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보은

2006.04.02 20:32

김영교 조회 수:667

김대규[-g-alstjstkfkd-j-]Yanghwajin Seoul Foreign MIssionary's Cemetery Park
        김영교


선교기념관 앞에 놓인 봉헌시 “양화진” 은 이곳에 잠든 이들의 삶과 믿음과 이념을
세기를 관통하여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양화진
영혼의 고향 하늘나라로 가는 길목
백년 전에 이 땅을 예수께서 지적하신
땅 끝으로 믿고
아비의 집을 떠난 젊은이들이
그 생애를 기꺼이 바치고
주안에서 잠든 곳

가난과 질병과 무지와 억압 속에서
신음하던 이 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고
우리들의 가난, 우리들의 질병을
함께 지고 가다가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은 이들이
그 육신으로 묻은 언덕.

     큰 오라버니의 와병소식에 미국 사는 두 자매는 용수철이 튕겨 오르듯 서울행을 감행하였다. 쾌차하시어 자매를 위해 양화진을 안내해 주셨다. 때마침 늘 벼르기만 하던 양화진(楊花津) 외인묘지에 간 것은 그 때가 사순절 절기였다. 시간적으로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기회를 감사히 여겼다. 금식할 수 있었고 기도할 수 있었고 묵상에 잠길 수 있었다.
     206명의 선교사들은 복음을 위하여 헌신했고 모국에서 누릴 수 있었던 수많은 권리와 안일을 포기하고, 당시 세상에 가장 덜 알려진 나라 ‘Corea'에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해 젊음을 바쳤던 흔적들을 더듬으며 보은과 감사에 젖어들었다. 만개의 흰목련과 개나리가 너무 아름답게 묘지를 벗해주고 있었다. 그늘이 진 한 쪽 켠의ㄹㄹㄹㄹㄹㄹㄹㄹ 철쭉은 몽우리 채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었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한 검소한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Mary Fletcher Benton
Widow of William T. Scranton
Born December9, 1832
Died at Seoul, Korea October8, 1909
Methodist Episcopal Church
This Stone was erected by her son in loving memory.

Mary Scranton 메리 스크랜튼(1832-1909)
1832 10월 9일 목사의 딸로 태어났으며, 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 아들 William B. Scranton을 두었다. 1872년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이 예일대학 학부와 뉴욕에 있는 의과대학을 마친 후, 1884년에 아들 내외와
함께 선교 활동을 위해 한국으로 출발, 1885년 6월 6일에 도착했다.
당시 한국여성들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만을 강요받았기 때문에 여성교육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성 선교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스크랜튼 한국의 여성을 위해
학교를 세우려고 노력을 기울였고,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화고녀, 이화여대)을
설립했다. 스크랜튼 여사의 첫 학생은 발진티프스 환자였던 여인의 딸이었는데 어머니는
선교병원의 첫 번째 환자였고, 나중에 딸은 이화학당의 첫 번째 학생이 되었다.
또한, 스크랜튼 여사는 연로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일과 여성교육을 위해 나라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기독교 교육과 하누 여성의 권리를 위해 힘쓴 선구자였다.
1909년 10월 8일에 75세를 일기로 그 생을 마쳤다.

양화진 외인묘지의 위치는 마포구 합정동 145번지 9로서 지하철 2호선 합정역과 양화대교 근처의 절두산 순교자성당사이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으며 면적은 약  4천평이다.
강 쪽으로 삐죽 나온 지형의 양화진은 예부터 강 건너 영등와 노량진을 잇는 매우 중요한 나루터로서 수상 교통상 큰 몫을 했으며 영조 30년(1754년)에는 한강진, 노량진, 동작진, 송파진과 함께 서울 5진의 하나로 양화진이 설치되어 한강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양화진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1839년 3명의 프랑스 신부들이 새남터에서 처형당하고 1866년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천여 명의 천주교도가 양화진 절벽에서 참수당한 병인년대박해사건 때문이었다. 절두산(切頭山)이란 지명도 그 이후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절두산에 세워진 천주교순교자성당은 1984년 5월 교황 바오로 2세가 서울에 와서 103위의 수교성인 시성식을 갖고 나서 이 성지를 방문 축성함으로써 더욱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양화진 외인묘지 묘역에는 기독교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새로 지은 연합교회가 있고 잘 다듬어진 잔디와 수목 사이사이로 크고 작은 각기 다른 모양의 서양식 뵤비가 즐비하게 서 있어 우리나라 묘지와는 전혀 다른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스산한 바람에 낙엽지는 늦가을이면 그 애잔함과 어울려 찾는 이를 비감에 젖게 한다.
        여기에 묻혀 있는 3백여 명의 외국인은 대부분 미국, 캐마다, 영국, 호주, 프랑스인으로서 열강이 각축하던 구한말 개화의 소용돌이 속에 이역만리 낯선 이 땅에 와서 교육, 의료, 언론, 종교 등 각 분야에서 우리나라 근대화를 위해 몸 바쳐 봉사하다 죽은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언더우드(Horace Underwood,1859-1916)부부와 그 아들 부부, 최초의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세워 종교교육의 개척자적 봉사에 생애를 바친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와그의 가족, 이화여대 전신인 이화학당을 세워 여성교육의 첫 장을 연 매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1832-1909), 세브란스병원을 세운 올리버 애비슨 (Oliver R. Avison, 1860-1956)의 묘소도 그곳에 있다.
        묘지 서쪽 경사지에는 1917 10월 볼세비키 혁명을 피해 온 러시아인의 무덤 50여 기도 있다. 양화진 외인묘지가 처음 조성된 것은 1885년 6월 미국장로교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활동하던 고종의 시의(侍醫) 좐 헤론(John W. Heron,1850-1890)이 이질 환자들을 치료하다 감염되어 이질로 33세에 사망하자 그의 묘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였다.
        당시 외국인이 이 땅에서 죽으면 1882년 맺어진 한미통상수호조약에 따라 조선정부는 묘지를 제공하게 되어 있었으나 외국인들이 원하는 양화진은 내어주지 않았다.
그 때  미국영사관에서 일하던 장로교의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1858-1932)이 적극 조정을 설득하여 결국 이를 허용 받았다. 이후 그곳은 한국을 사랑하고 이 땅에 묻히기를 원한 외국인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양화진 외인묘지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곡절을 거치면서많은 곡절을 겪었다. 조선 초기 황폐했던 묘지는 주한외국인들의 모금운동으로 일단 정비되었지만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면서 친한 외국인들이 묻혀있는 그 곳은 외면 당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시에는 군사요충지로서 부근에서 여러 차례 격심한 전툭 벌어져 지금도 묘 비석에는 총탄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양화진 외인묘지는 1984년 한국기독교가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하면서 양화진의 참된 정신을 계승보존하기 위해 이곳에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교회를 세움으로써 외국인 선교사 묘지와 천주교의 ‘양화나루-잠두봉 유적’을 연결해서 양화진 일대를 세계에서 보기 드문 신.구교 만남의 성지로 조성, 깨끗이 단장되었다.
복음의 밀알이 되어 이 땅에서 썩어지고 양화진에 묻혀있는 선교사들의 삶은 선교 200주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소중한 자산이자 민족사의 현장이었다. 후세가 기억 보존하는 것은 마땅하며 우리 시대의 요청이며 사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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