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사전-3

2006.10.11 06:05

김혜령 조회 수:830 추천:129

3. 연지의 말
응, 누구냐, 수, 수지, 아니 연지냐?
일년에 서너 번이나 걸까 말까하는 전화를 아버지는 꼭 그렇게 마라톤 선수처럼 허둥지둥 걸었다. 뒤의 선수가 좇아오기 전에 물 마시는 대신 네게 전화를 건다는 듯이 마른침까지 꿀꺽꿀꺽 삼켜가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게다가 며칠 전 언니와 예상치 않던 통화까지 했으니 아버지의 마음은 더욱 급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좀체 끝나지 않는 마라톤 중에 물어야 할 안부가, 어쩌면 걸어야 할 전화가 적어도 하나는 더 생겼으니까.
네, 연지예요.
그래, 언닌 어쩌고?
내가 십여 년 전 미국에 왔을 때도 아버지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면서 내가 언니를 등뒤에 숨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자꾸만 고개를 뽑아 내 등 너머를 살폈고, 그 바람에 나도 몇 번인가 혹시 언니가 몰래 따라 오지 않았나, 김포공항을 떠나면서부터 돌아보지 않으려 뻣뻣해진 등뒤를 흘끔거리기까지 했었다.
어쩌긴요?
나는 통통 제자리 뛰기를 멈추지 못하는 아버지의 초조한 발 동작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소리나지 않게 한입 웃음을 베어 물고 시치미를 뗐다.
아, 언닌 지금 어딨냐고? 어떻게 하고 있냐고?
학교 갔지요.
지금쯤 바싹 핏대가 돋아 오른 아버지의 목을 타고 땀방울이 두 줄기쯤 뱀처럼 구불구불 깡마른 가슴팍을 파고들고 있으리라. 세월의 먼지 밑으로 자식들과 배우자, 그리고 자신에 대한 복잡한 회한이 칡넝쿨 마냥 치렁치렁 엉켜있을 가슴 어디쯤에서는 월남전에서 생겼다는 상흔이 오늘따라 아프게 꿈틀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쟁이 한을 낳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그 월남전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아버지는 어느 날 엄마에게 말했다 한다. 아무래도 아들이 하나 있어야겠소. 내가 총알 맞고 죽으려고 눈을 감다가도 번쩍 정신이 듭디다.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내 인생이, 우리 이씨 집안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서야 되겠는가 하고 말이요. 그러니 아들 없는 한은 아버지를 죽음으로부터 지켜준 셈인데도 아버지는 그 한의 칼자루를 돌려 엄마를 위협했고, 결과적으로 죽음으로까지 몰고야 말았다.
가끔 나는 생각했다. 엄마는 어떤 심정으로 이미 부서질 듯 위태위태한 육체에 또 다른 생명을 들였던 걸까. 아이를 가지기 전부터 엄마는 온갖 정성을 다해 자신의 몸을 가꾸고 태교를 했다지만, 마음 한 구석에 치사하고 구차하다는 느낌을 없었을까. 차라리 늘 불안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내던져버리고 싶은 자포자기의 심정은 아니었을까. 엄마의 임신을 극구 반대했던 의사의 진단을 아버지가 모를 수 있었을까. 혹시 알고도 모른 척하거나 엄마에게 설득 당하는 척 자신을 속였던 건 아닐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미 낳아놓은 언니와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머리를 저어 생각을 털고 돌아서야 했다. 막다른 벽에 부딪친 거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등을 돌려도 그 벽에는 아버지의 상흔처럼 지워지지 않는 낙서가 남아 있었다.

하, 학교?
네.
아버지는 대학도 다 졸업한 네 언니가 새삼스레 웬 학교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만, 나는 스스로 엄마의 억울한 혼을 자처하듯, 아니 언니와 내 앞에 차가운 벽을 세워놓은 두 사람 모두에게 앙갚음이라도 하듯 모르는 척 말을 자르며 거드름을 피웠다. 오래 전에 영주권을 포기했던 언니가 급한 대로 체류신분을 유지하려면 영어학교라도 가야지 별 수 있겠냐는 말을 하자니 짜증이 났다. 하지만 거기다가 아버지의 똑똑하고 재주 많은 큰딸은 실상 대학을 졸업한 것도 아니라는 말을 덧붙인다면 아버지의 심전도는 천장을 뚫고 날아가리라. 그 생각을 하니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와서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지는 듯 했다.
언니 전화번호 드려요?
그, 그래.
아버지가 수화기를 다른 손으로 바꿔드는 동안 잠시 침묵이 지나고, 꿀꺽 마른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던져주는 빵 조각에 달려드는 배고픈 새처럼 허겁지겁 언니의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고맙다, 고, 고맙다, 연발하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새어머니가 들이닥치기 전에 또 한 통의 전화를 마치자면 마음이 급했으리라. 뚜우, 끊어진 신호음이 울리는 전화기를 나는 잠시 그냥 들고 있었다. 이렇게 지금 내 가슴 한복판을 관통하는 밋밋한 소리는 누구의 심전도일까. 누가 만들어낸, 어디로 달려가는 텅 빈 길일까.

미국에 와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3년 가까운 세월동안 나는 아버지와 함께 마라톤주자였고, 간첩이며, 도망자였다. 우리는 간첩 접선하듯 새어머니의 눈을 피해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하다거나, 어디서 어떻게 만나자는 의사를 전달했고, 만나면 각기 갈 길이 다른 마라톤주자들처럼 헐떡이며 황급히 용무를 처리하고 헤어진 뒤,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시치미를 떼고 가정이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안일한 (또는 그래야 할) 울타리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저녁 식사 후면 권사님인 새어머니의 집도로 지루하게 이어지던 가정예배 시간에 아버지와 나는 간단히 암호를 주고받았다. 확실히 성경은 난수표보다 편리했다. 겨우 말문을 떼기 시작한 배다른 동생까지 앉혀놓고 예배가 시작되면 첫 기도 후에 아버지와 새어머니, 내가 번갈아 가며 그날 읽은 성경구절을 낭독했다. 로마서 5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아버지는 눈을 끔뻑이며 듣고 계시다가 예배가 끝난 뒤 재빨리 서재에 들어가 책장에 고이 모셔놓은 커다란 성경을 펼쳤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그 성경책은 샘 많고 눈치 빠른 새 어머니의 손길로부터 안전한 집안의 유일한 성역이었다.
그 날의 말씀, 로마서 5장에는 급히 휘갈겨 쓴 내 편지가 꽂혀 있기 마련이었다. 아버지, 언니에게서 소식이 왔어요. 올 겨울엔 피아노 학생이 많이 떨어져서 등록금이 모자라는 눈친데...... 그나마 아버지 형편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때에는 다음 날이나 그 다음 날쯤 아버지가 지적한 성경말씀에 1,2백 불쯤 꼬깃꼬깃한 돈이 꽂혀 있기도 했다. 언니에게 보내주어라. 애비 걱정일랑 말고, 몸 따습게, 잘 챙겨 먹으라고. 애비 걱정? 아버지는 언니가 미국에 오지 않은 게 새 가정을 꾸린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드리려는 속 깊은 배려였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걱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그리도 간절했거나.
언니 이번 학기 휴학했대요. 그래도 언닌 꿋꿋해요. 어차피 이젠 졸업논문만 쓰면 된다고...... 요즘은 야학에서 가르친다나 봐요. 또 무슨 말을 성경에 꽂아 전했던가. 언니가 공장에 취직했대요. 온종일 골치가 지끈거리도록 '용필이 오빠' 노래를 들으며 끝없이 미싱을 돌린대요. '친구여, 친구여' 노래를 들으며 악을 쓰듯 미싱을 돌려 수출할 가죽잠바를 만든대요. ...... 아버지, 언니가 파업을 주도하다가 해고되었대요. 그리고 언니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보내온 꺼멓게 색연필로 줄이 그어진 편지 내용은 어디까지 전했던가. 한 마디나 전했던가. 그 부분은 내 머리에서 완전히 삭제되어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동안의 철저한 학습과 없는 자의 분노, 혼자 남은 고독으로 정신의 날을 무섭게 갈아세운 언니는 푸른 항공서간에 다짜고짜 이렇게 썼다. 너도 노린내 나는 양키들과 살지 말고 여기 와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투쟁하자. 그 위에 꺼먼 색연필이 그어져 있었던가, 아니던가. 어쨌건 상관없었다. 꾹꾹 눌러쓴 볼펜자국은 무엇으로 덮어 씌워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선명했으니까. 풋. 떨리는 가슴으로 편지를 읽다가 그 구절에 가서는 웃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지금 누구와 살고 있는가. 학교나 길에서 어쩌다 눈이 마주치는 '양키'들은 겉도는 미소를 주고받으면 그뿐 별 상관이 없어 보였고, 한 집에 같이 사는 마늘 냄새나는 사람들도 식사시간과 예배시간을 제외하면 한 자리에 앉을 일이 없는 타인들이었다. 하지만 혼자 가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같이 살자고? 함께 투쟁을 하자고? 민주주의를 위해? 단식투쟁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학교도 못 가면서 그런 말을 하는 언니도 내겐 낯설기만 했다.
그래도 내가 아버지에게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건 아마 오랜 습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네 식구가 살던 큰 집을 팔고, 언니와 내가 친척들 집을 떠돌 때, 더 더 작은 집을 찾아 짐을 꾸릴 때마다, 우리 자매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 무사히 이사했어요. 아랫방 뚱보 아줌마가 이제 이 집 못된 귀신은 다 쫓았으니 모두 흥해서 나갈 거라며 고사떡을 절반이나 뚝 떼어 주었어요. 뭐, 그런 시시한 얘기들을 썼던 것 같다. 마치 빚에 몰려 도망 다니는 아버지가 우러러 소원을 비는 샛별이라도 되는 듯이. 하긴 마침내 아버지가 야자수 사진이 찍힌 엽서에 성조기 휘날리는 우표를 붙여, 내 곧 너희들을 부르마, 하고 써보냈을 때, 나는 구원받은 소공녀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또 무슨 얘기를 아버지에게 썼던가. 언니가 살림을 차렸대요. 형부는 지난 번 언니가 공장장에게 대들다 눈에 번쩍 불이 나게 뺨을 맞았을 때 공장장을 때려눕혔던 바로 그 남자래요...... 가물에 콩 나듯 보내오는 언니의 소식을 나는 그렇게 숨어서라도 아버지에게 전해야 했다. 그래야 내 몸에 피가 도는 것 같았으니까. 나는 복음서는 물론이고 고린도서, 로마서, 시편, 민수기, 아가서, 요한계시록까지 닥치는 대로 들먹였던 반면, 아버지의 대답은 언제나 욥기에 있었다. 그렇겠지. 아버지는 하늘이 내린 시련을 겪어내고 계시니까, 욥의 용기가 필요하겠지.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손에 쥘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언젠가는 내 입으로 출애굽기를 말하리라, 생각했다.
출애굽기 12장 31절. 아버지, 대학합격통지서를 받았어요. 장학금도 준대요. 출애굽기 13장 17절. 아버지, 언니와 형부가 그 파산한 공장을 인수했대요. 노동자들을 위한 일터를 만들 거랍니다. 나는 그렇게 길을 인도해줄 모세도 없이, 스스로 모세가 되어 아버지의 집, 아니 새어머니의 집 현관문을 홍해를 열 듯 쩍 갈라 열며 그 집을 떠났다. 아직도 겪어야 할 시련이 남아 있는, 이제는 늙고 지쳐 빛을 잃어 가는 나의 샛별을 남겨 두고.

언니에게 다녀온 뒤 보름이 지나서야 나는 전화를 받았다. 헬로우라는 나의 첫 마디 이후 전화 속에는 아무 말도 흐르지 않았다. 상대방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숨소리가 들렸고, 그렇게 숨쉬는 것조차 거북스럽게 느껴질 때쯤 전화는 고막을 강타하는 종료음을 남기고 끝났다. 그 소리는 내 몸 속에 동굴을 파고 들어가 언제까지고 질긴 공명을 울리며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동굴이 내 안에는 이미 허다했고, 그렇게 전화를 걸어 나와 숨소리를 섞고야 마는 그의 내부도 나와 별로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말하고 싶었으리라. 기다리지 말라고. 그러다가 조금은 싱거워졌고, 그 말로 자신이 끊임없이 나를 다시 찾으며 기다리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당혹스럽기도 했으리라. 그리고 또 지겨웠으리라. 아직도 끊어지지 않은 이 늘어진 고무줄 같은 관계가.
전화를 받은 날 나는 조금 과식했고, 소화되지 않은 음식을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토해내야 했다. 쿨럭쿨럭 먹은 음식을 다 토해내고 속이 비워졌다 싶을 때쯤 다시 빈 동굴을 울리듯 내 몸 속 어디선가 전화의 종료 신호가 들렸고, 나는 문득, 내가 그의 결혼을 겪어냈듯 그 아내의 출산을 겪어낼 수 있을까, 의심스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결혼했을 때 나는 이미 그의 청혼을 세 번이나 거절한 뒤였다. 결혼이라는 것이, 또 나라는 사람이, 특히 그가 목사가 될 것을 열망해 마지않는 그의 양부모 앞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아직은 그와 떨어져 혼자가 될 자신도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세 번째 거절 이후 한 달도 못되어 거짓말처럼 약혼을 발표했고, 내가 미처 그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결혼을 치러버렸다. '빨리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라는 것이 그가 뒤늦게 달아준 주석이었지만, 내가 상황을 소화해내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자, 어차피 보내야 할 사람, 이왕이면 결혼선물도 사서 축하해 주자, 그렇게 그를 내 마음에서 순하게 떠나보내자, 마음먹고 가정용 전자제품 가게를 돌다가, 백화점을 돌다가, 자동차를 몰며 도심을 돌다가, 그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점점 더 큰 원을 그리며 낯선 길을 질주하다가, 고속도로 한복판에 서버린 적도 있었다. 차창 밖은 깜깜한 밤이었고, 바람은 멈춰 선 차 한 대쯤 쉽게 세상 밖으로 던져 버릴 듯 세차게 불었다. 옆 차선을 달리는 자동차들이 지날 때마다 서버린 차와 함께 내 몸도 덜컹덜컹 흔들렸다.
그렇게 많은 기억과 생각이 오갔건만, 아직도 세상은 같은 날이었고, 차들은 이탈하는 일도 저항하는 일도 없이 앞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텅 빈 연료탱크가 쿨럭쿨럭 소리를 냈고, 나는 갑자기 달려든 허기에 허겁지겁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그래, 그래, 나야. 응. 배가 너무 고파서. 그는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달려왔다. 그가 가솔린을 사다가 내 자동차에 넣어주고, 이십 사 시간 여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사주었다.
식당의 불빛은 그의 낯익은 얼굴 속의 정맥을 비춰 보일 만큼 환했고, 따뜻한 음식의 온기가 내 몸 속에 퍼져 나가자 입안 가득 삼켰던 찬바람이 천천히 내 몸을 빠져나가 나는 조금 허탈해졌다. 내가 헤매며 찾던 얼굴이 바로 내 앞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베개 삼아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도 편안히 제자리를 찾아 눕는 듯 했다.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과 똑같다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십 오 년만에 아버지를 다시 만난 새어머니도 같은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비록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고 얼굴엔 중년의 기름기가 피로와 실패의 얼룩과 함께 절어 있어도, 그가 이미 상처를 하고 말 만한 두 딸의 아버지며, 걸음마도 못하고 죽은 어린 아들을 가슴에 묻고 있노라, 아무리 입으로 말을 해도, 그녀는 오래 공중을 떠돌아야 했던 화살이 마침내 과녁을 찾아가듯 눈앞에 돌아온 낯익은 얼굴을 향해 자신을 날려 꽂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가슴에 품어온 익숙함이 바로 사랑이라, 내 몫의 삶이라, 그 외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눈을 감으며. 그렇게 눈감는 순간의 평온함을 다시 놓칠세라 전력을 다해 부둥켜안으며. 그리고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아버지의 생존하는 두 딸, 그 불편한 현실이 멀찍이 바다 건너에 얌전히 숨죽여 있는 동안은.

다음 날 걸려온 전화는 느낌이 달랐다. 들려오는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전화 너머로 달려들 듯 거칠었고, 배경이 시끄러웠다. 그 거칠던 숨소리가 어느 덧 잦아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 말소리, 그릇 부딪치는 소리들 사이로 뽕짝조의 유행가가 들려온다 싶을 때쯤 전화는 또다시 가슴을 관통하는 종료 신호를 남기고 끊어졌다.
나는 재빨리 벽에 걸린 시계를 살폈다. 오전 11시. 한국은 새벽 3시. 아직도 귀를 울리는 전화의 종료신호가 가슴에 파놓은 동굴 속으로 언뜻 한 사내의 퀭한 눈동자가 보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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