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들

2006.04.05 04:00

김혜령 조회 수:1146 추천:79

에이, 고얀 놈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허씨는 혀를 차고 말았다. 가게 앞에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쪼그려 앉은 꼬마들 사이로 흘러가고 있는 까만 물줄기가 개미떼라는 걸 허씨가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젖은 화단의 한 모퉁이로부터 기어 나온 개미떼가 줄지어 가고 있는 곳은 아이들이 떨어뜨린 한 덩이 아이스크림이었고 그곳을 지난 개미떼들이 영치기 영차 녹아 사라지는 먹이를 지고 가는 곳은 돋보기 화형장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든 녀석과 돋보기를 든 녀석은 앉은 채로 개미떼를 따라 게걸음을 치면서 먹이고 죽이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저것도 내 집에서 산 아이스크림이겠거니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짠했다. 녹아 물이 되어 가는 아이스크림에 빠진 개미들이 버둥버둥 가는 다리를 버르적거리며 일어나 줄줄이 지글지글 불의 초점으로 사라지는 걸 보면서 허씨는 또 한번 혀를 차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라면 에이, 이놈들, 하고 발을 굴러 쫓아보냈겠지만, 말많고 고소하기 좋아하는 미국 땅에 살면서 마음놓고 남의 자식들 야단칠 수도 없고 아이들 얼굴 보기가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러니 때마침 "여보, 나야" 소리를 지르며 걸려온 아내의 전화가 고마울 뿐이었다. 아내는 헤어진지 몇 분이 지났다고 잘 도착했느냐, 점심은 언제 먹느냐, 끼니 거르지 말아라, 종알종알 귀가 간지럽도록 걱정이 많았다. 몸은 아직 불편해도 일년 남짓 가게를 떠나 있는 사이 명랑해진 아내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허씨는 허허, 허허, 민들레 씨 같은 웃음을 풀풀 날렸다.  
그런데 가게문을 여는 순간 허씨는 낯 색이 변했다. 웃던 얼굴이 팔랑, 바람 탄 종잇장처럼 뒤집혔다. 하긴 그의 낯 색이 변하기 전에 이미 변해있던 건 가게 내부의 색깔이었으니까, 그의 얼굴이 자신의 몸과도 같은 가게의 색깔을 반영하며 검게 변한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곧이어, 늘어진 양쪽 뺨이 파르르 강진을 예감하는 지진계의 추 마냥 떨기 시작했다.
입을 열어 무어라 소리를 내기 전에 우선 허씨는 작은 눈을 한껏 부릅떴다. 하룻밤 사이 잿빛으로 변해버린 가게 안의 풍경도, 그 속에서 일을 하는 척 흥얼흥얼 뚱뚱한 몸을 비비적거리는 닉이란 놈의 태평한 얼굴도 믿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혹시 내가 뇌졸중이나 뭐 그런 증세를 보이는 건 아닐까. 그러면 쓰러지기 전에 흔히 눈앞이 캄캄해진다고들 하던데. 그는 높지도 않은 자신의 혈압을 걱정하며 멀쩡한 뒷골을 짚어보기까지 했다.
뇌졸중은 아니었다. 그의 손끝에 묻어난 시커먼 재와 손이 지나간 자리에 허옇게 난 길이 그것을 증명했다. 허씨는 한숨이 자신의 마른 입술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돌아서 있는 닉의 더벅머리를 향해 사나운 눈을 치떴다. 어떻게 된 거야? 허씨는 딴엔 창을 꽂듯 제법 사납게 내던진 말에 움찔도 하지 않는 닉의 풀린 눈동자를 보자 덩달아 맥이 풀렸다. 녀석의 무심한 표정이 아니라도 그 멍청한 녀석의 힘으로 가게 안을 온통 꺼멓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는 자신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서 화산이라도 터진 걸까? 창 밖을 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재 가루가 검은 나비 마냥 분분, 쪼그리고 앉은 아이들 머리 위로 이착륙을 거듭하며 시야를 암담하게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매캐한 연기가 맡아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여태 모르고 살았던 화산이 어디서 갑자기 솟아나 터졌단 말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허씨는 문을 향해 내달았다. 유리창밖에 숯 검둥이가 된 정씨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어이, 정 사장. 오늘 굴뚝소제요? 마침 이년 전 정씨네 일본식당의 깔끔한 전 주인이 가게를 팔기 전에 굴뚝소제를 했던 일이 생각났고 부지런한 정씨라면 능히 스스로 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허씨는 화산이란 무지막지하고 먼 생각에서 옆집 굴뚝으로 귀환한 기쁨에 허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정씨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정씨는 대답이 없었다. 숯 검댕 밑으로 목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한겨울 아궁이 속의 구공탄을 방불케 했다. 굴뚝소제는요. 부인을 해놓고도 정씨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참 굳어져 있다가 허씨가 이 사람이 숯 기둥이 되었나 의아해질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불이에요, 불.
뭐, 부울? 단념한 듯 내뱉는 정씨의 말을 허씨가 알아듣기도 전에 언제 왔는지 중국식당의 박씨가 끼어 들었다. 거, 쯧쯧쯧, 조심들 허지 않구, 어째 불이야? 순간 숯 검댕 밑에서도 정씨의 낯 색이 얼음처럼 하얗게 변하는 것을, 한 순간에 뻘건 구공탄과 얼음 사이를 오가는 정씨의 심정까지도 허씨는 보고 말았다. 글쎄 말입니다. 말을 끊고 돌아서는 정씨의 웅크린 등을 보면서 허씨는 아직도 박씨와 정씨 사이에 앙금이 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원, 사람허구는...... 여전히 정씨의 등에 대고 혀를 차대는 박씨가 불편스러워져서 허씨는 생각지도 않은 말을 불쑥 묻고 말았다. 호세는 일 잘하고 있습니까? 으응? 호, 호세? 아, 그런 놈들 왔다가도 가고, 또 갔나보다 하면 다시 오기도 하고 그런 거지, 뭐. 박씨 역시 편치 않은 심기를 얼버무리느라 큼큼 괜한 기침을 했다. 얼마 전 정씨네 일본식당이 새로운 메뉴를 내놓으며 한창 바빠졌을 때 정씨네 집에서 주방허드렛일을 하던 호세가 소식도 없이 사라져 정씨가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호세는 버젓이 박씨의 중국식당에서 식탁을 치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저 흥, 기가 막혀서, 하고 돌아설 정도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며칠 후에 호세는 정씨의 일본식당에 있었고, 또 며칠 후에는 다시 박씨 집에 있었다. 그래서 호세를 볼 때마다 내가 일식을 먹으러 왔던가, 중식을 먹으러 왔던가 간판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허씨가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두 집에서 필요한 대로, 편리한 대로 나눠 쓰기로 했다고 했다. 솔로몬왕도 한 수 배워야 하지 않나, 속 모르는 허씨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며칠 뒤 일본식당 뒷문에서 정씨를 부르는 박씨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여보, 정 사장, 나 좀 봅시다. 호세 오늘 그 집에 있소? 그때 밖에서 바람쐬던 허씨는 심상치 않은 기류에 냉큼 가게 안으로 들어가 몸을 사렸다.
불은 간밤 정씨네 주방 온장고에서 시작된 거였다. 정확한 원인은 몰라도 활활 불길이 타올랐던 건 아니고 플라스틱 용기들이 녹고 집기들이 연기에 그은 것뿐이니 화재라고 하기보다는 â연재ä라고 정씨는 말했지만 허씨가 들어가 본 정씨의 일본식당 모습은 화재 못지 않게 참혹한 것이었다. 주방 기구들은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으리만큼 녹아 찌그러지고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식당 쪽도 타지만 않았지 시꺼멓기는 마찬가지였다. 보기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폐허의 풍경 속에 정씨 부부와 스시맨 둘이 그림자들처럼 꺼멓게 서서 역시 꺼먼 마스크 밑으로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으며 빗자루와 걸레를 이러 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왜, 홈디포에 가서 일꾼이라도 몇 데려오지. 허씨는 호세가 가버린 요즘 일주일이 멀다하고 홈디포에 사람장을 보러 간다는 정씨 말을 기억하고 한 마디 보탰다. 새벽부터 홈디포 담벼락에 개미떼같이 붙어 서서 불러주기만 기다린다는 날품팔이 일꾼들 생각이 났던 것이다. 한 달이 멀다하고 들고나는 어린 점원들 때문에 속을 썩이던 허씨는 급할 때 그렇게 쉽게 사람을 구해올 수 있는 정씨를 부러워했다. 허씨의 점원들은 직접 손님을 맞고 다양한 메뉴를 주문대로 만들어내야 하는 만큼 영어도 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경험이나 훈련도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원병력이 많아서 좋겠다는 허씨의 말에 정씨의 대답은 의외였다. 병력은 많지만 어디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있나요. 정씨도 꽤나 점원들에게 마음을 치었구나 싶어 씁쓸했었다.  
지금이라도 댓 명 데려다가 한 사흘 꼬박 청소하면 바로 영업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허씨의 제안에 정씨는 힘없이 글쎄요 소리만 되풀이했다. 오후 늦게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정씨의 여든 넘은 아버지가 걱정스럽다 못해 비극적인 얼굴로 정원용 호스를 휘청거리며 들고 와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표어대로 가게 앞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 아버지를 겨우 달래 보내고 나서 깜둥이가 된 스시맨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났고 가부끼 가수 마냥 얼굴만 하얗게 닦아낸 정씨의 아내도 떠났다. 석양녘에 허씨가 내다보니 정씨가 혼자 식당 뒷문에 기대앉아 맥주 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주 넋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작은 정씨의 체구가 비 맞은 벌레처럼 오그라들어 까만 실루엣으로 응고되는 것을 허씨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온종일 통풍구를 통해 넘어온 재 가루와 그을음을 닦아내느라 바빴던 허씨 역시 심난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봄부터 내놓았던 가게가 매상 좋은 여름이 다 가도록 팔리지 않아 초조하던 차에 옆집에 불이라니. 허씨의 아이스크림 손님 중에는 일본식당 손님이 적지 않아서 닫힌 일본식당 문 앞에서 돌아설 손님들을 생각하니 허씨는 바로 자신의 가슴에 재를 뿌린 기분이었다.
아내가 교통사고만 당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초조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 생각을 하면 시간을 되돌려 아내를 향해 돌진하는 술주정뱅이 자동차 앞으로 자신의 몸이라도 내던져 막고 싶은 안타까움이 불끈불끈 치솟았다.  
아내가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그런 대로 해볼 만한 장사였다. 허씨는 이미 이민 오기 전에 한국서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직했고 장성한 자식들도 미국서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기에 허씨 부부는 이태 전 봄에 그저 소일거리 삼아 한인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그마한 아이스크림 가게를 장만했던 것이다. 집에 앉아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늙느니 동네꼬마들 아이스크림이나 퍼주고 노는 모습 지켜보면서 두 늙은이 생활비나 조금 보태자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허씨 부부와 두세 명의 점원으로 충분했다. 부인이 아침에 가게를 열면 허씨가 장을 보아와 교대를 하거나 더러는 점원에게 가게를 맡겨놓고 부부가 함께 장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장사라고는 생전 처음 해보는 데다 아내와 함께 장을 보는 일도 허씨에게는 새로운 일이라 그는 현장학습 나온 초등학생 마냥 가는 곳마다 낄낄 웃음을 흘리며 다녔다. 서툴어도 과거 영문학도시절의 실력을 되살려 손님들과 웃고 인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장소가 극장 앞이라 매상도 그들의 기대보다 좋았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해 여름이 지나면서 사정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매상이 떨어지는 가을인데 길 건너편에 갖가지 과일조각을 비벼주는 새로운 유행의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집이 들어선 것이다. 거기선 점원 중에 누구라도 팁을 받으면 전 직원이 노래를 부른다는 말을 듣고 저런 어줍잖은 유행이 얼마나 갈까 생각했지만 일단 손님을 뺏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적자로 내달리려는 매상을 붙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다른 아이스크림 집은 물론 스무디 가게며 주스 가게들을 들락거리며 아이디어를 모았고, 한달 여를 만들어보고 먹어보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과일 스무디며 셰이크를 비롯한 몇 가지의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냈다. 그때만 해도 그들 부부는 TV 가정요리 시간에 초대받은 부부들 마냥 즐거웠다. 아내에게 무딘 손놀림을 핀잔 받으면서도 허씨는 허허허 웃음을 놓지 못했었다.
그런데 새 메뉴와 함께 매상이 올라가는 듯 하자 이번에는 점원들이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일이 많아졌다는 이유로 급료를 올려라, 점원을 더 붙여라, 이건 못한다, 저 것도 못한다, 말이 많더니 학교를 가야 한다, 휴가를 가야 한다, 머리가 아프다, 이빨이 아프다, 하다 못해 강아지나 사돈의 팔촌이 아파서 못 나온다는 말이 사흘이 멀다 하고 들려왔다. 그렇게 뚫리는 구멍들을 메우느라 점원 수를 늘리다 보니 그만큼 두통거리도 늘어났다. 교장 시절을 생각하면 모두 교장실에 불러다 눈물이 쏙 빠지게 혼쭐내고, 정학, 퇴학을 시켜도 시원치 않을 일이었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때마다 꼼짝없이 부부가 끌려나가 빈자리를 메우다 보니 얼마 안 가 두 사람은 꿈속에서도 절렁절렁 가게에 연결된 쇠고랑 소리를 듣게 되었고, 단골들은 그들대로 점원이 너무 자주 바뀐다, 맛이 없어졌다, 서비스가 나쁘다, 불만이 많았다.
그렇게 매상이 올라가는 듯 하다가는 내려가고, 다시 올라가는 듯 하다가는 더 내려가는 일을 반복하면서 일년을 버텼다. 매상이 오르리라, 오르리라, 그래도, 그래도, 하며 메뉴를 늘이고 바꾸고 재투자를 거듭하는 사이에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모아두었던 비상금 뭉치들이 하나 둘 헐려 나가기 시작했다. 인건비만 줄일 수 있다면, 함께 나설 수 있는 가족이 많았다면...... 그런 생각은 허씨에겐 하나마나한 공상에 불과했다.
그런 중에 아내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허씨가 아내를 데리고 병원과 재활원 사이를 동분서주하는 동안 가게는 바퀴가 잘못 달린 수레 마냥 제멋대로 휘청휘청 내리막길을 굴러가고 있었다.
    
이틀 뒤 정씨네 일본식당 문에는 공고가 붙었다. '보다 좋은 서비스를 위해 내부 수리중이니 양해 바랍니다. 보름 후 새로운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마침표 뒤에 점 둘과 길다란 곡선으로 그려진 얼굴을 허씨는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저게 정말 웃는 얼굴인가, 우는 얼굴인가. 언젠가 스시맨이 회칼을 내던지고 나가 버렸을 때, 머리에 띠 두르고 스시바에 서서 '이라샤이' 소리를 지르다가 허씨를 보고 겸연쩍게 웃던 정씨 얼굴이 떠올랐다. 킥킥, 우리 아버지 보시면 큰 일 나요. 만주벌판을 달리던 항일투사셨거든요. 정씨는 서툴게 스시를 만들며 킬킬 웃었었다.
가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정씨도 정씨의 고물 벤즈도 보이지 않고, 가게 유리창마다 누런 시멘트 종이가 시퍼런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어제 보험회사에서 나와 견적을 낸다더니...... 이왕이면 좀 보기 좋게 가리지 않고. 그나저나 보름이라. 허씨는 한숨이 나왔다. 어제도 허씨의 매매광고를 보고 찾아왔던 사람 하나가 텅 빈 가게 앞을 휘둘러보더니 허씨는 만나지도 않고 가버린 일이 있었다. 하긴 자신이 생각해봐도 누가 굳이 시멘트 종이 바른 잿더미 앞에 앉아 아이스크림 먹을 기분이 나겠으며 장사할 기분인들 나겠는가 싶은 게 사실이었다.  
지난여름 영양제 넣은 음료수 덕에 그나마 매상이 조금 올랐을 때 싼 가격에 팔아버리는 건데. 그때 부동산업자 말만 믿고 욕심을 부린 게 후회막급이었다. 찾아왔던 구매자들은 허씨를 이리 찔러보고 저리 찔러보고 전신에 구멍이 숭숭 나도록 찔러 본 뒤에 너나 없이 입을 삐죽거리며 돌아서 가는데도 부동산업자는 기다려보시라는 말만 되풀이했던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한 달 전부터는 가격을 대폭 낮추어 직접 신문광고를 냈지만, 걸려오는 전화나 찾아오는 사람은 많아졌어도 실속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이제는 부동산업자를 통해 구매자를 거르는 과정이 생략된 지라 의도나 상황이 얼토당토않은 사람들까지 만나야 했고, 전에는 부동산업자가 알아서 대답해주었던 것까지 일일이 응수하느라 허씨는 정작 가게는 돌보지도 못하고 파김치 되기가 일쑤였다.
내가 빨리 일어나야 하는데...... 사고만 안 났어도...... 지쳐 돌아오는 허씨를 볼 때마다 미안해하는 아내에게는 걱정 말라, 걱정 말라, 허허, 허허, 웃으면서도 허씨는 아마 요즘 제 속을 들여다보면 꼭 정씨네 식당 같을 거라는 생각에 쓴웃음을 삼켰다. 돌이켜보면 내가 곱게 늙다말고 왜 돈주고 이런 고생을 사들였나 싶어 발등을 찧고 싶었지만, 원망할 사람도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허씨는 그날 점심을 먹으러 박씨네 중국식당에 갔다가 정씨네 보험회사에서 보냈다는 하청업자들을 만났다. 모처럼 여러 사람이 몰려든 탓인지 식당 안은 제법 왁자지껄 밥집 기분이 나고 박씨는 연신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정말 보름이면 되겠느냐는 허씨의 말에 하청업자들은 하나같이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싱글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이구, 그러엄. 이런 일이야 걸릴 만큼 걸려야 되는 거지. 박씨는 허씨를 막아서며 하청업자들을 향해 인심을 썼다. 아무튼 일하는 동안 점심은 걱정 말아요. 우리 집에서 스페셜로 디스카운트 해줄 테니깐. 신이 나서 떠들다가 허씨의 뜨악한 얼굴을 보고는 얼른 덧붙였다. 게다가 디저트로는 바로 옆에 맛있는 아이스크림 집이 있잖소. 이 집 셰이크도 좋고, 과일 스무디도 아주 그만 이라오.

다음 날은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온종일 파리 잡을 일조차 없던 허씨는 선반 밑에서 꾸역꾸역 빠져 나오는 시꺼먼 개미떼를 발견하고 기겁을 했다. 빗물에 집을 잃은 개미들이 대이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개미들은 벽에 붙은 콘센트 구멍으로 나오고 있었다. 한바탕 살충제를 뿌려 죽은 것들을 치우고 보면 어느 새 개미떼가 같은 구멍으로 의산의해를 이루며 밀려나오고 있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기를 쓰고 구멍을 빠져 나오는 개미들을 보고 있자니 허씨는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뭐 먹을 게 있다고, 아등바등 긁어모으면 또 얼마나 살겠다고. 차라리 내 간을, 아니 내 심장을 먹어라. 들어줄 이도 마땅찮은 고함을 허공에라도 질러보고 싶었다.  
하품 좀 그만하고 저런 구멍이나 막으라고 닉 녀석에게 호통을 치려는 찰나에 정씨네 하청업자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박씨가 전날 너스레를 떤 덕분인지 셰이크와 스무디를 도합 열 개나 시켜 가지고 갔다. 그 중 하나를 문 앞까지 따라가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고 다시 물으니, 일이 너무 많다, 정말, 정말 너무 너무 많다, 저렇게 그을음 덮인 것은 탄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나쁘다, 차라리 처음부터 새로 식당을 꾸미는 게 낫다는 말만 커다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려가며 수선스럽게 되풀이 하다가 가버렸다.

정씨 부부는 이참에 지겨운 가게 일 잊고 지내자고 어디 훌쩍 여행이라도 떠났는지 열흘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고, 하청업자들은 매일 아침 열 시가 다 되어서야 히히덕거리며 나타나서, 배 두드리며 점심 먹고 오전 오후로 간식, 휴식 다 챙겨 먹다가 오후 세 시가 되기 무섭게 트럭을 몰고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나마도 주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저래가지고 언제나 일이 끝나려나 한숨만 쉬던 허씨는 일꾼들이 식당 붙박이 의자에서 뜯어낸 쿠션을 트럭에 쑤셔 박아 떠나려는 걸 보고는 한 마디 하고 말았다. 그거 멀쩡해 보이는데, 버리기 전에 좀 닦아 보지. 일꾼들은 대답도 없이 새침한 표정으로 트럭 문을 꽝 닫고 떠나버렸다. 아니, 저런......
허씨가 역정을 내려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박씨가 군만두 한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그러게, 쯧쯧쯧, 타려면 아주 몽땅 탔어야지. 아니, 옆집이 다 타버리면, 정씨는, 또 우린 어쩌고? 우리? 글쎄, 그러니까, 그러니까아, 타려면 몽땅 탔어야 한다지 않아. 박씨는 허씨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 과장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왜, 허 사장도 보험 있을 거 아냐. 어차피 제 값은커녕 개 값 받고 팔기도 어려운데 몽땅 타버리면 만세지 뭐. 흐흐, 허 사장, 거 왜, 노래도 있잖소. 탈대로 다아 타아시오오. 타다 말지인 부디 마오. 박씨는 놀라운 미성으로 노랫가락까지 뽑아내더니 흐흐 웃으며 허씨의 등을 쳤다. 허씨는 박씨의 노래를 듣고 그의 얼굴에 깔린 피곤의 그늘을 새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일년 전 길 건너 아이스크림 집 옆에 한, 중, 일식을 겸한 대형 프랜차이즈 뷔페식당이 들어선 후로 정씨는 물론이고 박씨의 얼굴도 전과 같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식당 카운터 뒤에 걸려 있던 신문사진 속의 박씨 얼굴도 떠올랐다. 언젠가 무심히 사진을 바라보는 허씨에게 박씨의 부인이 먼 곳을 헤매듯 멀어진 눈빛으로 말했었다. 벌써 까마득히 오래 전이네요. 우리가 한때는 요트 타고 태평양 횡단까지 했거든요. 팽팽하게 부푼 돛의 흰빛이 액자의 유리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잠시 퍼덕거렸다. 호호, 지금처럼 식당에 목줄 매고는 꿈도 못 꿀 일이지요. 늦게 본 쌍둥이 아들 둘이 아직 법대 재학중이라고 했다.  

이틀 후에 나타나 식당을 들여다보고 한숨을 쉬는 정씨에게 허씨는 보험회사에서 뭐라 해도 역시 주인이 직접 나서서 독려를 해야 일이 빠르지 않겠느냐고 타일렀다. 그러게요. 다 알아서 한다더니 여태 해놓은 게 거의 없네요. 허씨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정씨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중국집 박사장님은 우리 집에 불난 게 좋다고 하셨다면서요? 일꾼들 말이, 그래서 우리 집에 올 손님이 중국집에 오고 일꾼들도 매일 와서 매상이 오른다고...... 게다가 이왕이면 몽땅 타버렸어야 한다고 까지 했다면서요? 아무리 경쟁이 된다지만, 어떻게 남 못된 일에 말을 그렇게...... 정씨는 몹시 서운한 얼굴이었고, 허씨는 괜히 당혹스러워져 얼굴을 붉혔다. 두어 시간 후 중국식당 뒷문 쪽에서 박 사장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고, 정씨의 고향선배라는 스시맨이 잔뜩 굳은 얼굴로 박씨와 함께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토요일 아침 늦잠을 자던 허씨는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깨어났다. 닉이란 놈이 못 나온다고 또 무슨 되지 않는 핑계를 대려는가 싶어 기운 없이 받았는데 뜻밖에도 녀석의 달달 떠는 목소리가 귀를 채웠다. 가, 강도를 당했어요. 뭐라고? 핏줄 속을 돌던 피가 그 순간 딱 멈춰 서서 찌릉 찌릉 비상벨을 울리는 것 같았다. 가가, 강도요오. 언제? 지, 지, 지금이요. 어, 어떤 놈들이야? 흐, 흑인 둘이, 예, 이십 대 마른 여, 여자 하나하고 남자 하, 하나요. 어, 어떻게? 제가 안에서 주, 준비 다 하고 아, 앞문 열러 나가는데 확 미, 밀치면서, 초, 총을 제 얼굴에 이, 이렇게 들이대고 도, 도, 돈 내노라고. 그, 그래서? 그, 금전 등록기에 있던 돈 다, 다, 다 내주고...... 허씨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게문을 여는 아침시간 금전등록기에 있던 돈이라면 거스름돈 주려고 깔아놓은 백여 불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넌 괜찮으냐? 예, 에...... 그제야 여유를 되찾고 묻는 허씨의 말에 대답은 하면서도 닉 놈은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는지 미적거렸다. 경찰에 신고는 했냐? 아, 아, 아니오. 아니오. 시, 신고하면 아, 아, 안 된다고 해서. 그러면? ...... 그, 그런데...... 닉이 마른침을 꼴딱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가, 가, 강도들이 저를 가게 뒤쪽으로 데려가서 도, 도, 돈을 또 내노라고 해서...... 그래서? 허씨는 다시 긴장감으로 목이 조여와 가까스로 물었다. 어제 마침 박씨가 자기 집에 가서 한 잔 하자는 바람에 가게를 점원아이들에게 맡겨두고 나왔던 것이다. 그런 날이면 점원들이 돈을 세어서 가게 뒤쪽 선반 한 구석에 숨겨두도록 되어 있었다. 제가 도, 도, 돈 더 없다고, 아침이라 없다고 했는데...... 그, 그래서? 허씨 목에서는 이제 쇳소리가 났다. '쇠똥 (bull shit)!' 이라고 고막이 터지도록 소, 소리를 지르면서 또 이, 이렇게 내 눈앞에 총을 들이대어서...... 그래서? 하, 하, 할 수없이...... 그래, 알았다. 그래도 너는, 너는 다친 데 없이 괜찮다 말이지? 허씨는 어제 하루 매상이 다 날아갔다는 사실에 맥이 풀리면서도, 여유를 되찾으려고 심호흡을 했다. 어제는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인데다 이웃 극장에 근간 화제를 모으던 새 영화가 들어오고 날씨까지 더워서 오랜만에 손님들이 가게 문밖까지 줄을 섰던 것이다. 그만큼 바빴으면 적어도 어제 매상이...... 허씨가 전날의 매상을 가늠하며 쓰린 가슴을 겨우 쓸어 내리는데 닉 녀석이 다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제, 제 지갑까지 내노라고 해서. 얼마나 들어 있었는데? 도, 도, 돈은 이십 불도 없었지만. 시, 시 신분증을 빼, 빼, 빼려고 했는데. 그, 그, 그것까지 빼, 빼, 뺏어 가면서, 너 어디 사는지 누, 누군지 다 아니까 조, 조심하라고, 신고하면 가, 가만 안 둔다고. 여태까지 말을 하느라 힘들었는지 헉헉거리는 숨소리만 잠시 전화통에 가득했다. 닉, 괜찮아, 어차피 감시 카메라에 다 잡혔을 테니까...... 그, 그게...... 왜? 강도들이 그, 그것까지...... 비디오 테이프하고 카메라까지 다 떼어내서...... 그래, 알았다. 허씨는 내가 뒤늦게 아이스크림 가게 하나 벌여놓고 별의별 인생공부를 다 하는구나 싶어 떠오를 리 없는 전생의 죄를 더듬으며, 원금도 이자도 알 수 없는 이 빚을 언제 다 갚으려나, 한숨을 쉬었다.
허씨가 경찰에 신고를 하고 순경이 와서 지문을 채취하는 내내 닉은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하더니,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면서 집으로 가버렸다. 이제 겨우 스무 살도 안 된 놈이 그런 일을 당하니 겁이 단단히 났나보다 생각하면서도 허씨는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한 달쯤 전부터 닉이 일을 표나게 잘했다 못했다, 기분도 썩 좋았다 썩 나빴다, 했던 데다 가끔은 화장실에 한참 틀어박혀 있다가 코피가 났다며 콧구멍을 틀어막고 나오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허씨가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거나 물건을 사러 나가 닉을 혼자 가게에 남겨 둔 날 매상이 다른 날보다 눈에 띠게 적었던 일이 몇 번 있었다. 언젠가 손님들이 닉을 가리키며 마약쟁이 인간쓰레기라고 쑥덕거리는 걸 언뜻 들은 일도 있었다. 또 곰곰 생각해보니 강도들이 가게에 가장 돈이 많을 밤 시간을 놔두고 하필 닉이 혼자 일하는 아침에 왔다는 게 미심쩍었다. 간밤에 허씨가 돈을 가져가지 않았다는 걸, 또 그 돈을 가게 뒤쪽에 둔다는 걸 아는 놈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요즘 토요일이면 바로 옆 정씨네 일본식당이 비어 있다는 것도 알고 한 짓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위협을 당했다지만 닉이 빨리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마약을 하면 손버릇도 나빠진다는데. 그래도 설마...... 허씨는 의심은 가면서도 한편으론 미운 정 고운 정 들여가며 일년 가까이 데리고 있던 사람을, 그것도 불시에 강도를 당하고 위협까지 받아 벌벌 떨고 있을 나이도 어린 사람을 의심하는 자신이 싫어서 갈팡질팡하는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다.  
어쨌건 닉은 갔고,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점원들은 무섭다 거니, 허씨가 강도사건 이후로 신경과민이 되어 저희들을 의심하고 못살게 군다 거니, 투덜대며 줄줄이 허씨의 가게를 떠났다. 이제는 꼼짝없이 허씨 혼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게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날은 느지막이 문을 열었고, 밤에 가게문을 닫을 때면 만약의 경우를 위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허씨가 자동차에 올라 주차장을 떠날 때까지 전화기를 켜두었다. 허씨는 운전을 할 때면 누가 뒤에 좇아오지는 않나 백미러를 살피고, 가게주변에서 마주치는 흑인들을 의심의 눈으로 살피는 탐탁지 않은 버릇까지 생겼다. 가게의 매상은 바닥을 기었고 허씨의 정신은 어두운 땅 속, 아니 아예 깜깜한 바위 속을 헤매고 있었다. 소문이 났는지 이제는 매매광고를 보고 찾아오는 방문객은커녕 문의전화조차도 없었다.
어느 날인가 잠자리에서 허씨의 아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보, 우리 임대계약기간이 얼마나 남았지? 글쎄. 좀 남았지, 아마. 이미 같은 생각으로 계약서류를 살펴보았던 허씨는 차마 아직도 오 년이 남아 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우리 가게에 있는 기계며 장비들 다 내다 팔면 얼마나 나올까? 허씨는 아내의 뜻을 알아채고 가슴이 저려 돌아누워 버렸다. 이제 그만 다 포기하고 가게 문 닫자는 얘기였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안되면 되게 하라. 뜻 있는 곳에 길이...... 엄동설한에 까까중 머리들을 운동장에 세워놓고 떠들던 자신의 목소리가 기억의 마이크를 타고 카랑카랑 허씨의 귀에 메아리쳤다. 아내 옆에 누워서 허씨는 자신의 몸이 비 맞은 벌레처럼 자꾸만 조그맣게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작아지고 또 작아지다 내일 아침이면 한 점 개미가 되어 버르적거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긴 그러면...... 그러면 더 이상 가게 걱정을 안 해도 되리라는 생각에 허씨는 흐흐 웃다가, 바로 코앞에 화형장이 있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먹이를 나르던 개미를 생각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정씨네 일본식당은 화재 이후 한달 하고도 열흘이 지나서야 겨우 문을 열었다. 발길을 돌렸던 손님들이 허씨의 가게에도 하나 둘 돌아오고, 매상이 회복되기 시작하자 허씨는 다시 가격을 내려 신문광고를 내고 한편으로는 새로 부동산업자를 찾아 가게를 내놓았다. 허씨 부부가 가게를 살 때 치른 값이나 삼 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모저모로 손보고 개발한 노력과 정성을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가격이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찾아온 구매자들이 제시했던 터무니없는 가격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 없이 혼자 가게를 꾸려야 하는 지금 허씨는 가게 일에 흥미를 잃었을 뿐더러 전 같은 열성을 쏟을 수도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보다는 가게 일에 매여, 몸이 편치 않은 아내를 맘껏 돌봐주며 노후의 남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늘 마음이 아프고 초조했다.
자신의 가게에 매겨지는 개 값도 못되는 헐값에 불쑥불쑥 울화가 치밀고 그 울화를 삭이기를 여남은 번 거듭하며 가격을 내리고 또 내린 끝에 마침내 부동산업자를 통해 제안이 들어왔다. 벌써 12월이었다. 상대는 한국서 온 투자이민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정해진 기간 내에 무엇이 되었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일정액수 이상의 사업체를 매입해야하고, 대개의 투자이민들이 그렇듯이 임대계약을 넘겨받을 만한 재정능력은 충분하고도 넘친다고 했다.  
허씨는 가게를 내놓았던 봄부터 수없이 무너지고 또 무너졌던 기대의 계단을 소리 없이 다시 쌓기 시작했다. 또다시 실망할까 두려워 아내에게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부동산업자가 아무리 염려 말라 거듭 말해도 허씨는 자신의 가슴이 돋보기 밑의 개미 마냥 바작바작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가격이고 흥정이고 다 때려치우고 지금 당장이라도 열쇠 던져주고 아내에게로 훨훨 날아가고 싶은 걸 스스로 진정시키느라 허씨는 매일 혼자 기대의 계단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했다. 가끔은 타들어 가는 제 속을 들여다보며 일부러 느릿느릿, 탈대로 다아 타아시오오, 혼자 노래를 불러보기도 했다.
힘겹게 며칠을 기다리다 부동산업자에게 전화해보니 시간이 걸리는 건 상대방이 박씨네 중국식당까지 한꺼번에 사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씨네 화재사건 이후로 부쩍 말수가 적어졌던 박씨가 요즘 싱글벙글 웃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격흥정이 두어 차례 오가고 마침내 합의를 본 날, 정씨 부인이 아이를 데리고 허씨의 가게에 와서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요즘 좋은 일 있으신가봐요. 말쑥하게 양복 뽑아 입은 부동산업자가 서류 들고 드나드는 걸 보고 하는 말이겠지만, 벌써 일년도 전에 정씨네가 가게를 내놓았다는 걸 짐작하고 있는 허씨는 괜히 대답하기가 쑥스러웠다. 아니, 아직 뭐, 저...... 얼버무리며 정씨의 아이에게 아이스크림만 듬뿍듬뿍 퍼주고 말았다. 화재 이후 웨이트리스 둘을 내보내고 직접 나선 정씨 부인을 따라 방과후면 매일 식당으로 출퇴근하는 정씨네 늦둥이 막내였다. 그 아이가 쓰레기통이 있는 식당 뒤 주차장에서 혼자 자전거를 타거나 공을 차고, 그것도 지치면 시무룩한 얼굴로 파리를 잡고 있는 걸 허씨가 불러서 아이스크림을 퍼준 일이 몇 번 있었다.
다음 날 허씨는 부동산업자들과 함께 구매자들을 만났다. 에스크로(escrow)를 열기 전에 가게에 드나들며 두 주간 매상확인부터 하고 싶다는 요청을 허씨가 받아들인 때문이었다. 매상만 확인하면 당장 사겠다는 조건이 붙어있기도 했다.
삼십 대 딱 벌어진 체구의 부부가 일곱 살, 두 살 짜리 딸 둘에 여자의 친정엄마까지 모시고 나타났다. '투자이민이라고 얕보지 마시오'를 남자의 올록볼록한 근육과 두 모녀의 공처럼 통통한 뺨, 그 속에 묻힌 앙 다문 입술에 꽉꽉 새겨 넣은 인상이었다.
더러 이런 기간 동안에 친지들 풀어 매상 올리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사내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그랬다. 사내의 입술은 실없는 걱정이란 걸 안다는 듯이 웃고 있었지만 눈은 미리 못박아 두겠다고 날카롭게 벼르고 있었다. 아이, 괜한 걱정이십니다. 여기 허사장님은 한국서 교장선생님까지 하시던 분이라...... 불안해진 부동산업자 조씨가 서둘러 꺼낸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잘랐다. 허사장님 시절이야 안 그랬겠지만, 요즘 한국 학교라는 게 어디 촌지계지 교육계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긴 교사들도 교직 얻느라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며 돈 쓰고, 겨우 취직되고는 또 그 박봉에 상납까지 해야 하니. 우리가 이민 온 것도 다 아이들 교육 때문이라니 까요. 그런 같잖은 교사들에게 촌지 주느라 힘 빼느니, 그 돈 아껴서 영어교육, 예체능교육 실컷 하고......  마주앉은 테이블을 걷어차고 싶어 들썩거리는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고 있던 허씨는 사내의 불균형하게 커다란 얼굴을 가득 채우는 초조한 안간힘을 알아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치켜 뜬 여자의 시선이 허씨의 뺨에 날아와 박혔다. 내 남편이 총이면 나는 대포요, 하는 듯이 여자의 확대된 동공이 허씨를 쏘아보고 있었다.  
다행히 씀씀이가 많아지는 연말이었고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새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기에 허씨네 매상은 전성기에 버금갈 만큼 올라주었다. 어떻게든 이번에는 꼭 가게를 팔아야겠다고 마음먹은 허씨가 정성을 기울인 탓도 없지 않았다. 그간 아내의 몸도 많이 좋아져 허씨가 가게에 좀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매일 저녁 가게를 찾아와 금전등록기에서 매상보고서를 뽑아가던 이씨도 며칠이 지나자 매상에는 불만도 의혹도 없는 듯 했다. 닷새 째 되는 날에는 그 도깨비 방망이같이 삐죽삐죽 우락부락한 얼굴에 수줍은 미소까지 띄우고 허씨에게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허 선생님, 아이구 참 이거, 허 사장님이라고 불러야하는데. 하지만 저는 허 선생님이 오래 전에 쓰신 영어학습서를 보며 공부한 사람이라, 자꾸 사제지간 같이만 느껴지네요. 멀리 타국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이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자처럼 이끌어주시면...... 이씨의 돌변한 태도에 당황한 허씨는 낯을 붉히며 그냥 허허,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씀입니다, 허 선생님. 사내는 다시 번쩍 눈빛을 세우며 말을 이었다. 지난 번 월별 비용이라고 적어주신 게, 그게 좀...... 물론 분야별 총액인지는 압니다만, 그게 좀...... 못 믿겠다는 뜻을 표정으로 충분히 전달한 뒤, 이씨는 말을 이었다. 이만하면 매상은 괜찮지만 매상만 좋으면 뭐합니까. 비용이 많으면 말짱 헛수고지요. 그러니 항목별 청구서를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지난 이년 동안 세금보고 사본도 좀 보았으면 합니다만...... 이게 낯선 땅에서 저희가 처음 해보는 사업인 데다, 제가 워낙 회계사 출신이라 숫자에 좀 깐깐하거든요. 이씨는 â회계사ä라는 말을 할 때 그렇지 않아도 딱 벌어진 어깨를 출전하는 싸움닭처럼 한껏 펼쳐 보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 조금 수고스러우시더라도...... 내 오늘 다 찾아서 중간사람들에게 맡겨놓으리다. 요변하는 이씨의 태도를 견딜 수 없어진 허씨는 그렇게 말을 잘라 버렸다. 물론 이씨의 얼굴도 반쯤은 이미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씨가 요구했던 서류들을 부동산업자 조씨에게 맡겨놓고 대답을 기다리던 허씨는 이틀 후에 조씨에게서 엉뚱한 소식을 전해 받았다. 이씨가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안 사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보내준 서류라도 돌려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에 허씨는 이씨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운전 중이라 양해를 구하며 전화를 끊었던 이씨는 세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허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유를 묻는 허씨에게 이씨는 태연하게, 서류를 못 받아서, 역시 서류의 내용이 보여줄 만한 게 아닌가 보다 생각했다고 했다. 허씨가 서류는 이미 조씨에게 맡겼다고 하니, 아이쿠, 저희가 갑자기 여행할 일이 생겨서 급히 떠나오느라고 연락이 어긋났나 보네요. 허사장님이 정말 서류를 보내셨다면 제가 한 번 훑어보고 다시 연락 드리지요 했다. 속는 셈치고 한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듯 인심쓰는 말투였다. 그런데 말씀입니다, 허 선생님. 금세 은근하고 부드럽게, 달래는 듯한 태도로 돌변한 이씨가 말을 이었다. 급하신 줄은 알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희가 지금 여행 중이라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일주일 뒤에나 서류를 볼 수 있겠네요. 아직 남은 일주일치 매상확인도 마찬가지고요.
거꾸로 허씨를 통해 소식을 들은 부동산업자 조씨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바빠서 하루 늦게 서류를 보낸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두 주 동안 매상확인을 하겠다던 사람이 서류가 하루 늦었다고 돌아서 버리다니. 게다가 이제 와서 일 주일을 더 끌려고 하다니. 조씨는 자신의 실수를 아는 만큼 목청을 높여 이씨를 비난했다. 이씨의 거절을 전했던 이씨 측 부동산업자도 흥정을 깰 생각은 없었다며 안절부절 했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달팽이처럼 엉금엉금,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나마 그 사이 크리스마스가 끼어 매상이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재미에 허씨는 그 날들을 견딜 수가 있었다. 이 좋은 매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이씨 같은 사람이라면 누굴 시켜서라도 가게를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러길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감시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약속한 일주일이 지나고 하루가 더 지나서야 이씨가 서류를 받아갔다는 소식이 들렸고, 다시 이틀이 지나서야 업자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류를 살펴본 이씨가 역시 비용이 너무 많아 수입이 안 난다며 그만두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씨가 계산했다는 비용이나 수입은 허씨의 계산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업자들도 또 오해받을까 겁이 나는지 이씨와 허씨가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짓도록 종용했다. 어떻게 그런 계산이 나왔는지 궁금했던 허씨도 그 편이 나으리라 생각했다.
노트북 컴퓨터까지 들고 온 이씨 부부는 꼬박 세 시간 동안 허씨를 심문했다. 처음부터 이씨는 허씨가 보여준 서류 자체를 믿지 않고 비용을 부풀려 계산한 터였고, 숨길 생각이 없었던 허씨는 그저 아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었지만, 좌우에서 번갈아 찌르고 또 찔러보는 식의 취조는 허씨로 하여금 스스로 없는 죄라도 빨리 만들어 자백하고 싶은 심정이 되게 했다. 돋보기 밑의 개미 생각이 났다. 가는 다리와 더듬이를 바들바들 떨며 어디론가 가려고 기를 쓰던 모습이, 그 확대된 떨림이 자꾸만 허씨의 망막을 덮었다.    
어이쿠, 이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요? 마침내 노트북을 덮은 이씨가 도깨비 방망이 얼굴에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허 사장님, 오랜 시간 친절하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거 쑥스러워서 참, 제가 아이스크림 장사 경험이 없어서 말씀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도무지 감이 안 잡히네요.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더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매달 나오는 은행 스테이트먼트 말입니다. 그걸 좀 볼 수 있을까요. 지치고 기가 막혀 쳐다보는 허씨에게 이씨는 철철 미소를 흘리며 허리를 굽실대기까지 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초보자라 그렇다 생각하시고 그것까지만 보여주시면 제가 한결 안심이 되겠네요. 그럽시다. 이번에는 오해 없게 내 직접 팩스로 보내드리리다. 정말 그것만 확인하면 되는 거요? 허씨는 성가시다 못해 흥정이고 뭐고 다 패대기치고 싶은 기분을 애써 달래며 말했다. 그럼요, 그럼요. 그런데 말씀입니다, 허 선생님. 또 뭐요? 허씨는 이씨의 눈웃음에 저도 모르게 경계태세를 취하며 물었다. 이씨 부인이 배시시 미소를 흘리며 상기된 얼굴을 제 남편에게로 돌렸다. 저희가 낯선 땅에 와서 먹고 살아보겠다고 서툴게 나서는데 말씀입니다, 선생님께서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 말이지요. 아시다시피 드리기로 한 가격이 그게 장난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만한 돈이면 요즘 강남에......  하지만 가격은 이미 합의를 보고 시작한 일이지 않소? 허씨는 불쾌한 감정을 억지로 삼키느라 삑삑 쇠 긁는 목소리를 냈다. 아이, 그래도 아직 에스크로도 열지 않았는걸요, 뭘. 사실 열쇠를 건네 받을 때까지는...... 그 때까지는 언제라도 흥정을 깰 수 있다는 제 마누라의 은근한 위협을 허씨가 충분히 접수했으리라고 생각한 이씨는 얼른 표정을 풀고 다음 말을 계속했다. 저희 같은 초보자들이 장사를 시작하면 아무래도 처음에는 벌어들이기는커녕 가게에 갖다 바치는 비용이 더 많을 텐데, 그런 걸 좀 감안하셔서. 대체 원하는 게 얼마요? 이씨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제시한 가격에 허씨는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애당초 낮추고 또 낮추어 합의 본 가격에서 만 불을 더 깎아달라고 했다. 허 사장님 어차피 그 정도는 구전으로 업자들에게 뺏기실 거잖아요. 이씨 부인이 타자기를 두드리듯 또박또박한 말투로 끼어 들었다. 그 사람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지난번에도, 또 오늘도 일은 우리끼리 다 하고 있는데...... 구전이라도 깎고 보자는 얘기였다. 어쩌면 두 번씩이나 안 사겠다고 한 것도 그런 의도로 꾸민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생님은 평생 좋은 일 하시다가 은퇴하시고 지금도 이런 것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가 있어 보이시는데, 동포끼리 낯선 땅에서 돕는다 생각하시고...... 사나이와 사나이 사이의 화끈함으로...... 사제간에 한번 베푼다 생각하시고...... 이 사내는 대체 얼굴이 몇 개나 되는 걸까, 허씨가 생각할 즈음 이씨는 '그렇게만 해주시면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고 구십도 각도로 절을 했다. 이씨는 정말 다양한 기능이 장착된 스위스 아미 나이프 같았다. 큰 칼, 작은칼과 손톱깎이, 깡통따개, 병따개는 물론이고 어쩌면 소리내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침이나 바늘같이 미세한 총이 달려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 날도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었다. 약속한 서류를 아침에 팩스로 보내고, 전화로 이씨에게 조목조목 취조를 받으며 또 다른 서류들을 보내고 다시 취조 받기를 거듭하는 동안 짧은 겨울 해가 졌다. 온종일 시달린 허씨가 허탈한 기분으로 발갛게 지는 해를 바라볼 때쯤 이씨는 서류에서 트집 잡아내기를 포기했는지 다시 얼굴을 바꾸어 가격 얘기를 꺼냈다. 이씨는 동포애, 사나이, 사제지간, 은혜, 등등의 단어들을 사정없이 이곳저곳에 풀어 반복 구사한 뒤, 지칠 대로 지친 허씨로부터 오 천 불을 깎아주겠다는 항복선언을 듣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허씨는 종전의 평화나 패자의 비애에 비할 만한 어떤 느낌도 가질 틈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십분도 안되어 이번에는 이씨 부인이 총대를 메고 다시 나선 것이었다. 오 천 불 깎아주신 건 참 고마운데요, 저희가 원하는 가격은 그게 아니거든요. 허 사장님처럼 그렇게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예산이 안 맞으면 처음부터 그 가격에 서명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어머, 그렇다고 저희가 돈도 없는데 덤볐다고 생각하시면 서운하고요. 다만 중간에 낀 업자들이 일단 그렇게 서명을 해도 가격 흥정은 가능하다고 해서 한 거지요. 어쨌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별로 한 일도 없는 중간 사람들한테 아까운 구전을 주느니 그 돈을 처음 사업 시작하는 사람 돕는 셈치고 저희한테 달라는 거지요. 그런데, 도대체 그 분들에게 얼마나 주시는 거죠? 여자는 슬쩍 얼마나 깎을 수 있을지를 가늠해 보려는 태도였다. 그런 건 내가 말할 수 없고, 그 사람들 한 일에 불만이 있으면 직접 말하시오. 설사 그 사람들한테 사소한 실수가 있었더라도 나는 약속대로 받아서 약속대로 주는 게 옳다고 생각하오. 아이, 그건 허 사장님이 너무 신사라 그러시죠. 여자는 지치지 않고 중간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우는 아이처럼 징징대며 늘어놓았다. 글쎄, 직접 말씀하시라니 까요. 그렇지만 구전을 주는 것은 허 사장님이시니까 허 사장님이 말씀하시는 게 아무래도 부드럽잖아요. 나는 이제 와서 구전을 깎자는 말은 낯뜨거워서 못하겠소. 내가 아무런 하자도 없이, 이미 합의한 가격에서 그만큼을 깎아주었으면 됐지, 그런 말까지 하라면 너무 무리한 부탁이오. 이젠 내가 정한 가격에서 그만 마음을 정하는 게 좋겠소. 허씨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넌더리를 치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그깟 아이스크림 가게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되나 생각하니, 돋보기 속에 확대된 개미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무심한 햇빛과 누군가의 무책임한 파괴력이 초점을 맞추기 전에 제 안의 터질 듯한 자괴지심만으로도 충분히 폭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점심때가 지나서 허씨는 부동산업자 조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씨네와의 흥정이 깨졌다는 말을 하면서 조씨는 거듭거듭 미안하다는 말과 결코 허씨나 허씨의 가게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을 했다. 허씨가 이유를 캐묻자 한참 이리저리 피하며 뜸을 들이던 조씨는 조심스럽게 중국식당 박씨 때문이라고 했다. 박씨가 이씨네에게 구전 액수를 알려주고 중간사람들을 빼돌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나이도 지긋하고 사업 경험도 많은 사람이 그런 도리에 어긋난 일을 했다고 조씨는 박씨를 탓했지만, 정작 맥이 빠질 대로 빠진 허씨는 박씨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다. 이씨 부부의 집요한 공략에 굴복하고 만 박씨의 심정을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틀 후 바람이 몹시 부는 새벽에 허씨는 또 한번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가게가 불타고 있다고 했다. 쓰레기통에서 시작된 불이 그 앞에 세워둔 박씨의 자동차를 폭발시킨 다음, 삽시간에 박씨네 중국식당을 태우고 허씨네 아이스크림 가게를 거쳐 정씨네 일본식당도 이미 반 이상을 타들어 갔다고 했다.
전화를 끊은 허씨는 궁금해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조용히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아내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기도하듯 모아 얹고 허씨는 박씨의 노래를 소리 없이 느릿느릿 따라 불렀다. 탈대로 다아 타아시오오...... 노래의 물결을 타고 돛이 팽팽하게 부푼 요트가 불길 너머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타다 말지인...... 허씨는 개미들의 다음 생을 생각하며 가슴에 모은 손을 오래도록 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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