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문학사/비젼통신

2012.10.21 09:53

김영교 조회 수:648 추천:9

CHAPTER _ 3 낭만주의 시기 1820~1860 : 수필가 및 시인

독일에서 시작되어 영국과 프랑스 등으로 빠르게 확산된 낭만주의 운동은, 윌리엄 워즈워스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서정가요집(Lyrical Ballads)》을 출간해 영국 시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지 약 20년 후인 1820년경에 미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의 신선하고 새로운 비전이 미국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전율시켰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미국의 낭만주의는 국가 확장의 시기와 맞물려 미국적 목소리의 발견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미국의 국가 정체성이 굳어지고 이상주의 및 낭만주의에 대한 열정이 증가함에 따라 미국 르네상스의 대작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낭만주의적 사고는 영감으로서의 예술, 자연의 정신과 미학, 유기적인 성장의 은유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낭만주의자들은 과학이 아닌 예술이 보편적인 진실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낭만주의자들은 개인과 사회에서 표현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국 낭만주의 시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라 부를 수 있는 랠프 월도 에머슨은 에세이 <시인(The Poet)>(1844)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진실에 의해 살아가고 표현의 필요성 때문에 일어선다. 우리는 사랑에서, 예술에서, 욕심에서, 정치에서, 노동에서, 게임에서 우리의 고통스러운 비밀을 표출하기 위해 애쓴다. 사람은 오직 절반만이 자신이며 나머지 절반은 표현이다.
  

자아의 개발이 주제가 되었고 자기 인식이 가장 우선하는 방법이 되었다. 낭만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아와 자연이 하나라면 자기 인식은 이기적인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우주로 향해 길을 여는 지식의 한 형태이다. 자아가 인류와 하나라면 개인은 사회의 불평들을 개혁하여 인간의 고통을 덜어줘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전 세대까지는 이기주의로 여겨졌던 ‘자아’의 개념이 새롭게 정의된 것이다. 자아실현(self-realization), 자기표현(self-ex-pression), 자기의지(self-reliance) 등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새로운 복합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독창적이며 주관적인 자아가 소중하게 여겨진 동시에 심리 영역 또한 중요하게 간주되었다. 뛰어난 예술적 효과와 기술이 한층 고양된 심리적 상태를 환기시키기 위해 개발되었다. 산꼭대기에서 본 풍경처럼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인한 효과인 ‘숭고(sublime)’는 경외감, 존경심, 광대함,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힘 등을 느끼게 해주었다.

낭만주의는 대부분의 미국 시인과 창조적인 수필가들에게 긍정적이며 또한 적절한 것이었다. 미국의 거대한 산, 사막, 열대성 기후는 숭고를 구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낭만주의 정신은 미국 민주주의에 적합한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낭만주의가 개인주의를 강조하고 일반인의 가치를 긍정하며, 상상력에 미학적렝구??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랠프 월도 에머슨, 헨리 데이비드 소로 등 뉴잉글랜드 초월주의자들은 낭만주의 운동의 새로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면에서 영감을 얻었다. 낭만주의가 뉴잉글랜드라는 기름진 토양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초월주의


초월주의 운동은 18세기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이면서 동시에 19세기의 보편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사고 경향이 표출된 것이다. 초월주의 운동은 세상과 신이 동일하다는 근본적인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각 개인의 영혼은 세계와 동일한 것, 즉 소小세계라고 여겨졌다. 자기의지 및 개인주의에 대한 학설은 개인의 영혼과 신이 동일한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 전개되었다.

 
초월주의는 보스턴에서 서쪽으로 32킬로미터 떨어진 뉴잉글랜드의 작은 마을 콩코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콩코드는 식민지 시대 당시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의 첫 번째 내륙 정착지였다. 숲으로 둘러싸인 콩코드는 평화로운 마을로, 서점이나 대학이 가까이 있어서 문화적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장소이면서,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보스턴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이기도 했다. 콩코드는 미국 독립 혁명의 첫 번째 전투가 발생한 곳으로 랠프 월도 에머슨의 시 <콩코드 찬가(Concord Hymn)>는 이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이 시는 미국 문학 중 가장 유명한 도입부 중의 하나로 시작된다.


시내 위로 휘어진 거친 다리 옆에
그들의 깃발이 사월 미풍에 날렸다.
한때 농부들이 여기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이 쏜 총소리는 온 세상에 울렸다.

콩코드는 시골에 위치한 첫 번째 예술가 식민지였으며, 미국의 물질주의에 대한 정신적레???대안을 제공해준 첫 번째 장소이기도 했다. 콩코드는 고상한 대화와 단순한 삶(에머슨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 둘 다 채소밭이 있었다)을 위한 장소였다. 소로와 1834년에 콩코드로 거주지를 옮긴 에머슨은 그 마을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들이며, 이 마을은 또한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 페미니즘 작가 마거릿 풀러, 소설가 루이자 메이 올커트의 아버지이자 교육자인 브론슨 올커트, 시인 윌리엄 엘러리 채닝 등을 불러들였다. 초월주의 모임은 1836년에 특별한 짜임새 없이 구성되었으며 에머슨, 소로, 풀러, 채닝, 브론슨 올커트, 오레스테스 브라운슨(목사), 시어도어 파커(노예 제도 폐지론자, 목사) 등 다수가 회원이었다.

초월주의자들은 계간지 《다이얼(The Dial)》을 간행했는데, 이 잡지는 4년 동안 지속되었고 처음에는 마거릿 풀러가, 이후에 에머슨이 편집을 담당했다. 그들은 문학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에도 참여했다. 많은 초월주의자들은 노예 제도 폐지론자들이었으며, 일부는 근처에 있던 브룩 농장[호손의 《블라이스데일 로맨스(The Blithedale Romance)》에 묘사된]과 프루트랜즈 등 실험적인 유토피아적 공동체에 참여했다.

많은 유럽 단체와는 달리 초월주의자들은 선언서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들은 개인적인 차이, 각자의 독특한 관점을 존중했다. 미국 초월주의 낭만주의자들은 급진적인 개인주의를 극단으로 몰고 갔다. 미국 작가들은 자신들을 사회와 관습 밖에 있는 외로운 탐험자라고 여겼다. 허먼 멜빌의 에이합 선장, 마크 트웨인의 헉 핀,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 같은 미국적 영웅들은 형이상학적으로 자아 발견을 추구하다가 위험에 직면하고, 때때로 파멸에 이르기까지 한다. 미국 낭만주의 작가들에게는 ‘기정 사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학적렌英맛?관습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작가들은 진정한 문학 형식, 내용, 목소리, 그 모든 것을 동시에 발견해야 한다는 엄청난 압력을 느꼈다. 미국 남북전쟁(1861~65) 이전 30년 동안 발표된 다수의 명작들을 살펴보면 당시 미국 작가들이 이러한 도전에 당당하게 맞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랠프 월도 에머슨(1803~1882)

당시 독보적인 존재였던 랠프 월도 에머슨은 선교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전복시키려 했다며 그를 비난했지만 에머슨은 “좋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교회를 떠나는 것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에머슨은 1838년에 자신의 모교인 하버드 신학대학교에서 한 연설 때문에 30년 동안 하버드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이 연설에서 에머슨은 “하느님이 죽은 것처럼” 행동하고, 교인들의 영혼을 옥죄며, 교리만을 강조한다고 교회를 비난했다.

에머슨의 철학은 자기 모순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성적인 체계가 직관과 융통성에 대한 자신의 낭만주의적 믿음과 어긋나기 때문에, 그가 논리적인 지적 체계 구축을 의식적으로 피했던 것은 사실이다. 에머슨은 <자기의지(Self-Reliance)>라는 수필에서 바보같이 일관성을 지키는 것은 마음이 편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미국적 개인주의의 발생을 요구하는 데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을 유지했다. 새로운 국가 비전의 필요성, 개인 경험의 이용, 우주적인 대령大靈의 개념, 보상 이론 등 그의 주요 사상 대부분은 그의 첫 번째 저술 《자연(Nature)》(1836)에 제시되어 있다. 수필 《자연》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 시대는 회고적이다. 우리 시대는 조상들의 무덤을 세운다. 우리 시대는 전기, 역사, 비평을 적는다. 앞선 세대들은 신과 자연을 대면했는데, 우리는 그들의 눈을 통해서 신과 자연을 본다. 왜 우리도 우주와의 본래 관계를 즐길 수 없는 것인가? 왜 우리는 전통, 우리에게 계시된 종교, 그들의 역사가 아닌 통찰력을 주는 시를 지닐 수 없는가? 왜 우리는 자연 속 계절에 안겨 과거의 마른 뼈 속을 더듬어야 하는가? 자연 속 생명의 강물이 우리 주위에, 우리를 관통해 흐르고 있고, 우리에게 힘을 주어 자연과 균형 잡힌 행동을 하도록 초대하고 있는데 말이다. 오늘도 태양은 다시 빛나고 있다. 들판에는 양모와 아마가 풍부하다. 새로운 땅과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사고가 있다. 우리 자신의 사역과 법, 예배를 요구하도록 하자.

 
에머슨은 16세기 프랑스 수필가 몽테뉴의 경구가 가득한 천재적인 글을 사랑했으며, 한번은 브론슨 올커트에게 자신도 몽테뉴의 책처럼 “재미, 시, 관심사, 신성함, 철학, 일화, 상소리가 가득한” 책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올커트의 추상적인 스타일이 “한 아이의 수저에 비친 빛이 반사되어 한 남자의 모자에 내려앉는 장면”을 빠뜨리고 있다고 불평했다.

에머슨은 영적인 비전과 실용적이고 경구가 가득한 표현으로 더욱 유쾌한 인물이 되었다. 한 콩코드 초월주의자는 에머슨의 말을 듣는 것은 “그네를 타고 하늘로 가는” 느낌이라고 비유했다. 그의 영적인 통찰력은 동양의 종교, 특히 힌두교, 유교, 이슬람 수피즘 등에 대한 서적들에서 얻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시 <브라흐마(Brahma)>는 인간의 제한적인 인식 외부에 존재하는 우주적인 질서를 주장하기 위해 힌두교 자료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피에 굶주린 살인자가 살인한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만일 살해당하는 자가 살해당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잘 모르는 것이다,
내가 존속하고,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는 그 오묘한 법을.
내게는 먼 또는 잊혀진 것이 가까운 것이고
그림자와 햇빛은 동일한 것이다.
사라진 신들이 내게 나타나고
내게는 수치심과 명성이 하나이다.

나를 등졌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잘못 생각한 것이며
내 위를 날아갈 때, 나는 날개다.
나는 의심자이자 의심이며,
나는 브라흐민이 노래하는 찬송가이다.

강한 신들도 내 거처를 동경하고
헛되이 일곱 성인들도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대, 온순한 선善 애호가여!
나를 찾고, 천국에 등을 돌려라.

1857년에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 1호에 실린 이 시는 힌두교 최고신이며 우주의 영원하고 무한한 영혼인 브라흐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혼돈을 야기했다. 에머슨은 독자들에게 “브라흐마 대신 여호아라고 말하라”고 충고했다.

영국 비평가 매튜 아놀드는 19세기 영어로 된 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워즈워스의 시와 에머슨의 수필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산문작가이며 시인인 에머슨은 월트 휘트먼, 에밀리 디킨슨, 에드윈 알링턴 로빈슨, 월리스 스티븐스, 하트 크레인, 로버트 프로스트 등 많은 시인들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존 듀이, 조지 산타야나, 프리드리히 니체, 윌리엄 제임스 등의 철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프랑스 인과 스코틀랜드 인의 후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콩코드에서 태어나 그곳을 영구 거주지로 정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에머슨처럼 하버드 대학을 다녔다. 그는 평생 동안 극도로 검소하게 지냈으며 아주 적은 돈으로도 독립성을 유지했다. 본질적으로 그는 자신의 삶 자체를 중요한 경력으로 만들었다. 불순응주의자였던 그는 항상 자신의 엄격한 원칙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는데, 이것이 그의 글 다수의 주제였다.

소로의 대작인 《월든, 혹은 숲속의 생활(Walden, or Life in the Woods)》(1854)은 소로가 에머슨이 소유하고 있던 월든 호숫가 땅에 직접 오두막을 짓고 1845년부터 1847년까지 그곳에서 보낸 2년 2개월 2일 동안의 생활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서 소로는 의식적으로 이 기간을 1년으로 줄였으며, 책을 계절 순으로 신중하게 구성했다. 이 책은 또한 단순한 세속적인 관심사(‘경제’라는 장에서 소로는 오두막을 짓는 데 든 경비를 묘사하고 있다)로 시작해 끝으로 가면 별에 대한 명상으로 진행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여행 서적을 좋아하고 또 몇 권을 저술한 바 있는 소로는 《월든》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때까지 미국 책들이 접근한 적이 없는 자기발견이라는 내적인 개척 분야를 파헤친 반反여행 서적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소로의 금욕적인 생활처럼 매우 소박한 이 작품은 좋은 삶이라는 고전적인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지침서나 다름없다. 자세하게 표현된 오두막 짓기 과정은 영혼을 실하게 채우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은유이다. 1852년 1월 30일 일기에서 소로는 한곳에 뿌리박고 사는 것을 선호하는 데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나는 내 마음이 완전히 흐트러질지 모르기 때문에 여행을 많이 하거나 명소에 가는 것이 두렵다.”

소로의 은둔과 집중의 방법은 아시아의 명상법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다. 소로는 에머슨과 휘트먼처럼 힌두교나 불교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긴 소유물은 아시아 고전 작품 장서로, 에머슨과 공유했던 것이다. 그의 스타일은 절충적으로 그리스 어나 라틴 어로 된 고전 작품들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투명하면서도 말장난으로 가득하며, 영국 후기 르네상스의 형이상학적 작가들의 것만큼 은유로 풍성하다.

《월든》에서 소로는 초월주의 이론을 직접 시험해볼 뿐만 아니라 19세기의 총체적인 미국 경험, 즉 변방 개척지에서의 생활을 재현하고 있다. 소로는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통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느꼈다. 다음은 1851년 어느 날의 그의 일기이다.

영국 문학은 초서, 스펜서, 셰익스피어, 밀턴을 포함하여 음유시인으로부터 호반시인湖畔詩人(Lake Poets)에 이르기까지 신선하고 야성적인 기질을 지니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나 로마를 반영하는, 근본적으로 길들여지고 문명화된 문학이다. 문학의 황야는 푸른 숲이고 야성적인 인간은 로빈 후드였다. 시인들 중에는 자연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자연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연의 역사는 우리에게 야성적인 인간이 아니라 야성적인 동물들이 언제 멸종되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미국이 필요했던 것이다.

《월든》은 열정적인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에게 영감을 주어 《이니스프리의 호도(The Lake Isle of Innisfree)》라는 작품을 쓰도록 했다. 또한 소로의 수필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은 부당한 법에 대해 합법적인 개인이 불복종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필요하다는 수동적 저항 이론을 담고 있으며, 이는 20세기에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 독립운동 및 마틴 루터 킹의 흑인 민권운동에 영감을 주었다.

생태학적인 관심, 혼자서 모든 것을 하는 독립성, 노예 폐지론에 대한 윤리적인 기여, 시민 불복종 및 평화적인 저항이라는 정치적 이론 등으로 인해 오늘날 소로는 초월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작가로 남아 있다. 그의 생각들은 아직도 신선하며, 그의 예리하고 시적인 스타일과 철저하게 관찰하는 습관은 지금 생각해도 현대적이다.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월트 휘트먼은 목수이면서 민중의 대변인으로, 혁신적인 작품들을 통해 미국의 민주주의 정신을 표현한 시인이다. 휘트먼은 대부분 독학으로 지식을 깨우쳤는데, 11살에 일하기 위해 학교를 떠나는 바람에, 미국 작가들에게 존경심을 갖고 영국 작가들을 모방하게 만드는 전통적인 교육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가 평생 수정하고 교정했던 시집 《풀잎(Leaves of Grass)》(1855)에는 미국인에 의해 쓰인 가장 독창적인 작품인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가 실려 있다. 비록 크게 성공은 못했지만, 이 대담한 시집에 대해 에머슨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보내준 열정적인 찬사는 시인으로서 휘트먼의 입지를 확인시켜주었다.

모든 피조물을 찬미하고 있는 사변적인 시집 《풀잎》은 에머슨의 글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재미있는 점은, 에머슨은 수필 <시인>에서 휘트먼같이 신념이 강하고 마음이 열려 있으며 우주적인 시인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풀잎》의 혁신적이고 각운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시 형식, 성性에 대한 묘사, 생동감 있는 민주주의적 감수성에 대한 공개적인 찬미, 시인의 자아는 시, 우주, 독자와 하나라는 식의 극단적으로 낭만주의적인 주장 등은 미국 시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풀잎》은 미국 대륙만큼 방대하며, 에너지로 충만하고 또 자연스럽다. 이 시집은 비록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수 세대에 걸쳐 미국 비평가들이 원했던 서사시였다. <나 자신의 노래> 내내 무언가가 불안한 음악처럼 꿈틀거리며 요동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를 묶었던 끈과 바닥짐은 이미 내게서 떠나갔다...
나는 산맥을 에워싸고 내 손바닥은 대륙을 덮는다.
나는 내 비전과 함께 걷고 있다.

이 시는 수많은 구체적인 풍경과 소리로 꿈틀거리고 있다. 휘트먼의 새들은 다른 시들에서 관습적으로 표현되는 ‘날개 달린 영혼’이 아니다. “노란 왕관을 쓴 왜가리는 밤에 늪지에 와서 작은 게를 먹는다”에서 보는 것처럼 구체적이다. 휘트먼은 자신이 보거나 상상한 모든 것에 자신을 투영한다. 그는 “장사와 모험을 하기 위해 모든 항구로 여행을 하고, 현대적인 군중과 함께 열의에 가득 차고 또 변덕스럽게 서둘러 움직이는” 대중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고통받는 인간이다. “아이들이 보는 가운데 마녀로 선고받아 마른장작에 태워진 늙은 어머니... 나는 사냥개에 쫓기는 노예, 그 개들이 물 때마다 몸을 움츠린다... 나는 구타당해 가슴뼈가 부러진 화부火夫.”

무엇보다도 휘트먼은 민주주의적인 미국의 신화를 창조했다. “지구상의 어떤 시기, 어떤 나라 중에서도 미국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시적 특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본질적으로 가장 위대한 시이다.” 이 글을 쓰면서 휘트먼은 미국이 시적으로 되기에는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 국가라는 일반적인 견해를 과감하게 뒤집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온 선구자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들로 북적대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땅 미국의 영원한 이미지를 창조했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D. H. 로렌스는 휘트먼을 ‘열린 길’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휘트먼의 위대함이 엿보이는 시들 중에는 <브룩클린 나루터를 건너며(Crossing Brooklyn Ferry)>, <끝없이 흔들리는 요람에서(Out of the Cradle Endlessly Rocking)>, 그리고 에이브러햄 링컨의 죽음에 대한 감동적인 만가인 <앞뜰에 라일락이 피었을 때(When Lilacs Last in the Dooryard Bloom?)> 등이 있다. 다른 유명한 작품으로는 긴 수필인 <민주주의 전망(Democratic Vistas)>(1871)이 있는데, 이 작품은 고삐 풀린 물질주의 시대인 19세기 말 ‘황금시대(Gilded Age)’에 쓴 것이다. 이 수필에서 휘트먼은 미국 저변에 깔린 영혼의 “마르고 평평한 사하라”를 감추고 있는 “강력한 여러 갈래의 부와 산업”에 대해 적절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또한 미국인들을 활기 있게 만들 새로운 종류의 문학을 요구했다.(“책이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서 많은 게 필요하지는 않지만 독자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휘트먼의 불멸에 대한 주된 주장은 <나 자신의 노래>에 담겨 있다. 그는 시의 한가운데에 낭만적인 자아를 위치시켰다.

나는 스스로를 찬미하며 노래 부른다.
내가 취하는 것은 당신도 취하리라.
왜냐하면 내게 속한 모든 원자는 당신에게도 속하기 때문에.

모든 창조물에 존재하는 통일성과 생명력을 선포한 휘트먼의 목소리는 현대 독자들까지도 전율시키고 있다. 그는 매우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휘트먼에 의해서 자전적인 시, 음유시인으로서의 미국적 범인凡人, 창작자로서의 독자, ‘실험적’ 혹은 유기적 형식의 발견 등의 개념이 탄생하게 되었다.


보스턴 브라민 시인들


귀족적이고 하버드 대학교 출신들인 보스턴 브라민(Boston Brahmins)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진정한 교양인 문학 중재자들을 양산했다. 그들은 뉴잉글랜드의 강력한 노동윤리와 교육에 대한 존경심에 이끌렸으며 동시에 부와 여유를 즐기는 생활을 했다.

보스턴 브라민들이 만약 청교도 시대에 살았다면 성직자가 되었을 것이지만 19세기에 살았기에 교수, 대개는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이가 들어서 때로 대사가 되거나 유럽 교육 기관으로부터 명예 학위를 받았다. 대부분은 유럽을 여행하거나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고, 영국럿뗌狗프랑스렝謙뻗?틔스페인 서적과 사상들에 익숙했다. 배경으로는 상류층이며 정서적으로는 민주주의자들이었던 브라민 시인들은 3천 곳의 문화 강좌 회관 대중 강연과 영향력 있는 보스턴의 두 잡지 《노스 아메리칸 리뷰》와 《애틀랜틱 먼슬리》의 지면을 통해 자신들의 격조 높고 유럽 중심적인 관점을 미국의 모든 분야에 적용했다.

브라민 시인들의 글은 미국과 유럽 전통을 결합했으며 공유하고 있는 대서양 연안의 경험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이들 학자 시인들은 미국 문학에 유럽적인 면을 소개함으로써 일반 대중을 교육시키고 고양시키려 노력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의 노력이 전체적으로 보수적이었다는 점이다. 유럽적인 것들과 형식들을 고집함으로써 그들은 뚜렷한 미국적 의식의 성장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보수적인 배경으로 인해 소로, 휘트먼(그들이 사교적으로 만나기를 거부했던), 에드거 앨런 포 등이 이룩한 문학에서의 과감한 혁신을 파악하지 못했다. 브라민 시인들은 ‘품위 있는 전통’을 세웠고, 이 전통에 대해 미국 리얼리즘 작가들은 3세대에 걸쳐 투쟁해야만 했다. 부분적으로 브라민 시인들의 온건한 태도 때문에 휘트먼, 멜빌, 소로, 포 등 뛰어난 천재 작가들이 미국에서 널리 인정받기까지는 1세기 정도가 걸리게 되었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

보스턴 브라민 시인들 중 가장 유명한 시인들은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올리버 웬델 홈스와 제임스 러셀 로웰이다. 하버드에서 현대 언어를 가르쳤던 롱펠로는 당시 가장 잘 알려진 미국 시인이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 전통을 섞은 모호하고 비역사적이며 전설과 같은 역사의식을 만들었다. 그는 유럽적인 각운을 사용하여 미국 토속 전설을 옮긴 장시 3편, <에반젤린(Evangeline)>(1847), <하이워어사의 노래(The Song of Hiawatha)>(1855), <마일즈 스탠디시의 구애(The Courtship of Miles Standish)>(1858)를 집필했다.

롱펠로는 또한 현대 언어에 대한 교과서들을 집필했으며, 워싱턴 어빙의 《스케치북》 형식을 이용하여 해외 전설을 소개하는 《해외로(Outre-Mer)》라는 제목의 여행기를 창작했다. 비록 관습적인 면과 감상적인 면, 그리고 쉽게 글을 쓴 점 때문에 롱펠로의 장시는 오점이 있지만, 쉽게 마음을 떠나지 않는 짧은 서정시 <뉴포트의 유대 인 묘지(The Jewish Cemetery at Newport)>(1854), <잃어버린 내 청춘(My Lost Youth)>(1855), <밀물과 썰물(The Tide Rises, The Tide Falls)>(1880) 등은 아직도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제임스 러셀 로웰(James Russell Lowell, 1819~1891)

정년퇴직한 롱펠로의 뒤를 이어 하버드 대학에서 현대 언어 교수로 강단에 선 제임스 러셀 로웰은 미국 문학에서 영국 비평가 매튜 아놀드 같은 존재이다. 그는 시인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시적인 능력을 상실하고 존경받는 비평가 및 교육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애틀랜틱 먼슬리》의 편집자와 《노스 아메리칸 리뷰》의 공동 편집자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비평가들을 위한 우화(A Fable for Critics)》(1848)는 미국 작가들에 대한 재미있고 적절한 평가서이다. 이 책에서 로웰은 “바나비 러지(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옮긴이)를 닮은 포가 자신의 까마귀를 들고 오고 있다. 그의 5분의 3은 천재적이며 나머지 5분의 2는 허튼소리에 불과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로웰은 부인의 영향을 받아 자유 개혁자, 노예 제도 폐지론자, 여성 참정권 및 미성년 노동 금지법에 대한 지지자가 되었다. 지방 사투리를 사용한 그의 시 《비글로 페이퍼, 첫 번째 시리즈(Biglow Papers, First Series)》(1847~48)에서는 개혁을 주장하는 영리하지만 교육 받지 못한 시골 시인 호시 비글로라는 허구의 인물을 창조했다. 로웰에 앞서 벤저민 프랭클린과 필립 프리노가 사회적 논평을 위한 대변자로 지적인 촌부村夫를 등장시킨 적이 있다. 로웰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글을 쓰면서, 1850년대에 꽃피어 마크 트웨인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된 새로운 리얼리즘 및 지역주의와 식민지 시대적인 인물 창조 전통을 결합하였다.

올리버 웬델 홈스(Oliver Wendell Holmes, 1809~1894)

유명한 내과의사이자 하버드 대학의 해부학 및 생리학 교수였던 올리버 웬델 홈스는 여러 방면에 대한 다작 활동으로 유명한 브라민 3인방 중 가장 범주에 넣기 힘든 작가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아침식사 테이블의 독재자》(1858)를 비롯, 유머 가득한 수필들로부터 시작하여 《엘지 베너(Elsie Venner)》(1861) 외 소설들,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1885)을 비롯한 전기들, 그리고 명쾌한 시 <집사의 명작(The Deacon? Masterpiece, or, The Wonderful One-Hoss Shay)>, 철학적인 시 <들어앉은 앵무조개(The Chambered Nautilus)>, 혹은 열렬한 애국시 <늙은 철기병(Old Ironsides)> 등의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총망라하고 있다.

홈스는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하버드 대학의 본고장인 보스턴 외곽 케임브리지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시인 앤 브래드스트리트의 후손이다. 홈스는 당시 그리고 이후에도 위트와 지성, 매력의 상징이었으며 사회, 언어로부터 의학, 인간 본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해석하는 모범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201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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