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모도나즘과 실험 (1914-1945)

2012.10.21 17:49

김영교 조회 수:651 추천:11

CHAPTER _ 6 모더니즘과 실험 : 1914~1945

비록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았으며(1917~1918), 사상자 또한 유럽 동맹국이나 적군에 비해 매우 적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두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를 정신적 충격을 받은 미국의 ‘성년기’로 특징지었다. 존 더스 패서스는 소설 《세 군인(Three Soldiers)》(1921)에서 전후의 환멸감을 표현하면서 문명은 “방대한 허위의 구조물이며, 문명이 부스러기가 된 상태에도 불구하고 문명을 가장 완전하고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인들은 전쟁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린 모습으로 귀향했고, 다시는 순수함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 시골 출신의 군인들 또한 쉽게 자신들의 뿌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세상을 경험한 후이기 때문에 다수는 이제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파종, 수확, 묶음을 위한 새로운 기계들이 농장들의 인력 수요를 급감시켰다. 그러나 생산성 증대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가난했다. 도시 노동자의 임금처럼 곡식 가격은 사업 이익을 챙기려는 통제되지 않은 시장의 힘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농민이나 노동자를 위한 정부 보조금 제도는 아직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통령 캘빈 쿨리지는 1925년에 “미국인들에게 주된 관심사는 비즈니스이다”라고 선포했으며 대부분 이 말에 공감했다.

 

전후의 거대한 붐 속에서 사업은 번창했으며 성공한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처음으로 다수의 미국인들이 고등 교육 기관에 등록해, 1920년대에는 대학 등록자 수가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중산층은 부유해졌으며, 미국은 세계 최고의 국가 평균 수입을 기록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 지위의 상징인 자동차를 구입했다. 전형적인 도시 가정에는 전깃불이 들어왔으며, 가정을 바깥 세계와 연결하는 라디오와 전화기가 설치되었고, 카메라렴맛未綏재봉틀 등도 자랑스럽게 구비되었다. 싱클레어 루이스의 소설 《배빗(Babbit)》(1922)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평범한 미국인들은, 이러한 기계들이 현대적이기 때문에, 또한 대부분 미국에서 발명되고 미국에서 제조된 것이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했다.

 

‘포효하는 1920년대’ 미국인들은 현대적인 오락물들과 사랑에 빠졌다. 대부분 일주일에 한 번씩 영화를 보러 갔다. 미국 헌법 수정조항 제18조에 따라 미국 전역에 알코올 생산, 운송, 판매를 금지한 금주법이 1919년에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즈와 칵테일, 과감한 스타일의 옷과 춤으로 특징지어지는 지하 무허가 술집과 나이트클럽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춤, 영화, 자동차 여행, 라디오 등에 온 국민이 열광했다. 특히 미국 여성들은 자유를 만끽했다. 많은 여성들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후방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농장이나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서 현대적인 여성으로 변모했다. 그들은 주로 단발머리에 ‘플래퍼(flapper)’ 스타일의 짧은 옷을 입었고, 1920년에 통과된 헌법 수정조항 제19조에 따른 여성 투표권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여성들은 또한 과감하게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했고, 사회에서도 공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유럽의 젊은이들은 야만적인 전쟁,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나이든 세대, 어려운 전후 경제 상황 등에 환멸과 분노를 느끼며 반항했다. 아이러니한 일은 이러한 경제적 상황 때문에 F.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등 여유 있는 미국인들이 유럽에서 적은 돈을 가지고도 생활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 심리학과 마르크스주의 등 당시의 지식 풍조는 이보다 앞선 다윈의 진화론처럼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을 표현했으며, 또한 전통적인 가치의 붕괴를 거들었다. 해외에 사는 미국인들은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정착하면서 젊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상상력에 불씨를 댕겼다. 예컨대 20세기 미국 소설가인 윌리엄 포크너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 프로이트적인 요소를 이용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진지한 미국 소설가들은 모두 프로이트적인 요소를 사용했다.

 

밖으로 보이는 쾌활함과 현대성, 전례 없는 물질적 번영 등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은 거트루드 스타인이 명명했듯이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였다. 안정적이고 전통적인 가치 구조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개인은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안정적인 가족, 익숙하고 기틀 잡힌 사회, 농장에서 파종과 수확을 알려주는 자연의 영원한 리듬, 지속적인 애국주의, 종교적인 믿음과 사고에 의해 심어진 도덕적 가치들, 이 모든 것이 제1차 세계대전과 그 후유증으로 훼손된 것처럼 보였다.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1926)와 피츠제럴드의 《낙원의 이편(This Side of Paradise)》(1920)을 비롯한 수많은 소설들이 잃어버린 세대의 무절제와 환멸을 그렸다.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끼친 T. S. 엘리엇의 장시 《황무지(The Waste Land)》(1922)에서는 서구 문명이 비(영적인 갱생)가 절실하게 필요한 음산한 사막으로 상징되고 있다.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은 미국인 대부분에게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었고 공장은 문을 닫았으며 기업들과 은행들은 파산했고, 작물을 수확하여 운송하거나 팔 수 없는 농부들은 빚을 갚지 못해 농장을 잃어야 했다. 중서부의 가뭄은 미국의 곡창지대에 먼지가 날리게 만들었다. 많은 농부들이 직장을 찾아 중서부를 떠나서 캘리포니아로 향했는데, 이는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1939)에 묘사되어 있다. 대공황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전체 미국인의 3분의 1이 실업자가 되었다. 무료 급식소, 판자촌, 실직하여 불법으로 화물차를 타는 부랑자 등이 미국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공황을 지나친 물질주의와 안이한 생활에 대한 처벌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중서부 하늘을 검게 물들였던 먼지 폭풍을 보면서 “한낮의 회오리바람, 정오의 어둠”이라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믿었다.

 

대공황은 세계를 뒤집어놓았다. 1920년대에 비즈니스라는 복음을 전파한 미국인들 다수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과 같은, 정부의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지지하게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방 자금을 통해 공공 부문과 자연 보호, 시골 지역 전기 보급 등에서 일자리를 창출했다.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에게는 벽화를 그리고 정부 책자를 발간하게 하여 임금을 지불했다. 이 정책이 도움이 되긴 했지만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야 산업적인 건설을 통해 경제 성장을 본격적으로 재개할 수 있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한 후 사용되지 않던 조선소와 공장들이 선박, 비행기, 지프차, 군대 물자 등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군수품 생산 및 실험은 핵무기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 개발을 이끌었다. 첫 번째 핵무기 폭발 실험을 목격한 국제적인 핵 과학자 팀의 지도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나는 세상의 파괴자인 죽음이 되었다”라는 힌두교의 시를 인용했다.

  

  

  

  

모더니즘

  

  

20세기 초반에 유럽과 미국에서 점증적으로 부상한 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문화적 흐름은, 서양 문명의 고전적 전통뿐만 아니라 과거와도 날카롭게 단절한 예술로 현대적인 삶의 느낌을 표현했다. 현대적인 삶은 전통적인 삶과는 매우 달라 더욱 과학적이고 빠르며, 기술적이고 기계적인 것처럼 보였다. 모더니즘은 이러한 변화를 껴안았다.

문학에서는 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이 현대 미술과 유사한 글쓰기를 창안했다. 파리지엔이자 미술품 수집가(그녀와 그녀의 오빠 레오는 세잔, 고갱, 르느와르, 피카소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구입했다)였던 스타인은 글을 쓰는 자신과 그림을 그리는 피카소는 사실 동일한 일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녀는 물감 대신 단순하고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해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시를 개발했다. 스타인의 단순한 단어들의 순수한 면은 현대 미술의 밝은 원색을 연상시키며, 반복적인 표현은 추상적인 시각 구상 작품의 반복적인 모양을 반영하고 있다. 그녀는 문법과 구두법을 혼란스럽게 씀으로써 새로운 ‘추상적’ 의미들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그녀의 시집 《부드러운 단추들(Tender Buttons)》(1914)에서는 입체파 그림처럼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있다.

  

  

탁자를 탁자는 의미하지 않는다 내

사랑아 그것은 완전한 안전함을 의미한다.

변화 가능성이 높다. 탁자는

유리잔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며

심지어 유리거울은 크다.

  

스타인 작품에서 의미는 기법에 종속하는데 이는 추상 시각미술에서 형식이 소재보다 더 중요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주제와 기법은 그 당시 시각미술과 문학 모두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술과 문학에서 초석이 된, 내용의 등가물等價物로서의 형식이라는 개념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공장과 기계 산업에서의 기술 혁신은 예술의 기법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자면 빛, 특히 전깃불은 현대 미술가와 작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포스터와 광고는 투광조명을 비춘 고층 빌딩 이미지와, 무지와 낡은 전통을 의미하는 삭막한 어둠을 밝히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극장, 감시탑에서 나오는 빛줄기들의 이미지로 가득했다.

과학 발전을 통해 사진이 예술의 위치에 오르기 시작했다. 사진가 앨프레드 스티글리츠는 뉴욕 시에 화랑을 열고 1908년까지 피카소와 거트루드 스타인의 유럽 친구들의 작품 등 최신 유럽 작품들을 전시했다. 스티글리츠의 화랑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시인들 중 한 명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가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스는 이미지의 사진적인 명쾌성을 연마했는데, 그의 미학적 격언은 “사상이 아니라 사물을 통해서(no ideas but in things)”였다.

시각과 관점은 모더니즘 소설에서도 본질적인 면이 되었다. 직접적인 3인칭 서술이나 혹은 부적절하게 참견하는 화자의 사용은 더 이상 충분한 서술 방법이 되지 못했다. 이야기를 말하는 방식이, 이야기 자체만큼이나 중요해졌다.

헨리 제임스, 윌리엄 포크너를 비롯한 많은 미국 작가들은 허구적인 시점에 대해 실험했으며, 일부 작가들은 아직도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제임스는 종종 소설 속의 정보를 한 인물이 알고 있는 정보만으로 제한하기도 했다. 포크너의 소설 《음향과 분노(The Sound and the Fury)》(1929)는 이야기를 전체 4장으로 나누어 각 장마다 다른 인물(정신지체아까지 포함해)의 관점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런 모더니즘 작품들을 분석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새로운 비평 언어를 지닌 ‘신비평(New Criticism)’이 등장했다. 신비평 학자들은 ‘에피파니(epiphany, 인간들에게 성인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로, 현대 문학에서는 한 등장인물이 자신이 처한 상황의 진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를 찾으려 했으며, 자신들의 통찰력으로 작품을 조명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작품을 철저히 분석하고 명료화했다.

  

  

  

  

1914~1945년의 시:형식 실험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

 

에즈라 파운드는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미국 시인 중 한 명이다. 파운드는 1908년부터 1920년까지 런던에 거주하면서 많은 작가들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중에는 자신이 비서로 일했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자신이 과감하게 편집하고 수정했던 시 《황무지》의 시인 T. S. 엘리엇이 있었다. 파운드는 미국과 영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해리엇 먼로의 중요한 시카고 잡지 《포이트리》에서 공헌도 높은 편집자로 일했다. 그는 또한 매우 시각적이고 명료한 표현을 옹호하는 ‘이미지즘’이라는 새로운 시 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미지즘에 따라 다양한 시적 접근을 시도하던 파운드는 이탈리아로 가서 파시즘에 빠지게 되었다.

파운드는 편지, 수필, 시선집 등을 통해 이미지즘을 진전시켰다. 1915년 먼로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상투어나 관용구’ 등을 피하며 현대적인 음성을 지닌 시각적 시를 옹호한다고 했다. 그는 <이미지즘 시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A Few Don?s of an Imagiste)> (1913)라는 글에서 이미지를 “순간에 지적이고 감성적인 복잡성을 전달하는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1914년 파운드가 시인 10인의 시를 모은 선집 《이미지즘 시인들(Des Imagistes)》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힐다 두리틀, 에이미 로웰 등을 비롯한 뛰어난 작가들의 이미지즘 실례를 수록하고 있다.

파운드의 관심과 독서는 세계적이었다. 그의 번안물과, 더러 틀린 점도 있지만 대체로 훌륭했던 번역물들은 다양한 문화로부터의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미국의 현대 작가들에게 소개했다. 그의 역작은 《캔토스(The Cantos)》로, 눈을 감는 날까지 집필하고 출간했던 시들이다. 훌륭한 시구를 담고 있는 《캔토스》는 다양한 시대 및 문화로부터 온 문학과 예술 작품을 인유하고 있어 난해하다. 파운드의 시는 명백한 시각 이미지, 신선한 운율, 남성적이고 지적이며 평범하지 않은 글귀로 유명하다. 이러한 특성은 <캔토 81>에 나오는 “용의 세계에서 개미는 켄타우루스다”라는 표현과 다음의 <지하철역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1916) 같은 일본 하이쿠로부터 영감을 받은 시들에 나타나 있다.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난 얼굴들;

축축한 검은 나뭇가지의 꽃잎들.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은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 소르본 대학, 옥스퍼드 대학의 머튼 칼리지 등에서 공부한 그는 동시대 주요 미국 작가들 중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작가였다. 그가 공부했던 산스크리트 어와 동양 철학은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파운드처럼 그도 일찍 영국으로 건너가 문학계에서 거대한 인물이 되었다. 당시 가장 존경받는 시인 중 한 명이었던 엘리엇의 모더니즘적이고 보기에 비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새로운 시들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또한 영향력 있는 수필과 희곡을 집필해 현대 시인들에게 문학적렌英맛?전통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비평가로서 엘리엇은 ‘객관적 상관물’을 공식화시킨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는 《신성한 숲(The Sacred Wood)》에서 객관적 상관물을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무리의 사물, 정황, 일련의 사건”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J. 앨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1915)는 이런 접근법을 구체화한 것으로, 이 시에서 나이든 화자 프루프록은 스스로 ‘커피 스푼으로 내 삶을 쟀다’고 생각하는데, 이 구절에서는 단조로운 존재와 낭비된 인생의 반영으로 커피 스푼이라는 상관물이 사용되었다.

<프루프록의 연가>의 유명한 서두는 현대적인 삶처럼, 인생이 던지는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 천박한 골목길로 독자를 초대하고 있다.

  

  

자 우리 갑시다, 당신과 나

수술대 위에 누운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을 배경으로 사지를 뻗고 있는 지금

우리 갑시다, 반쯤 인적 끊긴 어느 거리를 통해

싸구려 일박 여인숙에서의 불안한 밤이

중얼거리며 숨어드는 곳,

굴 껍질 흩어져 있는 톱밥 깔린 레스토랑을 지나

위압적인 질문으로 당신을 인도할

음흉한 의도의

지루한 논쟁처럼 이어진 거리들을 지나

오, 묻지는 마세요, “무엇이냐?”라고.

일단 가서 방문해봅시다.

  

  

제1차 세계대전 즈음 런던의 분주한 거리를 환기시키기 위해 단테의 지옥을 반영하는 《황무지》(1922)에서도 비슷한 이미지가 가득 배어 있다.

  

  

현실감 없는 도시,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런던 다리 위로 흘러갔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죽음이 망쳤으리라고는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I, 60-63)

《황무지》의 비전은 궁극적으로 묵시록과 같은 보편성을 지닌 것이다.

  

  

보랏빛 허공 속에 있는 깨어짐 재건 그리고 다시 터짐

무너지는 탑들

예루살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비엔나 런던

현실감이 없는 (V, 373-377)

  

  

엘리엇의 다른 주요 작품 중에는 서구 사회의 노쇠함을 상징하기 위해 노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 <작은 노인>(1920), 인간성 상실에 대한 감동적인 만가인 <텅 빈 사람들(The Hollow Men)>(1925),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영국 국교회로 마음을 돌리고 있는 《재의 수요일(Ash-Wednesday)》(1930), 시간과 자아의 본질, 영적인 각성 등 초월적인 주제에 대한 복잡하고 실험적인 명상시 《4개의 4중주(Four Quartets)》(1943) 등이 있다. 그의 시, 특히 과감하고 새로운 초기 작품들은 몇 세대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

로버트 리 프로스트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지만 10살 때까지 미국 북동부에 있는 농장에서 성장했다. 엘리엇과 파운드처럼 그도 영국으로 건너갔고 새로운 시운동에 이끌렸다. 카리스마적인 시 낭송가였던 그는 순회공연으로 명성을 날렸고,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 때는 자작시를 낭송해, 시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을 촉발하기도 했다. 그의 인기는 쉽게 설명되는데, 전통적인 농장 생활에 관한 시를 씀으로써 옛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프로스트의 소재는 사과 따기, 돌담, 울타리, 시골길 등으로 보편적인 것들이었다. 그는 명쾌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창작했다. 그는 인유나 생략법 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각운脚韻 또한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프로스트의 작품은 종종 단순해 보이지만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거의 최면적인 각운을 지닌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1923)라는 시에서 배경이 되는 조용히 눈 내리는 저녁은 죽음에 대한 차분한 태도를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게 누구의 숲인지 알 듯하다.

그 사람 집은 마을에 있지만

그는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여기 멈춰 서서

자신의 숲에 눈 쌓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내 조랑말은 나를 기이하게 여길 것이다,

근처에 농가라곤 하나 없는데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서

연중 가장 캄캄한 이 저녁에 길을 멈추었으니.

  

  

말은 방울을 흔들어댄다,

뭐가 잘못됐느냐고 묻기라도 하듯.

그밖의 소리는 오직 가볍게 스쳐가는

바람소리, 부드러운 눈송이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월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55)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태어난 월러스 스티븐스는 하버드 대학과 뉴욕 대학 법대를 졸업했다. 그는 1904년부터 1916년까지 법률 활동을 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겸했다. 1916년 보험회사의 간부가 되기 위해 코네티컷의 하트퍼드로 이사를 가서도 시를 계속 창작했다. 그의 삶은 놀랍게도 시인으로서의 생활과 직장인으로서의 생활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는데, 보험회사 관계자들은 그가 당시 유명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풍금(Harmonium)》(1931년 개정판), 《질서의 관념들(Ideas of Order)》(1935), 《세계의 부분들(Parts of a World)》(1942) 등과 같은 적절하게 이름 지어진 시집에서 보이듯이 평생 미학적인 질서에 대한 매우 복잡한 생각들을 개발하는 데 매진했다. 그의 유명한 시들 중에는 <일요일 아침(Sunday Morning)>, <건반 앞의 피터 퀸스(Peter Quince at the Clavier)>, <아이스크림의 황제(The Emperor of Ice-Cream)>, <검은새를 보는 13가지 방법(Thirteen Ways of Looking at a Blackbird)>, <키웨스트에서 질서의 관념(The Idea of Order at Key West)> 등이 있다.

 

스티븐스의 시는 상상력, 미학적 형식의 필요성, 예술의 질서는 자연의 질서와 호응해야 한다는 믿음 등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가 사용한 시어는 풍부하고 다양하다. 그는 울창한 열대 지방의 장면들뿐만 아니라, 유머 넘치고 아이러니한 삽화 같은 장면들 또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 일부는 대중문화를 다루고 있으며 어떤 시들은 복잡한 사회에 대해 조롱하거나 지나치게 지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그는 “이윽고 탬버린 같은 소음을 내며/그녀를 시중드는 비잔틴 사람들이 왔다(Soon, with a noise like tambourines/Came her attendant Byzantines)”는 표현에서처럼 풍부한 언어 유희로 유명하다.

스티븐스의 작품은 놀라운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그는 때로 다음의 <10시의 환멸(Disillusionment of Ten O?lock)>(1931)이라는 시처럼 독자들에게 장난을 친다.

  

  

그 집들에는

흰색 잠옷들이 출몰한다.

어떤 것도 초록색이 아니다.

초록색 링이 달린 자주색도

노란색 링이 달린 초록색도

파란색 링이 달린 노란색도 아니다.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다,

레이스와 작은 구슬 달린 띠가 있는

양말을 신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비비와 고둥을 꿈꾸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늙은 선원만이

술에 취해 장화를 신은 채 잠들어

호랑이를 잡는다,

붉은 날씨 속에서.

  

  

이 시는 상상력이 없는 삶(평범한 흰 잠옷)을 불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시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생생한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끝에서 재산에는 관심 없는 술 취한 선원이 비록 꿈에서지만 ‘호랑이를 잡는다’. 이 시는 인간의 상상력이 항상 창조적인 출구를 찾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 1883~1963)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평생 소아과 의사로 일했다. 그는 2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도와주었고 처방전에 시를 적기도 했다. 윌리엄스의 초기 시들은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후에 구어체 사용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미국 영어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활용해 미국 시가 르네상스 시기부터 영국 시를 주도하고 있던 단장격短長格 형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현대 도시에 살고 있는 노동자와 아이들, 그리고 도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사건들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애정 때문에 독자는 그의 시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네덜란드 정물화와 같은 <빨간 손수레(The Red Wheelbarrow)>(1923)는 일상적인 사물에서 흥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다.

  

  

많은 게

놓여 있다

  

  

빨간 바퀴

손수레에

  

  

빗물에 젖어

빛나는데

  

  

그 곁에 흰

병아리들

윌리엄스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시를 개발했다. 그에게 시는 스티븐스처럼 완벽한 예술품을 만드는 것도 아니었고, 프로스트처럼 워즈워스적인 사건들을 조심스럽게 재창조하는 것도 아니었다. 윌리엄스에게 시는 포즈를 취하지 않고 찍은 스냅 사진처럼 순간을 포착하는 것인데, 이 개념은 윌리엄스가 뉴욕 시의 스티글리츠 살롱 같은 갤러리에서 만난 사진가들과 예술가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시 <젊은 주부(The Young Housewife)>(1917)에서 보이듯이 그의 시는 종종 숨겨진 가능성이나 유혹 등을 스냅 사진처럼 포착해내고 있다.

  

  

오전 10시 젊은 주부가

남편의 집 나무 벽 뒤쪽으로

평상복을 입고 움직이고 있다.

나는 내 차를 타고 쓸쓸히 지나간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얼음장수, 생선장수를

만나러 길모퉁이에 가서

수줍어하며 코르셋도 입지 않은 채로

흩어진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서 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낙엽에 비유한다.

  

  

내 차의 소리 없는 바퀴들은

마른 잎사귀들 위로 바스락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내가 인사하고 미소 지으며 지나갈 때.

그는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사물들의 중요성을 제시하는 자신의 작품을 ‘사물주의(objectivist)’라고 불렀다. 그의 작품은 경험의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면을 포착하고 있으며, 1950년대 초반 ‘비트’ 작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엘리엇과 파운드처럼 윌리엄스 또한 서사시 형식에 도전했는데, 엘리엇과 파운드의 서사시가 문학적인 인유를 사용하며 교육 수준이 높은 소수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반면, 윌리엄스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서사시를 창작했다. 엘리엇이나 파운드와 달리 윌리엄스는 해외에서 수학했지만 미국에서의 삶을 선택한 시인이다. 그의 5권짜리 서정시집 《패터슨(Paterson)》(1946~58)은 자전적인 인물 패터슨 박사의 눈으로 바라본 그의 고향 뉴저지 주 패터슨을 찬미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윌리엄스는 서정적인 문구, 산문, 편지, 자서전, 신문 기사, 역사적 사실들을 병치시키고 있다. 그의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넓은 여백은 미국 문학에 나타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한 ‘열린 길’을 내포하며, 동시에 일요일 공원에 소풍 나온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는 새로운 장소의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휘트먼의 《풀잎》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패터슨 박사 또한 노동자들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인다.

  

  

-늦봄,

일요일 오후!

  

  

-벼랑으로 가는 오솔길을 따라 간다 (숫자를 세며:증명)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이 개와 발을 맞춰 오르다가

밟고 미끄러진 그 돌멩이를 이어 밟으며!

  

  

웃으며 서로에게 소리치며-

  

  

기다려! (II, i, 14-23)

  

  

  

  

양차 세계대전 사이 작가들

  

  

로빈슨 제퍼스(Robinson Jeffers, 1887~1962)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재능 많고 참된 시각을 지닌 미국 시인들이 대거 등장했다. 그들 중에는 서부 연안 출신의 시인들과 여성 및 흑인 시인들도 있었다. 소설가 존 스타인벡처럼 시인 제퍼스는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스페인 농장 소유자, 인디언, 그들의 혼합된 전통, 대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글을 썼다. 고전 문학을 공부하고 프로이트에 정통했던 그는 거친 해안 풍경을 배경으로 그리스 비극의 주제를 재창조했다.

그의 비극적 이야기시 중 잘 알려진 작품은 《타마(Tamar)》(1924), 《얼룩털의 종마(Roan Stallion)》(1925),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Agamemnon)》을 다시 쓴 《비극 너머의 탑(The Tower Beyond Tragedy)》(1924),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다시 쓴 《메데아(Medea)》(1946) 등이 있다.

  

  

에드워드 에스틀린 커밍스(Edward Estlin Cummings, 1894~1962)

 

일반적으로 e. e. 커밍스로 알려진 에드워드 에스틀린 커밍스는 유머, 세련미, 사랑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찬미, 구두점에 대한 실험과 시각적 형식 등의 특징을 지닌 매력적이고 새로운 시를 창작했다. 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시가 우선적으로 언어 예술이 아니라 시각적인 예술로 변했음을 인지한 첫 번째 미국 시인이었다. 그는 자간과 들여쓰기를 남다르게 구사했으며, 대문자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윌리엄스와 마찬가지로 커밍스는 구어체, 날카로운 이미지, 대중문화에서 비롯된 단어들을 사용했다. 또한 윌리엄스와 마찬가지로 시를 자유롭게 배열하였다. 그의 시 <이제 막(in Just)> (1920)은 독자들에게 중간에 빠진 생각들을 채우도록 하고 있다.

  

  

이제 막 --

  

  

봄 세상이 진흙인

감미로운 작은

절름발이 풍선장수는

  

  

멀리 휘파람을 불고 휙

  

  

그리고 에디와빌은*

구슬치기와 해적놀이를 하다

달려온다 이제

봄이다...

* ‘에디와 빌’이라는 의미인데 커밍스는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무시했다-옮긴이

  

  

하트 크레인(Hart Crane, 1899~1932)

 

하트 크레인은 33살의 나이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한 고뇌에 찬 젊은 시인이었다. 그는 서사시 《다리(The Bridge)》(1930)와 같은 놀라운 시들을 남겼는데, 이 시는 브루클린 다리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이었다. 하트는 이 시를 통해 의욕적으로 미국적 문화 경험을 검토하고 이를 긍정적인 언어로 바꾸어 표현하고자 했다. 그의 감미롭고 열정적인 스타일은 <항해(Voyages)>(1923, 1926)와 <멜빌의 무덤에서(At Melville? Tomb)>(1926) 등의 짧은 시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멜빌의 무덤에서>의 마지막 부분은 크레인 자신에게 적합한 묘비명이다.

  

  

만가를 불러도 그 선원은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바다만이 이 전설적인 그림자를 지키고 있다.

  

매리앤 무어(Marianne Moore, 1887~1972)

 

매리앤 무어는 시에 대한 정의를 “살아 있는 두꺼비들이 있는 가상의 정원”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녀의 시는 회화체이지만 분절마다 정확성을 기할 만큼 정교하고 섬세하며, 지나칠 정도로 정확한 묘사와 역사적럭墟隙?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시인의 시인’이었던 그녀는 어린 친구 엘리자베스 비숍 등을 비롯한 후기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랭스턴 휴스

(Langston Hughes, 1902~1967)

 

랭스턴 휴스는 제임스 웰든 존슨, 클로드 매케이, 카운티 컬른 등과 함께 1920년대 흑인들의 문학운동인 할렘 르네상스 시기에 나온 재능 있는 시인들 중 한 사람이다. 휴스는 아프리카 계 미국인의 재즈 리듬을 수용했으며, 글쓰기로 돈이 되는 경력을 쌓으려고 했던 최초의 흑인 작가들 중 한 명이다. 휴스는 자신의 시에 블루스, 흑인 영가, 구어체적 연설, 흑인 풍속 등을 결합시켰다.

휴스는 영향력 있는 문화 조직자로서 수많은 흑인문학 선집을 출간했으며 뉴욕뿐만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지에서 흑인 연극단체들을 설립했다. 그는 또한 사회 논평을 위해 허구적인 인물 제시 B. 셈플을 창조하여 효과적인 저널리즘 글을 집필했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의 시 <검둥이, 강에 대해 말하다(The Negro Speaks of Rivers)>(1921, 1925)는 서사시라는 장르 속에 아프리카적이면서 동시에 우주적인 유산을 감싸 안은 작품이다. 이 시는 세상의 모든 위대한 강들처럼 아프리카 문화도 인내 속에서 더 깊어진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강을 알고 있다.

세상처럼 나이 들고 인간의 핏줄 속에 흐르는 피처럼 오래된 강들을.

  

  

내 영혼은 강처럼 깊이 자랐다.

  

  

나는 이른 새벽에 유프라테스 강에서 목욕을 했다.

내가 콩고 강 옆에 오두막을 지으니 그 강은 나를 달래어 재웠다.

나는 나일 강을 바라보고 그 위에 피라미드를 세웠다.

나는 에이브 링컨이 뉴올리언스에 왔을 때 미시시피 강의 노랫소리를 들었고 나는 흙탕물 섞인 강물의 가슴이 일몰에 금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강을 알고 있었다.

나이 들고 어슴푸레한 강들을.

  

  

내 영혼은 강처럼 깊이 자랐다.

  

  

  

  

1914~1945년의 산문:미국적 리얼리즘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미국의 산문 작가들은 유럽 작가들처럼 실험적인 관점과 형식을 창조했지만, 전반적으로 유럽 작가들에 비해 더욱 사실적인 글을 썼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전쟁, 사냥, 그리고 기타 남성적인 이야기들을 장식적이지 않은 평이한 문체로 그려냈다. 윌리엄 포크너는 선 굵은 남부 소설들을 미시시피의 열기와 먼지 속에 뿌리박고 있는 세대와 문화를 배경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싱클레어 루이스는 부르주아적 생활을 아이러니하고 명쾌하게 서술했다.

현실에 대한 직시의 중요성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주도적인 주제가 되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와 극작가 유진 오닐은 얄팍한 꿈에 기대 살고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비극성을 반복적으로 묘사했다.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 1896~1940)

 

프랜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의 인생은 동화를 닮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피츠제럴드는 미군에 입대했고, 자신의 근무지인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근처에 사는 부유한 미모의 여인 젤다 세이어와 사랑에 빠졌다. 피츠제럴드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젤다는 약혼을 파기했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그는 젤다와 결혼하기 위해 뉴욕으로 가서 문학적 성공을 꿈꿨다.

그의 첫 번째 소설 《낙원의 이편》(1920)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들은 결혼했지만, 둘 다 성공과 명성으로부터 온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절제된 생활을 하기 위해 1924년 프랑스로 갔다가, 7년 후 미국으로 돌아왔다. 젤다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 때문에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피츠제럴드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영화 각본을 쓰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미국 문학에서 피츠제럴드의 확고한 입지는 무엇보다도 그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1925) 때문이다. 이 소설은 아메리칸 드림과 자수성가에 관한 것으로서, 훌륭한 문체와 간결한 구조를 지녔다. 신비로운 주인공인 제이 개츠비는 자아 성취와 사랑이라는 면에서 성공의 파괴적인 대가를 깨닫게 된다. 다른 수작으로는 심리가 불안한 여성과 결혼하는 바람에 삶에 어둠이 드리워지게 되는 젊은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인 《밤은 상냥하다(Tender Is the Night)》(1934), 단편소설집 《말괄량이와 철학자들(Flappers and Philosophers)》(1920), 《재즈 시대의 이야기(Tales of the Jazz Age)》(1922), 그리고 《모든 슬픈 젊은 남자들(All the Sad Young Men)》(1926) 등이 있다. 피츠제럴드는 다른 어느 작가보다 더 많이 1920년대의 화려하면서도 절망적인 삶을 포착해내고 있다. 《낙원의 이편》은 현대 미국 젊은이의 목소리의 도래를 알린 작품이다. 피츠제럴드는 두 번째 소설 《아름다운 자들과 저주받은 자들(The Beautiful and the Damned)》(1922)에서 자기 파괴적이고 무절제한 시대를 계속 탐구했다.

 

유혹적인 화려함이라는 주제에 걸맞은 눈부신 스타일은 그의 특징 중 하나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기나긴 시간의 흐름을 능숙하게 요약한 유명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여름 밤 내내 내 이웃집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렸다. 이웃의 푸른 정원에는 남자와 여자들이 나방들처럼 속삭임과 샴페인, 별들 사이를 오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어니스트 헤밍웨이처럼 다채로운 삶을 산 작가도 드물다. 헤밍웨이의 삶은 그의 모험 소설 중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듯하다. 피츠제럴드, 드라이저, 그리고 다른 많은 20세기의 우수한 소설가들처럼 헤밍웨이는 미국 중서부에서 태어났다.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에는 미시간 주에서 사냥과 낚시 여행을 하면서 방학을 보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의용병으로 자원해 프랑스에 갔으며 부상을 당해 6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헤밍웨이는 전쟁이 끝난 뒤 파리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며 고국을 떠나 생활하고 있는 셔우드 앤더슨, 에즈라 파운드, F.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등을 만났다. 특히 스타인은 그의 경제적인 글쓰기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1926)로 명성을 얻게 된 후에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1940년대 중국에서의 분쟁 등을 다루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파리 여행을 하던 중 자신의 경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심하게 다쳤지만, 사냥과 낚시 등 그의 최고 작품들에 영감을 주었던 활동들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늙고 가난한 어부가 영웅적으로 거대한 물고기를 잡지만 고기가 상어의 공격으로 다 뜯기게 된다는 내용의 짧고 시적인 소설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1952)로 195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그 이듬해에는 노벨상을 수상했다. 가정 문제와 지병, 문학적 재능을 상실했다는 생각에 낙심한 그는 1961년에 총기로 자살했다.

 

논쟁의 여지는 있겠지만 헤밍웨이는 20세기에 가장 인기 있는 미국 소설가이다. 그의 감수성은 기본적으로 비정치적이고 인간적인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는 보편적인 작가이다. 그의 단순한 스타일은 그의 소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의 소설들은 종종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경험이라는 신앙’을 믿었던 헤밍웨이는 등장인물들을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고 그들이 내적인 본성을 드러내도록 했다.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는 때때로 위험한 상황이 남성다움을 보여줄 기회로 사용되고 있다.

 

피츠제럴드처럼 헤밍웨이는 자기 세대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던 피츠제럴드처럼 치명적인 화려함을 묘사하는 대신 전쟁과 죽음, 그리고 냉소적인 전쟁 생존자들로 구성된 ‘잃어버린 세대’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몽상가가 아니라 강인한 투우사, 군인, 운동선수들이다. 그들은 지적이긴 하지만 깊이 상처받고 환멸을 느끼고 있다.

헤밍웨이의 특징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체이다. 그는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는데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1929)에서 여주인공은 아이를 낳다가 죽으면서 “난 조금도 두렵지 않아. 이건 그냥 더러운 장난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그는 한때 자신의 글쓰기를 빙산에 비유하면서 “보이는 것의 8분의 7은 물밑에 있다”라고 말했다.

헤밍웨이의 훌륭한 대화와 정확한 묘사는 <킬리만자로의 눈(The Snows of Kilimanjaro)>과 <프랜시스 매컴버의 짧고 행복한 삶(The Short Happy Life of Francis Macomber)> 등의 단편소설에 나타나 있다. 그의 최고 장편소설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도덕성을 상실한 이방인들의 삶을 그리고 있는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과 영국 간호사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무기여 잘 있거라》,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1940), 《노인과 바다》 등이 있다.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1897~1962)

 

오래된 남부 가정에서 태어난 윌리엄 해리슨 포크너는 미시시피 주 옥스퍼드에서 성장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포크너는 완전한 가상의 장소인 요크나파토파 카운티를 창조해 많은 소설에서 이곳을 언급하고 또한 과거 몇 세대 동안 서로 연결되어 있는 허구의 가족들을 창조해냈다. 제퍼슨을 중심지로 두고 있는 요크나파토파 카운티는 미시시피 주 옥스퍼드와 그 주변을 모델로 하고 있다. 포크너는 그 땅의 역사와 그곳에 살았던 인디언, 아프리카 계 미국인, 유럽 계 미국인, 다양한 혼혈인 등 다양한 인종들을 재창조하고 있다. 포크너는 연대기적 서사, 다양한 관점 및 목소리(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 아이들, 문맹자 등을 포함하여), 복잡한 종속절을 지닌 지나칠 정도로 긴 문장들로 구성된 풍부하고 읽기 힘든 바로크 스타일 등으로 훌륭한 실험 소설들을 창작했다.

 

포크너의 최고 소설로는 가족의 일원을 잃게 되는 상황에 처한 남부 가족의 모습을 탐색하기 위해 실험적인 시점을 활용한 두 편의 모더니즘 작품 《음향과 분노》(1929)와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As I Lay Dying)》(1930),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 간의 복잡하고 폭력적인 관계를 그린 《8월의 빛(Light in August)》(1932), 그리고 자수성가한 대농장주가 인종 편견 및 사랑의 실패로 패배자가 된다는 내용을 다루었으며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압살롬, 압살롬!(Absalom, Absalom!)》(1936) 등이 있다.

 

이들 소설 대부분은 각기 다른 등장인물이 이야기의 한 부분만을 전달하도록 하여 다루고 있는 소재뿐만 아니라 이야기하는 방식에 따라 어떻게 의미가 전달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관점을 사용하기 때문에 포크너는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에 비해 좀더 자기반영적이다. 즉, 각 소설은 보편적인 관심을 지닌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동시에 글쓰기 자체를 반영하고 있다. 포크너의 주제는 남부의 전통, 가족, 사회, 대지, 역사와 과거, 인종, 야망과 사랑 등이다. 그는 또한 퇴화하는 가족 스놉스 가에 초점을 맞춘 세 편의 소설 《촌락(The Hamlet)》(1940), 《마을(The Town)》(1957), 《저택(The Mansion)》(1959)을 집필했다.

  

  

  

  

사회 인식 소설들

  

  

1890년대부터 사회 저항의 기류는 미국 문학계를 타고 흐르다가 스티븐 크레인과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자연주의, 그리고 사회 문제 고발 소설가들의 명쾌한 메시지를 통해 크게 부각되었다. 그들에 이어 사회 문제에 참여한 작가들로는 싱클레어 루이스, 존 스타인벡, 존 더스 패서스, 리처드 라이트, 그리고 극작가 클리포드 오데츠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1930년대에 일반 시민의 복지에 대해 관심을 보인 작가들이다. 그들은 또한 일군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는데, 싱클레어 루이스는 《애로스미스(Arrowsmith)》에서 의사, 《배빗(Babbitt)》에서 사업가 등 전문직 종사자들을 다루고 있으며,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에서 가족을, 더스 패서스는 《미합중국(U.S.A.)》 3부작에서 등장인물 11명을 통해 도시 대중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다.

  

  

싱클레어 루이스

(Sinclair Lewis, 1885~1951)

 

해리 싱클레어 루이스는 미네소타 주의 소크 센터에서 태어나 예일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학교를 휴학하고 사회 고발 소설가인 업튼 싱클레어가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사회주의 생활 공동체 헬리컨 홈 콜로니에서 일했다. 루이스의 《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1920)는 미네소타 주 고퍼 프레리를 배경으로 단조롭고 위선적인 소도시 생활을 풍자하고 있다. 미국 생활에 대한 날카로운 재현과 미국적 물질주의, 편협성, 위선 등에 대한 비판으로 루이스는 전국적인, 그리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26년에는 탐욕과 타락으로 가득한 의료계에서 윤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의사를 추적한 《애로스미스》(1925)로 퓰리처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상을 거절했다. 1930년에는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루이스의 또 다른 주요 소설에는 《배빗》(1922)이 있다. 주인공 조지 배빗은 평범한 미국 도시인 제니스에서 사는 평범한 사업가이다. 배빗은 도덕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이 강한 인물로, 사업이 현대적인 삶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접근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불안을 느끼며 무언가를 성취하려 하지만 자유분방한 여성과의 관계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부인에게 돌아가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소설은 미국 언어에 새로운 단어를 첨가하도록 만들었는데, 바로 ‘babbittry’라는 단어로, 이는 속 좁고 무관심하며 중산 계급적인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엘머 갠트리(Elmer Gantry)》(1927)는 미국 내 신앙부흥 운동가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으며 《캐스 팀벌레인(Cass Timberlane)》(1945)은 나이든 판사와 젊은 여성의 결혼으로 야기되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

  

  

존 더스 패서스(John Dos Passos, 1896~1970)

 

싱클레어 루이스처럼 존 더스 패서스도 좌익 급진주의자로 시작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익으로 옮겨갔다. 더스 패서스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원칙에 따라 작품을 창작했다. 그의 최고 작품들은 과학적 객관주의와 다큐멘터리적인 효과를 성취하고 있다. 더스 패서스는 《북위 42도선(The 42nd Parallel)》(1930), 《1919》(1932), 《거금(The Big Money)》(1936)으로 구성된 대작 《미합중국》을 위해 실험적인 콜라주 기법을 개발했다. 《미합중국》 3부작은 1900년부터 1930년까지 미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물질주의적인 미국 사회의 도덕적 타락상을 폭로했다.

더스 패서스는 《미합중국》 3부작에서 새로운 기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첫 번째 새로운 기법은 당시의 신문 머리기사, 유행가, 광고에서 따온 ‘뉴스 영화(newsreel)’ 부분이며, 두 번째 기법은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 노동운동 지도자 유진 데브스, 영화배우 루돌프 발렌티노, 금융업자 J. P. 모건, 사회학자 톨스타인 베블런 등 당시 중요한 미국인들의 삶을 간단히 보여주는 ‘전기(biography)’ 부분이다. 이러한 기법들은 더스 패서스의 소설에 다큐멘터리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세 번째 기법인 ‘카메라의 눈(camera eye)’은 책에 묘사된 사건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을 제공해주며,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산문체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1902~1968)

 

싱클레어 루이스처럼 존 스타인벡 역시 오늘날 미국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찬사를 받고 있다. 1963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이로 인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두 경우 모두 노벨 위원회가 사회 비판으로 유명한 자유주의적 미국 작가를 선택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 출신인 스타인벡의 작품 다수는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있는 살리나스 밸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최고 작품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소설 《분노의 포도》(1939)로 세계 대공황 때 농장을 잃고 일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여행하는 가난한 오클라호마 가족의 고통을 담았다. 가족들은 부유한 지주의 봉건적인 억압으로 고통을 겪는다.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한 다른 작품으로는 《토르티야 대지(Tortilla Flat)》(1935),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1937), 《통조림 공장 거리(Cannery Row)》(1945), 《에덴의 동쪽(East of Eden)》(1952) 등이 있다.

스타인벡은 대지와 가까이 사는 가난한 농부들에게서 미덕을 찾는 원시적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을 결합한다. 그의 소설은 가뭄으로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을 수도 있으며 정치 불안이나 경제 침체의 시기에 가장 먼저 고통받는 농부들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할렘 르네상스

  

  

뉴욕 시 업타운 주택 지구에 위치한 흑인 사회 할렘은 활력 넘치던 1920년대에 열정과 창조성으로 번뜩였다. 흑인들의 재즈는 태풍처럼 미국을 휩쓸었고, 듀크 엘링턴 같은 재즈 연주자와 작곡가는 미국 전역과 해외에서 스타가 되었다. 베시 스미스 등의 블루스 가수들은 적나라한 감정을 보여주는 솔직담백하고 감각적이며 비꼬는 듯한 가사를 발표했다. 흑인 영가는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종교음악으로 널리 이해되기 시작했다. 흑인 배우 에델 워터스는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흑인들의 춤과 미술은 흑인음악 및 흑인연극과 함께 크게 유행했다.

할렘에는 다양한 재능을 지닌 예술가들이 존재하는 동시에 다양한 시각 또한 존재했다. 칼 밴 베치튼이 1926년에 발표한 할렘에 관한 감상적인 소설은 사회경제적 불평등 앞에서 미국 흑인이 겪어야 하는 복잡하고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생활을 담고 있다.

 

시인 카운티 컬른(1903~1946)은 할렘 출신으로 W. E. B. 뒤 보이스의 딸과 잠시 결혼했었으며, 기존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각운을 맞춘 훌륭한 시를 창작해 백인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는 시인이라면 인종 때문에 주제나 시 스타일을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컬른과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경우는 마커스 가비의 ‘흑인들은 아프리카로’ 운동에 동조하여 미국을 거부한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이었다. 이 양 극단 사이에 바로 진 투머의 작품이 놓여 있다.

 

진 투머(Jean Toomer, 1894~1967)

 

컬른처럼 아프리카 계 미국인 소설가이자 시인인 진 투머는 인종을 초월하는 미국적 정체성을 그렸다. 아마도 이 때문에 그는 각운과 운율 면에서 시적 전통을 훌륭하게 따르면서 새로운 ‘흑인’ 형식을 추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주요 작품 《사탕수수(Cane)》(1923)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윌리엄스의 《패터슨》처럼 《사탕수수》는 시와, 산문체로 된 짤막한 글귀, 이야기, 자전적인 기록 등을 결합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한 흑인은 조지아 주의 농촌, 워싱턴 D.C., 일리노이, 시카고 등지의 흑인 사회 안팎에서, 그리고 미국 남부에서 흑인 교사로 일하며 자아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사탕수수》에서 투머가 그린 조지아 주 시골 흑인들의 모습은 자연스러우며 예술적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소나무는 기타이다

솔잎은 연주를 하면서 빗줄기처럼 떨어진다…

그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사탕수수 합창단은

별들에게 저녁 기도를 올리고 있다… (I, 21-24)

  

  

《사탕수수》는 도시 워싱턴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흑인들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대조하고 있다.

  

  

돈이 호주머니에서 타고 있다, 호주머니는 아프다.

실크 셔츠를 입은 주류 밀매자들,

풍선을 달고 달리는 캐딜락들,

전차 선로를 씽씽 달리고 있다. (II, 1-4)

  

  

리처드 라이트

(Richard Wright, 1908~1960)

 

리처드 라이트는 가난한 미시시피의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5살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가족이 버림받았다. 라이트는 중학교까지밖에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일반 독자에게 다가간 아프리카 계 미국인 소설가였다. 그의 어려웠던 어린 시절은 최고작 중 하나인 《흑인 소년(Black Boy)》(1945)에 묘사되어 있다. 훗날 그는 인종 차별로 인한 박탈감이 너무 커서, 독서만이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었다고 회고했다.

셔우드 앤더슨, 시어도어 드라이저, 싱클레어 루이스의 사회 비판과 리얼리즘이 라이트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30년대에 라이트는 공산당에 가입했다. 1940년대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에서 거트루드 스타인과 장 폴 샤르트르를 알게 되고 반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대담한 글은 후배 흑인 소설가들이 가야 할 길을 닦아놓았다.

그의 작품에는 단편소설집 《톰 아저씨의 아이들(Uncle Tom? Children)》(1938), 박력 넘치고 잔인한 소설 《토박이(Native Son)》(1940) 등이 있다. 《토박이》에 등장하는 교육받지 못한 흑인 젊은이 비거 토머스는 실수로 백인 고용주의 딸을 죽이게 되고 그녀의 몸을 태운 다음, 자신의 흑인 여자친구가 자신을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녀를 살해한다. 비록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 일부는 라이트가 흑인 등장인물을 살인자로 묘사했다며 비난했지만 이 작품은 숱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던 인종 차별을 시의적절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조라 닐 허스턴(Zora Neale Hurston, 1903~1960)

 

플로리다 주의 작은 마을 이튼빌에서 태어난 조라 닐 허스턴은 할렘 르네상스를 빛낸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16살 때 유랑극단의 일원으로 뉴욕 시에 처음 오게 되었다. 청중을 사로잡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야기꾼이었던 그녀는 버나드 대학에 다니게 되었고, 그곳에서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즈와 함께 공부하며 민족성을 과학적인 관점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보아즈는 그녀에게 고향 플로리다의 민담을 모아보라고 했고, 그녀는 보아즈의 말을 따랐다. 저명한 민속학자 앨런 로맥스는 허스턴의 《노새와 인간(Mules and Men)》(1935)을 “가장 흡입력 있고 독창적이며 능수능란하게 씌어진 민담집”이라고 불렀다.

허스턴은 또한 카리브 연안의 민담을 모아 《내 말에게 말하라(Tell My Horse)》(1938)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천부적인 구어체 영어 실력으로 그녀는 마크 트웨인의 위대한 전통 속에 포함되었다. 그녀의 글은 아프리카 계 미국인의 구비문학 전통에서 나온 다채로운 언어와 코믹한 혹은 비극적인 이야기들로 번뜩인다.

허스턴은 인상적인 소설가이다. 그녀의 가장 중요한 소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Their Eyes Were Watching God)》(1937)는 아름다운 흑백 혼혈 여성이 세 차례의 결혼을 겪으면서 성숙해가고, 결국 행복을 되찾는 이야기를 감동적이며 신선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미국 남부 시골에서 일하고 있는 흑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린다. 여성운동의 선구자인 허스턴은 자서전 《길 위의 먼지 자국(Dust Tracks on a Road)》(1942) 등의 책들을 통해 앨리스 워커, 토니 모리슨 등 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문학 비평:탈주자 그룹(the Fugitives)과 신新비평

  

  

독립전쟁을 지나 20세기가 되어서도 미국 남부에서는 인종 차별과 미신으로 가득한 정치경제적 침체가 계속되었지만, 동시에 그곳은 다채로운 풍속과 강한 자부심, 전통 의식으로 축복받은 곳이었다. 당시 남부는 지방패권주의를 지닌 무지한 문화의 불모지라는 다소 부당한 오명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20세기 가장 의미심장한 지역적 문화운동이 문학 이론가 존 크로 랜섬, 시인 앨런 테이트, 소설가 겸 시인이자 수필가 로버트 펜 워런이 이끄는 탈주자 그룹에 의해 바로 남부에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남부 문학파인 탈주자 그룹은 미국을 장악하고 있던 ‘북부적인’ 도시상업적 가치들을 거부했다. 탈주자 그룹은 남부에 아직도 남아 있는 미국 전통과 대지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이들 그룹은 문학잡지 《퓨지티브(The Fugitive)》에서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이 잡지는 테네시 주 내슈빌에 있는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1922년부터 1925년까지 간행되었고, 랜섬렴戮鉗?워런 모두가 여기에 관여했다.

 

이 3명의 주요 탈주자 작가들은 세밀한 독서를 통해 형식(이미지, 은유, 운율, 소리, 상징 등)과 형식이 제시하는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며 문학을 이해하려는 접근 방법인 신비평과 연관되어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남부의 문예부흥을 주도한 이론가인 랜섬은 이런 방법에 기초한 저서 《신비평(The New Criticism)》(1941)을 출간했으며, 이를 통해 역사와 전기 등 문학 외적인 요소를 통한 기존의 비평 방법에 대해 대안을 제시했다. 신비평은 엘리엇 등 모더니즘 작가들을 비평하는 데 아주 적합하고, 프로이트 이론(특히 이드, 에고, 초자아 등 구조적인 구분)과 신화적인 패턴을 이용한 접근 방법을 흡수할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1940년대와 1950년대 주도적인 비평 방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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