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사전-4
2006.10.11 06:07
4. 수지의 말
우리 큰딸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 할 텐데, 하며 말끝을 흐리던 아버지와의 만남은 내가 미국에 온지 석 달이 다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그 동안 아버지는 지난 십 사오 년간의 세월을 보상하려는 듯 일주일이 멀다하고 전화를 걸어 성급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고, 그때마다 같은 말로 안타까워했다. 매번 아버지가 내게 남기는 안타까움에 밀려서 나는 지도를 샀고, 급기야는 없는 돈을 털어 행동반경이 빤한 나로서는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 털털거리는 중고차를 장만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사는 곳까지 160마일. 자동차로 세 시간 가까운 거리였으니 아버지로서는 아무리 좋은 차를 가지고 있어도 가정의 불화를 각오하지 않는 한 내게 달려올 생각은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럭저럭 영어학교의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운전에 조금 자신이 붙었다 싶어진 뒤에야 아버지와 나는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그 상봉의 시간을 사흘 앞둔 날부터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아버지의 걱정 어린 전화를 받아야 했다. 수지야, 정말 혼자 올 수 있겠냐? 차는 잘 점검해 두었냐? 아무래도 연지를 불러 같이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차라리 낙하산 타고 노르망디나 인천에 상륙하는 게 쉽지 않을까 싶어 한숨을 쉴라치면 아버지는 더 깊은 한숨으로 덧붙였다. 아빠가 가야하는 건데. 그 말을 들으면 얼굴이 후끈 붉 어졌다. 내가 어리광부리고 투정하는 귀엽고 사랑스런 딸의 역할을 저버린 것 같은 죄책감이 난데없이 불쑥 치솟는가 하면, 혹시 이 아버지가 이미 서른이 넘어버린 나를 다른 누구, 죽은 석지나 배다른 민지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의구심도 들었다.
언제까지 숨길 생각인지는 몰라도, 혹시나 새어머니의 귀에 들어갈까 봐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한국인도 피하고 싶었을 아버지가 정한 상봉장소는 아버지 집에서 30분 떨어진 백인촌의 어느 작은 식물원이었다. 아버지는 전에 민지를 데리고 두어 번 가보았을 뿐이라는 그곳을 나와의 상봉을 위해 여러 번 답사했음이 분명했다.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그곳까지 가는 길을 골목길 하나 하나까지 자세히 일러주고 거듭 확인했을 뿐 아니라, 주차장 입구에 들어서서 어느 쪽으로 꺾어 어디로 돌아가야 운전이 서툰 내가 접촉사고의 위험 없이 널찍한 장소를 찾아 쉽게 주차할 수 있는지도 알려주었다.
주차를 하고 입구에서 표를 산 다음 화장실과 휴게소가 있는 포플러나무 그늘을 지나 자카란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오른쪽 연못으로 가는 길 녘 넝쿨장미 아래 벤치가 하나 있느니라. 자, 카, 란다요? 응, 이맘때면 이곳에 보라색으로 눈이 아릿아릿하도록 아주 야단스럽게 꽃피는 나무가 있느니라. 아아, 언뜻 보면 어린 시절 연지와 함께 그 밑에서 흙장난하던 등나무 같은 나무들. 그 나무들이 무거운 기억처럼 뚝뚝 떨구던, 가까이 가면 지린내 같은 독한 냄새가 나던 꽃. 다가설 때마다 악취와 향기,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모멸감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그래서 악과 선의 접점에 대해 까무룩 생각에 잠기게 하던 꽃. 그 생각을 하느라고 넝쿨장미 아래 벤치에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느냐는, 입안에 장난스레 맴돌던 말은 삼켜버리고 말았다. 용의주도한 간첩이라면 으레 챙겼어야 할 일이지만 그렇게까지 아버지를 놀리기엔 아버지의 어조가 너무도 비장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서도 한 가지 의문은 내게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내가 이름표 없이, 또는 암호 없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이제는 민지의 아빠인 아버지는 혹시 아직도 자신을 '아삐야'라고 부르는 어린 딸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늙수그레한 동양인 아저씨들에게 차례로 다가가 암호를 말하듯 나지막이 '아삐야' 라고 말하는 나 자신을 그려보았다. 레인코트의 깃을 올리고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머리에는 머플러도 써야 하지 않을까.
첫 딸인 내가 말을 배우고도 꽤나 오랫동안 아버지는 내가 처음 당신을 향해 불렀다는 '아삐야'라는 말로 자신을 일컫기를 즐겨했었다. 내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 어림잡아 석지가 죽기 전까지,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우리 세 남매의 '아삐야'였고, 아침마다 대문간에 주루룩 모여선 엄마와 우리들 셋을 향해 '빠이빠이, 삐삐' 손을 흔들고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성대한 이별 없이는 출근길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삐야. 그와 내가 함께 살았던 칠 년 가까운 세월동안 나는 가끔 그 병아리 같은 말을 생각했었다. 눈 녹은 땅에 고개를 내미는 뾰족한 새싹, 코끝을 간질이는 젖비린내, 이른 봄볕에 비친 솜털......그런 것들. 연초록, 연분홍, 연노랑의, 세상의 속살 같은 것들.
공장지대 판자촌을 떠돌던 그와 나의 생활은 색조로 말하면 잿빛이나 검은 색에 가까웠다. 아니, 우리가 한창 나이의 젊은이였다는 사실과 그 일대 모든 젊은이들이 노상 입고 다니던 푸르뎅뎅한 유니폼을 감안하면, 글쎄, 청회색 정도나 될까.
내가 처음 봉제공장에 취직했을 때 함께 공부하며 야학에서 가르치던 동아리의 친구들은 내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앞장 선 혁명전사를 위해 축배를 들고, 술과 감동으로 터질 듯한 붉은 얼굴로 내 어깨를 울컥 부여안기도 했다. 나는 늘 그 어깨가 쑥스러웠다. 시리기도 하고 뻐근하기도 하고, 할 수만 있다면 솜이불처럼 큰 품을 찾아 꼭꼭 숨기고 싶었다. 동아리의 친구들은 물론, 공장에서 만나 함께 살게 된 그까지도 나의 취직을 위장취업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겐 변두리 무허가 피아노 학원에서 오지 않는 코흘리개들을 억지로 끌어다 만들어낸 소음에 뚱땅뚱땅 정수리를 두드려 맞는 일이나 봉제공장에서 온종일 미싱소리에 들 들 들 골머리를 박히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다니지도 않은 명문음대를 다니는 척 원장의 거짓말에 밀려다니며, 지긋지긋한 음치를 낳은 엄마들에게 사탕발림 아첨을 파는 게 내겐 더 고통스런 위장취업이었다. 이류대학 중퇴 학력을 찾아주는 과외학생이 많을 리 없었고, 그래서 남아도는 시간에 몸과 정신을 비틀고 앉아 있느니, 어차피 먹고 살 돈이 필요한 거라면 공장 쪽이 정직하고 마음 편해 보였다. 물론 그 시대 의식 있는 젊은이에게는 공장이 피아노레슨이나 몰래과외보다는 훨씬 더 어울리는 삶의 소재라는 계산도 없지 않았다.
그는 출감하는 나를 기다려 새벽부터 두부를 사들고 떨며 서 있었다. 나를 '큰집'에 보내고 박박 깎았다는 민둥머리가 동아리들의 털모자 사이로 겨울나무보다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면 내가 그를 따라갔을까. 말 한 마디 못하고 망설이는 그의 땀 배인 손에 손을 잡힌 채 온종일 갈 곳 없는 시내를 헤맸을까.
그는 곰팡내 나는 요 위에 나를 눕혀 놓고, 눅눅한 이불로 목덜미까지 꼭꼭 여며준 뒤 아침밥을 지으러 나갔다. 방문 바로 앞, 전날 밤 그에게 이끌려 들어올 때 언뜻 보았던 석유풍로에서 비릿한 석유냄새가 닫힌 문틈으로 스며들었고, 풍로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양은 냄비 두 개, 냄비 뚜껑 밑에 꽂혀 있던 한 쌍의 수저가 한동안 호들갑스레 달그락거렸다. 몇 번인가 신발을 끌고 골목으로 멀어졌다 돌아오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도 들렸다.
마침내 그가 받쳐들고 온 쟁반엔 반찬 그릇이 셋 있었다. 김치, 고추장, 마늘 장아찌. 냄비 하나는 김이 오르는 쌀밥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부를 납작납작 썰어 넣은 김치찌개. 어제도 두부 실컷 먹었는데...... 지겹더라도 많이 먹어. 전날 보았던 수저는 내 앞에 놓여 있었고, 그의 앞에는 자루가 부러진 녹 숟가락과 나무 젓가락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장에 가서 밥공기도 사고 수저도 한 쌍 더 사야겄네. 그가 냄비 속 밥 한 중간에 숟가락으로 금을 그어 가르며 말했다. 그 반쪽에만 고추장을 놓고, 그 반쪽에만 김치찌개 건더기를 올려놓으며 그가 멋쩍은 듯 덧붙였다. 여름이면 풋고추라도 찍어 먹을 텐데. 그 금이 그와 나를 가르는 선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면, 내가 숟갈질을 달리 할 수 있었을까. 그 골짝의 깊이를 가늠이라도 했다면, 억지로라도 뻘건 김치찌개를 흥건하게 부어넣고 그와 나의 밥을 썩썩 비벼먹을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랬다면...... 가슴 한 구석을 건드리는 연한 부리 같은 그 말, '아삐야' 라는 말이 그와 나의 품안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까.
아버지를 만나기로 한 날 나는 잠이 깨자마자 벌떡 일어나 커튼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 바람에 유리창에 상형문자처럼 붙어 있던 도마뱀이 깜짝 놀라 화단 속으로 달아났다. 넓게 펼쳐진 들판 저편으로 펑퍼짐한 산들이 물결치고 있었다. 제각기 다른 깊이의 물처럼 가지가지의 푸른빛으로 넘실거리고 있어, 내가 귀양 온 선비라면 무슨 별곡이나 어부가라도 한 자락 뽑아야 할 것 같았다. 석 달 전 연지와 함께 올 때 들판을 불태우던 양귀비꽃들은 간데 없고 새벽 햇살 앞에 조용히 엎드린 들판을 가로지르며 외길 하나가 굽이굽이 산을 돌아 사라지고 있었다.
저 길을 어떻게 왔던가. 나는 오늘의 임무를 서둘러 마치기 위해 주인집 게으른 개를 깨워 동네 산책에 나서면서도 흘끔흘끔 길이 사라진 산 쪽을 살폈다. 나무마다 기둥마다 똥오줌을 번갈아 싸며 코를 킁킁거리는 늙은 개가 아니라도, 나는 마주 보이는 산들처럼 길바닥에 펑퍼짐하게 주저앉고 싶은 유혹을 몇 번이나 거듭 물리쳐야 했다. 멋모르고 연지를 따라왔던 길, 지도에서 몇 번이나 확인했던 저 길, 몇 개의 인디언 부락을 지나 산길을 벗어나면 몇 번 몇 번 고속도로와 연결된다는 그 길. 그 길을 따라 세상으로, 내 밖으로 다시 나갈 수 있을까. 선 자리에서 한 발짝이라도 내딛으면 산채 만한 퍼런 물결이 내 앞을 가로막을 것만 같았다.
찌그러진 자동차 문을 수없이 열고 닫으며 집 앞을 서성이던 끝에 마침내 나는 각설이 타령으로 결정했다. 연지가 주고 간 몇 개 안 되는 오디오 카셋은 고장난 플레이어에 번갈아 집어넣어 보다가 머리 위로 던져 버렸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어허 조오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을쑤우......
혼자 장단을 맞추며 어깨를 흔들고 아프도록 철썩철썩 무릎을 치며, 성조기 펄럭이는 학교 앞을 지나고, 내가 주 7일 근무하는 식당 앞도 지났다. '냉면개시'라고 쓴 현수막 밑, 산()자처럼 생긴 키 큰 선인장들 꼭대기에 아침 햇살이 노랗게 걸려 무어라 흥얼대고 있었다. 텅 빈 식당 한복판에 혼자 앉아 빈 의자를 흘겨보며 콩나물을 다듬고 있을 아주머니......
어화아, 이 몸이 이래봬도오...... 구로공단의 공순이로......
무료와 두려움을 이기는 데는 역시 노래가 제일이다.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나는 기억 속에 엉킨 수많은 파업현장과 몇 개의 인디언 보호구역을 지났다. 마른 덤불 사이에 시든 풀꽃처럼 숨은 초라한 종족들의 이름 뿐, 색색의 깃털로 만든 요란스런 관을 흔들며 후다따따 신나게 춤을 추는 인디언은커녕 인적도 보이지 않았다. 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아, 저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자카란다 길을 어떻게 지났는지, 나무 사이로 보이는 넝쿨장미 아래 벤치에는 말쑥한 초로의 신사가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잠시나마 영화에 나오는 불행한 옛 애인처럼 돌아서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건 카탈로그 모델 같은 아버지의 차림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카키색 바지에 폴로 셔츠, 잔잔한 무늬의 양말과 조그만 가죽 술이 달린 캐주얼 구두, 그 구두와 색깔을 맞춘 벨트와 벤치에 벗어놓은 가죽잠바.
나는 나도 모르게 봉제공장에서 내가 만들었던 이런 저런 가죽잠바와 벨트를 떠올렸고, 거기 붙이던 상표들을 기억해 내려고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내가 '시다'로 일했던 그 공장을 그와 함께 인수하고 IMF로 파산한 게 1년도 안된 일인데, 그때까지 수도 없이, 어쩌면 꿈속에서도 박고 또 박았을 상표들인데, 기막히게도 머릿속을 뱅뱅 돌기만 할 뿐 또렷이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 얼굴 위에 떨어진 꽃 그림자가 바람결에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빨래하는 날이 아니면 매일 입고 다니는 솔기가 너덜너덜한 청바지에 밑창이 떨어질 듯 말 듯 납작한 운동화, 물 빠진 분홍 티셔츠, 질끈 뒤통수에 말꼬리처럼 동여맨 윤기 없는 머리카락. 아버지의 간절함을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는 차림이었으나......
팔도강산을 마다하고, 을쑤우, 돈 한푼에 팔려서, 조오타아!
나는 내 안에서 몸을 비트는 미안함과 망설임을 힘 삼아 불쑥 아버지를 부르고 말았다.
우리 큰딸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 할 텐데, 하며 말끝을 흐리던 아버지와의 만남은 내가 미국에 온지 석 달이 다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그 동안 아버지는 지난 십 사오 년간의 세월을 보상하려는 듯 일주일이 멀다하고 전화를 걸어 성급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고, 그때마다 같은 말로 안타까워했다. 매번 아버지가 내게 남기는 안타까움에 밀려서 나는 지도를 샀고, 급기야는 없는 돈을 털어 행동반경이 빤한 나로서는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 털털거리는 중고차를 장만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사는 곳까지 160마일. 자동차로 세 시간 가까운 거리였으니 아버지로서는 아무리 좋은 차를 가지고 있어도 가정의 불화를 각오하지 않는 한 내게 달려올 생각은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럭저럭 영어학교의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운전에 조금 자신이 붙었다 싶어진 뒤에야 아버지와 나는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그 상봉의 시간을 사흘 앞둔 날부터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아버지의 걱정 어린 전화를 받아야 했다. 수지야, 정말 혼자 올 수 있겠냐? 차는 잘 점검해 두었냐? 아무래도 연지를 불러 같이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차라리 낙하산 타고 노르망디나 인천에 상륙하는 게 쉽지 않을까 싶어 한숨을 쉴라치면 아버지는 더 깊은 한숨으로 덧붙였다. 아빠가 가야하는 건데. 그 말을 들으면 얼굴이 후끈 붉 어졌다. 내가 어리광부리고 투정하는 귀엽고 사랑스런 딸의 역할을 저버린 것 같은 죄책감이 난데없이 불쑥 치솟는가 하면, 혹시 이 아버지가 이미 서른이 넘어버린 나를 다른 누구, 죽은 석지나 배다른 민지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의구심도 들었다.
언제까지 숨길 생각인지는 몰라도, 혹시나 새어머니의 귀에 들어갈까 봐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한국인도 피하고 싶었을 아버지가 정한 상봉장소는 아버지 집에서 30분 떨어진 백인촌의 어느 작은 식물원이었다. 아버지는 전에 민지를 데리고 두어 번 가보았을 뿐이라는 그곳을 나와의 상봉을 위해 여러 번 답사했음이 분명했다.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그곳까지 가는 길을 골목길 하나 하나까지 자세히 일러주고 거듭 확인했을 뿐 아니라, 주차장 입구에 들어서서 어느 쪽으로 꺾어 어디로 돌아가야 운전이 서툰 내가 접촉사고의 위험 없이 널찍한 장소를 찾아 쉽게 주차할 수 있는지도 알려주었다.
주차를 하고 입구에서 표를 산 다음 화장실과 휴게소가 있는 포플러나무 그늘을 지나 자카란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오른쪽 연못으로 가는 길 녘 넝쿨장미 아래 벤치가 하나 있느니라. 자, 카, 란다요? 응, 이맘때면 이곳에 보라색으로 눈이 아릿아릿하도록 아주 야단스럽게 꽃피는 나무가 있느니라. 아아, 언뜻 보면 어린 시절 연지와 함께 그 밑에서 흙장난하던 등나무 같은 나무들. 그 나무들이 무거운 기억처럼 뚝뚝 떨구던, 가까이 가면 지린내 같은 독한 냄새가 나던 꽃. 다가설 때마다 악취와 향기,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모멸감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그래서 악과 선의 접점에 대해 까무룩 생각에 잠기게 하던 꽃. 그 생각을 하느라고 넝쿨장미 아래 벤치에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느냐는, 입안에 장난스레 맴돌던 말은 삼켜버리고 말았다. 용의주도한 간첩이라면 으레 챙겼어야 할 일이지만 그렇게까지 아버지를 놀리기엔 아버지의 어조가 너무도 비장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서도 한 가지 의문은 내게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내가 이름표 없이, 또는 암호 없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이제는 민지의 아빠인 아버지는 혹시 아직도 자신을 '아삐야'라고 부르는 어린 딸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늙수그레한 동양인 아저씨들에게 차례로 다가가 암호를 말하듯 나지막이 '아삐야' 라고 말하는 나 자신을 그려보았다. 레인코트의 깃을 올리고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머리에는 머플러도 써야 하지 않을까.
첫 딸인 내가 말을 배우고도 꽤나 오랫동안 아버지는 내가 처음 당신을 향해 불렀다는 '아삐야'라는 말로 자신을 일컫기를 즐겨했었다. 내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 어림잡아 석지가 죽기 전까지,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우리 세 남매의 '아삐야'였고, 아침마다 대문간에 주루룩 모여선 엄마와 우리들 셋을 향해 '빠이빠이, 삐삐' 손을 흔들고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성대한 이별 없이는 출근길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삐야. 그와 내가 함께 살았던 칠 년 가까운 세월동안 나는 가끔 그 병아리 같은 말을 생각했었다. 눈 녹은 땅에 고개를 내미는 뾰족한 새싹, 코끝을 간질이는 젖비린내, 이른 봄볕에 비친 솜털......그런 것들. 연초록, 연분홍, 연노랑의, 세상의 속살 같은 것들.
공장지대 판자촌을 떠돌던 그와 나의 생활은 색조로 말하면 잿빛이나 검은 색에 가까웠다. 아니, 우리가 한창 나이의 젊은이였다는 사실과 그 일대 모든 젊은이들이 노상 입고 다니던 푸르뎅뎅한 유니폼을 감안하면, 글쎄, 청회색 정도나 될까.
내가 처음 봉제공장에 취직했을 때 함께 공부하며 야학에서 가르치던 동아리의 친구들은 내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앞장 선 혁명전사를 위해 축배를 들고, 술과 감동으로 터질 듯한 붉은 얼굴로 내 어깨를 울컥 부여안기도 했다. 나는 늘 그 어깨가 쑥스러웠다. 시리기도 하고 뻐근하기도 하고, 할 수만 있다면 솜이불처럼 큰 품을 찾아 꼭꼭 숨기고 싶었다. 동아리의 친구들은 물론, 공장에서 만나 함께 살게 된 그까지도 나의 취직을 위장취업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겐 변두리 무허가 피아노 학원에서 오지 않는 코흘리개들을 억지로 끌어다 만들어낸 소음에 뚱땅뚱땅 정수리를 두드려 맞는 일이나 봉제공장에서 온종일 미싱소리에 들 들 들 골머리를 박히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다니지도 않은 명문음대를 다니는 척 원장의 거짓말에 밀려다니며, 지긋지긋한 음치를 낳은 엄마들에게 사탕발림 아첨을 파는 게 내겐 더 고통스런 위장취업이었다. 이류대학 중퇴 학력을 찾아주는 과외학생이 많을 리 없었고, 그래서 남아도는 시간에 몸과 정신을 비틀고 앉아 있느니, 어차피 먹고 살 돈이 필요한 거라면 공장 쪽이 정직하고 마음 편해 보였다. 물론 그 시대 의식 있는 젊은이에게는 공장이 피아노레슨이나 몰래과외보다는 훨씬 더 어울리는 삶의 소재라는 계산도 없지 않았다.
그는 출감하는 나를 기다려 새벽부터 두부를 사들고 떨며 서 있었다. 나를 '큰집'에 보내고 박박 깎았다는 민둥머리가 동아리들의 털모자 사이로 겨울나무보다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면 내가 그를 따라갔을까. 말 한 마디 못하고 망설이는 그의 땀 배인 손에 손을 잡힌 채 온종일 갈 곳 없는 시내를 헤맸을까.
그는 곰팡내 나는 요 위에 나를 눕혀 놓고, 눅눅한 이불로 목덜미까지 꼭꼭 여며준 뒤 아침밥을 지으러 나갔다. 방문 바로 앞, 전날 밤 그에게 이끌려 들어올 때 언뜻 보았던 석유풍로에서 비릿한 석유냄새가 닫힌 문틈으로 스며들었고, 풍로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양은 냄비 두 개, 냄비 뚜껑 밑에 꽂혀 있던 한 쌍의 수저가 한동안 호들갑스레 달그락거렸다. 몇 번인가 신발을 끌고 골목으로 멀어졌다 돌아오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도 들렸다.
마침내 그가 받쳐들고 온 쟁반엔 반찬 그릇이 셋 있었다. 김치, 고추장, 마늘 장아찌. 냄비 하나는 김이 오르는 쌀밥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부를 납작납작 썰어 넣은 김치찌개. 어제도 두부 실컷 먹었는데...... 지겹더라도 많이 먹어. 전날 보았던 수저는 내 앞에 놓여 있었고, 그의 앞에는 자루가 부러진 녹 숟가락과 나무 젓가락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장에 가서 밥공기도 사고 수저도 한 쌍 더 사야겄네. 그가 냄비 속 밥 한 중간에 숟가락으로 금을 그어 가르며 말했다. 그 반쪽에만 고추장을 놓고, 그 반쪽에만 김치찌개 건더기를 올려놓으며 그가 멋쩍은 듯 덧붙였다. 여름이면 풋고추라도 찍어 먹을 텐데. 그 금이 그와 나를 가르는 선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면, 내가 숟갈질을 달리 할 수 있었을까. 그 골짝의 깊이를 가늠이라도 했다면, 억지로라도 뻘건 김치찌개를 흥건하게 부어넣고 그와 나의 밥을 썩썩 비벼먹을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랬다면...... 가슴 한 구석을 건드리는 연한 부리 같은 그 말, '아삐야' 라는 말이 그와 나의 품안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까.
아버지를 만나기로 한 날 나는 잠이 깨자마자 벌떡 일어나 커튼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 바람에 유리창에 상형문자처럼 붙어 있던 도마뱀이 깜짝 놀라 화단 속으로 달아났다. 넓게 펼쳐진 들판 저편으로 펑퍼짐한 산들이 물결치고 있었다. 제각기 다른 깊이의 물처럼 가지가지의 푸른빛으로 넘실거리고 있어, 내가 귀양 온 선비라면 무슨 별곡이나 어부가라도 한 자락 뽑아야 할 것 같았다. 석 달 전 연지와 함께 올 때 들판을 불태우던 양귀비꽃들은 간데 없고 새벽 햇살 앞에 조용히 엎드린 들판을 가로지르며 외길 하나가 굽이굽이 산을 돌아 사라지고 있었다.
저 길을 어떻게 왔던가. 나는 오늘의 임무를 서둘러 마치기 위해 주인집 게으른 개를 깨워 동네 산책에 나서면서도 흘끔흘끔 길이 사라진 산 쪽을 살폈다. 나무마다 기둥마다 똥오줌을 번갈아 싸며 코를 킁킁거리는 늙은 개가 아니라도, 나는 마주 보이는 산들처럼 길바닥에 펑퍼짐하게 주저앉고 싶은 유혹을 몇 번이나 거듭 물리쳐야 했다. 멋모르고 연지를 따라왔던 길, 지도에서 몇 번이나 확인했던 저 길, 몇 개의 인디언 부락을 지나 산길을 벗어나면 몇 번 몇 번 고속도로와 연결된다는 그 길. 그 길을 따라 세상으로, 내 밖으로 다시 나갈 수 있을까. 선 자리에서 한 발짝이라도 내딛으면 산채 만한 퍼런 물결이 내 앞을 가로막을 것만 같았다.
찌그러진 자동차 문을 수없이 열고 닫으며 집 앞을 서성이던 끝에 마침내 나는 각설이 타령으로 결정했다. 연지가 주고 간 몇 개 안 되는 오디오 카셋은 고장난 플레이어에 번갈아 집어넣어 보다가 머리 위로 던져 버렸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어허 조오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을쑤우......
혼자 장단을 맞추며 어깨를 흔들고 아프도록 철썩철썩 무릎을 치며, 성조기 펄럭이는 학교 앞을 지나고, 내가 주 7일 근무하는 식당 앞도 지났다. '냉면개시'라고 쓴 현수막 밑, 산()자처럼 생긴 키 큰 선인장들 꼭대기에 아침 햇살이 노랗게 걸려 무어라 흥얼대고 있었다. 텅 빈 식당 한복판에 혼자 앉아 빈 의자를 흘겨보며 콩나물을 다듬고 있을 아주머니......
어화아, 이 몸이 이래봬도오...... 구로공단의 공순이로......
무료와 두려움을 이기는 데는 역시 노래가 제일이다.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나는 기억 속에 엉킨 수많은 파업현장과 몇 개의 인디언 보호구역을 지났다. 마른 덤불 사이에 시든 풀꽃처럼 숨은 초라한 종족들의 이름 뿐, 색색의 깃털로 만든 요란스런 관을 흔들며 후다따따 신나게 춤을 추는 인디언은커녕 인적도 보이지 않았다. 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아, 저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자카란다 길을 어떻게 지났는지, 나무 사이로 보이는 넝쿨장미 아래 벤치에는 말쑥한 초로의 신사가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잠시나마 영화에 나오는 불행한 옛 애인처럼 돌아서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건 카탈로그 모델 같은 아버지의 차림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카키색 바지에 폴로 셔츠, 잔잔한 무늬의 양말과 조그만 가죽 술이 달린 캐주얼 구두, 그 구두와 색깔을 맞춘 벨트와 벤치에 벗어놓은 가죽잠바.
나는 나도 모르게 봉제공장에서 내가 만들었던 이런 저런 가죽잠바와 벨트를 떠올렸고, 거기 붙이던 상표들을 기억해 내려고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내가 '시다'로 일했던 그 공장을 그와 함께 인수하고 IMF로 파산한 게 1년도 안된 일인데, 그때까지 수도 없이, 어쩌면 꿈속에서도 박고 또 박았을 상표들인데, 기막히게도 머릿속을 뱅뱅 돌기만 할 뿐 또렷이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 얼굴 위에 떨어진 꽃 그림자가 바람결에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빨래하는 날이 아니면 매일 입고 다니는 솔기가 너덜너덜한 청바지에 밑창이 떨어질 듯 말 듯 납작한 운동화, 물 빠진 분홍 티셔츠, 질끈 뒤통수에 말꼬리처럼 동여맨 윤기 없는 머리카락. 아버지의 간절함을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는 차림이었으나......
팔도강산을 마다하고, 을쑤우, 돈 한푼에 팔려서, 조오타아!
나는 내 안에서 몸을 비트는 미안함과 망설임을 힘 삼아 불쑥 아버지를 부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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