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커스병과 우거짓국과 초록별

2005.07.26 23:50

김혜령 조회 수:1299 추천:106

그날 우리가 왜 만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긴 젊고 할 일 없는 사내놈들이 만나 나이트클럽에 가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겠는가. 아마 우리들 중 하나의 심심한 손가락이 주인에겐 별 상의도 없이 알고 있는 전화번호를 돌렸고, 수화기를 잡은 둘 중 하나의 입이 질겅대던 껌을 입안 한 구석으로 밀어내며 할 일도 없는데 얼굴이나 보자고 했을 것이고, 그렇게 심드렁한 대화를 시작한 둘의 나른한 머리 한 구석에 다른 누구의 여드름 난 얼굴이 떠올랐을 것이고, 또 그의 담배연기로 흐려진 머리가 누구의 버드나무 마냥 유연하게 춤추는 허리와 또 다른 누구의 넉살 좋은 입을 떠올리는 동안, 누군가 주머니에 싱겁게 들어와 한동안 할 일 없이 잠을 자고 있던 몇 푼의 돈을 기억해 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해 여름이 유난히도 길고 지루했다는 것이다. 아니 우리가 겪고 있던 지루함은 그해 여름뿐만이 아니라 그 이전, 거리에 최루가스가 날리기 시작하던 봄이거나 멀찍이 대학 본고사, 또는 예비고사가 끝났던 겨울이나 늦가을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옆방에서 해가 두 번이나 바뀌고 그 강철같던 대통령마저 바뀌도록 담배연기만 뿜고 있던 형의 의견을 따르자면, 그 지루함은 형이 젖을 떼고 내가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우리 나라의 정권만큼이나 우리의 뼈와 뇌 속에 굳건히 뿌리를 박고 모세혈관처럼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아득한 산골 소읍과 면, 이, 이름 없는 촌락까지 퍼져나가 있는 막강한 것, 그러므로 도망 갈래야 갈 수 없는 바로 우리 자신인지도 몰랐다.
고등학교 문턱을 들어서면서부터 '이 땅에 태어난 역사적 사명'으로 알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매달렸던 예비고사가 단 세 자리 숫자의 점수로 마감될 때, 나는 이미 덧없는 한 세상을 다 살아버린 늙은이의 심정으로 마른 가지 사이에 걸린 동전 만한 겨울 해를 향해 훅훅 담배 연기를 뿜어냈던 것이다. 한물 간 기분으로 남의 다리 긁어주듯 본고사를 치르고, 그래도 쉬이 놓아주지 않는 시험귀신에게 발목을 잡혀 후기 대학 시험까지 치른 뒤에, 홀어머니가 맞춰준 안쓰러운 양복을 입고 어정쩡한 표정으로 대학입학이란 걸 하긴 했었다.
마침, 비록 â대통령 시해ä라는 점잖지 못한 방법이지만, 18년만에 나라의 대통령이 바뀐 직후인지라 대학은 복학생들로 붐볐고, 이럭저럭 대학 문을 들어선 우리들은 신입생환영회란 핑계로 '큰집'이나 군대에서 막 돌아왔다는 늙은 선배들이 부어주는 술을 물처럼 퍼마시고 등 두드리며 꺼억꺽 토하고 젓가락 장단맞춰 노래 부르는 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남들 따라 미팅이란 걸 두어 번 나가 흥흥 싱거운 웃음을 흘리다보니 어느 새 꽃잎 분분 날리던 봄날이 다 갔고, 코앞에 다가선 중간고사에 깜짝 놀라려던 참에 때맞춰 데모가 터지고 며칠 후엔 철가면을 덮어 쓴 전경들 대신 아예 휴교령이 교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5월에 내려진 휴교령은 유월이 가고 칠 월이 다 가도록 물러설 줄을 몰랐다. 가끔 학교 앞을 지나갔지만 닫혀진 교문 창살 사이로 보이는 건 군인들의 텐트요, 발맞춰 행진하는 군인들의 모습뿐이었다. 초, 중, 고등학교들이 여름방학으로 들어가고도 한참 지나서야 봄에 내 어머니의 주머니에서 적지 않은 입학금을 긁어냈던 대학에서 각 과목별 과제가 적힌 우편이 도착했다. 통신대학도 아닌데 과제물을 우송할 교수들의 주소도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그나마 아무런 과제도 적혀있지 않은 과목도 있었다. 휴교 전까지 약 두 달 반 동안의 출석일수 만으로 학점을 준다는 얘기였다. 그 철저한 무성의에 잠시 입이 벌어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그런 건 그때 내가 익사 직전으로 푹 빠져 있던 권태의 늪에 손톱자국도 남기지 못할 것들이니까. 학교는 그렇게 이미 내 머릿속에서 현실감을 잃고 쉬이 의식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추상명사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 주위에 지천으로 널브러져 있는 지식이나 정보,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달리의 그림처럼 진득하게 녹아 내리며 느릿느릿 의식의 블랙홀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긴긴 여름 해도 제풀에 지쳐 식어 가는 초저녁이 되어 현관문을 나설 때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잠복 근무하는 보초병처럼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어디 가냐? 통행증도 대답도 없이 빙글거리는 아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 차례나 찬찬히 훑어본 다음 어머니는 쯧, 소리와 함께 돌아서며 말했다. 일찍 들어와라. 밤에 같이 갈 데가 있으니. 부엌에서는 언제부터 끓이기 시작했는지 우거짓국 냄새가 요란했다. 아, 두 아들의 입시 때마다 산 게들을 새벽 산에 풀어 산신령의 환심을 사려했던 어머니. 물어보나마나 어머니가 말하는 â갈 데ä 라는 건 삼거리일 테고, 나의 역할이란 어머니가 끓인 구수한 우거짓국이 든 솥과 펄펄 뛰는 황소라도 저밀 듯 무시무시한 무쇠 식칼을 들고 묵묵히 어머니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새 또 형이 발작을 하고 앓아 누웠나? 형의 방문은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찜통 더위에도 불구하고 굳게 닫혀 있었다. 그것은 잊을 만 하면 다시 도지는 형의 발작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내 다시는 이 입을 열지 않으리라, 어디 네 놈들이 내 입을 열 수 있나 봐라...... 그렇게 혼자 씩씩거리다가, 오페라 아리아 가락에 붙여, 아무도 말하지 못하리, 아무도 알지 못하리...... 승리, 승리...... 하며 목줄기에 시퍼렇게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악을 쓰다가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아이롱 밑의 와이셔츠...... 운운'하는 천상병의 시를 읊거나 '별 진다, 여기 별 또 하나 떨어진다' 외치며 누워버리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그날은 오랜만에 우리 오총사가 다 모였다. 얼렁뚱땅 후기 대학에라도 이름을 걸어놓고 안주해버린 나나 필주 같은 경우야 가끔 만나는 편이었지만, 벌써 고시촌을 들락거리기 시작한 석준이나 본고사 끝나기가 무섭게 재수학원에 박혀버린 병묵, 아르바이트를 하며 편입학 준비를한다던 영태는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장마가 쓸고 간 하늘은 쳐다보기가 쑥스러우리 만치 맑고 파랬다. 거기다 뭔가 속 시원하게 한마디 휘갈겨 써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문득 스스로 멋쩍어지게 팽팽히 펼쳐진 하늘. 아마 혼자 기다리던 병묵이 물먹은 병아리 마냥 고개를 들었다 내렸다 히죽히죽 웃고 있던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쪽 어느 도시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제 나라 군인에게 총 맞고 칼 맞아 죽었고, 곳곳에서 길 가던 사람들이 어디론가 잡혀간다는 소문이 여름 내내 쉬쉬 입에서 입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그런 입들을 꾹꾹 밟아버리겠다는 듯이 아침이면 개천 건너 삼거리 경찰서에서 시작된 군화소리가 핫둘핫둘 군가에 발맞춰 베갯머리를 밟고 지나갔고, 깨어나려던 내 넋은 그 발소리에 눌려 좀체 일어서지 못했다. 씹어뱉은 껌처럼 납작하게 눌려버린 내 넋은 하릴없이 베개 위에 달라붙어 얼마 전에 머릿속에 채록된 필름을 되돌렸다. 피사체들을 온통 표백시켜 버릴 듯 땡볕이 사정없이 내리꽂히던 어느 날, 삼거리에서 한 군인이 마주 지나가던 대학생의 정수리를 '뻑' 소리가 나도록 치고 간다. 그 순간 그 대학생과 내 눈길이 마주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어쨌거나 그 '뻑' 소리 외에는 아무 말도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오래도록 그 '뻑' 소리가 조용한 거리와 내 머릿속에 메아리를 만들며 거듭거듭 울리는 것 외에는. 그렇게 메아리가 울릴 때마다 솥뚜껑 만하게, 바위 만하게, 집채만하게, 자꾸만 커져 가는 그 군인의 손에 거듭거듭 정수리를 얻어맞는 내 정신이 뱉어낼 수 없는 소리를 삼킨 벙어리 울림통이 되어버린 것 외에는.
그렇게 여름이 끝날 때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새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대학본고사가 없어졌고, 과외공부가 금지되었고, 소집일을 맞아 오랜만에 찾아간 대학에는 각과마다 '정화위원'이란 게 생겨났다. 더러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더러는 겨우 복학해서 '운동'은커녕 미처 '준비운동'도 다시 시작하기 전에 예방용으로 잡혀갔다는 어느 과 어느 선배들의 소문이 홰를 치며 쏘다녔다. 그러니 막상 휴교령이 거두어지고 새 학기가 시작될 때 몇 명이 학교로 돌아올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최루가스와 흙먼지로 뒤범벅된 세상의 그 모든 일들을 남김없이 보았을 텐 데도 하늘은 구김살 하나 없이 파랬다.
병묵과 나는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었다. 그의 반짝이는 덧니를 보는 동안만이나마 하늘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 내가 내민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가치를 꺼내들면서 병묵은 또 말없이 히죽 웃었다. 뭔 헐 지랄이 있다고 이 자식들 이렇게 늦냐? 젖은 구공탄 구멍 마냥 벌름벌름 거푸 연기를 내뿜던 병묵이 혼잣말하듯 낮게 내뱉었다. 난 이제 대가리 처박고 공부할 맛도 안 나드만. 대학본고사에 뭐 그리 대단히 고차원적인 기대를 걸었기에, 본고사 없어졌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수학원에서 나와 버렸다는 병묵은 말투가 전에 없이 거칠어져 있었다. 오기로 했으믄 오겄지. 여기 이렇게 해바래기허고 섰으면 뭐 세월이 좀 먹냐? 한숨과 담배연기를 버무려 느리게 흘러나온 내 말에 병묵이 다시 히죽 웃었다. 병묵은 재수 때려치웠다는 지난 한 달 사이에 애꿎은 머리카락만 잡아늘이고 있었는지 벌써 귀와 목덜미를 덮은 시꺼먼 머리카락이 햇빛 아래 광기 서린 윤기를 머금고 번득거렸다.
나는 지금쯤 닫힌 방, 때묻은 베개 위에 깊숙한 골을 파고 있을 형의 민둥머리를 생각했다. 이년 전 만해도 형은 탐스런 고수머리를 쓸어 넘기며 도서관에 앉아 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떤 운동권 친구들의 설득이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얀마, 우리 불쌍한 홀어머니의 장남이얌마. 역시 형은 집안의 흔들림 없는 기둥이었고 샛별이었다. 만화와 놀기를 좋아하고 성적도 들쭉날쭉 하는 나와는 달랐다. 그러던 형이 어느 날 장발단속에 걸려 파출소에 끌려갔고, 재수 없게도 형의 소지품에서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 â불온유인물ä이 나오는 바람에 꼼짝없이 '몰지각한 학생'으로 낙인이 찍혀 열흘이 넘도록 '조사'를 받는 일이 생겼다. 그나마 월남전 유공자의 아들이라 그만했다는 뒷말이 있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한동안 형은 가위질에 함부로 갉아 먹힌 머리카락을 무슨 무공훈장이라도 되는 양 자랑스레 쓰다듬으며 늠름하게 학교를 오갔다. 어느 날 백짓장 같은 얼굴로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멀쩡한 대문을 두고 담을 넘어 집으로 뛰어들 때까지는 말이다. 학교가 있는 신촌부터 세검정까지 뛰어왔다는 형은 중천에 떴던 해가 꼴깍 서산을 넘어 가도록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 연방 눈동자를 휘둘러 아무도 없는 밖을 살피며 꿀꺽꿀꺽 마른침을 삼켜댔다. 그날 밤부터 형은 헛소리를 하며 앓아 누웠고, 가끔씩 일어나 '몰라, 모른다니까!', '난 몰라, 내가 뭐얼?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안 했단 말야!'를 외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잠이 들곤 했다. 사흘째 밤에 나는 어머니를 따라 귀신을 꼬이느라 어머니가 온종일 끓인 우거짓국과 식칼을 들고 삼거리에 나가 분부대로 국을 패대기치고 투우사처럼 으럇샤, 소리를 지르며 길바닥에 칼을 꽂았다. 급체한 사람에게나 쓰던 비방이 어떻게 형에게 붙은 귀신을 물리칠 수 있는지, 우리 나라의 귀신은 서너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나 새마을운동으로도 쫓을 수 없는 가난하고 허기진 귀신뿐인지, 게다가 어떻게 생긴 귀신이기에 찔릴 육체도 없으면서 칼에 쫓겨 도망가는지는 몰라도, 다음날 아침에 벌떡 일어난 형은 머리를 박박 밀고 목욕재계한 뒤 다시 용감히 도서관으로 출격했다.
예비고사가 끝난 날부터 내가 일가족모발총량불변의 법칙을 주장하며 기르기 시작한 머리는 이제 살랑살랑 어깨를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잃어버린 형의 정신적 동정과 탐스런 고수머리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엉덩이가 저리고 고개가 뻣뻣해지는 고초도 마다 않고 장시간 미장원에 앉아 물파마를 하고 애지중지 가꾸었기에 언제부턴가는 '예수'라는 별명까지 후광으로 따라 붙었다. 전국민의 훈육주임을 자처하듯 단발령을 내리고 머리 긴 남자들을 족족 잡아 가두던 대통령이 죽어버린 그 시절 학교에서도 쫓겨난 우리들의 머리카락 길이는 남아도는 시간과 정신적인 여유, 아니 무료와 공백의 크기에 비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담배를 연달아 서너 가치 피웠을 때쯤, 석준이 흰 와이셔츠 위로 여전히 새파란 하늘을 짊어지고 유령처럼 하얀 얼굴을 드러냈다. 석준은 휴교령이 내리던 날 새벽에 날벼락 치듯 들이닥친 전경들에게 영문도 모르는 채 집단몰매를 맞고 고시촌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아직도 법의 존재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지 그의 넋 나간 얼굴을 자꾸만 흘끔거렸다.
곧이어 한여름에도 맞춤콤비양복을 챙겨 입고 다니는 필주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한 손으로는 금시계를 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타났고, 그때까지 우리들을 본척만척 하던 나이트클럽 문 앞의 '기도(문지기)'가 다들 모이셨냐며 노랗고 빤질빤질한 얼굴로 아는 척을 했다. 그의 등 뒤 회전문을 타고 한 떼의 아가씨들이 마른 콩알 같은 웃음을 깔깔 뿌리며 빨려 들어가고 있었고, 그 웃음을 허겁지겁 주워 먹은 참새 몇 마리가 힘없이 잭, 잭, 밀려오는 자동차의 매연 속으로 사라져갔다. 병묵과 나는 싱겁게 입맛을 다셨다. 살도 한 점 없겠다.
야, 근데 왜 영태는 안 오냐? 하늘에도 서로의 얼굴에도 더 이상 시선을 두기가 민망스러워진 누군가 뜻 없이 손목시계를 흘끔거리며 물었고 다른 누가 또 생각 없이 대답했다. 혹시 이 자식 여태 눈치 없이 과외하다 잡혀간 거 아냐? 걔가 워낙 세상 소식에 늦잖아. 맞아. 같이 나쁜 짓을 해도 꼭 혼자 걸리지. 눈치도 더럽게 없다니까. 혼자만 걸리면 좋게? 저 걸리면 눈치껏 내뺀 우리까지 줄줄이 사탕이었잖아. 맞아. 그러니 별명이 오멘이지. 꼭 낭패를 보이고야 만다니까. 맞장구를 치는 웃음소리가 파란 하늘을 키들키들 건드렸다.                      
그래도 그날의 영태는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새끼줄만큼 굵은 금사슬 목걸이와 팔찌, 유행따라 길바닥 먼지를 쓸어주는 미화봉사용 통바지는 그러려니 해도 단추를 풀어헤친 와이셔츠 속으로 보이는 근육은 가히 볼만한 것이었다. 불끈 힘을 주면 우드득 솔기를 터뜨리고야 말 것 같은 가슴의 근육이며 소매를 팽팽히 채운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은 녀석이 한쪽 어깨에 걸친 야들야들한 가죽잠바가 바로 슈퍼맨 망토가 아닌가 싶을 만큼 우람했다. 고등학교 시절 시내를 주름잡는 하키선수였던 녀석은 과외가 금지되면서 그 동안 모은 돈과 남아도는 시간을 모두 신체미화에 재투자 한 것이 틀림없었다.
영태의 출연 이후로 한층 더 비굴하고 싹싹해진 '기도'를 향해 병묵이 삐죽삐죽한 수염 사이로 뾰루지가 난 턱을 치켜들고 흘끔 노려보는 것을 신호로 필주와 영태를 앞뒤로 세운 우리들의 나이트클럽 입장이 시작되었다. â기도ä는 물론이려니와 클럽의 그 누구도 감히 우리에게 신분증이니 미성년자니 조사니 하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색색의 조명등 한가운데로 번쩍이는 공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현란한 색깔과 귀를 찢는 음악을 마구잡이로 섞어대고 있었다. 매직 랜턴. 그 놈의 단어가 어느 놈의 시에 들어 있었더라. 꿈인지 뭔지를 투사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여름내 골머리를 싸매게 했던 과제물 생각이 나서 나는 구정물 뒤집어 쓴 개처럼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얀마, 비듬 떨어져. 예수님 파마 봐달라고 들어오기가 무섭게 흔드냐, 흔들길? 아니, 근데 이 자식, 샴푸도 되게 존 거 쓰나 보다. 영태가 내 머리카락에 주먹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바람에 목덜미가 스멀거렸다. 대체 뭐냐, 상표가? 글쎄, 막달라 마리아표 향유라고나 할까. 야, 그건 발씻는 거 아냐? 고운님 발 씻기려면 내 머리칼에 먼저 뒤집어 써야 한다는 싱거운 말장난을 하려는데, 여태 눈뜨고 자는 줄만 알았던 석준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쟤가 아까부터 너 자꾸 쳐다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한 아가씨가 황급히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급한 동작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긴 머리카락들이 색조명 아래 무지갯빛 부채를 그리며 가닥가닥 어깨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한 손에 든 페퍼민트가 색조명 속에서도 선명한 초록색으로 도드라졌다. 초록빛 바닷무울에...... 한밤중에 보름달처럼 일어나 앉아 신나게 손뼉을 치는 민둥머리 형의 노랫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킥킥, 그렇다면 숙녀의 소망을 모른 척 할 수 없지. 야, 오늘 우리 북킹 담당이 누구냐? 영태가 박자를 세듯 솥뚜껑 만한 주먹을 규칙적으로 쥐었다 폈다 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도령이 방자까지 할 수는 없으니 너는 안 되겠고, 내가 이 우람한 체격으로 나서면 아가씨들이 겁먹을지 모르고...... 야, 필주야, 네가 한번 총대 메 봐라. 필주가 반듯하게 고쳐 입은 양복저고리 위로 긴 목을 뽑으며 일어서자 우리 네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등을 밀었다. 밀어라, 향단아, ......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 듯이...... 아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이건 또 웬 놈의 시란 말인가. 내가 뒤죽박죽이 된 머리를 다시 흔들 때쯤 저편에서는 별 저항 없이 문이 열리고 아가씨들의 시선이 까르르 웃음소리와 함께 날아와 꽂혔다. 머니머니머니 인 더 리치맨스 핸즈...... 쿵짝쿵짝쿵짝쿵짝...... 노래를 타고 번쩍번쩍번쩍번쩍 조명이 튀었다. 말도 필요 없이 다섯 명의 아가씨들이 최면에 걸린 듯 몸을 흔들며 무대를 향해 일어섰다.
'돈돈돈'이 끝나고, 이어서 'YMCA'와 '야간열차'도 끝난 다음, 이제는 한물간 '웬 아이 니 쥬'가 흘러나올 때 나는 페퍼민트를 지그시 그러안았다. 함께 매직랜턴이 되어 빙글빙글 홀을 돌았다. 아아, 우리는 어떤 꿈을 이 자리에 투사하고 있는 것일까. 네가 필요할 때, 네가 필요할 때,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손을 뻗어보지. 그렇게 너에게 내 마음이 닿지. 너무 격렬하게 춤을 춘 다음이라 페퍼민트의 머리에서는 아지랑이 같은 달콤한 열기가 올라와 내 코끝을 간질였다. 네가 필요할 때, 네가 필요할 때......  내가 누굴, 왜 필요로 하는가. 잠시 쓸데없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마침 페퍼민트가 봉긋한 가슴을 내 갈비뼈 사이로 들이미는 바람에 질끈 눈을 감고 페퍼민트의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말았다. ...... 감은 눈 속에서 나는 수천 수만 마일을 달려, 소리 없이 달리고 달려...... 나는 말을 타고 페퍼민트의 아지랑이 속을 달렸다. 차츰 속도가 붙은 말은 들리지 않는 울음을 통쾌히 뿜어내며 휘날리는 갈기로 깊은 물 속처럼 새파란 하늘을 쓰다듬었다. 나는 바람처럼, 아니 바람보다 더 빠르게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려...... 마침내 흙바람 휘날리는 땅을 박차고 힘차게 공중으로 치솟았다. '내'가 도달해야 할 '너'는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향해서인지, 무엇을 피해서인지, 점점 깜깜해지는 공중을 쉬지 않고 달렸다. 쉭, 쉭, 마주 오던 유성들이 불칼 같은 몸뚱이로 내 옆구리를 그으며 지나갔다. 더 이상 별들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몇 소절이나 더 달린 뒤에야 멀리 동그란 초록별이 보였다. 아, 거기 있었구나, 바로 너였구나. 마지막 달리기를 위해 숨을 몰아쉬는데, 페퍼민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 벌써 끝났다니까요. 어느 새 페퍼민트의 가는 몸이 빠져나가고, 잠시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음각 되었던 갈비뼈 사이로 흙먼지가 흩어지고 있었다. 이히히히히힝. 멍청히 혼자 남겨진 말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이어 디스크자키의 웃음 섞인 멘트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늘을 잘못 놓았군요. 나는 긁힌 음반 같은 기분으로 자리에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옆구리에 유성들이 남긴 화끈거리는 흔적을 더듬는데 다시 쿵짝거리는 음악과 함께 페퍼민트 테이블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어? 근데 쟤들 지금 뭣들 하는 거냐? 영태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이어 병묵이 씹어뱉는 대꾸가 들렸다. 뭐하긴, 보면 몰라? 저게 바로 더블 북킹이라는 거다. 과연 우리들에게 등을 돌린 채 깔깔거리는 페퍼민트들 앞에는 양복에 넥타이까지 졸라맨 남자들이 아가씨 한 명에 두세 명의 비율로 주루룩 늘어서 제각기 아가씨들과 눈을 맞추려 눈에 심지를 돋우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다시 '돈돈돈'이 나오고, '와이 엠 씨 에이'가 나오고, '야간열차'에 이어 '아름다운 이 강산'까지 나오도록 우리는 아가씨들과 넥타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군인처럼 머리칼이 짧고 졸라맨 넥타이가 아니었으면 목 찾기가 어려웠을 넥타이 하나가 나의 페퍼민트 앞에서 거친 뿌리 같이 우락부락한 손을 휘두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래도 아가씨들은 기본소양이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었는지 우리들에게 인간적인 예우를 갖추어주기로 의견을 모은 것 같았다. 허스키한 여자 목소리가 â당신은 나를 원했지요, 나를 원했지요.ä하고 땅속에 묻혀 가는 무엇을 긁어 올리듯 힘겹게 헐떡일 때쯤, 나는 다시 페퍼민트의 손에 이끌려 빙빙 돌아가는 매직랜턴이 되어 있었다. 페퍼민트의 가슴이 아까보다 한결 더 뾰족한 느낌으로 갈비뼈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숨결을 모아, 갈비뼈 사이로 이는 바람을 타고 말갈기를 휘날리며 달려갔다. 다시 유성들이 스쳐갔고 멀리 어둠 속에서 초록별이 손짓하듯 깜빡였다. 아아, 두 손을 담그고 싶은...... 사알짝 나를 어루만져주는...... 초록별. 그 초록별을 우악스레 움켜쥐고 있는 바오밥나무의 거친 뿌리가 보인다 싶은 순간 음악은 끝났고, 우리 다섯은 너나 없이 자리에 돌아가 공평한 사회구현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땀흘리는 페퍼민트 아가씨들과 넥타이들의 춤을 관람해야 했다.
그렇게 몇 차례나 돌아갔던 걸까. 끊임없이 돌아가는 지구 위, 빙빙 돌아가는 불빛 아래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우리는 순번을 따라 돌고 또 돌며, 머릿속엔 우악스런 바오밥나무를 속절없이 키우며, 무엇과 경주하듯, 무엇에게 쫓기듯, 정신없이 제 몸들을 흔들며 돌아가고 있었다.

일이 터진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마침 우리 차례가 되어 내가 넥타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페퍼민트를 지그시 끌어안고, 유 니드 미, 아이 니 쥬, 어쩌구 하며 쏟아지는 유성 사이를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조명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급히 들어왔다 나갔다 하더니 쿵짝쿵짝 음악까지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가아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다시 만나요오. 쿵짝쿵짝쿵짝쿵짝. 이제는 우리가아......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몸을 틀던 설익은 환상들을 단숨에 쓸어내듯 무안스럽게 환한 조명이 들어왔고, 우리는 등덜미에 다가오는 빗자루를 피하는 위기감으로 황급히 그곳을 나와야 했다.
야, 우리 그냥 이렇게 찢어지는 거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말을 꺼낸 것은 영태였다. 글쎄...... 나는 아직도 초록별을 찾아 우주를 헤매는 혼을 불러들이는 중인데 얼굴 노란 '기도'가 차가운 물병을 내밀었다. 바커스였다. 다섯 분이시지요? 앞서가는 대다수의 '우리'와 아직은 '찢어지기' 싫었던 영태는 이미 문을 빠져나간 뒤였으므로, 나 혼자 양손가락 사이사이에 다섯 병의 바커스를 끼고 어기죽어기죽 그곳을 나와야 했다. 자, 여기 유리병이 있습니다. 그 속에 새가 들어 있어요. 머릿속에서는 형이 가끔 약장수처럼 중얼거리는 횡설수설이 돌아가고 있었다. 새를 그대로 병 속에 둘까요, 아니면 병을 깰까요? 병을 깨면 새가 다칠지도, 죽어버릴지도 모르는데요? 물론 그대로 두면 질식할지도 모르지요. 흐흐흐.  
가로등 밑에서는 이미 세 팀 사이에 협상이 분주히 진행되고 있었다. 정면의 가장 밝은 가로등 밑에 페퍼민트들이 마스게임이라도 할 듯 동그랗게 모여 서 있었고, 필주가 동그라미 속에 긴 목을 쑤셔 넣고 뭐라, 뭐라, 말하는 듯하더니, 곧이어 까르르 아가씨들의 웃음소리가 종소리처럼 퍼져나갔다. 함께 2차를 가자, 더 놀다 가자는 말이 그렇게 재밌게 들릴 수도 있는가, 나는 페퍼민트가 벌여 놓은 갈비뼈 사이로 멋대로 드나드는 종소리에 견디기 힘든 간지럼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러다가 필주가 샴푸광고라도 찍는 듯이 우아한 몸짓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영태들에게 돌아갈라치면, 종소리의 여운이 가시지도 않은 아가씨들의 동그라미 속으로 어느 새 다가온 넥타이 하나가 머리를 틀어박는 것이었다. 그러면 기회평등주의자인 아가씨들은 또다시 까르르 종소리를 울렸고, 영태에게 다시 등을 떠밀린 필주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아가씨들의 동그라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종을 울렸을까. 까르르, 까르르, 종소리와 함께 샴푸광고가 반복되는 꿈처럼 여러 번 돌아간 뒤에, 아직도 아가씨들의 동그라미에 머리를 박고 있는 필주를 지나쳐 바오밥 넥타이가 무리에서 떨어져 멀거니 서 있는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러시면 안되지요. 다짜고짜 입을 연 넥타이의 첫 마디는 그랬다. 내가 뭐랬나? 무슨 보험회사의 배지가 어깨에 걸친 양복깃에서 초조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멀뚱히 쳐다보는 내게 넥타이가 바오밥 손으로 술기운과 무안으로 성난 벼슬처럼 붉어진 네모난 얼굴을 세수하듯 쓸어 내리며 말했다. 춤출 때는 같이 놀았다고 해도...... 저 아가씨들 먼저 우리하고 놀던 아가씨들이에요...... 으응? 그래서? 더러운 침이라도 발라 놓았단 말인가. 벙어리 울림통 마냥 잠잠하던 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불쑥 치솟는다 싶은 순간이었다. '퍽' 소리가 나고, 내 안의 무엇이 파열되는 듯한 쾌감과 함께 '병 깼어?' 라는 영태의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고막을 터뜨릴 듯 강타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어어쭈, 병 깼어, 이 짜식들이...... 맹수같이 달려와 내 앞의 바오밥을 덮친 것이 영태의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손아귀의 허전함을 느꼈다. 삼거리에 퍽, 소리를 내며 패대기쳐 지던 우거짓국 냄새가 화끈 얼굴을 뒤덮는 듯도 했다. 부글부글 바커스 액체가 만들어낸 거품이 산산이 깨진 뾰족뾰족한 병조각들을 핥으며 호리병에서 해방된 뱀처럼 꿈틀꿈틀 흘러가고 있었다. 영태가 달려들던 순간 나를 바라보던 넥타이의 놀란 눈동자가 거품마다 박혀 있다가 피식피식 더럽고 깜깜한 아스팔트 속으로 꺼져갔다. '뻑' 소리와 함께 정수리를 얻어맞던 삼거리 대학생의 눈이 저랬던가. 난 모른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형의 눈동자가 그랬던가.
내가 병 하나만을 달랑 끼고 있는 허전한 손을 내려다보며 기억을 뒤적거리는 중에도 싸움은 마구 커져가고 있었다. 누구야, 어떤 새끼야, 너야? 이 새끼야? 네가 병 깨면 어쩔 거야? 어쩔 거냐구? 왜 쳐, 이 새끼야, 왜 쳐? 언제 달려갔는지 석준이와 병묵이, 게다가 우아하기 짝이 없는 필주까지 헝클어진 머리로 넥타이를 하나씩 붙잡고 씨근거리고 있었다. 누가 어디를 얻어맞는지 퍽, 퍽, 큰북을 울리는 듯한 주먹소리에 이어 억, 억, 신음소리가 났다. 청군 이겨라, 청군 이겨라. 잘한다, 잘한다, 우리 청군 잘한다. 내 마음속의 누구였을까. 싸움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삼삼칠 박수로 응원을 시작한 것이. 왜 하필 청군일까? 홍군이라면 누가 빨갱이랄까 봐 그러나.
그새 당황한 바오밥을 여지없이 제패한 영태가 필주의 멱살을 잡은 넥타이를 향해 비호같이 달려가는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저 곰 같은 자식이...... 누군가 그런 영태를 향해 마주 달려오는가 싶더니, 그만 해, 그만, 나보다 조금 일찍 정신을 차린 다른 누구의 목소리가 넥타이들 쪽에서 들렸다. 영태를 향해 달려오던 넥타이가 싸움을 말리려던 다른 넥타이의 다리에 걸려 길 위에 넘어지고 그 바람에 깨진 머리에서 피가 흐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누군가 야, 피난다, 하고 다급한 고함을 치지 않았더라면, 그 무모한 싸움이 언제까지 계속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야, 튀자. 어느 새 양복저고리를 찾아 입은 필주가 제법 패싸움에 익숙한 깡패처럼 말할 때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야, 영태야, 그만 튀어! 필주와 석준이 번갈아 날카로운 휘파람 신호를 보내고 나서야 영태도 오늘만은 â오멘ä이라는 별명을 벗기로 결심했는지 한번 더 휘두르려던 주먹을 아쉬운 듯 거두고 퉤퉤 침을 뱉으며 일어섰다. 어디서 병을 깨, 깨길, 겁도 없이.
울퉁불퉁 부어오른 얼굴에 터진 입술을 하고 부러 유유히 뒷골목 쪽으로 걸어갈 때,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클럽 문 앞의 기도가 노란 얼굴을 불쑥 내밀어 말했다. 당신들이 이겼어, 당신들이. 아니, 저 자식이.....? 닭싸움 구경했나, 이기고 지고 하게? 영태가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가며 낮게 씨부렁거렸다. 야, 이거 내일 신문에 나는 거 아니냐? 모 보험회사직원들 의문의 깡패들과 패싸움하다? 뭐, 보험 회사? 난 또 무슨 기관원 끄나풀이라도 되는 줄 알고 신나게 팼지. 나도...... 난 그냥 너희들이 패길래...... 기관원 패서 무슨 경을 치려구? 야, 영태야, 근데 그 병 말야...... 아, 운동 좀 했더니 목 탄다. 야, 예수야, 너 안 떨어뜨린 병 아직 하나 남았지? 대답할 사이도 없이 영태의 손으로 넘어간 바커스 병은 어느 새 필주와 병묵과 석준의 손을 차례로 거쳐 내 손에 빈 병으로 돌아와 있었다. 병 속에는 잠들어 가는 도시의 불빛만 남아 낮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그날 밤에 나는 나를 기다리던 어머니와 함께 예정대로 삼거리로 가서 힘껏 우거짓국을 패대기치고 으럇샤 칼을 던졌다. 오래 끓여 검게 변한 우거지를 봉두난발 풀어헤친 채 칼 맞은 허기진 귀신 하나를 삼거리에 눕혀 놓고 돌아와 나는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짹짹짹, 언제 들어갔는지 새들이 갈비뼈를 쪼며 꺼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핫둘핫둘, 군화소리가 내 머리카락을 밟고 몸을 밟으며 지나갔다. 우거짓국도, 아니, 배고픈 그 귀신도 그렇게 밟히고 있는 걸까. 아니면 더러운 개천에라도 뛰어든 것일까. 군화 사이로 초록별이 보였다. 등대처럼, 눈동자처럼 나를 향해 깜빡이는 초록별을 향해 험상궂게 생긴 군화들이 핫둘핫둘 흙먼지를 내며 가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손을 뻗어 잡아도, 잡아도, 군화는 도도한 강물처럼 이어지고 초록별은 자꾸만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흘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는 형이 우거짓국과 칼을 들고 어머니와 함께 삼거리에 다녀왔다.

그해 늦가을에는 형식적인 무슨 선거가 있었고, 그에 대한 예방, 후속조치로 교정은 또 잠시 소강상태를 겪었다. 거리의 곳곳에서 낙엽 태우는 냄새를 맡을 때, 나는 그 속에 섞여 있을지도 모를 최루가스를 식별해 내려고 코를 벌름거렸지만 허사였다. 군홧발에 단단히 눌린 도시는 낙엽과 함께 혼마저 태워 버린 듯 조용하였다. 고함소리도, 신음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낙엽 태우는 냄새가 겨울비에 씻겨 사라져 갈 즈음에 나는 거리에서 우연히 페퍼민트를 만났다. 손에 페퍼민트를 들고 있지 않은 페퍼민트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일러 보이는 두꺼운 코트에 긴 부츠를 신고 이 세상의 추위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하얀 입김 사이로 종소리를 뿜으며 웃고 있었다. 그녀의 따뜻한 코트 속이라면 초록별을 숨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와 따뜻한 찻집에 앉아 'Imagine'을 들었다. 존 레논의 어이없는 죽음 이후로 세상은 온통 그 노래로 넘쳐 있었다. 무엇인가 이름 붙여진 것, 형태 있는 것을 드러내놓고 함께 애도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다음 해 초여름까지 간간이 이어졌던 그녀와의 만남은 그녀가 여름방학을 이용해 해외언어연수라는 걸 떠나면서 끊어졌다. 군화들은 달려들어 물지도 못하면서 쉬이 물러나지도 못하는 개들에게 선뜻 해외여행, 해외유학 개방조치라는 달콤한 먹이를 던져주었다.
페퍼민트를 다시 만났을 때는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던 봄이었다. 나는 참고논문들을 적당히 짜깁기해 만든 졸업논문을 제출하고 한참 석사장교 시험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럭저럭 정신이 돌아와 준 형도, 나도, 최고권력자의 자제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는 우연 때문에 육 개월만에 속성으로 군대 의무를 마치는 새롭고도 특이한 제도에 합류할 수 있는 특혜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페퍼민트는 진한 화장에 골치가 띵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배시시 웃었다. 초컬릿 빛 루즈가 번들거리는 입술 사이로 이제 종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언어연수하러 미국에 갔다가 누구라면 알 만한 집안의 자제를 만나 결혼을 하고 이혼도 했다고 했다. 그럼 혼사 완전정복이네? 나는 베개 대신 베고 자던 참고서 제목을 생각하며 부러 킥킥 웃었다. 아냐, 재혼까지 해야 완전정복인가? 재혼? 페퍼민트가 힘없는 목소리로 씁쓸히 웃었다. 너무 밝은 대낮이라 그런지 눈가에 부챗살처럼 퍼진 잔주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나는 그날 페퍼민트와 함께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나이트클럽에 갔다. 무슨 노랜지 제목도 가사도 박자도 모르는 채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대다가 술을 퍼마시고 휘청거리며 그녀의 집 근처라는 강남 어디쯤에서 헤어졌다. 그리고는 혼자 그 낯선 동네를 오래오래 헤매었다. 초록별도 'Imagine'도 떠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새벽 산에 산 게들을 풀어 준 덕에 나는 당당히 이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석사장교 시험에 합격했고, 늦여름에는 육군삼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석준, 필주, 그리고 조기 졸업한 병묵을 만났다. 우리 넷 다 잡아줄 끈은커녕 지푸라기도 없는 집안형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다 못해 필사적인 자세로 그 시험에 임했는가를 알 만했다. 모 건설회사 사장이라는 아버지가 정치권에 단단히 매어놓은 줄을 잡고 타잔처럼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영태와는 경우가 달랐다. 우리는 그 사실을 그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훌쩍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버린 뒤에야 알았다. 비어 있는 그의 자리를 바라보며 우리는 쑥덕거렸다. 그 자식, 가버리길 잘 했지. 눈치 없는 녀석 끼고 데모를 제대로 하겠어, 땡땡이를 맘놓고 치겠어? 그 놈 부친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셨겠냐? 야, 그래도 영태가 쌈 하나는 시원하게 하잖아. 쌈만 잘하면 뭐하냐? 신나게 팼으면, 제 때 튈 줄도 알아야지. 킥킥.    
훈련동기생들의 끈이 대부분 단단하긴 해도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던 모양으로, 나는 이 년 전 석사장교를 거쳐간 형처럼 주말마다 사관학교를 찾아주는 시립교향악단의 연주를 듣거나 이슬비만 내려도 야외훈련을 중단하는 영화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타의 질시와 부러움을 받으며 우리들의 빤질빤질한 군화만큼이나 민망스런 특혜를 누리는 집단임에는 틀림이 없었고, 행여 그 특혜를 소홀히 할까, 잔꾀를 부려 땡땡이를 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야간독도 시간에 민가에 숨어들어 라면 끓여먹기, 장거리 행군 시에는 택시 잡아 뺑소니치기, 야영훈련 중에 온천 가기...... 우리가 누리고 있는 특혜에 대한 민망함이나 군대에 대한 뼈에 박힌 거부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눈치 없는 오멘 영태가 남긴 빈자리의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스물 몇 해 동안 키워온 모든 상상력과 조직력을 총동원해 힘들게 차지한 특혜를 남용하고 우롱하는데 바쳤다.
영태를 만난 것은 내가 사 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휴전선 최전방부대에 실습소대장으로 배치되고 난 뒤였다. 미국에 유학 가 있는 줄만 알았던 영태가 그곳에서 작대기 셋 붙인 상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쩐 일이냐? 졸업하고 귀국했지, 뭐. 얌마, 그랬으면 병무청에서 아는 척 하기 전에 얼른 다시 튀었어야지, 눈치 없게......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싱글거리는 얼굴이 아니라도, 그가 군복무를 기피하거나 우리처럼 특혜를 누릴 수단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느 밤인가, 야간순찰을 돌고 돌아와 깜빡 졸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이 깼다. 누가 안전등 밑에 쭈그리고 앉아 무엇을 쓰고 있었다. 영태였다. 야, 너 거기서 뭐하냐? 응, 뭐 좀 써. 뭐, 연애편지? 아니야. 녀석이 씩 웃으며 종이를 가리려는 듯 커다란 몸을 돌렸다. 순찰병사와 나눠먹은 라면 냄비가 덜그럭 소리를 냈다. 야, 근데 왜 펜은 자꾸 바꿔 쓰냐? 으응, 다섯 자에 한 자씩 빨간 볼펜으로 써오라고 해서. 눈치 없는 녀석이 무슨 일로 걸려 반성문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야, 너 또 쌈했냐? 아니야, 그냥 좀...... 병을 깼거든. 병? 왜? 응, 중대장실에 갔었거든. 근데? 건빵에 별사탕 넣고 쭈그리탕 끓여주러. 삼십 분 휴식 중에 후닥닥 라면 끓여 먹고 앉아 졸던 병사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근데에? 그 바오밥 같은 중사 놈이 나만 보면 바커스 사오라고 지랄이잖아. 그래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겨워서...... 와장창 떨어뜨려 버렸지 뭐. 영태의 와장창ä 소리에 졸던 병사가 잠시 놀란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이십 사 시간 쉬지 않는 대남방송에서는 낙원입네다. 월북환영합네다.ä가 되돌아가고 대북방송에서는 여전히 이은하의 야간열차ä가 쿵짝쿵짝 기적을 울리고 있었다. 그 자식 보루박스 같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씩씩대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킥킥...... 반성문 써 오래. 킥킥킥. 야, 그래도 여기 한 병은 남겨왔다. 그는 넓적한 얼굴에 번져가던 자조 섞인 웃음을 선뜻 지우고 생각난 듯 바커스 병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잠이 깬 병사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해에 어머니는 백일 동안 새벽마다 산을 돌며 게를 풀어 형을 사법고시에 합격시키고야 말았다. 물론 수산시장에서부터 산까지 게를 들고 가는 일은 내 몫이었다. 어머니는 일부러 헐벗은 산, 배고픈 산신령들만 찾아다니시는 것 같았다. 더러는 식목상태를 감시하는 비행시찰단을 눈속임하느라 초록 페인트가 칠해진 바위 위에 게 자루를 풀기도 했다. 자루에서 풀려난 게들은 제 위치도, 갈 길도 모르는 채 허겁지겁 집게발을 휘두르며,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며, 게걸음을 쳐 달아났다.
하지만 형은 인권변호사가 되기를 고집하였기에 어머니는 그 후에도 수없이 많은 우거짓국을 끓이고 패대기쳐야만 했다. 그렇게 많이 우거짓국을 끓였는데도 아직 이 나라에 배고픈 귀신이 남아있을까 의심스러웠지만, 어느 날 형이 다시 박박 밀어붙인 민둥머리로 돌아와 출가할 것을 통고할 때까지 그것은 어머니와 나의 일상이었다.
그 삼거리의 개천이 아스팔트로 메워지고 발 밑이 달달 떨리는 지하철역이 생기도록 시간강사로 지방대학을 떠돌며 시시콜콜 지루한 지식을 팔던 나는 어느 재미교포 아가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왔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차고 하늘로 치솟을 때 나는 잠시 푸른 공중에 휘날리는 말갈기며 초록별의 환상을 기억하려고 질끈 눈을 감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눈을 부릅뜨고 먹고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배운 도둑질이라 미국에 와서도 처음엔 지식을 팔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얼마 후엔 넥타이 졸라매고 보험을 팔러 다녔고, 그 다음엔 허름한 리커스토어를 사들여 술과 음료를 팔았다.
그 쥐구멍 만한 가게에서 밤낮으로 노예처럼 일해 마침내 '머니머니머니', '돈돈돈' 나직한 속삭임이 들릴 때쯤 LA폭동이 터졌다. 나는 TV화면으로 바로 전날 내게 제 남편이나 아내의 흉과 자랑을 늘어놓으며 함께 웃던 이웃들이 내 가게에서 히히덕거리며 술병을 꺼내 가는 모습을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한때 내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던 이들의 얼굴도 보였고, 더러는 조심성 없이 들고 가던 병을 깨뜨리고 히죽 웃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나와 내 가족들의 삶이, 아니 내 안에서 조심조심 기지개를 켜던 소중한 그 무엇이, 그렇게 퍽, 퍽, 얻어맞으며 함부로 깨어져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깨진 병 조각 조각이, 히죽거리는 사람들의 웃음, 웃음이 내 가슴에 칼날을 꽂고 또 꽂았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분해서 펄펄 뛰며 훌쩍거리기를 반복하던 아내를 겨우 재우고 나는 혼자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수없이 비수에 찔렸기 때문일까. 속이 견딜 수 없이 아프고 허전했다. 문득 어머니 모습이 보이고 우거짓국 냄새가 났다. 기억 속의 삼거리, 아니 지난 삼 년간 매일 드나들던 버몬트와 올림픽, 그 어느 교차로로 우거짓국을 들고 나가는 나와 어머니의 모습이 우리 가족의 삶을 조각 내던 뉴스 필름과 함께 머릿속에서 돌고 또 돌아가 바로 눈앞의 현실처럼 망막에 새겨졌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는 형을 찾을 세라, 들킬 세라 마음을 졸이며 숨어, 숨어, 전국의 산사를 돌고 계시다는 어머니. 어쩌면 어느 헐벗은 바위산을 산신령에게 바쳐진 게처럼 허덕허덕 기어오르고 계실 어머니.
냉장고를 뒤져 손에 잡히는 푸성귀들을 다 집어넣고 우거짓국을 끓였다. 나는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자꾸만 졸아드는 우거짓국에 물을 붓고 또 부으며 국을 끓였다. 어머니도 밤늦게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며 그렇게 물을 붓고 또 부었을 것이다. '초록빛 바닷물'을, 두 손을 담고 싶은 '초록빛 바닷물'을 저만치 바라보며 자꾸만 '아이롱 밑의 와이셔츠'가 되는 형의 닫힌 방문을 그렇게 홀로 마음 졸이며 지켰을 것이다.
우거짓국 냄새와 수증기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 수증기 속에 코를 박고 나는 또다시 환상을 찾고 있었다. 나를 태우고 이 흙먼지 휘날리는 땅을 차고 달려나갈 말의 환상. 누군가 억울하게 퍽퍽 맞았기에 또 억울한 누가 퍽퍽 맞아야만 하는, 치고 받고 찌르고 터지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이 땅을 힘차게 차고 오르는 환상. 오르려해도, 오르려해도 자꾸만 미끄러지는 바위산을 저 아래 바라보며 푸른 공중을 소리 없이 쓰다듬는 말갈기...... 어쩌면, 어쩌면...... 통쾌한 말울음이 들릴 것도 같았다. 들려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새벽이 올 때쯤 솥에 가득한 우거짓국을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허기진 귀신처럼, 칼맞고 도망치다 지친 귀신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고 삼키면서 식어 가는 우거짓국을 반쯤 먹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퍽'하고 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쩌렁쩌렁 귀를 울리는 목소리. 병 깼어? 어어쭈, 병 깼어? 나는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키득키득 몸을 흔들며 웃기 시작했다. 내 안에 나를 힘겹게 싸고 있던 막이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며 터져 나가고 있었다. 깨면 어쩔 거야? 어쩔 거냐구? 멈춰지지 않는 웃음을 타고 아프게 갈비뼈를 쪼아대던 새들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더러는 힘차게, 더러는 피를 흘리며, 더러는 다친 날개 때문에 기울어진 자세로 나의 젖은 망막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폭동이 터지고 한 달이 안돼 나는 적지 않은 액수의 수표 한 장을 우편으로 받았다. 휘갈겨 쓴 서명으로 보아 인도의 도로 건설현장에 나가 있다는 영태의 짓이었다. 봉투에서 메모지가 떨어졌다. 보태 써라! 끝에 붙은 느낌표는 빨간 색으로 쓰여 있었다. 나는 초록색 펜을 찾아 영태의 느낌표 뒤에 동그란 별을 하나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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