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이월란(09/09/09)
지나간 시간을 복원하는
기억의 붓질 앞에 묻어두어도 보석이 되는 건
여백도 활자가 되고 침묵도 언어의 그림자가 되는
세월이 세공한 유치했던 사랑
롬바르디아의 세월이 세공한 도쿄의 사랑
꽃들의 청첩장이 꽃가루처럼 날리는 열 번의 봄 사이
수평선과 지평선이 손금처럼 맞닿은 빛나는 약속 사이
시간의 모서리마다 양지바른 전설이 살았다는데
운명의 고층빌딩 속에서 같은 층에 살고 있던 두 심장 사이
가슴의 증인으로 서로에게 가는 길
종이 한 장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사이 집을 짓고 얇은 집을 짓고
비올론첼로가 흐르는 강따라 무한대의 대지 위에
현실과 꿈 사이 무한대의 집을 짓고
땅은 냉혈의 군락을 지어도
대본에 없는 기억을 복원하는 하나의 계절이
하나의 사연을 대변하는 그 사이
15분 전에 출발해버린 밀라노행 열차를
이성의 정거장을 앞질러 인파를 거슬러
눈 앞에 서 있는 얼굴, 위에 퍼지는 피렌체의 종소리로
꿈을 두드리는 소리
내일은 언제나 절박한 자의 것이었다
냉정 속에 숨겨진 열정의 것이었다
* 에쿠니 가오리 원작, 나카에 이사무 감독의 영화