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사전-7

2006.10.11 06:09

김혜령 조회 수:963 추천:131

7. 연지의 말
디에게서 엽서가 왔다. 그의 엽서는 '잎사귀 엽' 이라고 말하듯 철 이른 선홍색 잎 하나만 달랑 달고 왔다. 벌린 손바닥 같은 잎사귀 한 귀퉁이에 벌레가 지나간 자국 마냥 작은 글자들이 꿈틀거린다. 잎맥을 넘느라 구부러지고 흩어진 글자들은 어렵사리 서로를 찾아 'Thee' 또는 'thee' 같이 보이는 단어를 만든다.
아이 러브 디 (I love thee). 오래 전 신입생시절에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으며 딴에 멋을 부려 그렇게 말했었다. 내 기숙사 창에 발코니가 달려 있었다면 밤마다 거기 서서 귀에 들리는 새소리가 나이팅게일이네 종달새네 하며 성대한 이별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마음의 가파른 산과 계곡을 맴돌다 고속도로에서 멈춰선 내 차에 가솔린을 넣어주었던 어느 날 그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내게 말했다. 히 러브스 디. 지금 내게 보낸 그의 엽서가 조금이라도 사랑을 담았다면 그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으리라.
그런데...... He. 삼인칭. 그의 사랑을 받고 있는 Thee 또는 thee. 고유명사로서의 '디' 또는 목적격 대명사로서의 thee. 신이 나를. 신이 나의 '디', 그를. 또는 멀리 삼인칭으로 달아난 그가...... 언제나 내겐 삼인칭인 신이...... 그래, 삼인칭. 삼인칭이니까 뭐든지 가능한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신이라는 두루뭉실한 삼인칭의 자루를 만들어 놓고 너무 함부로 욕심을 담아 넣고 있는 건 아닌지. 때로는 그 욕심을 회피하고 싶은 비겁함이나 게으름까지. 다만 대화에 직접 개입할 수 없는 삼인칭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내 시선이 잎맥을 더듬는 사이 글자들도 의미를 갈래갈래 가르며 달아난다. 모르겠다. 어떤 말이기에 자꾸만 숨어드는지. 어떤 사랑이기에 내 손에는 잡히지 않는 것인지. 쥐면 바스스 부서질 듯 위태롭게만 보이는 것인지.

신문의 종교소식 한 구석에서 그의 사진을 만난다. 아니면 그와 닮은, 또는 내 마음이 그의 기억을 투사한 삼인칭 남성. 기사에는 '통기타를 두드리며 대중 속으로 나선 거리의 선교사' 라는 제목과 함께 '미국 입양 혼혈아'라는 꼬리가 붙어 있다. 핏덩이로 헤어진 생모를 찾는다는 '그'. 삼인칭의 '그'가 역시 삼인칭의 '그녀'를 찾아서 수많은 삼인칭의 물결을 헤치고 또 헤치고...... '쉬 러브스 디'라고 말하면, 그러면 마침내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삼인칭의 동그라미가 완성될까. 세상을 흐르는 겹겹의 물결, 그 어딘가를 나와는 상관없이, 내가 아는 '디'와도 상관없이 의기양양하게 굴러가고 있을 동그라미.
나는 스스로 터져 버리고 싶은 동그라미처럼 먹고 또 먹었다. 부서진 귀퉁이가 있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빵빵하게 부풀어오르고 싶었다. 아니, 아주 아주 무겁게 되어 가라앉아 버리고 싶었다. 내 안에 비어 웅얼거리고 있는 동굴들을 꽉꽉 채워버리리라. 그것들의 덧없는 입들을 모두 막아버리리라. 아무런 소리도, 모양도 없는 깊은 곳에서 물처럼 해체되어 버리고 싶었다.

괜찮은가요? 수화하는 남자의 얼굴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검은 하늘에 떠 있었다. 먹은 것을 다 토하고 바람 좀 쐰다고 나왔던 것이 그만 벤치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직 여름인데도 밤바람은 제법 날카로웠고, 내 몸 어디선가는 역한 토사물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남자임을 확인하고는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려 그의 손을 찾았다. 그가 수줍은 듯 주머니에서 두 손을 꺼내며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날아오르는 새처럼 높지도 않았고, 깊은 물 속처럼 가라앉아 있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흔들어 깨우고 벤치에 일으켜 앉혀준 허연 두 손을 어깨에 매달린 추처럼 흔들며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검은 나무들이 부스스 몸을 떨었고 그가 사라진 쪽에서 왜, 왜, 소리가 났다. 갑자기 온몸이 폭발하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발을 구르며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고 말았다.

한밤중에 눈이 떠졌다. 창에는 새파란 새벽이 노려보듯 바싹 붙어있고 방안은 헝클어진 논문 자료로 가득하다. 나는 자료를 모으던 카드에 하나씩 쓴다. He/he, She/she, Thee/thee. 또 하나의 카드에 '디'의 기사를 오려 붙인다. 그리고 카드들을 치우려다 또 하나를 집는다. I. 가지도 잎도 없는 나무 줄기가 하나 흰 공간 속에 기우뚱 서 있다. 그 나무의 뿌리를 찾듯, 나는 조심조심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동그라미, 팩맨...... 동굴, 화살, 고무줄놀이...... 안달래, 출애굽기...... 나뭇잎 같은 카드가 금세 내 두 발을 뒤덮는다.

여름이 막바지에 이르러 여름방학 특강을 듣던 학생들마저 교정을 떠난 뒤 나는 수화하는 남학생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가지고 다니는 카드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그가 다가와 물었다. 저희 결혼식에 증인이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무그늘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귀머거리 여학생이 머리에 화환을 쓰고 수줍은 듯 웃으며 서 있었다.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버드나무 앞에서 주례로 보이는 남자와 신랑과 신부의 손이 차례로 원을 그리며 날아갈 듯 푸드득 푸드득 공중을 어루만지더니 곧 서로를 그러안는 둥근 고리가 되었다. 버드나무가 반짝이는 이파리들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여름내 깃을 세우고 퍼덕이던 나무들이 나뭇잎을 떨군다. 마른 혀들이 무수히 떨어져 내린다. 더러는 공중에서 부서지고, 더러는 떨어져 메마른 아스팔트 바닥을 아쉬운 듯 핥다가 모든 말을 제 속에 담은 채 부서져 사라진다.
추수감사절도 크리스마스도 지나, 비 젖은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낙엽들이 길을 가로막던 겨울도 다 간 어느 날, 나는 도서관에서 지나간 신문기사를 읽는다. 파산한 영세업자 모씨 정부()와 변사체로 발견. 동반자살로 추정. 비슷한 날짜의 다른 신문은 모씨가 가죽잠바를 만들던 삼십 대 후반의 남자이고 여자는 모 업소의 접대부라고 하는데, 또 다른 신문에서 그 접대부는 공장의 여공이 되고, 여관은 '불새여인숙'이란 이름을 얻는다. 그리고는 다가오는 겨울을 앞두고 비관 자살하는 노숙자들에 대한 짤막한 기사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나는 이미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한 신문 더미 사이를 한동안 서성이다 마침내 모씨의 기사들을 하나씩 복사기 위에 놓는다. 복사된 기사들을 얌전히 오려 카드에 붙인다.

봄이 다시 시작될 즈음에야 나는 수화하는 남학생을 다시 만났다. 그 동안 한쪽 다리가 공중에 들린 불안정한 모습으로 내내 비어 있던 언덕바지의 강의실 의자에 그가 앉아 있었다. 언제부턴가 도서관을 오갈 때마다 자꾸만 무거워지는 카드 주머니를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보던 그 의자에 그가 혼자 앉아 묶어놓은 나룻배처럼 먼 곳을 바라보며 몸을 흔들고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지만 입으로는 으으어어, 하는 안타까운 신음소리 뿐 아무 말도 나와주질 않았다. 당신 부인은? 몇 번 들어올리려던 두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내려놓은 뒤 그는 입안에 떠돌던 말의 파편들을 삼키듯 꿀꺽 침을 넘겼다. 그는 곧 체념한 듯 내게 웃어 보이고는 다시 먼 곳으로 눈을 돌렸고 나는 카드 주머니를 짊어지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안타까운 듯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바라보던 곳, 새순이 돋는 나무 사이로 문득, 반짝이는 강물이 벌떡 일어서는 것만 같았다. 나는 헐떡이며 뛰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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