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네요, 그것도 한참 기우는...... 8월 앞에 감탄사를 붙여야만 속 시원 할 것 같은, 내년이면 70년이 되는 조국의 아픔과 기다림이 바닷가 모래알처럼 쌓인 길고 긴 세월, 모른 척 고개 돌려도 우리의 심장에 파고드는 유별난 현대역사에서 오직 한 나라, 허리 묶인 체 ......
강한 반어적 톤으로 민족의식과 비탄과 허무로 조국의 상실을 개탄하고 광복을 갈망한 육사의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러나 결코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깊은 저항의식이 깊게 깔린 그의 노래 속으로 들어가 우리 함께 불러본다면.....? 그러나 노래는 함께 불러도 그때 그 상황을 감히 상상할 힘이 없네요.
육사는 마지막으로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라 노래하고 있지요. 그런가하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님은 갔습니다 아아 나의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고 노래하고 있어요.
이렇게 비탄과 강한 광복의 갈망을 노래한 일제 강점기의 시인들을 추억하며 지금의 우리 시인들의 의식의 흐름은 어떤가하고 생각해 보지요. 그냥 시류?에 흘러가는 (미안해요) 작금의 시인들을 생각하며, 그 많은 순국열사들의 피 끓었던 애국정신을 떠올리며.......이국의 가리에서 무능한 한 시인의 안타까운 작디작은 푸념을 바람에 떠는 낙옆처럼......
나는 최근에 ‘미사일‘이란 졸시를 하나 썼어요, 짜증나고 부끄러운 어린이들도 무서워하는 ’미사일’의 협박, 메인 스트릿트에 뒹구는 못생긴 가시 숭숭 돋친 돌 같은......
길을 잃은 곳에서 쓴 나의 시의 발, 너무 들어난 말에는 듣기 전부터 실증이 나지요. 새소리도 너무 시끄러우면 귀를 막게 되는 인간의 청력, 그 때 침묵이 필요하지요. 고요가 필요하지요. 그리고 거기 은유가 살몃, 돗자리를 펴고, 그래요 시에도 삶에도 그런 은유는 필요하지요.
우린 너무 오래 참기만 한 걸까요? 쓸모없이 기다리기만 한 걸까요? 길고 긴 우리들의 겨울, 우리는 언제까지 긴 침묵을 품고 냉혹한 흙속에서 겨울의 잔인함을 견디며 그 날을 기다려야 할까요......?
그럼에도 삶이 안고 오는 온갖 향내와 색체의 옷을 짜기워 인내의, 푸른 인내의 밭에 새 한 마리 띄워 보내기로 했어요. 아래의 졸시 하나 고요한 톤으로 불러 보았어요.
귀소리 접고
고요로 들어간다
고요가 기 차려! 일어나고
바싹 마른 수초들 사이 바위산 넘어에는
분명 길이 있다
나는 어디쯤?
뜨악한 끝점의 집 창틈으로
살랑이며 새어나오는 흰 색체들
순간 유혹에 흐릿한 나
그러나 곧 귀를 막고 침묵의 허원으로 들어간다
까치발걸음으로 3월의 들밭을 넘은 곳
아아, 밤이 가고 새벽이 열리고
새벽이 일어나는 샘물 소리 같은
푸른 시간, 이슬방울꽃씨 하나 허공에서
살며시, 내려온다
내 발이 닿기 전 네가 오네
내 발이 닿기 전
연초록 사립문 반쯤 열린 채
분명, 엄마가 대청마루 수금을 타고
사립문 소리가 하르르 열리네 (‘뉴욕의 까치발소리‘ 곽상희)
8월이 그렇게 가버렸네요. 아직 무더움 가시지 않는 날들, <세월을 아껴라- redeem the time>는 말씀이 참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오네요. 그래요. 시간은 생명과 같지요. 나머지 8월 소중하게 품고 함께 가야겠다고...... 아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