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을 해결해 준 고구마

2020.11.17 21:08

고안상 조회 수:11

굶주림을 해결해 준 고구마

 

                                             신아문예대학 수필금요반 고안상

 

 

  며칠 전 고구마를 한 두럭 수확을 해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수확량이 많지 않았다. 이제 막 캔 고구마를 깨끗이 손질한 뒤에 솥에 넣고 푹 쪄 먹어보니 기대했던 것보다 그 맛이 참으로 포근하고 달달했다.

 지난 5월 초순, 시장에서 고구마 모종을 사다가 텃밭에 심었었다. 벌써 4개월이 다 되었다. 심은지 120일이 지나면 수확을 할 수 있으니 요즘이 적기가 아닌가 싶어 우선 한 두럭을 캐본 것이다. 다음 주쯤 적당한 날자를 잡아 나머지 고구마도 수확을 해야겠다. 그리고 아들과 처제네 집에도 보내고 나머지는 집에 저장해 두었다가 가끔 생각이 나면 건강식으로 애용해야겠다.  

 옛날에는 고구마 모종을 집에서 길렀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부모님께서는 고구마 모종을 내려고 3월 초순 무렵이면 안방 윗목에다 모판을 만드셨다. 먼저 널빤지나 작은 통나무로 네모난 모판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비료포대를 깔고, 다시 바닥에 짚과 모래를 수북히 깐 뒤 줄지어 씨고구마를 촘촘하게 심으셨다. 그러고 나서 그 위에 흙과 맵저를 두툼하게 덮은 다음에 물을 흠뻑 부어주었다.

 그런 뒤부터 모판을 살펴가면서 가끔씩 물을 촉촉히 주었다. 방안 공기가 따뜻하여 물을 머금은 씨고구마는 열흘내지 2주 정도 지나면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나와 동생에게 삼 사일에 한번씩 저녁나절에 물을 넉넉히 주도록 지시하셨다. 호기심이 많던 시절이라 고구마 순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동생과 나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빠트리지 않고 물을 주는데 정성을 다했다.

 고구마 순이 방안에서 자라고 있는 동안에는 방이 비좁아서 불편함도 많았다. 그래도 고구마 순을 잘 키워야만 가을철에 고구마를 먹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다소 불편하더라도 잘 견디었다.

 4월이 가고 5월 하순 무렵이 되면 고구마 순은 듬뿍 자라 모판을 가득 채웠다. 이어서 6월이 되면 보리 수확을 하고, 바로 모내기 철이 되어 부모님은 들에서 바쁘게 보내셨다. 모내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면 장마철에 접어들어 비가 자주 내렸다. 어머니는 그동안 잘 자란 고구마순을 가위로 잘라 방문 밖 마루위에다 내어 놓으셨다. 그러면 나는 동생과 함께 어머니 말씀따라 적당한 간격으로 순을 잘라 고구마 모종을 준비했었다.

 아버지는 고구마 밭 두럭을 치시고 어머니는 준비한 모종을 간격에 맞추어 두럭 위에 심으셨다. 우리도 어머니께 작은 힘이나마 보태드리려고 서툴지만 함께 모종을 심었다. 어느 해인가는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비료 포대를 몸에 두르고 심었던 일이 지금도 엊그제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요즘은 고구마 모판을 방안에 만들 필요도 없이 시장에 가 모종을 사다가 어느 때고 심을 수 있으니 참으로 편리해졌다. 또 비닐로 두럭을 씌운 다음에 심으니 풀을 매야하는 고생도 할 일이 없을 만큼 우리 부모님 시대와 비교하면 농사 짓는 일이 아주 수월해졌다.

 

 나는 가끔 고구마를 쪄 밥 대신 먹곤 한다. 수리시설이 잘 되지 않고 농약이 없던 옛날에는 곡물 수확량이 적어 해마다 식량난으로 서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러기에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나 관리들에게는 서민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 바로 고구마와 감자였다.

 고구마는 감저, 조저, 남감라고도 하는데 원산지는 열대아메리카로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현종 4년인 1663년에 일본에 표착하였던 사람이 그곳에서 사람들이 고구마를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작물을 재배하면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겠다는 보고를 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1600년대 중엽부터 일본에 표착한 어민이나 통신사를 통하여 고구마의 존재가 우리나라에 알려졌으나 이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 후반부터이다.

 1763년 조엄이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오던 중 대마도에 들러 그 종자를 얻어 동래와 제주도에서 시험삼아 심게 한 것이 고구마 재배의 처음 시도로 보인다. 이보다 먼저 서울의 이광려가 명나라 『농정전서』를 통해 고구마의 존재를 알고 난 뒤, 중국에 가는 사신이나 역관에게 여러 차례 고구마를 가져오라고 부탁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강계현에게 부산과 동래지방에서 고구마 한 포기를 구해 와 집에서 직접 시험재배를 하였고, 또 동래부사 강필리에게 부탁하여 몇 포기를 더 재배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강필리는 이와는 별도로 동래지역에서 시험재배한 뒤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다음 최초의 고구마 전문서인 『강씨 감저보』라는 책을 펴냈다.

 그 뒤 유중림, 박제가, 김장순, 선종한, 서유구 등 많은 사람들이 고구마를 재배할 것을 주장하고 이에 관한 저서도 남겼다. 특히 박제가는 나라에서 재배를 장려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조정에서도 고구마 재배를 장려했다. 김장순은 남쪽 해안 지방에서 고구마를 먹어보고 구황작물로 적합함을 깨닫게 되어 전국적으로 보급시킬 방도를 찾았다. 그는 전남 보성에서 수년간 고구마 재배를 연구한 선종한과 만나 서울에서 시험재배를 하였다. 이 시험재배가 성공하여 남부지방만이 아니라 서울지방까지 재배를 하게 되었고, 이에 관한 연구결과를 기록한 책이 『감저신보』다.

 서유구는 1834년 『종저보』를 저술하는 한편, 호남지방의 보급에 힘썼다. 서경창은 재배기술을 연구하여 북쪽지방의 백성들도 고구마의 혜택을 주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런 노력들이 뒤따라 1900년대 이후부터는 전국적으로 고구마를 재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구마는 9월 하순부터 10월 중하순경 서리 내리기 전에 수확해야 한다. 고구마의 저장온도는 12~13℃ 이고 저장 중 장소를 옮겨 온도의 변화를 주면 썩는 것이 단점이다. 이를 보완하는 작물이 바로 감자로 다행히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고구마 재배가 성공을 거두고 또 감자를 들여와 서민들의 끼니 문제가 크게 해소될 수 있었다.

 

 지난 날 여러 선인들의 노력으로 우리 조상들을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데 크게 도움을 준 고구마는 참으로 고마운 작물이 아닐 수 없다. 이 고구마나 감자가 지금도 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에서 해마다 가난 때문에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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