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사전-6

2006.10.11 06:08

김혜령 조회 수:896 추천:94

6. 수지의 말
나는 무심코 맨발로 테라스에 내딛던 왼쪽 발을 잡고 깡충깡충 뛰었다. 햇빛에 달궈진 벽돌 바닥이 불덩이였다. 이런 더위라면 굳이 양초 날개로 태양 가까이 가지 않아도 뼈까지 녹아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햇빛에 쫓겨 얼른 유리문을 닫았다. 누렇게 메말라 부서질 듯 위태로운 야산을 배경으로 굳게 잠긴 본채 쪽에서부터 자동물뿌리개들이 차례로 고개를 틀어 올려 허연 물줄기를 뿜어냈다. 덕분에, 주인부부는 알래스카로 유람을 떠났어도, 집안의 화초며 잔디들은 생경하리 만치 선명한 녹색을 과시했다.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시야에 도마뱀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낮은 벽돌담 위 두 개의 화분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갈까 생각하며 준비운동을 하는 듯 윗몸을 일으켰다 내렸다 팔굽혀펴기를 한다. 주르륵 고동색 물줄기 같은 게 흘러내린다 싶더니 녀석은 어느 새 담 밑에 앉아 있다. 떨어진 제라늄 꽃봉오리 하나를 앞에 두고 다시 팔굽혀펴기를 하더니 눈 깜짝하는 사이에 제 몸통 만한 꽃봉오리를 물고 꿀꺽 삼켜버린다. 눈 속에 꿈틀거리는 꽃봉오리의 새빨간 잔영을 남겨둔 채 도마뱀은 아주 짧은 물줄기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꼬리를 잡히면 끊고 달아난다는 도마뱀. 살기 위해 제 몸까지 아낌없이 자르는 도마뱀도 뒤를 돌아볼 때가 있을까. 날 잡으려던 게 무엇이었나. 나의 일부를 끊고 달아나리 만치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나. 잘라진 나는 어떻게 되었나.
미국에 온 뒤로 나는 한국소식을 피했다. 어쩌다가 펼쳐져 있는 신문이나 잡지를 보아도 그 속에서 무서운 글자들이 튀어나와 물기라도 할 것처럼 얼른 덮어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뇌리에 박힌 몇몇 글자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IMF, 파산, 실업자, 노숙자, 그런 말들이 머릿속에서 웅웅 벌떼같이 떠돌았다.

미국 행을 닷새 앞둔 날 그가 찾아왔다. 다락을 비워 내 잠자리를 마련해 준 옛 동아리의 친구가 사는 셋방이었다. 말끔히 이발을 하고 레인코트까지 입은 그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비장하게까지 보였다.
반년 전 헤어질 때 그의 모습이 어땠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낡은 잠바나 하나 걸치고 있었던가. 어디서 자는지 말도 없이 사흘씩, 열흘씩, 때로는 보름씩 외박이 잦아지던 때라 면도도 제대로 못한 얼굴이었던 것 같다. 외박이 점점 길어져 그가 돌아올 것인가, 여기가 그의 집이 맞나, 그가 돌아올 무엇이 여기 있나, 하고 빚쟁이들이 쓸고 간 빈방과 나 자신을 번갈아 바라볼 때쯤이면 새벽녘 찬 기운과 함께 발끝에 그의 손길이 느껴지곤 했다. 돌아왔구나. 그렇게 한쪽 발을 그의 손에 잡힌 채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만 가, 그냥, 끊고, 밟고 가도 돼. 그런 속삭임을 몇 번인가 꿈결에 들은 듯도 했다.
그를 따라 골목길을 걸었다. 함석지붕 사이로 빼꼼이 바라보이는 하늘에 분홍빛 노을이 스러지듯 번지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좁은 골목이었건만 어디서 날아왔는지 비에 젖은 벚꽃이 잠길 듯 잠길 듯 검은 웅덩이를 떠다니고 있었다.
웃지마. 돌아서 기다리는 그를 따라 발길을 멈춘 것이 '불새 여인숙' 이었던가. 그래도 이 근처에선 제일 깨끗한 집이야. 간판 꼭대기의 시뻘건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전등빛이 눈을 찔러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밤엔 굵은 빗줄기가 쉬지 않고 창문과 벽을 부술 듯 거세게 두드렸고, 천둥과 번개도 유난스레 잦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나 서로를 받아들이고 탐하는 우리의 동작도 전에 없이 빠르고 거침이 없었다. 부둥켜안았던 팔을 풀고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쓰러지듯 눕힐 때에야 빗소리가 추적추적 잦아들었다. 갈비뼈를 부수고 뛰쳐나올 듯 몸부림치던 가슴속의 천둥소리도 작게, 더 작게 움츠리고 어디론가 스며들고 있었다. 지하수처럼. 깊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없었다. 숙박료는 이미 계산되었다는 여인숙 종업원의 말 뿐, 그가 다녀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꺼진 간판 위의 불새가 허연 골절만으로 남아 동자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골목의 웅덩이는 사라졌고, 찢어진 나뭇잎과 꽃잎이 한데 엉켜 꺼먼 덩어리로 굴러다녔다.

임신의 경우 '+', 임신이 아닌 경우에는 '-' 표시가 시험기구의 창에 선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임신 1주일까지도 진단이 가능한, 적중률 99퍼센트의 편리한 이 시험기구는......
나는 세면대 옆에 놓인 시험기구를 흘끔거리다가 부엌으로 간다. 30초면 결과가 나온다지만, 바라보며 견디기엔 너무 긴 시간이다.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아침에 사다 놓은 음식재료들을 하나씩 냉장고에서 꺼내 늘어놓는다. 분명히 화장실 문도 닫았고 일부러 쿵쿵 소리내어 냉장고 문이며 서랍을 여닫건만,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의 소음 사이로도 시험지에 소변이 스며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좁은 붙박이 식탁은 금세 생선과 치즈와 소고기와 각종 야채들로 가득 찬다. 돈 아끼려면 배고플 때 장보지 말라던데...... 내가 아까 그렇게도 배가 고팠나?
여성용품이 진열된 칸은 슈퍼마켓의 3번 줄에 있었다. 늘 사는 우유와 식빵, 주스, 달걀, 야채들을 수레에 담고 3번 줄에 들어섰을 때 나는 미국에 온 이래 한번도 사본 일이 없는 생리대를 집었다. 그것도 상표와 모양과 개수와 크기와 두께를 일일이 비교 검토해 본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라면과 두부를 집었고, 매장의 한쪽 끝에 다다를 즈음 생리대는 이사 올 때 연지가 사다놓은 게 있다는 생각이 났다. 다시 3번 줄에 들어가서는 질 세척제를 집었다. 물론 용량과 가격과 사용법과 향까지 비교한 뒤였다. 이번에는 한번도 해먹은 일이 없는 이상스런 모양과 색깔의 이태리 국수들과 소오스, 각종 치즈들을 담고서 다시 3번 줄로 들어섰다. 가지가지 촉감과 두께와 개수의 콘돔상자들을 하나씩 들어보다가 돌아서 나와 연어와 소고기를 집었다. 아이스크림과 냉동 피자를 수레에 담고 꼬리 달린 왕새우도 한 봉지 집었다. 다시 반대편 끝에 이르러 물통에 담긴 꽃들을 송이송이 차례로 살펴보고 냉장고 속의 꽃바구니들까지 점검한 뒤에 해바라기와 붓꽃이 들어간 꽃다발을 실었다. 그리고 또 몇 바퀴를 돌았던가. 온갖 향료를 하나씩 맡아보고, 케이크와 빵과 쿠키들을 살펴보고...... 마침내 오전 내내 3번 줄을 오가며 사용방법을 읽고 외워버린 시험기구 중 하나를 집어들었을 때, 나는 갑작스런 현기증 때문에 잠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떠나오기 전의 나흘 동안에도 나는 그렇게 서울의 곳곳에 주저앉아야 했다. 지하도를 이 구멍 저 구멍 들고나다 문득 출입구에서 고개를 들면 저만치 육교 위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허겁지겁 사람들을 헤치고 육교 위에 올라서면 또 저만치 횡단보도의 신호등 앞에 그가 서 있었다. 웅덩이와 울퉁불퉁 깨진 보도블록을 넘어 횡단보도에 서면 표정 없는 수많은 얼굴들이 해일처럼 밀려와 나는 휘청거리며 신호등 기둥을 붙잡아야 했다. 그리고 눈을 뜨면 횡단보도 저편 어둑한 골목으로 들어서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얼었거나 냉장되었던 음식들이 녹으면서 흘린 수분으로 식탁 위에 고인 물기가 부엌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닫힌 화장실 문 저쪽에서 숨죽인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시험기구의 창에 이른 수분이 서서히 몸을 풀며 그 창을 통해 증발한다. '+', 또는 '-'. 상자에서 보았던 그 기호들도 그렇게 몸을 풀며 스러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가 사라지듯 보이지 않는 곳으로 스며들고 있는 건 아닐까.

살을 태우고 뼈까지도 녹일 듯 뜨겁던 여름 해가 동전만큼 작아져 산등성에 묻혀가고 있다. 분홍과 오렌지색으로 빛나던 하늘은 보라가 되었다가 잠시 산등성에 자줏빛 띠를 두른다.
나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간다. 한줌 엷은 빛이 남은 개수대 앞 창가에 시험기구를 놓고, 식탁을 치운다. 실내등을 켜고 식탁과 바닥에 흥건한 물기를 찬찬히 닦아낸다. 기도하듯 쪼그려 앉은 한 사람의 그림자가 잠시 그 위에 고인다.
쌀을 씻어 냄비에 밥을 앉히고, 또 하나의 냄비에는 김치찌개를 끓인다. 두부도 납작납작 썰어 넣는다. 김치찌개에 넣고 남은 김치와 고추장, 며칠 전 식당에서 얻어온 마늘장아찌도 냉장고에서 찾아 꺼내 놓는다. 밥과 김치찌개가 담긴 두 개의 냄비를 식탁에 올리고, 두 벌의 수저를 놓는다. 그 가운데 꽃을 꽂은 꽃병을 놓은 뒤 냅킨을 놓고 시험기구를 올려놓는다. 어느 세상에서 보내온 신호인지, 하얀 냅킨 위에 빨간 기호가 선명하다. '+'.
개수대 앞 10호 남짓한 작은 창에는 어느 새 어둠이 차 오르고 실같은 달이 떴다. 김이 오르는 김치찌개를 한 숟갈 듬뿍 떠서 밥 위에 얹는다. 웅크린 산등성 어디쯤에선지 노랫소리가 들린다. 어화아, 이 몸이 이래봬도오...... 그 어두운 세상을 끌어안으려는 듯 누군가 입도 크게, 팔도 한껏 크게 벌리고 펄럭펄럭 춤추듯 날아드는 것만 같다. 나는 두 개의 숟가락으로 두부와 김치와 벌건 국물을 썩썩 하얀 쌀밥에 비빈다.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를 따라, 산과 바다와 계곡을 지나, 지금, 바로 여기까지 온 물줄기...... 지금 내 안에 흐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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