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만능 탤런트로소이다
2006.05.12 04:25
그대는 만능 탤런트로소이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중) 배윤숙
"뭐 찾으세요?"
"헌 체육복 어디다 두었더라?"
하, 또 그맘 때가 되었구나. 어제,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긴 옷장을 열며 물었다. 생각났을 때 찾아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깜박하고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쌀을 씻다말고 방으로 들어가 옷장 서랍 속 깊숙이 들어 있는 헌 체육복을 찾아냈다.
연례행사처럼 되어버린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 때도 되었건만 앞으로 며칠 동안 어설픈 페인트 공처럼 머리카락이랑, 손에 묻혀올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30년 전 그 옛날 전남 광양에 살 때부터 그랬던 것을 새삼스럽게 불편해하는 건 또 뭐람.
광양! 그 바다마을은 남편이 교사 초임발령을 받은 곳이고, 몇 년 뒤 우리 내외의 신혼생활이 시작된 곳이다. 밤이면 일본에서 여수항으로 들어오는 어선에서 비추는 불빛이 마치 하늘의 모든 별들이 살포시 내려앉아 바다에 별이 떠있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또한 삼태기처럼 둘러싸인 산 아래에 달랑 몇 개의 교실이 있는 조그만 학교는 일요일이면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어 깊은 산속 절간같이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일부러 교실을 한 가운데 둔 것같이 뒤란이 운동장 못지않게 무척 넓었는데 그 뒤란 언덕에 있는 코딱지만한 텃밭에다가 우리는 무씨랑 당근씨도 뿌리고, 감자도 심었으며, 밭 둘레에 구덩이 네 개를 파서 호박씨를 묻었다. 매일 매일 밭을 둘러보며 물도 주고, 안집서 얻어온 비료도 주면서 내 몸속에서 자라는 첫 아이 돌보듯 애지중지 키웠다. 배추벌레를 손으로 잡지 못해 아카시아 나뭇가지를 꺾어 집게를 만들었던 기억도 새롭다. 호박덩굴이 땅위에서 기지개를 켤 무렵 인분거름을 주었더니 여름 내내 따다가 호박전이랑 부침개도 해먹고 호박찜도 질리도록 먹었다. 그러고도 가을에는 10개가 넘는 늙은 호박을 수확했으니 팔에 한 아름 안길만큼 커다란 호박들을 보면서 얼마나 흐뭇해했던가.
유배지 같은 조용한 바다마을이 내게는 오히려 오랜 도시생활에서 느끼지 못했던 여유를 만끽하며 신혼생활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휴일에는 10여분 정도 바다로 걸어 나가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굴을 큰 조개껍질로 톡톡 깨서 먹기도 하고, 파래와 다시마도 건졌지만, 흔하디흔한 해초들을 달리 이용할 생각은 그 땐 왜 못했는지 모르겠다.
교직원이라고 해야 열 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 분들이 며칠 예정으로 여행을 떠날 때 남편이 신혼인 것을 핑계로 가지 않았더니 그 덕분에 잉꼬니 뭐니 얼마나 놀려대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이후로 선생님들과 그 가족들과는 한 식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것은 도시에서는 맛보기 힘든 바다마을 사람들만이 갖는 후한 인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라를 잡아오면 그 것이 곧 돈과 연결되는 것이건만 ‘새댁’하면서 부르는 동네 아주머니는 딸에게 먹이는 친정엄마처럼 바구니 째 건네주셨다.
아무도 없는, 아니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교실은 비록 오르간이었지만 내겐 피아노 학원이었고, 서예학원이기도 했다. 봄이 되어 환경미화를 위해 교실을 꾸미는데 학원생활을 충실히 했던 덕분에 남편을 도와주는 일이 당연시 되었었던 기억이 난다. 광양읍내를 거쳐, 다시 대산면 해룡리 산골마을로 전근을 가고 그곳에서 전북 고창읍내학교를 거쳐 다시 서해바다가 보이는 봉암으로 전근을 가면서 내가 도와주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 신나나 휘발유와의 연례전쟁을 치러야 했었다.
머리카락과 얼굴에 페인트를 묻혀오는 것은 그래도 약과였다. 헛 못질에 손가락이 멍들고, 칼에 베어 상처가 나기도 했다. 저학년을 맡아 교실바닥에 노란 물감을 칠할 때면 아이들을 시킬 수 없어 혼자 하느라 손까지 노랗게 물들여오는 것은 예사였고, 얼굴이나 멀쩡한 양복바지까지도 물감이 튀어서 은근히 짜증도 났는데 옆반 여선생님을 도와주느라 그랬다던가.
"마음시도 좋으셔--."
꽈배기 꼬듯 돌려대던 말은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그리곤 하도 딱한 생각이 들어,
"아니, 무슨 잡역부도 아니고 선생님이 그런 일까지 하느냐?"고 푸념하자 남편은 오히려 나를 책망했다. 왜 남편의 학교일에 간섭하느냐는 얘기였다.
교과 전담교사가 따로 없던 그 당시에는 여선생님 한 분과 남선생님뿐인 학교에서 운동회를 할 때 아이들한테 무용까지 가르친 적도 있었으니 안무가가 어디 따로 있던가. 신문을 보는 집이 거의 없는 산골 마을에서 근무할 때는 신문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서예시간에 쓰려고 가져가고, 새 학기가 되면 교실 화분에 보리도 심고 나팔꽃, 과꽃, 수세미도 심어 교실창문으로 들어오는 강한 햇볕을 막기도 하고 아이들한테 자연공부가 되도록 하였으니 원예조경사가 따로 없었다. 혼자 노래를 부르면 가끔 음이 틀리기도 하는 남편이 오르간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을 다시 볼 수가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뻣뻣하고 투박한 손가락으로 한 음 한 음 누르던 모습이 아직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남편에게 교직은 천직이었고, 남편은 만능 탤런트였다.
그러고 보니 마치 남편자랑에 푹 빠진 팔불출 같이 되었지만 초등학교 선생님은 누구나 그야말로 탤런트라고 해야 될 듯싶다. 탤런트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연기만 잘하면 되었는지 몰라도 요즘에는 탤런트가 되려면 연기는 기본이고 음악, 춤, 악기 등 다방면으로 재주가 있어야 인기를 얻는 것 같다. 어느 장소에서든지 자신의 능력을 힘껏 발휘할 수 있어야 될 만큼 많은 것을 요구하는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다.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많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보아 탤런트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라는 얘기다.
"자모님들 오시거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다 드리세요."
신신당부를 했는데 오늘은 페인트칠 하는 일이 취소되었단다. 유해한 냄새가 아이들에게 좋지 않으니 페인트칠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어느 학부형의 건의가 있어서 취소되었다고 하니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아무리 외형이 번듯하고 깨끗한 것도 좋지만 아이들에게 피해가 있다면 당연히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선생님들조차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하셨다는 얘기일까. 새로 지은 집의 건축자재에서 유해한 물질이 뿜어져 나와 ‘새집증후군’이 생긴다지 않던가. 페인트를 칠한 방에 양파를 잘라 군데군데 놓아두면 냄새를 없앨 수 있다고 하지만, 그 큰 학교 교실마다 양파를 놓아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새집증후군에 걸리면 비염, 천식, 알레르기도 생기고 아토피성 피부염도 생기는 등 그 피해가 심해서 적외선을 뿜는 황토로 지은 집이나 황톳물을 입힌 옷감들을 선호한다지 않던가. 남편이나 나도 아차했다. 정신없이 바쁜 신학기도 지났건만 또 나이 탓을 해야 하는 것 같아 씁쓸하지만 머리카락과 얼굴에 페인트를 묻히고 오는 일이 없어져서 내가 쫑알거리지 않게 된 것이 조금은 아쉽다.
(2006. 5. 10.)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중) 배윤숙
"뭐 찾으세요?"
"헌 체육복 어디다 두었더라?"
하, 또 그맘 때가 되었구나. 어제,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긴 옷장을 열며 물었다. 생각났을 때 찾아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깜박하고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쌀을 씻다말고 방으로 들어가 옷장 서랍 속 깊숙이 들어 있는 헌 체육복을 찾아냈다.
연례행사처럼 되어버린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 때도 되었건만 앞으로 며칠 동안 어설픈 페인트 공처럼 머리카락이랑, 손에 묻혀올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30년 전 그 옛날 전남 광양에 살 때부터 그랬던 것을 새삼스럽게 불편해하는 건 또 뭐람.
광양! 그 바다마을은 남편이 교사 초임발령을 받은 곳이고, 몇 년 뒤 우리 내외의 신혼생활이 시작된 곳이다. 밤이면 일본에서 여수항으로 들어오는 어선에서 비추는 불빛이 마치 하늘의 모든 별들이 살포시 내려앉아 바다에 별이 떠있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또한 삼태기처럼 둘러싸인 산 아래에 달랑 몇 개의 교실이 있는 조그만 학교는 일요일이면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어 깊은 산속 절간같이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일부러 교실을 한 가운데 둔 것같이 뒤란이 운동장 못지않게 무척 넓었는데 그 뒤란 언덕에 있는 코딱지만한 텃밭에다가 우리는 무씨랑 당근씨도 뿌리고, 감자도 심었으며, 밭 둘레에 구덩이 네 개를 파서 호박씨를 묻었다. 매일 매일 밭을 둘러보며 물도 주고, 안집서 얻어온 비료도 주면서 내 몸속에서 자라는 첫 아이 돌보듯 애지중지 키웠다. 배추벌레를 손으로 잡지 못해 아카시아 나뭇가지를 꺾어 집게를 만들었던 기억도 새롭다. 호박덩굴이 땅위에서 기지개를 켤 무렵 인분거름을 주었더니 여름 내내 따다가 호박전이랑 부침개도 해먹고 호박찜도 질리도록 먹었다. 그러고도 가을에는 10개가 넘는 늙은 호박을 수확했으니 팔에 한 아름 안길만큼 커다란 호박들을 보면서 얼마나 흐뭇해했던가.
유배지 같은 조용한 바다마을이 내게는 오히려 오랜 도시생활에서 느끼지 못했던 여유를 만끽하며 신혼생활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휴일에는 10여분 정도 바다로 걸어 나가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굴을 큰 조개껍질로 톡톡 깨서 먹기도 하고, 파래와 다시마도 건졌지만, 흔하디흔한 해초들을 달리 이용할 생각은 그 땐 왜 못했는지 모르겠다.
교직원이라고 해야 열 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 분들이 며칠 예정으로 여행을 떠날 때 남편이 신혼인 것을 핑계로 가지 않았더니 그 덕분에 잉꼬니 뭐니 얼마나 놀려대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이후로 선생님들과 그 가족들과는 한 식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것은 도시에서는 맛보기 힘든 바다마을 사람들만이 갖는 후한 인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라를 잡아오면 그 것이 곧 돈과 연결되는 것이건만 ‘새댁’하면서 부르는 동네 아주머니는 딸에게 먹이는 친정엄마처럼 바구니 째 건네주셨다.
아무도 없는, 아니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교실은 비록 오르간이었지만 내겐 피아노 학원이었고, 서예학원이기도 했다. 봄이 되어 환경미화를 위해 교실을 꾸미는데 학원생활을 충실히 했던 덕분에 남편을 도와주는 일이 당연시 되었었던 기억이 난다. 광양읍내를 거쳐, 다시 대산면 해룡리 산골마을로 전근을 가고 그곳에서 전북 고창읍내학교를 거쳐 다시 서해바다가 보이는 봉암으로 전근을 가면서 내가 도와주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 신나나 휘발유와의 연례전쟁을 치러야 했었다.
머리카락과 얼굴에 페인트를 묻혀오는 것은 그래도 약과였다. 헛 못질에 손가락이 멍들고, 칼에 베어 상처가 나기도 했다. 저학년을 맡아 교실바닥에 노란 물감을 칠할 때면 아이들을 시킬 수 없어 혼자 하느라 손까지 노랗게 물들여오는 것은 예사였고, 얼굴이나 멀쩡한 양복바지까지도 물감이 튀어서 은근히 짜증도 났는데 옆반 여선생님을 도와주느라 그랬다던가.
"마음시도 좋으셔--."
꽈배기 꼬듯 돌려대던 말은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그리곤 하도 딱한 생각이 들어,
"아니, 무슨 잡역부도 아니고 선생님이 그런 일까지 하느냐?"고 푸념하자 남편은 오히려 나를 책망했다. 왜 남편의 학교일에 간섭하느냐는 얘기였다.
교과 전담교사가 따로 없던 그 당시에는 여선생님 한 분과 남선생님뿐인 학교에서 운동회를 할 때 아이들한테 무용까지 가르친 적도 있었으니 안무가가 어디 따로 있던가. 신문을 보는 집이 거의 없는 산골 마을에서 근무할 때는 신문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서예시간에 쓰려고 가져가고, 새 학기가 되면 교실 화분에 보리도 심고 나팔꽃, 과꽃, 수세미도 심어 교실창문으로 들어오는 강한 햇볕을 막기도 하고 아이들한테 자연공부가 되도록 하였으니 원예조경사가 따로 없었다. 혼자 노래를 부르면 가끔 음이 틀리기도 하는 남편이 오르간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을 다시 볼 수가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뻣뻣하고 투박한 손가락으로 한 음 한 음 누르던 모습이 아직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남편에게 교직은 천직이었고, 남편은 만능 탤런트였다.
그러고 보니 마치 남편자랑에 푹 빠진 팔불출 같이 되었지만 초등학교 선생님은 누구나 그야말로 탤런트라고 해야 될 듯싶다. 탤런트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연기만 잘하면 되었는지 몰라도 요즘에는 탤런트가 되려면 연기는 기본이고 음악, 춤, 악기 등 다방면으로 재주가 있어야 인기를 얻는 것 같다. 어느 장소에서든지 자신의 능력을 힘껏 발휘할 수 있어야 될 만큼 많은 것을 요구하는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다.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많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보아 탤런트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라는 얘기다.
"자모님들 오시거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다 드리세요."
신신당부를 했는데 오늘은 페인트칠 하는 일이 취소되었단다. 유해한 냄새가 아이들에게 좋지 않으니 페인트칠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어느 학부형의 건의가 있어서 취소되었다고 하니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아무리 외형이 번듯하고 깨끗한 것도 좋지만 아이들에게 피해가 있다면 당연히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선생님들조차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하셨다는 얘기일까. 새로 지은 집의 건축자재에서 유해한 물질이 뿜어져 나와 ‘새집증후군’이 생긴다지 않던가. 페인트를 칠한 방에 양파를 잘라 군데군데 놓아두면 냄새를 없앨 수 있다고 하지만, 그 큰 학교 교실마다 양파를 놓아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새집증후군에 걸리면 비염, 천식, 알레르기도 생기고 아토피성 피부염도 생기는 등 그 피해가 심해서 적외선을 뿜는 황토로 지은 집이나 황톳물을 입힌 옷감들을 선호한다지 않던가. 남편이나 나도 아차했다. 정신없이 바쁜 신학기도 지났건만 또 나이 탓을 해야 하는 것 같아 씁쓸하지만 머리카락과 얼굴에 페인트를 묻히고 오는 일이 없어져서 내가 쫑알거리지 않게 된 것이 조금은 아쉽다.
(2006.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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