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
이 월란
외곬빛을 수태한 빛깔 없는 산소가
기압골에 몸을 풀고 아이를 낳았다
지학(志學)의 바람은 철없이 허송을 친구삼고
낮곁엔 바다에서 뭍으로 해풍을 좇아 바람을 익히고
밤이되면 바다로 돌아가는 육풍에 몸을 섞었다
오뉴월엔 뭍으로, 엄동설한엔 바다로
숨막히는 삶의 밀도를 헤치고 낮은데로 얕은데로 떠나는 여정
햇발에 찔려 골짜기로 추락한 골바람은 능선을 향해
이립(而立)의 바람을 탕진했고
달빛에 녹은 심신을 달래려 다시 골짜기로 숨어들었다
몸을 추스르면 남실남실 미풍으로 봄을 홀려내었고
갈바람에 자식같은 금빛 곡식들은 혀를 빼물고 자랐다
피아골의 흔들바람 불혹의 나이마저 헤쳐 놓았고
미세한 황토먼지에 눈이 멀기도 했었나
삶의 좁은 골목에서 높새바람은 교만의 턱을 치켜올렸고
천둥번개가 손발을 묶고 달려들던 힘겨운 고개길
폭풍우 속을 회오리 돌풍처럼 질주하기도 했었다
동서남북, 갈팡질팡 갈길 몰라 헤매일 때
샛바람, 하늬바람, 마파람, 높바람
돌아설 때마다 표정 바꿔 그렇게 타인처럼 살았었나
꽃을 만지면 꽃잎이 흔들리며 화답했고
나무를 만지면 빈가지도 몸을 떨었다
들판의 갈대들도 한마음으로 허리를 굽혔고
하늘 품고 꿈을 꾸던 실개천도 파르르 파문을 일으키며
스치는 곳마다 천지가 소리없이 기억의 망막을 흔들어 놓았었는데
나를 기억하는 얼굴들을 태풍의 눈에 새기고
이제 희수(稀壽)의 손을 모아 적도의 꽃을 피우러 간단다
그렇게 머물다 간 자리에 어느 누구도
머물다 간 바람을 기억조차 하지 않겠지
다시 태어난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신들린 듯 불어대겠지
2007-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