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사전-5
2006.10.11 06:08
5. 연지의 말
그래, 어제 아버지 만났어.
뭐라셔?
글쎄, 그냥...... 지금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아비 노릇 할 날이 곧 올 거라고......
응, 여전하시군.
그래도 참 곱게 늙으셨더라.
그 여자가 워낙 눈썰미가 있잖아. 게다가 남편이나 제 자식에 관한 한 지극정성이지. 먼지 한 톨 앉을세라, 끊임없이 호호 불고 닦고.
그렇구나...... 그런데 새엄마 공장에는 유난히 게으른 멕시칸들만 모인 거니?
왜? 흐흐, 언니 이젠 거기 가서 운동하려고?
아니, 공원들은 물론이고 감독해야 할 누구라더라, 응, 그 펠리페라는 매니저까지 새엄마 속을 썩인다고 아버지가 땅이 꺼지게 걱정을 하셔서.
글쎄, 속사정은 잘 몰라도 그 여자가 '안달래'를 입에 거품처럼 물고 사는 건 사실이야.
안, 달, 래?
응, 스페니쉬로 빨리 하란 말인가 봐. 내가 얼마 전에 우연히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를 읽었는데, 백년 전 사탕수수 농장에 팔려간 한국인들도 목화밭 흑인노예들처럼 채찍으로 철썩철썩 얻어맞으며 일했대. 모르지, 그 여자가 전생에 안달래 안달래 들으며 일한 노예 중의 하나였는지. 글쎄, 시장 가서도 새 배추 꺼내오라면서 안달래 안달래 하더라니까. 그 말이 나도 모르게 내 귀에 달라붙어서 내가 나 자신을 닦달했는지도 몰라. 안달래, 안달래, 안 줘, 안 줘, 그러며 눈가리개 씌운 경주용 말 마냥 앞만 보고 서둘러 시험보고, 서둘러 대학원서 쓰고, 서둘러, 서둘러......
그렇게 입으로는 전화통에 대고 실없는 말을 쏟아 넣으면서도 나는 어제 저녁부터 손에 쥐고 있는 신문을 놓지 못했다. IMF의 여파로 아직도 거리를 떠돌고 있다는 한국의 실업자들. 지난겨울에는 비닐로 몸을 감고 지하도에서 잠을 잤다는 두더지 같은 사람들. 그 사진 중에 내 눈에 들어온 한 남자의 얼굴이 언젠가 언니가 보내준 사진 속 그 남자의 옆모습과 꼭 닮았다는 말을, 아니 보는 순간의 직감이 바로 그였다는 말을 나는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엉뚱한 시간에 걸려와 말없이 끊어졌던, 디의 것이라고는 더 이상 믿어지지 않는, 몇 통의 전화에 대해서는 더욱 속수무책이었다.
근데 언니, 요즘 한국 소식은 좀 들어?
응, 식당에서 가끔.
식당에서?
응, 신문이 오잖아. TV로 아홉 시 뉴스도 보고.
아니, 그게 아니라...... 거긴 어느 신문이 오는데?
글쎄...... 어차피 난 읽을 틈도 별로 없는 걸, 뭘.
나는 그쯤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어차피 언니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칠 년 넘어 같이 살던 남자와 빚에 몰려 헤어질 때 그만한 시련을 생각 안 했을까. 아니, 거리에서 자는 일까지는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해도, 몇 달째 밀린 공장 직원들 월급마저도 전세방 빼고 가재도구까지 팔아 겨우 주었다는 그 남자가 혼자 어디 가서 배불리 먹으며 반짝반짝 윤기 나는 삶을 살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빈털터리로 기약 없이, 정처 없이, 바다 건너로 헤어져 버린 지금 서로를 향해 어떤 소식이나 원조를 주고받을 통로를 마련해 놓고 있다고도 믿기 어려웠다.
왜, 요즘 무슨 일이 있니?
아니, 그냥...... 온통 IMF며 실업자 얘기지 뭐.
그래......
언니는 말꼬리를 흐리며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더니, 불쑥 생각난 듯 물었다.
논문준비는 잘 되어가니?
논문준비라. 그걸 쓰겠다는 핑계로 방학에도 학교에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서 수없이 도서관을 들락거리고 수많은 자료카드를 만들고는 있지만 그걸로 뭘 할지는 나도 오리무중이었다. 그걸 어찌어찌 써서 제출을 하고 학위를 받는다 한들, 그것으로 무얼 할 건지도 막연하기만 했다.
글쎄, 그걸로 국을 끓여 먹을 수도 없고......
뭐라고? 그래도 아버진 침이 마르게 네 칭찬이시던데. 우리 딸이 박사가 된다고, 그래야 민지에게도 힘이 된다고.
모처럼의 전화였지만 또 한 통의 겉도는 통화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었듯이 언니도 내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아버지의 턱없는 자긍심이나 아전인수격의 기대를 굳이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나 목구멍을 넘지 못하고 내 살과 뼈 속에 동굴을 파고드는 말들. 그 속에 숨어 끊임없이 웅얼대는 말들.
그런데 내가 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신문에서 본 것 같은, 몇 번인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가 말없이 끊었던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며칠 전 불쑥 찾아왔던 디의 얘기? 일주일 후면 한국으로 떠난다는, 가면 오래 오래 돌아오지 않을 거라며 애써 피하던 그의 눈길이나 그 눈길을 잡지 못해 잠시 허둥대던 내 마음에 대해?
침묵은 잠시였는데도 디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묻지도 않는 말을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선교여행이라 일정이 빡빡해 혼자 떠난다고. 일단은 일행과 함께 전국을 돌 거지만, 자신은 서울에서 만도 할 일이 무궁무진하리라 생각한다고. 지하철과 달동네, 뒷골목에 가득한 부랑자, 극빈자, 그리고 요즘 늘어난 실업자며 노숙자...... 그리고 자신의 생모 역시 서울에 있으리라는 말은 돌아서기 직전에 대수롭지 않은 듯 슬쩍 내뱉었다.
칠월 한여름인데도 교정을 지나는 바람은 서늘했다. 껍질이 벗겨진 유칼립투스 나무들은 머리를 푸른 하늘에 담근 채 삐걱삐걱 몸을 흔들었고, 저만치 깊고 둥근 그늘을 드리운 버드나무는 잔 바람에도 으스스 비늘 같은 이파리들을 흔들며 몸을 뒤챘다. 나는 돌아서는 디의 손을 낚아채 그 속으로 달려가는 환상을 보았다. 그 깊은 물 속 같이 차분한 어둠 속에 그와 함께 나란히 누우면 내 안에 숨어 있는 말들이 헤엄쳐 나오지 않을까. 고운 지느러미를 살랑이며 뻣뻣한 내 목구멍과 혀와 얼굴과 허기진 몸을 어루만져 주지 않을까. 그러면 그와 함께 한번쯤 더 완벽한 동그라미의 환상으로 물결을 넘을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어느 날인가. 그것 역시 환상이었거나 꿈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한가한 오후 깜빡 빠진 졸음 속에 보았을지 모를. 그래서 눈꺼풀에 잠시 얹혔다가 사라졌을지 모를. 꿈이나 환상이라면 모를까,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실제로 보았다고 주장하기엔 그것은 너무 찬란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어쨌건 나는 검은흙을 헤치고 솟아오르는 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송이송이 꽃무더기가 늘어진 등나무 밑, 언니와 내가 쪼그려 앉았던 그 언저리였다. 나비는 여린 품속에 작은 해라도 품고 있었던 듯, 그 날갯짓을 따라 팔락이는 빛이 너무도 눈부셔 나는 눈이 멀 지경이었다. 차마 볼 수가 없어 눈을 감아 버렸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나는 그 나비의 모습을 눈꺼풀에 달고 살았다. 속눈썹 어딘가에 나비가 뿌린 빛방울이 걸려 있는 듯, 눈을 뜨면 한없이 눈이 부셨고, 눈을 감으면 나비가 팔락거렸다.
그래서 그 즈음의 나는 틈만 나면 잠을 자거나 땅을 파는 이상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땅을 깊게, 둥글게, 세모나 네모, 육각형, 또는 팔각형으로, 아무리 파보아도 비어 있는 땅 속에 언제부턴가 나는 내 손에 닿는 물건들을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나비 모양의 머리핀, 장난감, 깨진 구슬, 그리고 엄마가 장롱 속에 숨겨 두었던 죽은 석지의 딸랑이도 그렇게 땅에 묻었다. 묻고, 묻고, 또 묻고...... 날아오르는 것들을 위해, 아무리 기다려도 날아오르지 못하는 것들을 위해, 나는 묻고, 묻고, 또 묻기를 거듭했다. 오래 일어나지 못하던 엄마의 뭉턱뭉턱 빠진 머리칼도 묻었고, 할 수만 있다면 아마 나 자신도 꼭꼭 묻어 버렸을 것이다.
의자에 포개 앉아 푸드득 푸드득 두 손을 마주치고 비비며 수화를 주고받던 여학생과 남학생이 버드나무 밑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무슨 말을 묻으러 들어가는지, 출렁이는 나뭇가지를 타고 햇빛이 부서지고 땅속처럼 깊었을 그늘이 잠시 흔들린다. 문득 나도 부서지고 싶다. 흙처럼 물처럼 부서져 버리고만 싶다.
내일 모레면 디도 내 안 어딘가에 묻힐 것이다.
그래, 어제 아버지 만났어.
뭐라셔?
글쎄, 그냥...... 지금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아비 노릇 할 날이 곧 올 거라고......
응, 여전하시군.
그래도 참 곱게 늙으셨더라.
그 여자가 워낙 눈썰미가 있잖아. 게다가 남편이나 제 자식에 관한 한 지극정성이지. 먼지 한 톨 앉을세라, 끊임없이 호호 불고 닦고.
그렇구나...... 그런데 새엄마 공장에는 유난히 게으른 멕시칸들만 모인 거니?
왜? 흐흐, 언니 이젠 거기 가서 운동하려고?
아니, 공원들은 물론이고 감독해야 할 누구라더라, 응, 그 펠리페라는 매니저까지 새엄마 속을 썩인다고 아버지가 땅이 꺼지게 걱정을 하셔서.
글쎄, 속사정은 잘 몰라도 그 여자가 '안달래'를 입에 거품처럼 물고 사는 건 사실이야.
안, 달, 래?
응, 스페니쉬로 빨리 하란 말인가 봐. 내가 얼마 전에 우연히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를 읽었는데, 백년 전 사탕수수 농장에 팔려간 한국인들도 목화밭 흑인노예들처럼 채찍으로 철썩철썩 얻어맞으며 일했대. 모르지, 그 여자가 전생에 안달래 안달래 들으며 일한 노예 중의 하나였는지. 글쎄, 시장 가서도 새 배추 꺼내오라면서 안달래 안달래 하더라니까. 그 말이 나도 모르게 내 귀에 달라붙어서 내가 나 자신을 닦달했는지도 몰라. 안달래, 안달래, 안 줘, 안 줘, 그러며 눈가리개 씌운 경주용 말 마냥 앞만 보고 서둘러 시험보고, 서둘러 대학원서 쓰고, 서둘러, 서둘러......
그렇게 입으로는 전화통에 대고 실없는 말을 쏟아 넣으면서도 나는 어제 저녁부터 손에 쥐고 있는 신문을 놓지 못했다. IMF의 여파로 아직도 거리를 떠돌고 있다는 한국의 실업자들. 지난겨울에는 비닐로 몸을 감고 지하도에서 잠을 잤다는 두더지 같은 사람들. 그 사진 중에 내 눈에 들어온 한 남자의 얼굴이 언젠가 언니가 보내준 사진 속 그 남자의 옆모습과 꼭 닮았다는 말을, 아니 보는 순간의 직감이 바로 그였다는 말을 나는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엉뚱한 시간에 걸려와 말없이 끊어졌던, 디의 것이라고는 더 이상 믿어지지 않는, 몇 통의 전화에 대해서는 더욱 속수무책이었다.
근데 언니, 요즘 한국 소식은 좀 들어?
응, 식당에서 가끔.
식당에서?
응, 신문이 오잖아. TV로 아홉 시 뉴스도 보고.
아니, 그게 아니라...... 거긴 어느 신문이 오는데?
글쎄...... 어차피 난 읽을 틈도 별로 없는 걸, 뭘.
나는 그쯤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어차피 언니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칠 년 넘어 같이 살던 남자와 빚에 몰려 헤어질 때 그만한 시련을 생각 안 했을까. 아니, 거리에서 자는 일까지는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해도, 몇 달째 밀린 공장 직원들 월급마저도 전세방 빼고 가재도구까지 팔아 겨우 주었다는 그 남자가 혼자 어디 가서 배불리 먹으며 반짝반짝 윤기 나는 삶을 살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빈털터리로 기약 없이, 정처 없이, 바다 건너로 헤어져 버린 지금 서로를 향해 어떤 소식이나 원조를 주고받을 통로를 마련해 놓고 있다고도 믿기 어려웠다.
왜, 요즘 무슨 일이 있니?
아니, 그냥...... 온통 IMF며 실업자 얘기지 뭐.
그래......
언니는 말꼬리를 흐리며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더니, 불쑥 생각난 듯 물었다.
논문준비는 잘 되어가니?
논문준비라. 그걸 쓰겠다는 핑계로 방학에도 학교에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서 수없이 도서관을 들락거리고 수많은 자료카드를 만들고는 있지만 그걸로 뭘 할지는 나도 오리무중이었다. 그걸 어찌어찌 써서 제출을 하고 학위를 받는다 한들, 그것으로 무얼 할 건지도 막연하기만 했다.
글쎄, 그걸로 국을 끓여 먹을 수도 없고......
뭐라고? 그래도 아버진 침이 마르게 네 칭찬이시던데. 우리 딸이 박사가 된다고, 그래야 민지에게도 힘이 된다고.
모처럼의 전화였지만 또 한 통의 겉도는 통화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었듯이 언니도 내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아버지의 턱없는 자긍심이나 아전인수격의 기대를 굳이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나 목구멍을 넘지 못하고 내 살과 뼈 속에 동굴을 파고드는 말들. 그 속에 숨어 끊임없이 웅얼대는 말들.
그런데 내가 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신문에서 본 것 같은, 몇 번인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가 말없이 끊었던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며칠 전 불쑥 찾아왔던 디의 얘기? 일주일 후면 한국으로 떠난다는, 가면 오래 오래 돌아오지 않을 거라며 애써 피하던 그의 눈길이나 그 눈길을 잡지 못해 잠시 허둥대던 내 마음에 대해?
침묵은 잠시였는데도 디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묻지도 않는 말을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선교여행이라 일정이 빡빡해 혼자 떠난다고. 일단은 일행과 함께 전국을 돌 거지만, 자신은 서울에서 만도 할 일이 무궁무진하리라 생각한다고. 지하철과 달동네, 뒷골목에 가득한 부랑자, 극빈자, 그리고 요즘 늘어난 실업자며 노숙자...... 그리고 자신의 생모 역시 서울에 있으리라는 말은 돌아서기 직전에 대수롭지 않은 듯 슬쩍 내뱉었다.
칠월 한여름인데도 교정을 지나는 바람은 서늘했다. 껍질이 벗겨진 유칼립투스 나무들은 머리를 푸른 하늘에 담근 채 삐걱삐걱 몸을 흔들었고, 저만치 깊고 둥근 그늘을 드리운 버드나무는 잔 바람에도 으스스 비늘 같은 이파리들을 흔들며 몸을 뒤챘다. 나는 돌아서는 디의 손을 낚아채 그 속으로 달려가는 환상을 보았다. 그 깊은 물 속 같이 차분한 어둠 속에 그와 함께 나란히 누우면 내 안에 숨어 있는 말들이 헤엄쳐 나오지 않을까. 고운 지느러미를 살랑이며 뻣뻣한 내 목구멍과 혀와 얼굴과 허기진 몸을 어루만져 주지 않을까. 그러면 그와 함께 한번쯤 더 완벽한 동그라미의 환상으로 물결을 넘을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어느 날인가. 그것 역시 환상이었거나 꿈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한가한 오후 깜빡 빠진 졸음 속에 보았을지 모를. 그래서 눈꺼풀에 잠시 얹혔다가 사라졌을지 모를. 꿈이나 환상이라면 모를까,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실제로 보았다고 주장하기엔 그것은 너무 찬란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어쨌건 나는 검은흙을 헤치고 솟아오르는 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송이송이 꽃무더기가 늘어진 등나무 밑, 언니와 내가 쪼그려 앉았던 그 언저리였다. 나비는 여린 품속에 작은 해라도 품고 있었던 듯, 그 날갯짓을 따라 팔락이는 빛이 너무도 눈부셔 나는 눈이 멀 지경이었다. 차마 볼 수가 없어 눈을 감아 버렸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나는 그 나비의 모습을 눈꺼풀에 달고 살았다. 속눈썹 어딘가에 나비가 뿌린 빛방울이 걸려 있는 듯, 눈을 뜨면 한없이 눈이 부셨고, 눈을 감으면 나비가 팔락거렸다.
그래서 그 즈음의 나는 틈만 나면 잠을 자거나 땅을 파는 이상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땅을 깊게, 둥글게, 세모나 네모, 육각형, 또는 팔각형으로, 아무리 파보아도 비어 있는 땅 속에 언제부턴가 나는 내 손에 닿는 물건들을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나비 모양의 머리핀, 장난감, 깨진 구슬, 그리고 엄마가 장롱 속에 숨겨 두었던 죽은 석지의 딸랑이도 그렇게 땅에 묻었다. 묻고, 묻고, 또 묻고...... 날아오르는 것들을 위해, 아무리 기다려도 날아오르지 못하는 것들을 위해, 나는 묻고, 묻고, 또 묻기를 거듭했다. 오래 일어나지 못하던 엄마의 뭉턱뭉턱 빠진 머리칼도 묻었고, 할 수만 있다면 아마 나 자신도 꼭꼭 묻어 버렸을 것이다.
의자에 포개 앉아 푸드득 푸드득 두 손을 마주치고 비비며 수화를 주고받던 여학생과 남학생이 버드나무 밑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무슨 말을 묻으러 들어가는지, 출렁이는 나뭇가지를 타고 햇빛이 부서지고 땅속처럼 깊었을 그늘이 잠시 흔들린다. 문득 나도 부서지고 싶다. 흙처럼 물처럼 부서져 버리고만 싶다.
내일 모레면 디도 내 안 어딘가에 묻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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