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청 보리밭

2006.05.16 07:06

김금례 조회 수:71 추천:12

추억의 청 보리밭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김금례



  우리 수필기초반은 고창 청 보리밭을 찾아가서 야외학습을 하기로 했다. 꼭 참가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야외학습에 동참하려고 미리 서울로, 부산으로 줄달음쳐 다녀왔다. 남편은 나의 건강이 걱정되었는지,
“괜찮아? 괜찮겠어?”하며 물었다.
5월 3일 수요일 아침, 이른 시각에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 도착하니 교수님과 박 회장님이 벌써 나오셔서 환한 미소로 반겨 주셨다. 어느 새 학우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 좋다. 나이를 잊은 채 수필과 나의 만남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다. 박 회장님이 손수 운전하시는 차 안에서 김행모 선생님의 구수한 추억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너무 배가 고파 보리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어린보리를 베다 허기진 배를 달랬던 시절이 보릿고개라 하시면서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는 모습에서 그 가난하던 시절의 인고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고창 땅에 들어서면 온통 푸른 초원을 이룬 보리밭이 보이리라 상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보리는 보이지 않고 차창을 여는 순간 인분 냄새가 밀어닥쳐 자연의 향수를 느끼게 했다. 마치 도시에서 맡았던 매연가스를 씻겨주는 듯했다. 이곳저곳을 헤매다 초록색 바다를 이루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청 보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치 돛단배가 풍랑을 만나 헤매다 등대를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다.
“야, 저 보리밭 좀 봐!” 우리는 환호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우리는 박성희 님이 마련해온 김밥, 초밥, 찰밥 등 진수성찬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염미경 님이 가져온 복분자주를 나눠 마셨다.
청 보리밭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봄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나무그늘에서 빙 둘러앉아 수필공부를 마쳤다. 그런 뒤 손에 손을 잡고 보리밭을 향할 때, “추억의 시골장터 정을 사고팔아요.”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된장, 고추장, 상추를 넣고 착착 비비는 아낙네의 모습을 그리면서 보리밭 사잇길을 거닐었다.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며 걷노라니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불며’란 시가 생각났다. 학창시절에 이 시를 모르는 문학소녀는 없었으리라.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 산하
  눈물의 기 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니리.

나는 두 팔을 벌려 푸른 들판을 가슴에 안아보고 싶었다. 청명한 하늘을 보면서 야-호를 외쳤다. 보리밭에 우뚝 선 조각상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보니 가슴이 텅 빈 석고상이었다. 텅 빈 가슴을 보는 순간, 지난날 내 병고가 떠올랐다. 두 번 수술을 하면서 너무 힘들었던 시간들이 파란 보리이랑 사이에서 맴돌고 있었다.
보리밭은 한 순간 알로에 밭처럼 보였다. 나의 하루 일과가 내과, 신경외과, 산부인과를 다니다 보면 해는 서산에 지고 힘이 빠질 때 알로에가 나의 건강을 되찾아주었기 때문이다.
보리도 옛날에는 천대를 받았지만 지금은 무공해 식품으로 성인병을 예방해준다 하여 각광을 받고 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수없이 밀려오는 추억들 속에서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려고 기념사진을 찍을 즈음, 발에 짓밟힌 채 머리만 하늘을 쳐다보고 서있는 한 포기의 어린 보리를 보았다. 다시 일으켜 세워보았지만 세워지질 않았다.
“보리야, 미안해! 사람들은 너희들의 모습에 감동되어 사진을 찍다가 그만 너를 짓밟은 모양구나.” 또 세워 보았지만 다시 쓰러졌다.
“안돼, 일어나! 주저앉으면 안돼!” 나는 다시 세워 옆의 동료와 지푸라기로 묶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우리도 장애인을 사랑으로 감싸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바람은 세차게 보리파도를 이루며 나의 이마를 스치고 사라졌다. 마치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는 것 같았다. 푸른 초원을 이루고 있는 이 고창 청 보리밭을 개인이 경영한다니 참으로 감동적이다.

우리는 다시 고창읍내 모양성으로 발길을 옮겼다. 모양성 안으로 들어서니 답성놀이 때 돌멩이를 머리에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의 병이 낫고, 두 바퀴를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를 돌면 극락왕생한다는 전설이 생각났다. 성밖으로는 빨간 철쭉꽃들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오늘 야외학습은 봄의 정취를 흠뻑 맛보았을 뿐 아니라 박성희 님이 마련한 도시락과 염미경 님이 가져온 복분자주로 우리의 입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정다운 학우들의 우정이 내 가슴 속에서 소담한 박꽃처럼 피어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