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사전-8

2006.10.11 06:10

김혜령 조회 수:1025 추천:129

8. 수지의 말
후 불면 포르르 날아갈 것 같은 하얀 씨리얼을 세 숟갈, 미리 미지근하게 타 놓은 분유에 넣어서 아이에게로 돌아선다. 높직한 의자에 앉혀놓은 아이가 통통한 팔을 휘두르며 가가구구, 비둘기 소리를 낸다. 아아, 아이를 향해 입을 벌리며 엄지손톱 만한 숟가락으로 아이의 입술을 톡톡 친다. 꽃잎 같은 입술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금방 알을 깨고 나온 어린 물고기 마냥 작은 혀가 아아, 소리내며 파닥이고 있다. 그 반짝이는 분홍빛 혀 위에 숟가락을 놓는다. 어제까지도 입에 넣어준 음식을 주르륵 턱 밑으로 흘리던 아이가 오늘은 숟가락을 빨며 꿀꺽 제 혀에 닿는 음식을 삼킨다. 음식이 넘어가는 아이의 목을 바라보는데 아이가 다물었던 입술을 떼며 소리를 낸다. '음마' 같기도 하고 '마아' 같기도 하고, '엄마' 같기도 한 그 소리에 뭉클, 눈두덩이 뜨거워진다. 흐려진 시야 속에서 아이가 물에 번진 햇빛처럼 부정형으로 웃고 있다.
지난 사흘 모래산들을 통째로 들어 옮길 듯 거세던 바람은 잠자고 창밖엔 바람에 씻긴 맑은 햇빛이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 푸른 잎사귀들을 간질이고 있다. 빗자루를 들고 마른 나뭇잎들을 쓸며 테라스를 서성이던 연지가 톡톡 유리문을 두드린다. 왜? 하고 물으려던 말을 삼키고 창 밖을 본다. 어젯밤 연지가 보여준 카드 더미 속의 '왜가리 새끼'란 말이 간신히 다문 입술 끝을 간질인다.
연지 옆에는 다시 붙이면 작은 나무 하나는 될 만큼의 마른 나뭇잎이 쌓여 있다. 한때는 이 세상에 없었고, 한때는 푸른 점 같은 새싹이었다가, 또 한때는 물고기처럼, 혀처럼, 파닥였을 나뭇잎들. 날아오르고 싶어도 날아오르지 못해 나뭇잎일 수 있었던 것들.
좀 나와보라니까. 창 밖에서 들리지 않는 소리로 입만 뻥긋거리던 연지가 답답한지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와 번쩍 아이부터 들어올린다. 가가구구, 까르르. 유난히 낯을 가리는 아이인데도 연지만은 좋은지 팔다리를 버둥대며 웃어댄다. 연지가 산타클로스 같은 자루를 들고 바람처럼 쳐들어온 사흘 전 밤에도 아이는 뭐가 좋은지 까르르 웃으며 두 팔을 들어 제 이모를 반겼다.
연지가 가리키는 곳에 엉킨 마른 나뭇가지 같은 것이 보인다. 나뭇가지를 보라고? 아니, 잘 봐. 쭈그리고 앉은 우리들 앞에 잿빛 도마뱀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흐르는 물처럼 빠르게 화단의 꽃 사이를 빠져 달아나던 도마뱀. 어디로 갈까, 팔굽혀펴기를 하다가 꿀꺽 꽃봉오리를 삼키던 도마뱀. 어딘가에 제 몸을 잘라놓았을지도 모를 도마뱀. 빗자루 끝으로 툭 건드리자 마른 잎처럼 훌떡 넘어간다. 나뭇잎 속에 묻혀 있었어. 바람에 날려 왔을까. 아니면...... 내가 아이에게 홀려 나와보지 못한 지난겨울 그 어느 날부터 그곳에서 서서히, 잠에 빠져들 듯 생명을 증발시키고 있었던 걸까.

우리는 좁은 시내를 뒤져 인디언 기념품점에서 뚜껑 달린 항아리 두 개를 산다. 항아리의 둘레에는 희고 푸른 깃털을 달고 피리를 부는 사람들이 거미 같이 가는 팔다리로 춤을 추고 있다. 온몸으로 무어라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도 같다.
연지가 커다란 자루를 거꾸로 들어 그 안의 카드들을 쏟아낸다. 희고 붉고 파란 카드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왜가리, 돌토라니, 아삐야, 잠송이, 식사기도, 인어, 지느러미, 나비, 타임캡슐...... 그런 말들이 잠시 공중을 떠돌다 방바닥에 떨어진다. 어제도 그제도 연지는 온종일 카드들을 붙잡고 있었고 내게까지 카드무더기를 쥐어주며 뭐든 써보라고 했다.
까르르, 까르르. 바구니 속에 누워 있던 아이가 떨어지는 것들을 향해 팔을 휘젓는다. 연지가 제 외투 포켓에서 카드 몇 장을 더 꺼내 내게 내민다. 어제 연지의 외투를 걸어주다 이미 보았던, 복사된 신문기사가 붙은 카드들을 나는 말없이 받아 항아리 속에 담는다. 연지도 나도 마스카라 따위는 하지 않아 다행이다.
아삐야도 담고, 애비걱정도 담고, 각설이와 두더지와 냉면개시, 지하수도 담는다. 내가 '셀러리'라고 쓴 카드 뒤에는 연지의 글씨로 '한약', '비닐하우스' 뒤에는 '강'이라 쓰여 있다. 연지도 무언지 카드를 살피며 한 장 한 장 항아리 속에 담고 있다. 카드가 가득했던 방바닥이 비워지자 종이 봉지를 들고 테라스로 나간 연지가 한 움큼의 마른 잎을 담아온다. 그 속에 마른 도마뱀이 포근히 담겨 있다.
그 종이봉지도 항아리 속에 넣고 방안을 휘둘러보던 연지가 웃으며 아이에게로 다가간다. 그거 이모 줄래? 아이는 우리를 놀리듯 번갈아 바라보며 까르르 웃기만 한다. 나중에 너 다 보여줄게. 가까스로 아이에게서 받아낸 카드에는 앞뒤로 빼곡이 이렇게 쓰여 있다. 은어: 은어과의 물고기...... 치어 때 바다에 나갔다가 자라면 강으로 돌아와 여울에서 살며...... 은어: 어떤 동아리의 사람들이 본뜻을 숨기고 자기들끼리만 알고 남이 모르도록 만들어 쓰는 말. 은어: 숨은 말. 은어: 은빛 지느러미 또는 날개를 가진 말......
마지막 카드를 항아리에 넣고 뚜껑을 덮은 뒤 나무들 사이에 내려놓는다. 그새 어둠에 머리를 묻고 잠들었던 나무들이 푸르르 몸을 떤다. 삽 끝에 마른 흙이 벗겨지고 그 밑에 엉겨있던 젖은 흙이 부서진다. 어디서부터 흘러와 어떻게 스며든 물일까. 연지와 나는 힘을 합쳐 흙 속에 항아리들을 내려놓는다. 김장독을 묻듯 토닥토닥 흙을 얹어 말들을 심는다. 우리 안에 떨고 있는 말들, 이제는 자라는 아이의 옆에 보이지 않는 물로 흐르며 아이의 작은 손발과 가슴과 머리를 씻길 말들. 언젠가는 아이의 혀와 함께 세상을 헤엄쳐갈지도 모를 말들. 세상을 구르다 그 부서진 귀퉁이로 입맞출 말들. 세상을 날다 아이의 지친 어깨를 쓰다듬으며 부서질 말들. 지금은 잠시 묻어 잠재워야 할 말들.
나뭇가지마다 연두색 새싹이 삐죽삐죽 돋아난다. 한 세상 제 몸을 뒤흔드는 바람을 맞으며 때로는 뒤집히고, 때로는 그 바람을 타고 쓰다듬으며 공중에 떨다 사라질 혀들이 조심조심 서로를 핥으며 세상을 맛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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