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두와 결말

수필의 서두는 그 해당 작품의 첫 인상이 되므로 작품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긴요하다. 글의 출발점은 그 작품의 운명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분위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수필의 서두는 글의 전체적인 흐름을 예시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두는 간결하면서도 상징적인 표현이거나 단순하면서도 어떤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여운을 드리움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관심을 갖고 읽도록 하는 흡인력을 지니기도 한다.
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을 하면 절반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문장의 바른 길은 발단의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만큼 서두는 중요하다는 얘기다.
수필은 청자(靑磁)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는 것이다.
피천득(皮千得)의 <수필> 중 앞부분

독자들은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의 마지막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소녀와 사랑에 빠졌던 로버트 죠던은 적진의 철교를 폭파한 후 허벅지에 총상을 입게 되고, 그녀를 떠나보낸 후 기습해 오는 적과 대치하다가 최후를 맞게 되는데, 그가 그녀에게 마지막 남긴 말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가야 해. 하지만 나는 당신 곁을 떠나는 건 아냐. 두 사람 중 하나가 있는 한 우리는 함께 거기 있는 거야.󰡓 하던 그 말 한 마디를.

수필에 있어서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감동적인 말을 여운으로 남기는 것은 좋지만, 설교조나 교훈조로 설득하려 든다거나 강요하거나 지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결말은 글을 마무리하는 부분이므로 매듭을 잘 지어야 한다. 결말에서 매듭을 제대로 짓지 못하고 허술하게 처리하게 되면 실패작으로 쳐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필의 결말에는 작자 나름대로의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수필이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인생 탐구의 문학이라면, 결말은 그 인생 탐구의 귀결점이라 할 수 있다. 평범 속에서의 비범함이 재기 넘치게 반짝이는 결말을 보여주는 글이라면 좋은 매듭이 될 것이다.

전쟁 미망인, 납치 미망인들의 윤리를 운위하는 이들의 그 표준하는 도의의 내용은 언제나 청교도의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채찍과 냉소를 예비하기 전에 그들의 굶주림, 그들의 쓰라림과 눈물을 먼저 계량할 저울대가 있어야 될 말이다. 신산(辛酸)과 고난을 무릅쓰고 올바른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이들의 그 절조와 용기는 백번 고개 숙여 절할 만하다. 그렇다 하기로니 그 공식, 그 도의(道義) 하나만이 유일무이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

어느 거리에서 친구의 부인 한 분을 만났다. 그 부군은 사변의 희생자로 납치된 채 상금 생사를 모른다. 거리에서 만난 그 부인 ? 만삭까지는 아니라도 남의 눈에 띌 정도로 배가 부른 ? 그이와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선생님도 저를 경멸하시지요. 못된 년이라고……󰡓 하고 고개를 숙이는 그 부인 앞에서 내가 한 이야기가 바로 이 바둑판의 예화(例話)이다.
과실(過失)은 예찬할 것이 아니요, 장려할 노릇도 못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실이 인생의 올 마이너스일 까닭도 없다.
과실로 해서 더 커지고 깊어 가는 인격이 있다. 과실로 해서 더 정화(淨化)되고 굳세어지는 사랑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느 과실에서 적용된다는 것은 아니다.
제 과실의 상처를 제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가야󰡑반(盤)의 탄력 ? 그 탄력만이 과실을 효용한다. 인생이 바둑판만도 못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
김소운(金素雲)의 <특급품(特級品)> 중 끝부분

이 글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갖게 하는, 즉 인생의 카운셀러가 되어 줄 수 있는 삶의 지혜와 교훈이 담긴 글이다.
과실은 장려할 것이 못되지만, 인생의 올 마이너스일 까닭도 없다고 하는 지론이 바로 그것이다.

2. 서두는 어떻게 시작 하는가?

서두는 글의 첫머리로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서두는 독자의 흥미를 갖게 하되 앞으로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암시하도록 써야 하며, 글의 내용과 목적도 논리적인 글인 경우에는 밝혀도 좋다.
바람직한 서두의 시작은
① 진솔한 자기 고백적인 기술로써 글 읽는 이의 관심을 끌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② 대개 일반적인 글에서 많이 쓰는 방법인데 기상의 변화나 장소의 환기 등으로 사실을 직접 진수하여 글 읽는 이에게 다가가는 것도 바람직하다.
③ 의문형의 적절한 지시 내지는 열거로 글 읽는 이의 주의를 환기하는 방법도 있다.
④ 중국의 문장가 호적은 '전적을 이용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지만, 짧고 새로운 문구나 사항을 인용하여 참신한 느낌을 주게 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바람직하지 못한 서두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① 쓰려고 하는 글에 대한 장황한 배경 설명이나 불평은 옳은 글의 시작이라 할 수 없다.
② 글의 첫머리에 개인적인 변명을 중언부언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③ 새롭지 않은 진부한 내용이나 사상 등을 제시하는 것도 독자의 흥미를 반감시 키는 서두이다
④ 사전적 정의를 인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⑤ 끝마무리가 예상되는 서두도 좋은 글의 시작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좋은 글이 되기 위한 서두의 시작은 자연스럽고 참신하며, 독자의 흥미를 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몬로의 5단계 구성법(motivated sequence)은 ①주의 환기 ②과제 제기 ③과제 해명 ④해명의 구체화 ⑤결언, 행동화의 촉구로 글의 서두는 주의 환기이다.
서두에서 꼭 한가지 충고하고 싶은 점이 있다. 본론과 밀접하지 않는 부분을 도입부에 넣어서 독자들을 지루하게 하지 말라는 점이다.
요즘 명사(名士)들의 '수필'중에 흔히 그런 것이 많다. 수필을 마치 어떤 '교훈'이나 '훈화'처럼, 또는 선외(選外) 논설처럼 여겨 이건 틀렸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글들이 많은데 그나마도 핵심은 간단한데 도입부가 너무 지루해서 더욱 안타깝다. 이런 글들이 저지르고 있는 도입부의 오류는 대략 이런 것들이 있다.

① 공개되지 않아도 될 사생활의 지나친 공개...... 남의 사생활에 독자들은 관심이 없다. 적어도 자기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위치가 아니면 지나친 사생활을 공개하지 말 일이다. 불량품을 근절하자는 내용을 쓰기 위해서는 가장 악질적인 불량품의 예를 드는 것으로 서두를 장식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 뭐 딸(혹은 아들)과 언제 어느 시장에 가서 구경한 이야기부터 집안 식구들의 인물 묘사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문장 작법에서는 공사(公私)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
② 극히 상식적인 것을 혼자 아는 척하고 서두를 늘어놓지 말 것...... 남이 모르거나 느끼지 못한 사실로 첫 구절을 공격해야지 진부한 것으로는 안된다. 이것 역시 소위 네임 벨류가 있다는 분들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류의 하나다. 글에서 서두는 일종의 기습이요, 게릴라며, 협공이여야 성공적인 것이지 선전 포고를 한 후에 동원령을 내리는 식의 문장은 실패다.
③ 가능하면 도입부를 짧게 할 것...... 서론을 짧게 하라는 이야기는 현대인의 상식이다.
다 바쁜 사람들이니 요점으로 바로 들어가야 한다. 알베레스는 현대 소설의 특징으로 바로 이 긴장감을 들었다. 즉, 모파상의 <귀환>과 말로의 <인간조건>을 그는 비교했다. 모파상은 주인공을 등장시키기 위하여 바다의 묘사부터 마을, 골목, 집으로 시선을 옮겨간다.
그러나 말로는 첫 구절에서 <첸은 모기장을 들춰 올릴까? 그냥 모기장 너머로 갈겨 버릴까?>로 시작한다.
어느 글이나 현대인에겐 긴장과 요절을 처음부터 줄 수 있어야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헌영의 <처음과 끝을 하나의 線으로 연결하는 작업>에서

위의 인용문처럼 수필의 시작은 중요하며 또한 결코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시작이다. 가옥의 대문처럼 수필 전체의 구조와 어울리는 시작이여야 한다.

3. 어떤 서두가 바람직할까?

① 색다른 의견 제시나 사람의 흥미를 끄는 서두
보통사람이 생각해 내지 못하는 의견이나 남다른 생각 또는 충격적인 어구 로 시작하는 방법인데 이는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신선감이 있다.

사람은 행복한 맛에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맛에 산다. 추구 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극히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또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다. 사람은 그래서 다 같이 살아 왔다.

윤오영의 수필 「生活의 情」의 첫머리다.
슬픔과 기쁨으로 얼룩진 무늬를 짜며 살아가는 인생살이의 감정을 고백한 글이다. 눈물과 웃음의 아롱진 무늬, 이것이 인생의 문제이며 바로 생활의 정이라고 작가가 말했듯이 서두에 서 이 글의 전체를 암시하고 있다.

② 유명한 말이나 속담, 격언, 일화, 명언 등을 인용하는 서두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인용한 어귀의 해설이나 설명에 그치고 말 위험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인용에 주의를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쇼펜하워는「위대한 사람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육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이요, 하 나는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했다. 육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앞에서 커 보이나 멀어질수록 작아 보이고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은멀어질수록 커 보이지만 내 앞에 오면 결점도 있고 실책도 있는 나와 같은 범인이다. 이것이 실로 위대한 사람이다.

魯迅의 수필의 첫머리다. 쇼펜하워의 말을 인용했으면서도 그말의 원뜻과 는 상관 없이 전부 노신의 말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인용의 묘체요 묘리다.
그런데 만약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쇼펜하워는 「위대한 사람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육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이요, 하나는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있다. 육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지만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자기를 숨긴다. 육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정신은 썩었지만 위대한 사람은 육체는 졸렬해 보이지만 정신속에는 무한한 만석이 가득 차 있다.

이렇게 장장 수십 장의 글을 썼다면 이는 이미 소펜하워의 말이요 글 쓴 작가의 말은 아니다. 이런 글을 쓰려면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고인의 말이나 고사로 지면을 채우는 일은 특히 삼가할 일이다.

③ 사실과 사건, 생각 등을 거두절미하고 쑥 끄집어내어 쓰는 서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때때로 일어난 사건 및 생각 따위는 사람의 주위를 끌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만일 사건이나 사실이 유머러스하거나 신기하면 서두의 효과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자식은 돈은 벌러 외지에 가서 백골로 돌아오고, 딸은 돈벌이로 호텔에서 웃으 며 나온다. 죽은 자식은 잊으면 그만이다. 외국 손님 품에서 시달리는 딸년은 약간 애처롭지만 아침에 웃고 들어오는 얼굴은 역시 해사하다. 그러나 기쁜 것은 돈이다.
윤오영의 수필 「왜 울었던고」의 서두다. 현실을 떠나서 생활이 없고 생활을 떠나서 생활이 없고 생활을 떠나서 수필이 있을 수 없다고 볼 때 수필은 바로 생활문학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눈물이 없을 수 없고 왜 우느냐고 자신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자신도 모를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④ 장소나 시간 분위기, 자연, 환경, 인물묘사 등으로 시작하는 서두
본문과 관련이 있는 재미있는 재료를 가지고 서두를 장식하는 것이다.
한동안 뜸하던 꾀꼬리소리를 들고 장마에 밀린 빨래를 하던 날 아침에 참외장수가 왔다. 노인은 이고 온 광주리를 내려 놓으면서 단 참외를 사달라고 한다. (法頂<神市>)

⑤ 가정적 설문, 문제점 제시, 호소적인 것, 대화나, 독백, 古典의 출전을 밝히는 것, 强調하고 싶은 것 등을 제시하는 서두 이것은 쓰기 쉬운 방법이나 참신하고 산뜻한 맛이 나지 않는 게 흠이다.
수필의 서두는 일정한 제약이 없다. 그러나 서두는 장황한 것보다는 간명하게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정서적인 문장이 훨씬 참신하고 신선하다. 무미건조한 서두는 우선 처음부터 독자를 잡치게 만든다. 한마디로 느낀 대로 솔직하게 쓰면 된다.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만들려면 글이 서두에서부터 시든다.
한편의 수필은 서두가 무리하지 않게 자연스럽고 순로조우면 가장 무난한 서두가 아닌가 하다.

4. 수필의 서두의 또 다른 학설

시작이 반이란 말이 있다. 수필처럼 원고지 15매 내외의 지면에 승부를 걸어야 할 때 시작의 비중은 그만큼 커진다. 첫인상이 일생을 좌우한다고도 한다. 수필처럼 주로 생활의 실감에서 소재를 선택해야 되고 평범 가운데 비범을 발견해야 하는 글일 때 서두는 개성이 있고 신선감이 있어야 한다.
수필의 서두를 어떻게 써야 한다는 원칙이나 제한은 있을 수 없다. 다만 서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주제와 소재가 정해지고 구성까지 다 끝내놓고도 일성을 터뜨리지 못해 붓이 정지해 있을 때 서두를 끌어내는 방안을 강구해 보자.

(1) 서두의 중요성

"첫 센텐스, 그것은 내 창작에 있어 거의 전부다." 인생파 작가 계용묵 씨의 말이다. 샴페인도 마개가 잘 뽑히면 술맛이 좋다. 선보일 때도 첫인상이 좋으면 거의 성공한다. 출발은 종말을 예언하기 때문일까, 시작은 모든 일의 반이기 때문일까? 우리 나라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 또한 수필에도 해당되는 적절한 말이라고 여겨진다. 왜냐 하면 서두는 바로 독자를 이끄는 첫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서두는 발단에 해당되어진다. 이 서두가 잘 풀리면 그 수필은 시종여일하게 잘 풀려나간다. 이는 실제 글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체험하게 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기실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이 서두를 끄집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체험했음이 아닌가.
서두는 도입 단락에 해당한다. 도입단락은 전체 글의 첫머리에 놓이는 단락이다. 전체 글의 문을 여는 구실을 하므로 본격적으로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전개에 들어가기 전에 읽는 이의 관심을 끌거나 전체 글에 대한 예비적인 서술을 하게 된다. 이런 예비적, 입문적 구실을 하는 것이 도입 단락이다. 글에 따라서는 도입 단락이 없이 바로 일반 단락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그런 글에서라도 대개 한두 문장 정도 글의 문을 여는 구실을 하는 문장이 있기 마련이다.
서두 즉 도입 단락의 기능은 두 가지 정도이다. 하나는 글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 글의 내용을 개관하는 것이다. 전자는 주로 수필에서 많이 쓰는 것으로 글의 내용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읽는 이의 궁금증을 자극하여 글을 읽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후자는 설명적 에세이에서 전체 글의 내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구실이다. 전체 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포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읽는 이들이 원하는 내용인가를 쉽게 파악하도록 돕는 기능을 수행한다.
윤오영은 이 서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글은 '시작이 중요하다. 첫머리 한 마디가 전편을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고 전제하고 '서두에 설명이나 서론을 늘어놓지 말 일이다. 그것은 극히 문장의 정서를 죽이고 청신한 기분'을 해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될 수 있는 대로 긴 허두를 붙이지 말고 간명하게 시작하되 전편에 대한 암시적인 기틀이 되도록 유의하고 이론적인 말을 피해야 한다. 한 마디로 해서 느낀 대로, 직접 써 나가면 된다. 이러저리 만들어 보려는 데서 잡치는 것이다.
결국 서두는 느낀 대로 암시적인 기틀이 되도록 함이 무리 없는 시작이 됨을 제시한다. 그럼에 서두는 수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함도 그 소이가 여기에 있게 된다. 어떤 글이든 서두가 있고, 독자는 서두에서부터 읽어 들어간다. 서두는 독자를 끌어들이는 첫 번째 관문이다. 신문 칼럼을 읽는 사람 중에는, 서두와 중간과 끝 부분만 읽는다는 사람도 있다. 전문을 이해하는 데에 서두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두는 작품을 좌우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
소재를 만난 사람의 머리 속에는 쓰고자 하는 말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써야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아무 데서나 시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서두가 독자를 끌어들이게 할 것인가에, 서두의 중요성이 있다. 이 중요성을 땅을 비집고 솟는 싹의 떡잎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한 속담을 인용한 말이다. 나그네의 갈림길 같다고도 했다. 말하자면 갈림길에 들여놓은 발길의 향방에 인생길이 달라지듯, 수필의 서두도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2) 서두의 요령

서두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는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다. 취향과 개성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하나의 나무를 보고 쓴다고 하자. 이때의 서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나무를 보게 된 동기에서 시작할 수 있고, 나무가 서 있는 입지적 조건이나 나무의 모양, 또는 주위 환경 상황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서두는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의 한 부분이다. 동기부터 쓸 수도 있고 결론부터 말할 수도 있다. 대상을 순서적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중심부분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수필은 서두의 제시 방법에 따라 작품의 성공이 좌우된다. 제시 방법이란 표현 방법을 뜻한다. 말하자면 신선미가 없이 진부한 설명적 표현이거나,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노출이거나, 독자에게 강박감을 주거나 하는 따위이다. 서두는 차분한 말로 정적 분위기를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문체나 형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경수필의 경우는, 서두의 목소리가 높아서는 아니된다. 요구하거나 교훈적이거나 설교적이어서도 성공적인 것이 못 된다.
서두의 표현에는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불분명한 인상을 주지 않는 일이다. 이를 테면 첫 구절 시작이 지시대명사 '그'니 '어느'로 시작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대명사의 시작은 막연한 상황을 말하는 격이므로, 사실 개념과 떨어져 실감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독자를 끌어들이기에 효과적이 아니다. 다음은 1인칭 대명사 '나'로 시작하는 경우이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서두에 붙는 '나'는 군더더기일 경우가 있다. 수필은 문장 주체가 이미 '나'이다. 그러므로 '나'가 붙는 것은 서두에서나 내용에서나 군더더기일 때가 많다. 다만 예외인 경우는 작자 자신을 강조해야 할 때다.
'그' 라던가 '어느' 따위로 시작되는 것은 수필의 본질에서도 벗어난다. 작자가 주체가 되지 않는 형식 이를 테면 논설체 같은 경우가 아니면, 수필에도 육하 원칙 같은 것이 요구된다. 작자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 따위다.
막연히 지시대명사 '그'로 시작하는 것은 처음부터 원칙에서 벗어난다.
개성적 매력의 들머리에 표현기교를 모으는 게 예술문이라면, 내용전달에 초점을 두는 일반 문장에선 본론으로의 효과적 유도가 더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서두에서 흥미와 주의를 일으켜 놓고 중간에서, 그 흥미와 주의를 지속적으로 유지케 하고 마무리에서, 운치롭고 인상적으로 마치게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수필문에 붙여지는 주의사항이다.
해외 문학파의 한 사람이고 만연체 문장의 수필가인 김진섭 씨는 "문장은 발단의 예술이다"고 했고, 희곡 <<벗꽃동산>>으로 유명한, 러시아 비판적 리얼리즘 최후의 작가 체홉은 "대부분의 작가가 작품에서 실패하는 것은 처음과 끝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① 그 글에서의 서두는 그 한 문장뿐이다.

그 한 문장을 찾을 일이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의 주장이 수필의 서두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명수필의 작가에게서 듣는 '서두 한 줄을 찾는 데 피나는 산고의 아픔을 겪었다'는 고백을 자주 듣는다. 한흑구는 <나무>라는 수필을 쓰는 데 5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며,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는 서두글을 찾았다고 한다. 역설적이지만, 플로베르의 말대로 거기에 꼭 알맞은 한 마디를 그는 5년 만에 찾았던 것이다.

② 중심사상을 보다 구체화한다.

중심사상이란 그 글의 주제의식으로서 몸에 배태한 생명체와도 같은 것이다. 몸에처럼에서의 "사랑은 하나다."라든가, 피천득의 수필 <순례>에서의 "문학은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선택된 생활경험의 표현이다."라는 문장들은 모두 중심사상의 핵을 앞세운 예의 서두다.
밴 생명도 열 달이 차야 산기를 느끼는 것처럼, 그 산기와도 같은 글의 서두도 의식의 구체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짐으로써만 가능하다. 안병욱의 수필 <인생은 예술

③ 비유, 암시적인 문장이 효과적이다.

수필은 대우적인 문학이면서도 직접성을 피하여 완곡하게 우회하는 은근성을 체질로 한다. 이것은 보다 효과적으로 독자의 이해와 공감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단순구성의 수필에서는 대개 완만하거나 겸손한 문장으로 출발하여 말미에 가서 그 주제의 핵을 일반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시간적 순서를 밟지 않고 전개하는 병렬식 구성의 수필에서는 글의 서두에 예민한 신경을 쓰게 된다. 즉 직유나 은유의 문장으로 거의가 서두부에 주제의 핵을 상상처리하는 두괄식의 문장이 오게 된다.

(4) 난해하거나 추상적인 문장은 피하는 게 좋다.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일부러 어려운 외래어나 시문의 구절들, 또는 전문적인 용어들을 앞세우는 경우가 있다. 피할 일이다. 호기심이나 기대감의 유발보다는 오히려 이질감이나 혐오감을 불러일으켜 독자를 밀어내는 결과가 된다. 추상적인 문장일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념이나 관념이 글머리에 설 때, 대개는 친화감을 잃게 되어 호소력과 설득력을 잃게 된다. 때문에 수필의 서두는 '첫인상'으로서의 '선명성'을 잃지 말아야 하고, '예보적 기능'으로서의 '암시성'을 생명으로 해야 한다.

(5) 제목에 대해 배려한다.

서두는 제목과 더불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러므로 일단 제목에 매력을 느낀 독자가 한층 더 흥미를 느끼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다. 만약 한여름의 절전을 위하여 대통령이 남방셔츠 차림으로 집무하는 모습을 텔레비젼을 통해서 보고, 권위 의식에 사로잡혀 경직된 우리 사회 지도층을 꼬집는 글을 쓰고자 할 때, 그 글의 제목을 <대통령의 넥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수필의 첫 문장을 '대통령이 넥타이를 풀었다'라고 시작하면, 첫 문장이 제목을 반복하는 꼴이 되어 긴장감이 떨어진다. 따라서 서두 첫 문장을 적을 때는 항상 제목을 배려해서 표현하는 게 좋다.

(6) 결미와 조응되게 해야 한다.

서두는 글 전체를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글의 분위기나 주제의 무게, 소재의 성격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울려야 한다. 그러므로 주제에 접근하는데 어떤 암시적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다. 결미와 자연스러운 조응은 주제가 강조되고 감흥을 더해 줄 것이므로 본문을 거쳐 결미에 닿는 흐름에서 동떨어지지 않는지를 살펴야 한다.

(7) 교조적인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독자는 자존심이 강하고 싫증을 잘 낸다. 진부한 설명이나 교훈으로 독자를 가르치려는 의도를 보이거나 저속한 표현이나 꼭 필요하지 않은 외래어 사용도 거부감을 준다. 독자를 가르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고사나 명구의 인용은 참신하지 못하고 개성적이기 어려운 반면 내용이 반전되면 절정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유머와 위트로 파격을 주는 효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3) 서두의 유형

처음과 끝은, 문장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알파요, 오메가인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글을 잘 쓰는 데에는 여러 가지 주의할 점이 많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첫머리를 잘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첫인상이 중요한 것과 똑같은 이치다. 서두의 기법은 학자에 따라 각양 각색이다. 필자는 대원리 2가지와 소원리 20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오직 중요한 것은, 읽힐 문장의 서두는 재미, 새로움, 감명 중 그 한 가지는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재미'는 호기심의 사촌이다. 담 너머 사과가 가장 달다고 했다. 재미가 있을 문장인가 아닌가를 첫 석 줄에서 판단하려고 한다. 남의 집 불 구경 않는 군자가 없다는 것은, 도덕보다는 흥미에 더 많이 지배당한다는 인간 속성을 꿰찌른 말이다. '재미' 그것은 가장 확실한 유도책이다. '새로움'도 '감명'도 '재미'의 별명에 불과하다. 첫머리를 시작하는 요령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첫 문장을 여는 대원리 2가지와 서두 단락을 여는 소원리 20 가지 기법을 소개한다.
다음은 내용과 기능으로 본 서두 기법의 대원리 두 가지다. 글의 첫마디는 매우 중요하다. 처음의 한 줄이 글 전체의 인상을 좌우한다. 서두의 몇 마디에 글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내용을 강조한 경우
글은 그 논지가 명백할수록 좋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글의 맨 앞에 제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처음부터 맹백한 생각을 갖도록 하는데 효과적이다.

① 주제의 제시
'말이 무성하다'
'자유, 자유 안에서, 자유를 위하여'
먼저 주제를 제시하면 글의 긴장감을 더하게 된다.

② 소재의 제시
서두에 소재를 제시하여 사건이나 경험을 중심으로 글이 전개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나는 얄궂은 호박 한 개를 가지고 있다.'
'땡감 두 접을 샀다.'

③ 상황의 제시
'흰색과 노란색의 액체가 아주 천천히 방울지며 떨어지고 있다.
'오색 풍선을 매단 자가용이 푸른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상황을 제시하는 것은 독자에게 현장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④ 감상의 제시
글 전체의 분위기를 암시하기 위하여 감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겨드랑이에서 스멀스멀 날개가 돋아나서 날아갈 것 같다'.

(2) 기능을 강조한 경우

① 간명함이 주는 편안
'전설은 아름답다.'
'구례와 하동을 잇는 길은 진솔같이 깨끗했다.'

② 참신함이 주는 매력
'가슴이라는 공책이 있다'

③ 호기심이 주는 충동
'욕탕은 알맞게 김이 서리고 따뜻했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5. 서두 쓰기의 예

어떤 글이든 서두가 있고 독자는 서두에서부터 읽어 들어간다.
서두는 독자를 끌어들이는 첫 번 째 관문이다.
신문 칼럼을 읽는 사람 중에는 서두와 중간과 끝 부분만 읽는다는 사람도 있다. 전문(全文)을 이해하는 데에 서두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두는 작품을 좌우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
소재를 만난 사람의 머리 속에는 쓰고자 하는 말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써야할까 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아무데서나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서두가 독자를 끌어들이게 할 것인가에 서두의 중요성이 있다.
이 중요성을 "땅을 비집고 솟는 싹의 떡잎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한 속담을 인용한 말이다. 나그네의 갈림길 같다고도 했다. 말하자면 갈림길에 들여놓은 발길의 방향에 인생길이 달라지듯, 수필의 서두도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서두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는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다.
취향과 개성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하나의 나무를 보고 쓴다고 하자. 이 때의 서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나무를 보게 된 동기에서 시작할 수 있고, 나무가 서 있는 입지적 조건이나 나무의 모양, 또는 주위 환경 상황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서두는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의 한 부분이다. 동기부터 쓸 수도 있고 결론부터 말할 수도 있다. 대상을 순서대로 시작할 수도 있고 중심부분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수필은 서두의 제시 방법에 따라 작품의 성공이 좌우된다. 제시 방법이란 표현 방법을 뜻한다.
말하자면 신선미가 없이 진부한 설명적 표현이거나,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표출이거나, 독자에게 강박감을 주거나 하는 따위다.
서두는 차분한 말로 정적 분위기를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문체나 형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부드러운 수필의 경우는 서두의 목소리가 높아서는 안 된다. 요구하거나 교훈적이거나 설교적이어서도 성공적인 것이 못 된다.
서두의 표현에는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불분명한 인상을 주지 않는 일이다.
이를테면 첫 구절 시작이 지시 대명사인 '그'니 '어느'로 시작되는 경우다. 이와 같은 대명사의 시작은 막연한 상황을 말하는 식이므로 사실 개념과 떨어져 실감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독자를 끌어들이기에 효과적이 아니다.
다음은 1인칭 대명사인 '나'로 시작하는 경우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서두에 붙는 '나'는 군더더기일 경우가 있다. 수필은 문장 주체가 이미 '나'이다. 그러므로 '나'가 붙는 것은 서두에서 내용에서나 군더더기일 때가 많다. 다만 예외인 경우는 작자 자신을 강조해야 할 때다.
'그'라든가 '어느' 따위로 시작되는 것은 수필의 본질에서도 벗어난다. 작자가 주체가 되지 않는 형식, 이를테면 논설체 같은 경우가 아니면, 수필에도 육하원칙 같은 것이 요구된다. 작자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 따위다. 막연히 지시 대명사인 '그'로 시작하는 것은 처음부터 원칙에서 벗어난다.
예문을 보자.

[예문 1] 화해의 그때
그녀와 헤어진 후 우울한 기분은 떠나질 않는다. 커텐을 한 쪽으로 밀어붙이고 창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그래도 시원함은커녕 끈끈하고 습기 찬 공기가 가슴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검은 구름이 바로 머리 위에서 몰려 다니는 것을 보니 곧 비가 내릴 것 같다. 비가 와야 가뭄이 풀릴 터이지만 믿을 수는 없다. 사흘째 연이어 구름만 떠돈다. 나의 마음이 우울한 것은 날씨탓만은 아니다.

[예문 2] 수화기를 놓으면서
나의 용돈으로 서점에 가서 처음 산 책이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이다.
그때 친구들 간에는 '빙점'이 인기 있는 책이었다. 베스트셀러였다.
[예문 3] 그 남자의 손
신호등이 바뀌었다. 길을 건너기 위해 차도로 내려섰다. 옆에 있던 남자가 팔을 둘러 손으로 내 등을 밀며 걷는다. 나는 갑자기 하던 말을 중단했다. 등허리에 가득 덮힌 듯한 남자의 손에 온통 신경이 쏠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대낮 서울 거리에서 나와 함께 팔을 겯고 걸어도 상관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예문 4] 손 들고 세운 차
나는 공짜로 남의 차를 얻어 탈 때가 있다. 함께 어울리다 같은 방향인 때는 편승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탈 때도 있다.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으나 나와 빈 가슴을 얼마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 숭배주의자이다. 시골을 즐겨, 찾아 나설 구실을 만든다. 몇해 전에는 완행열차에 실려 기차여행을 했지만, 근래에는 완행버스에 실려 곧잘 서울을 벗어나기도 한다…….

[예문 1] 서두의 '그녀'와 [예문 2]의 '나'는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예문 3]의 둘째 단락에서도 갑자기 '그'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예문 4]에서는 '나'가 들어감으로써 문장이 산 경우가 된다. 작자인 주체를 강조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문장의 수식(꾸미는 것)은 서두에서 더욱 금기 사항이다.
앞에서 말한 바 있으나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좋은 문장이랄 수가 없다.
예문의 서두를 다시 보자.

[예문 1] 상록수를 읽고
밤이 조금씩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을 때 뿌연 달빛이 문틈 사이로 스며든다.

"밤이 깊어지면 문틈 사이로 달빛이 스며든다"면 되는 것을, 쓸데없는 수식인 "깊이를 더해가고"로 꾸미고 있다.

[예문 2] 중심 찾기
가을! 탐스럽게 익어가는 곡식 과일들은 모두에게 풍요로움을 안겨 준다.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에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생활하는 이들에게 어느날 좌절을 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사과에 이상이 발견되었을 경우이리라. 겉은 누가 보아도 깨끗하고 탐스러운데 속은 어느 벌레에게 긁히고 있다면 누구도 발견치 못한 작은 구멍이 뚫렸으리라.
사과의 중심이 흔들리고 그것에 희망과 기쁨을 쏟으면서 생활하던 이에게 중심을 잃도록 하는 것이리라. 나는 어느 날 나의 생활 속에서 작은 구멍에 의해 중심이 썩어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 글은 끝 부분에 가서야 작자가 하고자 한 말을 겨우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서두가 되었다면,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은 훨씬 강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뒤에 가서야 단락을 바꾸어 말한 것은, 서두를 아름답게 써 보려는 생각 때문에, 쓸데없는 말을 해서 꾸민 결과다.
사과가 익어가고 있다는 얘기와, 익은 사과에 해충이 붙어 있다는 말을 솔직하게 쓰면 된다. "가을!" 하고 감탄법을 쓴 것은 강한 것이므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를테면 "엊그제까지 찌는 듯하던 더위가 머리 속에 아직 남았는데, 어느덧 가을이다"면, 독자를 차분하게 끌어들인다.
"중심이 썩어가고"의 표현도 적합하지 않다. 중심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경우도 추상적으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사과밭에 병충해가 심하다면, "노력한 대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쯤으로 하면 자연스러운 글이 된다.
수필은 서두에서부터 품위를 잃지 말아야 외면을 당하지 않는다. 품위가 없으면 문장을 아는 사람의 눈에 들 리가 없다. 다시 예문을 보자.

[예문] 내 애인 비우 파이오니어
옥포만에 오자마자 짝사랑 애인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내 애인이 처음부터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초겨울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녀에 대한 내 어설픈 짝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지금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녀가 시집을 가더라도 그녀만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얼른 보기에 흠 잡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글이다. 그러나 교양인이라면 이 글이 제목과 서두에서부터 얼마나 품위를 잃고 있는가를 쉽게 알 것이다. 제목부터가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제목이다.
말할 때는 '애인'이니 '사랑한다'는 말을 예사로 할 수 있으나, 수필 문장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독자가 알 수 있도록 함축 시켜야 한다.
글의 시작이 "옥포만에 오자마자 짝사랑의 애인을 갖게 되었다"로 되고 있으나, 이런 문장은 개인 일기 속에나 적힐 글이다. 남에게 읽히는 수필 속에 거리낌없이 이런 말을 드러내는 것은, 첫째 수필 문장의 품격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소치이고, 둘째로는 평소에 이 작자의 교양을 의심케 하는 표현이다. 셋째는 이런 식의 표현은 소설적 수법이고, 서양의 언어 습속에서 온 잘못된 생각의 표현이다.
이런 까닭에 문장은 바로 그 사람이라고 했다. 인격 수련이 앞서야 문장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위 예문에서 작자가 애인 얘기를 서두로 꼭 써야 했을 것이라면, "옥포만에 오자마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쯤이면 서두의 품위가 살아난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는 말속에는 은근한 깊이가 있다. 독자는 이와 같은 함축에서 정감의 깊이를 읽어내게 된다. 수필 문장의 용어는 이와 같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함축적인 말을 쓸 때 향기를 내는 글이 된다.
서두에서 결함을 드러낸 예를 다시 보자.

[예문] 짙어진 우애
얄밉도록 푸른 하늘과 향긋한 풀 내음이 우릴 부를까?
야호! 통통배를 타고 물살을 가르며 청평 연수원으로 향하는 우리네(한빛회) 마음은, 한없이 부풀고 함박 웃음꽃이 얼굴 가득 피어오른다.
도착과 동시에 호박이랑 무랑(오매! 동족 상잔의 비극이잖여-)을 숭숭 썰어 보골보골 찌개를 만드는 우리는 예비 새악시. 왁자지껄 시끄럼 속에 어느새 근사한 지상 식탁.
"햇살은 따뜻, 강물 위는 금빛. - 맛있게도 냠냠."

서두를 의문형의 강조법으로 쓰고 있는 것부터가 시작을 위태롭게 해서 안정감을 잃고 있다. "얄밉도록․야호․오매" 따위의 표현이 천박하다. 침착하지 못한 문장으로 호들갑을 떨고 있는 모습이 작자를 보지 않아도 보는 듯하다. 청평 유원지로 가는 기분과 점심 준비 과정을 솔직하게 과장 없이 쓰면 된다. 고쳐본다면 다음과 같은 글이 될 것이다.
"푸른 하늘과 향긋한 풀내음이 우리들을 부른다. 통통배가 물살을 가르며 우리를 지금 청평유원지의 연수원으로 실어가고 있다." 이렇게 써야 자연스럽고 솔직하며 품위 있는 글이 된다. 예문을 또 보자.

[예문] 미(美)에게
다들다들한 종이 위에 무어라 적어야 할까? 문득 미의 얼굴이 떠오른다.
미야! 오늘도 이렇게 무작정 흘려보내 버렸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찌는 듯한 여름은 지나가고 물드는 계절로 바뀌었지만, 또다시 다가오는 싸늘한 계절에 옥이와 미, 우리는 영원히 굳게 약속하자. 땀 한 방울 한 방울이 후에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말이야.

편지 형식의 글이나, 앞의 예문과 같이 첫 단락의 서두가 의문형 강조법으로 시작이 되어 부자연스럽다. "다들다들"하다는 표현도 알 수 없는 말일 뿐 아니라, 어느 지방의 말인지도 알 수 없다.
즉 표준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자가 임의로 만들어낸 것 같은데 이런 것은 삼가야 한다.
시인이 시어를 만든다고 하나 산문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다들다들"이 설사 표준어라 해도, 문맥상으로나 문장의 분위기에 어긋나는 말이면 쓰지 말아야 한다.
무게가 없고 경박스런 이런 글은 예외 없이 젊은 층에서 보게 되는 결점이다. 적어도 수필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문장의 격이 어떤 것인가 부터 익히고 나서 써야 할 것이다.

[예문] 친구
인생은 누구나가 한 번 태어나면 만났다가 헤어지게 마련이다.
오늘은 뜻하지 않게 B의 부음(訃音)을 듣고 S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어제 저녁 늦게까지 종로에서 차를 나누고 헤어졌던 그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허망하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 글의 서두 "헤어지게 마련이다"는, 작자의 감정이 친구를 잃은 충격의 분출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진부한 얘기다.
신선미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삭제해야 더 효과적이다.

[예문] 참사랑
결혼을 하는 사람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사랑이 없으면 결혼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어제는 같은 과 동료 미숙이 결혼을 했다. 그들의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 둘도 없는 사랑이었다. 대학을 마치기까지 무려 6년간을 한결같은 사이였다.
이 글 역시 서두의 단락이 군더더기로 붙어 있다. 설교조요, 훈시조다. 한마디로 진부하다. 문체에 따라 이러한 서두가 있을 수는 있으나, 이런 경우의 문장 성격은 논리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서두의 문장은 논설문의 성격으로 전개가 되어야 한다.
서두의 또 한 가지 흠은 대화체 형식의 대사로 시작하는 글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필요 없이 대화체로 시작되는 것은 수필 문장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예문 1] 마당발
"그렇게 큰 구두는 없습니다."
십여 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245사이즈의 구두를 찾던 내게, 제화점 주인은 점잖게 무안을 주었다.
대화체로 시작된 부분을 지문으로 풀어서 써야 한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다.
245사이즈의 구두를 찾았더니, 그렇게 큰 구두는 없다며 제화점 주인은 점잖게 내게 무안을 주었다."로 시작되어야 한다.

[예문 2] 포장마차 집에서
"오늘 밤엔 꽤 바람이 부네요."
"아, 글세 포장 날아갈까 걱정이라우."
포장마차 끄트머리마다 큰 돌멩이를 갖다 누르며 사람 좋게 보이는 주인 아저씨는 성근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역시 대화체로 시작된 서두가 수필이 아닌 소설적 기법의 형식이다. 작자가 문장 속에 들어가 있지 않다. 고쳐본다면 다음과 같은 글이 될 것이다.
오늘밤은 바람이 유난하다.

성근 이를 드러내며 포장마차 주인이, 바람에 날아가겠다면서 걱정을 한다. 네 귀에 무거운 돌을 지질러 놓았으나, 그래도 바람에 못 이겨 펄럭거린다.

이상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서두의 결함을 살펴보았다. 예문으로 제시한 글은 대부분 수필에 뜻을 둔 회사원과 주부들이 쓴 글이다.
다음 예문의 서두는 비교적 안정된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다. 솔직해서 꾸미려고 하지 않는 점이 차분한 분위기를 빚어내 독자를 끌어들인다.

[예문 1] 변화가 나를 부를 때
창 밖에는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다. 요즈음은 계절이 바뀌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며 살아간다. 오늘은 그 동안 변화되어온 내 모습을 조용히 앉아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예문 2] 서로가 얻는 삶
입사한 지 어언 6개월, 적은 시간이면서도 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것 같은 느낌 속에 하루를 보낸다. 일하다 보면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일까 하고 반문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지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일하면 된다. 많은 사우들의 일하는 자세에서 그런 모습들을 본다.

[예문 3] 사미인곡
혼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집밖으로 나서다 보면 뭔가 잊은 듯 허전할 때가 있다. 초겨울 바람에 떨어져 길 위를 뒹구는 낙엽을 보면 미진한 것들이 고개를 든다.
남편과 결별 후, 한 사람이 남기고 간 빈자리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최근에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으로 대략 서두의 성격과 방법을 살펴보았다. 수필 문장의 성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지적 논리성과 감성적 서정성이랄 수가 있다. 서두가 논리적 문체로 시작되면 내용이 사회적․비평적 성격을 지니게 되며 부드럽게 시작이 되면 서정적 분위기의 글이 된다.
형식에 따라 또는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쓰는 것이 수필이기는 하나, 초심자의 경우 상당수의 글이 서두가 논리적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논리적 형태로 시작이 되었다면 문장 전체가 그런 성격이라야 하는데, 서두만이 그렇고 전개 과정에서는 가벼운 느낌의 부드러운 수필이 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서두를 잘못 시작한다는 얘기다. 정적인 내용일 때 서두의 시작은 이에 맞게 담담하게 시작되어야 한다. 충동에 의해 쓰게 되는 것이나, 차분히 가라앉혀서 나지막한 소리로 혼자 얘기하듯 시작해야 한다.

6. 결말은 어떻게 맺는가?

글의 결말은 끝맺음을 위한 요약 정리, 제시로 이루어진다.
본론을 요약한다든가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며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제시 및 방향 설정도 바람직한 끝맺기이다.
그러나 수필의 경우에는 여운을 남기는 경우, 혹은 독자들이 그 뒤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여백을 남겨두고 끝맺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드물게 볼 수 있는 경우이지만 소설에서 절정으로 서사를 구조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말은 주제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김희보는 <문장 바로 쓰기>에서 주제법, 감상법, 대응법, 요망법, 여운법 등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
문장이 독자에게 큰 감명을 주는 것은 그 결말이다.
결말의 문장은 무엇보다 전체의 통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효과 있는 결말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다.
① 주제법- 그 문장의 주제가 되는 생각을 마지막 단락에서 다시 한번 다루어 결말을 내는 방법. 본격적인 결말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② 감상법- 감상의 내용은 필자의 인품과 인생관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 에게 주는 인상은 선명하다.
③ 대응법- 서두의 내용과 대응시키는 방법이다. 문장에 익숙한 사람은 이 방법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
④ 요망법(要望法)- 문장의 결말에 필자의 요망이나 희망 따위를 쓰는 것은 호소 하는 문장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⑤ 여운법-여운을 남기는 효과를 내는 방법으로서 지금까지의 문장 작법의 경우 흔히 사용되는 것은 자연묘사이다.
기타 다음과 같은 방법도 흔히 쓰인다.
첫째, 반성이나 자신에 대한 훈계.
둘째, 풍자나 비판.
셋째, 전체의 요약.
넷째,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감상의 인용.
다섯째, 격언이나 명언의 인용.
여섯째, 위트가 넘치는 문구.
일곱째, 의문문의 형식에 의한 의문의 제기.
문장을 어떻게 끝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문장의 시작인 서두와 함께 중요한 것이다. 문장의 끝이 잘 맺어지지 않으면, 글의 성과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수필의 결말은 글 전체가 완성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끝맺는 것보다는 본문을 통해 서술한 내용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강한 인상을 심어 놓는 방법이 좋다. 내용에 따라서는 여운을 남긴다든가 압축미를 더하는 방법도 있다.

명화 하면, 라스트신이 떠오른다. 주제를 압축, 상징한 최후의 장면이 전체를 운치롭게 묶어 돌아가는 관객들 가슴팍에 날카롭게 각인하기 때문이다. 그 영화의 라스트신 기법이 문장에도 적용될 것이다.
라스트신의 특징은 1) 서정적이고, 2) 여운적이고, 3) 인상적인 데 있다.
곧 서정에 호소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감동되고, 변죽만 울리거나 함축미가 짙을수록 독자들의 반응이 강해지고, 읽은 다음에도 기억에 남게 하려면 선택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서정화는 시적 묘사로, 여운화는 전환이나 생략으로, 인상화는 핵심적 제시로 마무리함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서두보다 중요한 게 이 결어다. 독자들의 머리엔 이 마지막 것만이 남기 때문이다. 읽은 다음에 손해본 듯한 마무리는 필자도 독자도 바라지 않는다. 최소한 본전은 찾은 듯한 결말, "읽은 수고가 헛되지 않았구나"하는 잇점을 안기는 결말이었으면 함이 최소의 소망이겠다.
평생을 갈고 닦아도 면허증도 졸업장도 없는 문장수업, 그러나 그 실력이 잘 나타나는 곳이 문장의 끝이다. 공금횡령으로 3년간 투옥됐던 오 헨리는 마무리의 명수였다. 기발한 재치로 단편을 끝낸다
. 결어, 그것은 전체의 대명사요, 필자의 고심이 담긴 거울이기 때문이리라.
일반적으로 수필의 끝맺음은 논문의 경우 결론에 해당되어진다. 수필의 결어는 주제를 충분히 나타냈다고 여겨졌을 때 맺음이 바람직하다. 그 점에서 서두가 수필의 시발역이라면 결어는 종착역인 셈이다. 그러므로 문장은 종착역이 아닌 곳에서 멎어서는 안 된다. 만일 종착역이 아닌 곳에서 멎는다면 그것은 마치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하차하고 마는 격이 되고 만다. 이에 일반적인 문장의 마무리 조건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짧아야 한다는 점이다. 긴 문장은 역효과를 낸다. 일반적으로 수필에서 서두를 전체의 15%, 마무리를 10%로 잡으라 함은 그 때문이다. 수다장이 문장은 감명을 못 주는 법이거니와 더욱이 수다쟁이 마무리는 다 된 밥에 재 뿌리기다. 짧은 말에 많은 지혜를 깃들이라는 희랍 비극의 작가 소포클레스의 말은 바로 이 마무리를 맞힌 말이겠다. 끝맺음은 수필 내용의 중요한 요소를 보이고 있음이 상례이다.
둘째, 강해야 한다. 논설문 따위에선 앞에 말한 것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다. 강조하려면 반복하라는 원칙 때문이다. 그러나 수필문에서는 다르다. 주제나 핵심을 딴 방향에서 때려야 한다. '반복'은 싫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싫증나는 문장보다는 배고픈 문장을 쓰라는 것은 수필의 아버지, 프랑스의 몽테뉴다. 강한 표현이 되려면 문장을 입체화해야 한다. 입체는 평면의 반대이다.
1) 문제를 밖에서 바라보는 것,
2) 딴 화제와 결부시키는 것,
3) 표현에 변화를 깃들이는 것 따위도 입체화의 한 방법이다.
셋째, 안정감이 있어야 한다. 종결은 완결미, 완성미를 의미한다. 엉뚱한 화제로 돌리면서 끝맺는 것도 하나의 '여유'요 '새로움'이다. 양복입은 문장이 마무리에 어울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딱딱한 내용을 앞에서 말했으면 그 뒤에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결자 해지는 문장에도 적용된다. "옛다 모르겠다. 노래나 부르자…"하는 것도 긴장을 풀려는 하나의 기교다. 독자로 하여금 어리둥절케 하라. 이것은 문장의 프로들이 부릴일이지 일반인들이 쓸 일이 아니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뱀 우로보로스는 자기 꼬리를 물고 있다. 수미 조응의 안정감이다.
수필에서 서두와 결어는 항상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결어에서 서두를 반복하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것은 서두의 분위기를 다시 결어에서 반복함으로써 보다 강력한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수필에서의 결어는 작자의 사상이 집약적으로 결합, 제시된 부분이므로 수필 내용에서 서두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수필의 결어는 논문의 결론과 대비되어진다. 즉 논문이 형식을 갖춘 글로서 곧 과학적 합리성에 입각한 논리적인 글이라는 점이다. 곧 논리적 타당성을 생명으로 삼되 그것을 이론적으로 표현 기술하는 글이다. 그런 의미에서 논문적인 대상을 제재로 삼되, 그것의 바른 인식을 얻기 위해 규범이 될 사유의 법칙과 형식을 논리적 이론으로써 기술하는 문학이다. 그 점에 논문은 어디까지나 논리적 합리성을 생명으로 삼는 글이라는 데 그 묘미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문학 논문의 경우 문학을 대상으로하여 그 가치를 이론적이며 합리적으로 판단(평가)하는 글이다. 그 작업을 이룩함에 선행되어져야 할 바는 '논문(비평)하는 일'이다. 이 논문 작업이야말로 가치판단을 그 목적으로 지향한다. 그 점에 논문의 결말(결어)은 논문적인 결론으로 맺어야 한다.
이를 좀더 구체화시키면 서론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본론에서 이에 관한 충분한 논의가 있은 후에 연구 결과에 어떤 판단을 내리는 논리적인 귀결이 바로 이 결어 부분이다. 이에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는 흔히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다루어진다.
① 결론에서 자신의 연구를 통해 해결된 것과 앞으로 연구를 계속해 가야할 것 등을 가려서 확실히 밝혀 두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뒷날 연구를 계속시켜 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학문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 되기도 한다.
② 한 마디로 말해서 결론은 분명해야 한다. 구구한 내용 설명에 대해서 총괄적으로 정리하면 구체적이고 주관적인 견해가 밝혀져야 한다.
이러한 논문이나 평론에 비하면 수필의 결어는 구태여 논리성을 요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수필은 논문과는 달리 반드시 결론을 맺지 않아도 되는 무종결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필의 결어에는 작가에 따라 ' ...... 하지 않을까', ' ...... 해야 하지 않은가' 등 의문과 제시로 끝맺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 또한 무종결로서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강조이기도 하다. 즉 문제점을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표현상 독자에게 큰 감명을 주는 것은 그 결말이다. 결말의 문장은 전체의 통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결말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글쓴이의 생각이나 느낌에 모든 사람이 공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효과 있는 결말처리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이 20 가지 방법이 있다.
* 수필은 인생과 사물에 대한 개인의 느낌과 사색을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으로 쓴 산문이다. 형식이 자유롭기 때문에 대단히 다양하고 폭 넓은 경험을 직접 드러내기 쉬운 글이다. 개인의 작은 감상이나 깊은 사색은 물론,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까지도 내용으로 삼을 수 있다. 형식의 자유로움이 수필의 특징이지만, 문학이 되기 위해서 구체적인 형상화는 있어야 한다.
* 수필은 글쓴이의 개성이 짙게 드러나는 문학이다. 자신의 느낌이나 경험을 직접 고백하거나,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것은 소설이 가공의 인물을 설정하여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과 다른 특징이다.
* 수필은 심미적이며 철학적인 글이다. 글의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작자는 사물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깊은 자성(自省)을 하게 되고, 자신이 내리는 결론에 대해 반추하면서 깊이 있는 명상을 하게 된다. 이는 수필이 철학성을 가지는 요인이 된다. 그러한 과정을 독자에게 보여 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 글 속에 몰입하도록 한다. 수필이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사물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해 주는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 수필은 그 소재가 대단히 광범위하다. 수필은 그 작자가 인생이나 사회, 역사, 자연 등이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느낀 것, 생각한 것을 무엇이나 다 그때 그때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자유자재로 서술하는 것이다.
* 수필은 글쓴이의 유머, 위트, 비판 의식이 나타난다.유머, 위트, 비판 정신, 이런 것들은 다른 문학 양식에서도 나타나지만, 어떤 사건의 구성이 없는 수필에서는 특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유머나 위트는 수필의 평면성, 건조성을 구제해 주는 요소이며, 비평 정신은 수필의 아름다운 정서에 지적 작용을 더해 주는 요소이다.
* 수필은 간결한 것이 특색이며 산문으로 씌어진다. 수필은 비교적 길이가 짧은 산문이다. 근래 신문이나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수필 작품의 길이는 2백 자 원고지로 5매 정도에서 10여매 정도인 것이 많다.
* 수필은 생활인이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비전문적인 문학이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

7. 제목과 마무리

수필을 써 놓고 제목을 붙일 수가 없어 고심할 때가 있다. 이것은 제목이 내용과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수필 제목은 작품에서만이 아니라 수필집에서 붙이는 일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명사적 성격의 짤막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문장의 한 구절 같은 형식으로 붙이는 것을 본다. 이에 대해 차주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현상은 독자층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출판의 활력소 구실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얼마 동안 지나서 다시 과거의 형태로 짧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시적 유행이며 '초가집' 같은 짧은 제목들과, '사랑을 줍는 사람들의 기침 소리',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따위로 길게 붙는 제목들은 독자층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는 태도이며,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긴 제목에 부정적 견해를 나타내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그런 수필집 제목은 말장난같이 느껴지며,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그런 제목을 붙이는 일은 생각해 볼 문제다."
수필에 제목을 붙이는 일은 가령 옷으로 비교해 볼 수가 있다. 1차적으로 사람의 풍취를 외형적으로 가려보게 되는 것이다. 지난날에는 신분상 계층까지를 옷으로 나타냈으나 오늘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옷차림으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쯤은 짐작이 간다.
접객업소의 여인 차림을 하면 현숙한 주부도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옷은 입은 사람의 본체를 심층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본질에 비추어, 수필에 붙는 제목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문] 장갑
…정치 초년생인 남편에게 공천이 주어진 것은 요행으로 된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의 일은 유권자의 표를 얼마나 얻느냐 하는 결전만이 남아 있다. 지연․혈연․친지․이웃 등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종횡으로 뛰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늦게 유세장에서 돌아온 그가 흰 토끼털 가죽장갑 하나를 내놓았다. 동짓달 바람이 매서우니 끼고 다니라 했다.
가난한 정치 지망생의 아내인 나에게 그 토끼털 장갑은 작은 선물이 아니었다. 집집을 돌아 기호표를 나누어 줄 때는 그 장갑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워, 들고 다니거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짝을 잃고 말았다.
(중략)
그가 가고 없는 지금, 출근을 서두르는 아침길 손끝이 시리다. 퇴근길에는 백화점엘 들러 장갑을 사 끼어야 하겠다. (이병남)

제목이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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