐고 절을 하는 남자들을 바라보기만 한다.

제사를 마치면 음복이라 하여 술을 마시도록 하였다.조상의 영혼과 교류인 양 처음 술을 대한 나는 경건하다. 아버지는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하고 사내 男자를 풀면 열 식구의 입을 먹여 살릴 힘이 있어야 한다."며  호기를 가르치시고 거짓말과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아야 한다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약관 나이에 공군을 제대하고 공직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꼭 수저만큼은 구별하여 내것을 사용하는 건 아버지의 대물림이었을까?  나의 직장 동료였던 모인은 업무를 잘못 처리한 연유로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 처지여서 고민할 때 내가 권하기를, "매일 아침 숟가락을 식구 숫자대로 주머니에 꽂고 관사 앞에서 출퇴근 시 인사를 드리게. 그럼 효과를 볼걸세."  내 말 대로 실천한 동료는 결국 퇴직은 면하게 되어 위기를 넘긴 적이 있었다. 그 친구와 함께 술자리에 가면 숟가락 덕을 본 친구가 있어서 항상 술값계산은 그의 몫이었다.

이젠 놋수저나 방짜그릇은 퇴물이 되었고, 스텐레스나 재질이 좋은 식기로 바뀌었다. 놋수저는 어머니와 아버지 세대의 유물이기에 가끔 생각나는 귀한 물건이다. 얼마전 큰 며느리가 혼수로 나에게 선물한 유기 방짜그릇과 놋수저를 선물로 주어서 그 식기로 밥을 먹어보니 옛 아버지의 놋수저가 생각나서 울컥 목이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