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가위질

2020.03.23 04:24

한성덕 조회 수:3

바람의 가위질

                                                              한성덕

 

 

 

  경상남도 거제시 남부면 도장포마을에, 외도와 해금강을 오가는 도장포 유람선선착장이 있다. 그 매표소에서 보이는 나지막한 민둥산이 ‘바람의 언덕’이다. 강한 해풍의 영향으로 자생하는 식물들이 모질게 보였다. 바람의 가위질이 민둥산을 만들고, 나무들을 후리쳐 밑둥지만 통통하게 만들었다. 그 바람의 언덕에서 시원스레 펼쳐지는 너른 바다를 바라보면 가슴이 뻥 뚫린다.  

  큰딸이 한 청년을 세 번 만나더니 결혼하겠다는 게 아닌가? 도대체 어떤 머슴아길레 콧대 센 우리 큰딸이 홀렸나싶어서 퍽 궁금했다. 여행을 권하자 둘 다 흔쾌히 수긍하고 12일로 날을 정했다. 그 이틀간은 꽃가마를 탄 기분이었다. 사위로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때 갔던 곳이 ‘바람의 언덕’이었다. 어떤 친구는, 바람나면 어쩌려고 하필 ‘바람의 언덕’이냐고 농담으로 염려했다. 허나 우리가족에게는, 이레(준비함)와 희락의 언덕이요, 축복의 언덕이었다.

  사실, ‘바람의 언덕’이 거제도 거기만 있는 건 아니다. 또 바람이 ‘바람의 언덕’에만 몰아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서 바람처럼 자유분방한 게 어디 있을까? 마음이 없는 바람에게, 맘대로 한다는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하여간 제 맘대로다. 바람을 세심하게 들여다 보면 심오한 얘기가 있겠지만, 내 상식으로는 기압의 변화에 따라 생겨나는 공기의 흐름이 아닐까? 바람에 관하여 관용적인 표현들도 많이 있으나, 속담 몇 개를 발견했다. *'바람 먹고 구름 똥 싼다.'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을 보면서, 형체도 없는 바람을 먹고 똥을 싼다는 건데, 허황된 짓을 하는 사람을 빗댄 말이다. *“바람 따라 돛을 올린다.” 바람 부는 형세를 보아가며 돛을 올린다는 뜻으로, 때를 잘 맞춰서 일을 벌여나가야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다. *'바람 간데 범 간다.' 사람의 긴밀한 관계를 비유적으로 말한다. 마지막으로, *'바람도 올바람이 낫다.' 같은 바람이라도, 일찍 부는 바람이 덜 차고 피해도 적다는 뜻이다. 이왕에 겪을 일이라면, 괴롭고 어렵더라도 남보다 먼저 당하는 게 낫다는 말이다.  

  바람의 종류와 한글이름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을 초월한다. 바람이 부는 방향과 계절에 따라 이름이 다르고, 하루 중에 부는 바람의 명칭도 다르다. 장소, 모양, 느낌. 그리고 바람의 세기에 따라서 각각의 이름이 얼추 100여 가지쯤 된다. 이를테면, 가을의 서풍인 ‘하늬바람’, 이른 가을의 신선한 ‘색바람’, 장소에 따라 뒤쪽에서 부는 ‘꽁지바람’, 맵고 세차게 분다하여 ‘고추바람’, 또는 해상에서 물거품과 물보라가 덮여 하얗게 되고, 피해가 속출하는 ‘싹쓸이 바람’도 있었다. 이 많은 바람이 어디서 일어나 어디로 불며, 어디서 끝나는지를 누가 정하는가? 허나, 나의 관심사는 산 능선이었다.

  바람은 지치지 않는 역동성을 지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이다. 잠시도 쉬거나, 조는 법이 없다. 죽은 듯, 사라진 듯 잠잠할 때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산을 보며 ‘높다 낮다. 좁다 널찍하다. 뾰족하다 두리뭉실하다.’고 평한다. 고향인 무주를 오가며 산들의 능선을 눈여겨 보았다. 산등성의 나무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가지런히 정리되었을까? 그 나무들을 보면서, ‘사람들처럼 크거나 작은 것도, 티격태격 싸움질하는 것도, 우뚝 솟아올라 우쭐대는 모양새도 없구나. 솟으면 솟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곡선을 이루며 통일된 모습뿐이구나 싶다. 어깨동무를 한 채 그 자리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 또한, 참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좋은 모습이 낙엽 진 겨울엔 더 유난스럽게 보인다.

 

  철마다 이는 바람이 요리조리 다니면서 가위질을 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능선마다 빼곡한 나무들을 누가 손질하겠는가? 신기하고 놀랍다. 일급미용사의 손질을 뺨친다. 산 능선의 정연한 나무들을 보노라면, ‘우리의 정다운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고, 인간세상을 향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다.

                                        (2020. 3.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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