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일탈을 맛보다
이월란
여행은 내게 있어, 바른길 꺾어진 샛길을 지나 물 위를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익숙한 나의 대지와 하늘을 벗어나 낯선 지구의 골목길을 잠시 배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낯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날 알아보지 못한다. 몇 살인지, 어디서 뭘 하다 온 인간인지, 도무지 관심도 없다. 모래알같은 그 많은 사람들이 서로 서걱거리며 나의 여행지를 거주지 삼아 나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경이롭기까지 하다. 여행지에선 나 또한 타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게 된다. 낯선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다면 알지도 못했을 또 다른 나의 모습을 훔쳐보기도 한다.
때때로 일상을 벗어버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내 눈에 담겨지는 세상만 바라보며, 내 머리칼에 닿는 바람만 불어대는 세상인 줄 아는 우물 안 갈개비, 낯선 거리마다 쏟아져내리는 햇살은 내 작은 연못에 아프지 않을만한 크기의 잔돌을 비사치기 하듯 던져주고 싱그런 파문을 일으킨다.
여행 전날 밤, 일탈을 꿈꾸는 자아의 귀퉁이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짐을 꾸리기 시작한다. 설레임과 기대를 가방 안에 가득 채우고도 들뜬 마음조차 잊지 않고 핸드백에 구겨넣는다. 그리고 떠날 땐 나의 밖으로 슬며시 빠져나온 또 다른 나의 두 손에 슬쩍 투명한 수갑을 채울 것이다. 나를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타인들은 내가 아닌 투명한 수갑에 채워진 또 다른 나만 보게 되는 것이다.
미지의 하늘을 날아다닐 날개가 뇌수의 올마다 밤새워 돋아나고 돌아와 마주칠 눈빛까지 구석구석 새겨 둔다. 어린 시절 소풍 전날 밤이면 니꾸사꾸에 가득 채워 둔 과자들이 날아다니는 꿈을 꾸듯 가방 가득 채워 둔 꿈을 미리 살라 먹으며 잠드는 밤, 내일은 물 위를 걸으러 간다는 야무진 꿈을 배고 잔다.
익숙한 동선을 따라 걷던 맨땅에 익숙해져 있는 나의 두 발은 길 없이 출렁대며, 낯선 물살따라 길이 나는 물 위에서, 서툰 자맥질에도 난 행복하기만 할 것이다. 새삼 먹고 자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이며 싱싱한 물너울을 온 몸에 두르고 난 돌아올 것이다. 눈을 감고 아무렇게나 손을 뻗어도 정확한 각도에서 나의 손에 잡혀줄 샴푸와 비누가 있는 나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이제 더 이상 투명하지 않아도 되는 불투명해진 수갑을 물 속에 던져버리고 일탈의 맛배기에 흡족해진 나의 자아는 행복한 걸음으로 내 안으로 슬며시 걸어들어 올 것이다.
여행이 즐거운 건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돌아갈 집이 없다면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니까. 배낭 속에 채워둔 과자같은 밤을 나도 새벽도 설레임으로 한 입씩 베어 물고 있다.
2007.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