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랑

2006.05.06 18:01

염미경 조회 수:78 추천:11

아버지의 사랑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기) 염 미 경




  친정아버지께서 다녀가셨다. 평생을 농부로 살아오신 아버지께서는 손수 가꾸신 좋은 먹을거리만 골라 챙겨다가 우리 집에 들여 놓으시고는, 아픈 딸이 신경 쓸까 앉기가 무섭게 일어나 바쁘다며 집으로 돌아가셨다.

  마흔이 넘은 딸에게 아직도 어린아이 보살피듯 끝도 없는 사랑을 주고계시는 친정 부모님. 이젠 받은 사랑을 되돌려 드릴 때도 되었건만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는 딸은 언제나처럼 그저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부모님의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퍼주고 퍼주어도 끝이 없나 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아버지처럼 지극히 사랑해 줄 자신이 없는데.

  아침나절에 병원에 가려고 밖으로 나갔을 때 외투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 때문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걸어서 고작 7-8분 거리인 병원에 가면서도 춥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는데 이런 날씨에 친정아버지께서는 산 속을 헤매고 돌아다니셨다 한다.

  심한 기침으로 고생하는 딸이 안쓰러워 오늘 아침엔 동의보감을 펴 놓고 기침에 좋은 약초가 무엇인지 찾아 보셨단다. 그리고는 칡뿌리를 캐러 이 추운 날 칠순을 바라보는 허연 백발을 날리시며 산속을 해매고 돌아다니셨단다. 그 시간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딸은 따뜻한 집안에서도 춥다고 느껴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는데, 너 댓 가지 약초를 캐다 주면서도 못미더우셨던지 달여서 먹는 방법까지 손수 메모를 해 건네주시며 “이 약초를 달여 먹고도 기침이 낫지 않으면 내 또 다른 약초를 캐다 주마.” 하시고는 집으로 돌아가셨다.

  우리 집에서 친정까지는 승용차로 5분 거리쯤 된다. 처음 시집올 적엔 친정이 가까워 보고 싶은 부모님께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겠다 싶어 좋기만 했었다. 하지만 병치레를 하며 살다보니 오히려 늙으신 부모님께 걱정만 끼치는 딸인 것 같아 늘 죄송스런 마음뿐이다.

  건강하지 못한 딸을 옆에서 지켜보며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으셨을 텐데,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자식 사랑으로 친정 부모님께서는 나를 번번히 감동시키고 눈물짓게 만드신다.

  친정아버지께서는 오늘도 추운 줄 모르셨단다.
  “할 일도 없는디 니 덕분에 오랜만에 운동 좀 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몸이 추운 건 생각도 못하셨을 게다. 어서 약초뿌리를 캐다 딸자식의 감기를 낫게 해 주시려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을 테니, 병치레를 하며 골골거리는 딸자식을 낫게 하려는 일념으로 응달에 쌓인 눈을 피해가며 살을 에는 추위를 온 몸으로 견뎌냈을 아버지.

  친정아버지께서는 젊은 날에 지게로 나무를 해 나르다 무릎을 다쳐 한쪽 다리가 불편하시다. 그런데도 절뚝거리며 아픈 당신 다리보다는 딸의 감기치료가 더 급하고 우선이라고 생각 하셨을 것이다.


  내가 감기에 걸려 앓아 누워있다는 걸 알게 되신 날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화를 걸어 내 목소리를 확인하셨다. 병원에 다니며 약도 먹고, 나름대로 이것저것 잘 챙겨먹는데도 내 말처럼 정말로 괜찮은 건지 당신 눈으로 자식 얼굴을 직접 보고 싶으셨을 게다.


내 아이들이 어릴 적에도 두 아이 키우며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픈 딸자식을 행여 잃을까봐 바쁜 농사철에 나를 찾지 못하실 때면 날마다 전화를 걸어 내 목소리를 확인하곤 하셨다. 어쩌다가 보채는 아이를 데리고 잠깐 골목에 나가느라 전화를 받지 않을 때면 하던 일을 팽개쳐 두고 그 길로 바로 달려와 딸의 생사를 확인하셨던 아버지. 지척에 두고도 데려가지 못하는 출가한 딸자식을 지켜보는 친정아버지께선 가슴으로 우셨을 테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친정어머니의 눈에는 항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은 이토록 저려오는데 당신 가슴에 안쓰러운 짐이 되어버렸을 큰딸에게 아버지께선 아직도 못다 준 사랑이 남아있나 보다.

  몇 년 전 어느 날부터 허옇게 서리가 내린 친정아버지의 뒷모습이 작아 보이기 시작했었다. 넉넉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낸 친정아버지께서는 우리 4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느라 농사를 지으면서 쉬는 날 없이 일만 하셨다.
“내 자식 고생 안 시키고 눈물 나지 않게 하려면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두느라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책과 신문을 뒤적이며 다 외우고도 남았을 한자며 영어 알파벳까지 거칠어지고 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반복해서 써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시던 내 아버지.

  내가 친정집 앞마당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부터 이제 내 아이가 자라 중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해 마다 농사일 끝마친 한가한 겨울날이면 친정집 안방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아버지의 변하지 않는 모습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친정아버지께 많은 걸 배우며 자란 것 같다. 석양 빛을 받으며 들판에서 묵묵히 일하시던 모습에서, 해마다 농사일지를 쓰던 꼼꼼하신 모습에서, 자신을 가꾸며 앞서 가시던 모습에서 그리고 한없이 주시기만 하는 사랑 앞에서 나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기침 다 낫을 때까지 바람 쐬지 마라. 따라 나오지 말고.”
  “네, 아버지. 조심해서 가세요.”

  허연 백발을 날리며 친정으로 돌아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여 가슴이 울컥하며 목까지 차올랐다. 끝도 없이 주어지는 친정아버지의 가슴 저린 사랑 앞에 마흔 두 살을 바라보는 아픈 딸은 오늘도 통곡하듯 엎드려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2003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