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반 근

2006.03.31 06:39

김영교 조회 수:593

김영태[-g-alstjstkfkd-j-]그늘 반 근의 거인

                김영교

    나의 3권의 시집과 1권의 수필집 표지그림을 애정으로 그려준 김영태 화백은 큰 오라버니의 오랜 친구시다. 몇 주 전에 그가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충격의 전화를 받았다.‘어머나, 어쩌지’ 하면서 많은 것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어들었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 242는 감영태(金榮泰)화백의 "그늘 반 근"이었다. 책 제목이 나의 시선을 몽땅 가져간 것은 온 몸이 반 근의 예리한 송곳이 되어 세상을 찔러대는 그를 연상했기 때문이었다.
    상처를 싸매 주는데 반 근의 사랑이면 족했고 슬픔도 반 근이면 족하다는 그의 비명을 듣는 듯 했다. 항상 외로워 보이는 듯 조그마한 어깨 밑에 깔린 반 근의 압축된 응시는 무대 위로, 원고지 위로, 캔버스 위로 자연스럽게 분출되어 그의 비평가의 삶이 더욱 빛을 발하기도 했다.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그의 비범함이 나는 좋았다. 지금까지 변함없는 우정을 나는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앞으로도 지속되어지기를 소망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미술, 문학, 음악 그리고 춤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그의 독특한 예술성에 나는 매료되었다. 김영태화백은 늘 반 근의 여백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없는 듯 꽉 채우며, 모자라는 듯 차고 넘쳤다. 실체 없는 그늘이 존재 할 리 없다.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빛의 개입으로 그늘의 존재가치는 더욱 선명해졌다.
풀기가 가신 윗도리 아래 헐렁하게 삶의 원고지를 놓고 하루하루 지고의 미(美)로 가득 채우며 살아가는 자유인, 가끔은 이빨도 아프고 기가 질리는 속  쓰림 마저 껴안고 외로움과도 살을 섞으며 살아갈 줄 아는 그가 옆에 있어서 서가엔 그의 저서들이 거의 다 꽂혀 있는 게 나로선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실수로 비자를 놓쳐 문우 일행은 다 북경으로 떠나고 본의 아니게 혼자 서울에 남겨져 약간 울적한 기분이었을 때 김영태화백과의 회식은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다. 아카사카에서 내려다 본 서울은 비 온 뒤여서 한강도, 남산도 수묵화처럼 안개비에 평화스럽게 젖어있어 아름다웠다.
     오라버니와 함께 그는 도미조림을, 올케와 나는 도시락을 먹었다. 그러나 진짜로 맛있던 것은 그가 풀어놓는 옛날이야기 꾸러미였다. 천상병(千祥炳)시인이 소설가 한무숙(韓戊淑)씨 댁에 갔을 때라고 한다. 향수병을 미니 양주병으로 잘못 알고 단숨에 마신 탓에 까무러쳤다가 깨어난 후 계속 입에서는 향수 냄새가 폴폴 났다니... 지난 7월 나는 천상병시인의 그 사모님을 LA에 온 문인들 틈에서 만나고 잠시나마 회포를 풀 수가 있어 다행으로 여겼다.
인사동의 ‘귀천’에서 천상병시인과 함께 찍은 큰 오라버니의 젊었을적 사진을 보고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박재삼, 신동문, 박봉우 등의 젊은 시인들과 찍은 그 귀중한 역사적 사진을 이번 서울 방문 때, 윤석산시인 교수님과 함께 귀천을 들렸을 때 사모님이 나의 손에 선물로 쥐어 주셨다. 큰 오라버니 희수 기념 수필집 ‘어떤 보은’에 그 사진이 실려 있어 기분이 자못 새로웠고 감개가 컸다.

김영태화백의 "그늘 반 근"의 시집 첫 장에는 이렇게 쓴 그의 사인이 있다.

친구 영교,
내게 남은 건 그늘 밖에 없군요.
草芥

     초개는 그의 아 호이다. 옛날 내가 서울 살 때 그가 일러준 호는 목우(木雨)였다. 그때 그의 시작활동은 왕성했다. 나무가 물을 만나 더욱 풍성한 생명으로 충만했다. 첫 아들에게 목우를 넘겨주고 자신은 초개가 되어 ‘초개수첩’을 내 놓았다. 어느 날 초개얼굴을 기라성 같은 미녀들에게 돌리더니 무용평론계의 독보적 존재로 정상에 있었다. 본래 그의 ‘다재다능’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태평양 건너 사는 나에게는 늘 경이로운 바람이었다.
     김영태시인이 자신을 일컬어 초개라고 부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지푸라기와 풀잎은 ‘풀’에 근원을 두고 있다. 풀이 별 것은 아니지만 우주와 교감하는 물방울을 지닐 줄 알았다. 연약한 풀잎에 물방울이 맺히면 신비에 감전된 듯 그의 끼가 발동했다. 예술의 하늘을 환하게 열어 재치고 그의 말대로 ‘춤추는 풍경’을 활짝 펼쳐 놓았었다.
        언젠가는 그의  손끝에 무용계가 대롱대롱 달리기도 했다. 그의 정직한 춤 평은 불란서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실력파, 하지만 줄이 없는 무명의 신인에게 정상의 발레 슈즈를 신겨주기도 했던 것이다.
    목에 힘 줄줄 모르는 무게 없는 초개의 눈은 항상 번득였다. 정확한 무용 평은 비평계의 날개를 달고 정상을 날아올랐다. 목숨을 걸고 추는 춤이 살아나는 무대는 무지개 빛을 띄우곤 했던 게 기억에 떠올랐다. 바싹 말라 버린 지푸라기 같은 보잘 것 없는 비생명체마저 세상에 꼭 있어야 하는 존재가치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생명에는 에너지라는 질긴 힘이 내재율(內在律)로 잠복해 있었다. 생명 에너지가 풀이라면 에너지의 부재는 지푸라기다. 서로 연결되어 풀과 지푸라기, 생과 사, 밤과 낮, 선과 악, 유와 무, 등의 상극의 에너지로 미를 극대화시키는 우주의 원리를 늘 제시하는 장인이었다. 예리한 직관력은 한 순간도 그냥 낭비되지 않았다. 음악이 늘 배후에 개입되었고 음악평론집만 보아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오늘따라 진리를 향해 선을 완성하는, 그 미친듯한 원동력이 뛰기를 잠간 멈춘 듯싶어 안타까웠다. 다음의 도약을 위한 멈춤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풀잎과 지푸라기의 두 세계를 다 공유하면서 자유롭게 왕래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가슴이 서늘하게 떨릴 정도로 압권이었다. 무게도 없는 불과 반 근 밖에 안 되는 그늘의 실존은 옷깃을 여밀 정도로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들어 주었다.
    말수가 비교적 적은 그가 유독 유서라고 덧붙이며 "문예회관 대극장 가열 123번"을 먼저 읽어 보라며 건네준 ‘그늘 반 근’의 표지엔 특유의 필치로 자화상이 그려져 있었다. 평생을 모았던 춤과 시와 그림 외 모든 책을 한국 문화예술 진흥원 내 아르코 자료관에 보존을 위해 기증하였다. 김영태 자료실에는 육성 녹음과 1200명의 <예술가의 초상>이 다 들어가 있다.
     면으로 된 펜디 행커치프를 펴서 입언저리를 살며시 눌러 주면서 눈부셔하는 나의 시선을 함께 눌러 버리는 그는 역시 멋쟁이였다. 나눔의 기쁨을 누리며 반 근의 화살로 세상을 관통하던 쟁이, 그 사람이 21세기에 우뚝 서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저는 춤 보러 가서
        극장 맨 왼쪽 통로에 있는 자리  
            가열 123번에 앉아 있습니다.
        (중략)        
        30년 넘게 저는
        그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요
            제가 보이지 않는 날
            나의 누이들 중 누구 하나가 꽃다발을 놓고 가는 군요
        말없이 그가
        세상 뜬 저녁에.

     내 마음의 들판에 빗방울 같은 눈물이 뿌려졌다. 읽은 후 눈길을 떼었을 때는 많지도 않는 머리를 그는 쓸어 올리고 있었다. 슬픈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약간 굽이 있는 그의 구두 뒤축에 꽂힌 나의 젖은 시선이 발길을 옮길 때마다 몸속에 들어가 뼈를 부딪치며 휘돌아 우는 소리를 냈다. 행여 그 손실이 앞 당겨질까 심장은 콩콩 뛰었다. 헤어지기 싫은 오후였다.

    큰 오라버니 희수 출판 잔치 참석차 서울에 왔다. 오라버니와 함께 하동관에서 곰탕을 들고 혜화동 엘빈으로 갔다. 키모로 많이 빠진 머리카락, 미련 갖지 않는 눈치였다. 그의 병상 대신 체코에서 가지고 온 손잡이 없는 찻잔이 늘 그를 기다리는 엘빈 찻집을 그는 단골로 드나든다. 우리는 변종화 화백의 ‘달리는 여인의 알몸’ 아래 앉아 대화와 웃음으로 세월을 볶으며 차를 마셨다. 투병의 경험이 있는  나는 나보다 키 작고 몸무게가 적은 그를 껴안았다. 나는 힘을 주며 기도했다. 그늘 반근의 거인, 예술의 세계에서 종횡무진 활개 치는 그 엄청난 거인을 안아 본 것이다.
그 특유의 필치로 사인해서 선물로 안겨 준 김영태시전집(1959-2005)<물거품을 마시면서 아껴가면서> 와 <Ma Vie 11>가 그의 체온을 이렇게 따뜻하게, 따뜻하게  전해주고 있다.
          2006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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