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애하는 교사
이월란 (06/12/10)
어느 날 저녁, 밥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때 내 짝꿍이었던 친구였다. 거의 연락을 않고 살던 처지라 놀라움과 반가움에 수다를 좀 떨었는데 결론은 인터넷 초등카페가 생겼으니 가입을 하라는 거였다. 난 그 때까지 노트북은 회지나 장부 등의 문서정리를 위해서만 열고 닫았던, 아이들 뒷바라지에 시간에 늘 쫓기면서 살았던 사람이었다. 반가움 반, 호기심 반으로 인터넷 카페라는 델 처음 가보니 정말 요지경 속이었다. 이것 저것 생소하여 컴퓨터적인 기술과 인터넷에 대해 배우게 된 것도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가는게 아닌가 했던 사실을 절감하기도 했다. 자기 밖의 세상은 모르는게 약일 수도 있었고 알고 난 뒤 세상이 순식간에 뒤바꿔지기도 한다.
<국민학교>라는 말이 없어지고 <초등학교>라는 말이 처음 생겼을 때 난 제 3외국어를 대하듯 생소했고 나의 국민학교 시절마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신조어가 생길 수록 고국에 대한 뿌리가 더 흔들리는 듯 했고 점점 높아만가는 벽을 실감해야 했었던 내게, 기억마저 가물거리는 얼굴들이 살아움직이며 내게 말을 걸어왔고 내가 잠든 사이 주렁주렁 달린 댓글들은 내 멀쩡한 정신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이제 몇 년쯤 있으면 한국에서 살아왔던 시간과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같아지는 시점에서, 특별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제 내가 허락받은 삶의 중간을 넘어서 버렸다는 막연한 불안함과 초조함에 고국에 대한 향수까지 점점 고개를 들고 있었던 시점에서, 나를 알아보는 친구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읽어나갈 때마다 오~~ 이 기특한 물건들.... 랩탑 모니터부터 하이스피드 리시버까지 돌아다니며 쪽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해 주고 싶었다.
한국의 시장통이 그립고, 냄새가 그립고, 손끝 하나 닿아도 머리가 땅에 닿도록 미안해하는 여기 사람들 틈에서, 부딪히고 지나가면서도 도리어 화를 내곤하던 한국사람들이 그리운 내게 실시간 생방송으로 전달되는 나와 똑같은 사람들, 특히 감성 여리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공유했던 친구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이 타국땅에선 그저 신기하게만 보였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이라 했던가. 우린 쉽게 초등학교의 그 좁은 운동장으로, 그 낡고 보잘 것 없었던 나무 책상과 의자와 석탄 난로 위에 쌓아두었던 알미늄 도시락들이 따뜻하게 데워지고 있었던 그 교실로 돌아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사진들이 빛바랜 추억들을 저마다 터질 듯이 머금고 올라왔고 숨어있던 글쟁이들의 화려한 기록들이 추회의 편린들을 끝없이 퍼올려 우리들을 마구 흔들어 놓고 있던 어느 날, 나와 같은 반이었던, 나에겐 암묵적인 라이벌 관계였던 친구가 보관중이던 초등 때의 일기장이 스캔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신문기자의 딸이었던 그녀가 여장부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보통아이가 아니란 건 어릴 때부터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연필심 자국이 그대로 묻어있는 30년 전의 일기장은 나를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녀의 불평과 정의에 맞서는 열변들이 담겨져 있는 일기엔 하나같이 나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공개된 일기장 2탄의 첫 번째 댓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OOO선생님은 유난히 월란이만 이뻐하셨고....” 급우들의 기억 속의 담임선생님은 나만 이뻐하신 선생님이셨다. 12년간의 공교육 기간동안 나를 제일 이뻐해 주셨던 선생님이신데 내가 모를리가 있겠는가. 난 두 손 들고 <피고인>의 신분을 자청했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수위를 조절하여(마음을 다칠지도 모르는 나를 배려해서) 올린 일기장이었고 내 자신의 기억으로도 공평치 못했던 처사가 그땐 매일 일어나고 있었다. 수위가 조절되지 않고 올려질 일기의 내용은 불을 보듯 뻔했다. 선생님은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갖다붙이시며 나만 꼭 집어내어 단체기합에서 빼주기도 하셨고, 수업시간엔 선생님의 책상에 앉혀두고 사무적인 일들을 맡기셨고, 통지표가 나갈 시즌이면 방과 후 나와 단둘이 앉아 정리를 하셨던 탓에 난 반 아이들의 성적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지금은 학부모의 입장이 되어서, 더구나 타국에서 인종차별을 심심치 않게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와 아이들을 볼 때 “편애하는 교사”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교사들의 모자라는 자질이나 인격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초,중,고 12년 간의 학교생활을 누구나 거쳐온 지금 “편애하는 교사”에 대한 내 생각은 한마디로 자격미달이며 더불어 편애를 맘껏 누려봤던 나 자신 또한 편애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급우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피해자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지금 되돌아보건데 그 때 난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우월감보다는 늘 급우들에게 죄를 지은 것 같은 자책감에 시달렸었으니까.
나 자신, 편애를 받아본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론 정말 잊지 못할 선생님으로 기억될 수 밖에 없다. 식욕, 수면욕, 성욕 등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고 난 다음에 우리가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욕구가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아니던가. 그래서 날 넘치도록 사랑해주시고 110%까지 인정해 주신 선생님을 특별히 기억한다는건 당연하다. 사람이 영적인 동물이라 상대방의 눈빛이나 손짓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담겨진 나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인데 선생님은 나를 믿어주시고, 인정해 주시고, 아버지처럼 늘 감싸주신 분이었다. 나와 나란히 앉아 일을 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늘 너무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물론 직무유기를 일삼은 게으른 교사로 밖에 비춰질 수 없는 그런 일들을 나를 통해 자주 하시기도 하셨지만 어린 나이에 학교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묘한 우월감에 도취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신 장본인이시기도 하다.
교사들의 편애는 다분히 일방적이다. 한마디로 불공평한 처사이며 그리고 그 불공평한 기준에 따라 완전히 불공평하게 우열이 가려지니까. 그래서 한쪽은 불로소득처럼 생긴 우월감을 가지게 되고 다른 한쪽은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관계가 많은 경우에 일방적으로 맺어질 때가 많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받는 것 없이 이쁜 사람도 있고, 제 눈에 안경이며,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영화에서처럼 개인적인 체험으로 인한 편애도 자행될 수 있다.
짧았던 교생실습이나 지금 주일학교, 한글학교에서의 경험으로 비춰보더라도 교사가 박애정신을 가지고 학생들을 똑같은 선상에 놓고, 애써 자제를 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관심과 사랑은 공평치 못하게 흘러갈 수 밖에 없지 싶다. 중고등 학교 때의 기억들 중엔 나 자신도 편애하는 선생님들을 많이 경멸했었다. 학업성적이나 외모, 경제적인 환경만으로 아이들을 선별해서 갈라놓으시곤 했으니까. 편애가 지나친 교사들은 반대로 여러모로 열등한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모욕하고, 100개가 넘는 예민하고도 순수한 10대 아이들의 눈동자를 앞에 놓고도 자신의 부끄러운 인격을 여지없이 드러내곤 하셨다.
중학교 때, 호남형의 한 교사는 성적이 부진하고 내세울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이를 세워놓곤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너거 엄마도 너 같은 애 낳고 좋다고 미역국 먹었지?” 라고... 그 때 우리들은 알 수 없는 분노를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듯이 습관적으로 삼키며 수업마침종과 함께 곧 조잘대기 시작했지만, 그 때 새겨진 상처는 지금도 깊이 패여있어 낯선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출렁이는 물처럼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곤 한다. 갓난아이 때부터 받은 사랑의 농도가 지금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우리들의 언행을 늘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의 상처나 그 치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두 아이의 키가 나만해진 지금, 세상살이가 어떤것인지 대충 감이 잡혀가는 지금의 나라면 근신을 받더라도 용기를 내어 이렇게 댓구라도 해 드리고 싶었을것이다 “그럼 단지 성적이 부진하고 내세울 것 없는 집안의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서 그렇게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으시는 선생님의 모친께서도 고기까지 둥둥 뜨는 미역국을 몇 사발이나 들이키셨겠네요?” 라고.......
편애의 방법도 교사에 따라 다양하고 교묘해서 수업시간 똑똑한 아이들의 기를 있는대로 살려주는 교수법을 통한 편애에서부터 수업내내 마음에 드는 한 두 아이만을 번갈아 눈맞추기에 여념이 없는 비열한 방법까지 이루 다 말 할 수가 없다. 눈맞추기 쇼의 방청객으로 앉아있는 수업시간이면 우린 수업에 집중해야할 귀중한 뇌세포의 반 이상을 낭비해야만 했다.
초등 때의 어느 선생님은 이민간다는 한 남자 아이를 마지막 인사라는 명목으로 앞에 세워 놓으시곤 열등한 아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같은 애 이민가봐야 한국 사람 망신시키기 딱 좋겠다” 라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최소한의 기본적인 교사의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네가 이렇게 한국을 떠나지만 한국인의 자부심을 늘 잃지 말고 낯선 언어나 환경 때문에 힘들지라도 꿋꿋이 그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라고 말씀하셨어야 했다.
어느 카페에서 읽은 이야기이다. 39년전 한 여자아이가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을 했는데 오빠가 쓰던 몽당연필 하나를 빌려서 학교에 갔다가 그 연필심이 부러져 남자 담임선생님께 귀싸대기를 맞았단다. 학교에 오면서 연필을 깎지 않고 왔다고 말이다. 돈이 없어 연필 한자루 밖에 가지고 갈 수 없었던 1학년 여자아이가 무섭게 후려치는 선생님의 매서운 손맛에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데, 한자가 넘는 길다란 장작개비를 난로 옆에서 가져와 초겨울 교실 안에 불을 피우려고 갖다 둔 그 투박한 장작개비를 모로 세워 작디 작은 여자아이를 후려쳤단다.
무서움에 떨던 그 작은 1학년짜리 여자아이는 그 길로 보따리 가방을 싸서 학교를 떠나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는 산업전사가 되었다. 모진바람과, 외로움과, 답답함 속에서도 결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46살이 되어 혹여 글 모르는 것을 주위에서 눈치 챌까봐 마음 졸이며 예은여성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느라 늦깎이 공부를 하고 있다. 마음 속에 애끓는 분노를 삭이며..... 그 학교는 부산 당감동에 있었던 학교란다. 그때 그 선생님께서 조금만 더 친절하고 부드러웠다면 한평생 까막눈으로 한맺힌 삶을 살지는 않았을 터인데..... 분통을 터트리며 그 옛날 그 학교를 찾아가 그 선생님을 찾아내어 글을 못배워 잃어버린 내 삶의 분홍빛 꿈을 찾아내라고 소리 지르고 싶단다.
한마디로 교사들의 편애는 합법적인 교사의 권위를 이용한, 무기없이 행해지는 폭력이다. 그 보이지 않는 날카롭고도 둔중한 무기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어린 가슴들이 찢어지고 멍들어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문제아들이나 열등한 아이들에게 던진 따뜻한 교사의 한마디 말로 인해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미담들이 심심치 않게 전해지는 걸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피붙이를 사랑하는 것은 본능이며, 멋있는 연인을 사랑하는 것은 다분히 정욕적이고, 이쁘고, 공부 잘하고, 단정한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인 것이다. 받은만큼 되돌려 줄 수 있는 상대를 사랑하는건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편식을 하면 체내에 미숙한 부분들이 생기게 마련인 것처럼 편애, 특히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편애는 어린 가슴들을 되돌릴 수도 없는 세월 속에서 비참한 감정의 무덤 속으로 몰아가는 잔인한 처사일 수 밖에 없다.
결론은 교사들의 편애가 교사 본인들도 미쳐 헤아려보기 힘든, 일방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피교육자의 인격을 파괴하는,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실수라는 사실이며 그 잠깐 동안의 실수가 자라는 아이들에겐 평생 겪어야 할 아픔의 생채기를 내는 행위라는 것이며 기본적인 교사의 자질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일방적으로 행해진 편애를 독차지했다는 이유로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미안해야 하고 사과해야 하는 나 자신도 똑같은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가끔 아이들이 학교에서 특정 교사가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소리를 할 때면 내 가슴이 찢어진다. 유색인종들을 무시하는 듯한 눈빛들을 한 두 번 보아왔던가..... 넘지 못할 산이지만 그래도 세상엔,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세상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안다. 매를 들고, 어린 가슴을 후벼파 놓는 교사들 보다는 인내와 사랑으로 감싸주는 존경 받아야 마땅할 그런 교사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